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2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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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에 담긴 의미는 가장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중 하나가 원한의 대상을 살해하고는 목을 쳐 몸과 머리를 분리해 혼과 몸이 같이 있지 못하게 함으로써 고통을 영원히 준다는 상징적인 형벌로 기억됩니다. 그렇지만 참수를 한 후 효시를 한다는 것은 일벌백계의 교훈을 한다는 의미외에도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별도의 해석이 가능한 행위가 있을 겁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최후의 사건인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도 일반적인 관점을 벗어나서 개인만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술적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두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이 소설은 먼저 호겐 가문과 이가라시 가문의 복잡 미묘한 가계도를 파악해야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사건의 내막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는데요, 몇번씩 봐도 헷갈리는데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이탈한 기이한 혈연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 듣다보면 분명 홀대받은 가족구성원의 원한 사무친 절규와 한탄을 뒤끝처럼 만나게 되리란 예상을 하게 됩니다. 병원 고개의 집에서 목 매달아 죽은 이는 그래서 더욱 가여웠을 겁니다. 인간도 종족번식을 위한 본능이란 유전자가 있을 터이고 그것은 가족이라는 공식적인 경로로 탄생되지만 배덕이라는 의외성에 순간 혹하다보면 계획에도 없는 숨겨진 관계를 만들고야 맙니다. 

 

지금은 여권신장이 눈부신 시대니까 공공연하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던 때에는 남자들의 축첩은 어쩌면 당연시되던 세상이니 정부인과 후처, 적자와 서자 간의 갈등, 불화에 얽인 사건들은 일본추리소설에서는 단골로 사용되는 소재일겁니다. 그렇다면 큰 틀에서 본다면 이 소설에서의 살인사건의 범인내지 동기 등은 그리 크게 어려운 숙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목 매달아 죽은 이도 목이 잘린 이도 모두 기구한 운명이고 연쇄살인의 희생양들도 알고보면 혈겁을 피해갈 수도 있었던 운명들입니다. 트릭이라고 할만한 것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관에서 추락해 죽은 사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점이며 완벽한 알리바이로 교묘히 위장된 살해방법, 딱 한가지가 있겠네요.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트릭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단순하면서도 참신성이 돋보이는 시도였습니다. 

 

범인이란 것도 범행동기라는 것도 결국 마지막에 상세히 설명되기에 굳이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원통하고 분하다는 탄식이 생기지 않는 것은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랑 크게 차이없다고 착각될 정도로 이해타당한 대목들입니다. 그렇다면 한  권 정도의 분량으로도 끝낼 수 있었던 사건을 20년후에야 해결하게 된 데에는 어떠한 의도가 있을까요? 우선은 낡은 인습의 횡행이 현대에 이르러서 시대의 단절을 맞이할 때까지 필요한 시간적 소요와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명탐정의 은퇴식을 준비하기 위한 노림수에 있다고 저만의 판단을 내려보았습니다. 그

 

것은 어차피 중요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말년에는 쓸쓸한 회한이 남으면서 예전같지 않은 이야기의 한계와 노화도 대면하게 되기에 계속 추리소설을 이대로 읽어나갈수나 있을까라는 염려가 읽는 이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오니깐요.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마지막은 그런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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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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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늘 밤 이 시각에

  너희는 이 잘린 머리와 재회했다.

  앞으로 너희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으리라.

  너희는 저주받고 있다.

  너희는 저주받고 있다."

 

참수에 담긴 의미는 가장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중 하나가 원한의 대상을 살해하고는 목을 쳐 몸과 머리를 분리해 혼과 몸이 같이 있지 못하게 함으로써 고통을 영원히 준다는 상징적인 형벌로 기억됩니다. 그렇지만 참수를 한 후 효시를 한다는 것은 일벌백계의 교훈을 한다는 의미외에도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별도의 해석이 가능한 행위가 있을 겁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최후의 사건인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도 일반적인 관점을 벗어나서 개인만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술적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두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이 소설은 먼저 호겐 가문과 이가라시 가문의 복잡 미묘한 가계도를 파악해야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사건의 내막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는데요, 몇번씩 봐도 헷갈리는데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이탈한 기이한 혈연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 듣다보면 분명 홀대받은 가족구성원의 원한 사무친 절규와 한탄을 뒤끝처럼 만나게 되리란 예상을 하게 됩니다. 병원 고개의 집에서 목 매달아 죽은 이는 그래서 더욱 가여웠을 겁니다. 인간도 종족번식을 위한 본능이란 유전자가 있을 터이고 그것은 가족이라는 공식적인 경로로 탄생되지만 배덕이라는 의외성에 순간 혹하다보면 계획에도 없는 숨겨진 관계를 만들고야 맙니다. 

 

지금은 여권신장이 눈부신 시대니까 공공연하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던 때에는 남자들의 축첩은 어쩌면 당연시되던 세상이니 정부인과 후처, 적자와 서자 간의 갈등, 불화에 얽인 사건들은 일본추리소설에서는 단골로 사용되는 소재일겁니다. 그렇다면 큰 틀에서 본다면 이 소설에서의 살인사건의 범인내지 동기 등은 그리 크게 어려운 숙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목 매달아 죽은 이도 목이 잘린 이도 모두 기구한 운명이고 연쇄살인의 희생양들도 알고보면 혈겁을 피해갈 수도 있었던 운명들입니다. 트릭이라고 할만한 것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관에서 추락해 죽은 사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점이며 완벽한 알리바이로 교묘히 위장된 살해방법, 딱 한가지가 있겠네요.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트릭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단순하면서도 참신성이 돋보이는 시도였습니다. 

 

범인이란 것도 범행동기라는 것도 결국 마지막에 상세히 설명되기에 굳이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원통하고 분하다는 탄식이 생기지 않는 것은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랑 크게 차이없다고 착각될 정도로 이해타당한 대목들입니다. 그렇다면 한  권 정도의 분량으로도 끝낼 수 있었던 사건을 20년후에야 해결하게 된 데에는 어떠한 의도가 있을까요? 우선은 낡은 인습의 횡행이 현대에 이르러서 시대의 단절을 맞이할 때까지 필요한 시간적 소요와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명탐정의 은퇴식을 준비하기 위한 노림수에 있다고 저만의 판단을 내려보았습니다. 그

 

것은 어차피 중요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말년에는 쓸쓸한 회한이 남으면서 예전같지 않은 이야기의 한계와 노화도 대면하게 되기에 계속 추리소설을 이대로 읽어나갈수나 있을까라는 염려가 읽는 이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오니깐요.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마지막은 그런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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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가 너무 많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렉스 스타우트 지음, 이원열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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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엘릭시르 미스터리 소설 구입을 두고 고심을 좀 했더랬습니다. A사와 B사의 서포터즈에 연달아 선정되고보니 계획적인 독서 리스트가 필요했던 것이죠. 한동안 신간들을 정기 공급받을텐데 그전에 질러놓은 책들과 끊임없는 이벤 수집으로 다소 포화상태에 도달하다보니 잠시 엘릭시르 미스터리와의 만남을 뒤로 미루어둘까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어쩌다보니 밀린 책들을 상당부분 해결해냈습니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는 신간들의 공세 수준차가 확연히 나는 것이 작년에는 어찌 이런 책들을 다 읽었을까 라며 자책할 수준들이 제법 있었는데 반해 올해는 구입을 하고 또 해도 돌아서면 눈에 확 뜨이는 책들이 너무 많아 감당이 안되는군요. 그중에 바로 엘릭시르 미스터리가 한 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붉은 머리의 가문>이나 <가짜 경감 듀>가 레이다망에 먼저 걸려들었겠지만 결국 선택한 책은 렉스 스타우트의 <요리사가 너무 많다>.  

  

네로 울프 탐정은 그동안 소문으로 많은 명성을 전해들어왔습니다. 0.14톤의 거구에다 맥주를 즐기는 미식가이자 난초 애호가라구요. 또한 조수인 아치 굿윈과 함께 조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점을요. 또한 명탐정 코난이 선정한 세계의 명탐정에서 17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제 멘토님의 서평때문이기도 하겠네요. 제가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가이드가 되어주신 그 분은 대표적인  파워블로거 중 한 분이신데 추리소설을 기본으로 고전문학, 만화, 에세이 등 장르 불문하고 다양하고 왕성한 독서활동을 하시는 분인데 유일하게 인정하는 서평의 달인이시기도 하죠. 역시 <화형법정>과 함께 <요리사가 너무 많다>에 대한 평을 올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읽었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뭐랄까, 시리즈물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힘은 캐릭터의 독창성에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의자에도 앉아 있기도 힘든 신체구조라 자연히 두뇌는 자신이 맡고 몸으로 때우는 일은 조수인 아치 굿윈이 역할 분담하게 되어 있으니 또 다른 링컨 라임이라고나 할까요. 이번같이 최고의 요리사 중 한 명이 살해되었름에도 불구하고 현장탐문하기는 커녕 오로지 자신의 방에서만 대질심문이 사실상 전부입니다.

 

아치는 네로가 이 사람 불러와라, 저 사람 불러와라며 시키는 일에 끊임없이 불평하면서도 충실한 소임을 다하는 게 은근한 재미가 있더군요.  그래서인지 만담식 유머라고 통칭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유머의 핵심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까놓고 말하는 솔직함에 있을 것 같습니다. 마구마구 쏘아대는 독설에 키득거리다보면 속시원한 해갈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추리란게 별 것 없더군요. 그냥 부지런히 털다보니 꼬리가 잡히더란 식인데 그것보다 미식가들을 유혹하는 진미들의 성찬이었습니다. 요리 미스터리가 추리보다 배고픈 자들을 위한 요리가 우선이 된다는 덜 처음으로 깨달았는데 네로 울프가 끊임없이 집착하던 요리 "소시이 미뉘에"의 상세한 요리법이 원서에는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출판사측에서 추리소설에서는 필요없는 대목이라고 임의삭제했다고 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직접 해 먹을 것은 아니지만 혹시 압니까?  어느 독자는 호기심에 요리해볼지도... 물론 "네로 울프"의 요리책이 국내에 출간(?? 절판되었다는 얘기도) 되었다지만.... 그렇게 다 읽은 이 책은 앞서 언급한대로 네로 울프라는 뚱보 아저씨에게 포커스를 맞추여야 한단 말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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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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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를 전에도 찾았어요. 그러니 다시 찾아줘요."

"나 한테 빚졌어요. 패트릭." 

 

나는 분명 할 바를 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지배한 건 반박이 아니라 분노였다. 모호하고 비논리적이면서 지난 12년 동안 점점 더 깊어지기만 했다. 

 

12년 전 내 판단은 틀렸다. 4400일이 지나는 동안 난 매일 그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판단은 옳았다. 아만다를 납치범들에게 남겨주었다면, 아무리 잘 돌봐준다해도 납치범들일뿐이다. 그녀를 되찾은 후 4400일동안 이 이론 역시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럼 뭐가 남는거지? 지금도 내가 잘못했다고 믿는 아내. 

 

"아저씨가 원하는 건 면죄부예요. 그래서 스스로 양심이 깨끗한 성직자를 찾는 거죠. 그런 성직자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널 왜 집에 데려다줬냐고? 그건 상황 윤리냐 사회 윤리냐의 문제야.

내가 사회 윤리를 택한 거겠지."  

 

언젠가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해도 그 일을 막기엔 나 자신이 너무도 무기력하다는 불안감이 내 삶을 장악해, 이따금 세 번째 팔처럼 가슴 한가운데에서 자라날 것만 같았다. (본문 중에서)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으러 돌아 왔습니다. 켄지와 앤지는 결혼을 해서 지금 네살배기 어여쁜 공주님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가 않아서 두하멜 스탠디포드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고 부족한 수입원때문에 파산의 위기에 내몰리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는 안타까운 상황이지요. 그래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쨍하고 해뜰 날을 꿈꾸는 불확실한 미래를 기약중입니다.  

 

어느 날 새벽 3시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은 12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마음 한 켠에 꾹꾹 눌러담았던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내게 합니다. 납치당한 소녀 아만다를 찾아내어 친모에게 돌려주었던 그 사건. 그녀가 다시 실종되었다며 이모 베아트리체는 켄지에게 다시 찾아달라고 요청합니다. 12년전 사건은 켄지와 앤지 부부에게는 당시 둘 사이를 갈라놓을만큼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었지요. 엄마로서 최악이었던 친모 헬렌대신 아이를 제대로 키워줄 양부모에게 맡겨야된다는 앤지의 주장을 묵살하고 아무리 부모가 잘못했다해도 제멋대로 아기를 훔쳐, 제멋대로 아기를 키울 수 없으며,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켄지의 판단은 결국 아이를 친모에게 돌려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 12년의 세월이 흘러 켄지도 앤지도 화해하여 그들도 딸을 둔 평범한 부모가 되었지만 켄지에게는 결코 잊혀진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만다에 대한 꿈을 꿀 정도로 끝내지 못한 변비같았으니까요. 그렇게 12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 아만다는 이제 열여섯의 여엿한 숙녀가 되어있었고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하던 친 엄마 헬렌과 그녀의 새 남편 케니는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정서적 학대로 인해 고통받으며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길 기다리는 친구 소피와는 반대로 학교에서는 공부를 열심히하는 모범생으로 신망을 얻던 아만다는 세상의 게임에 적극 대응할 줄 아는 당차고 억척스러운 소녀로 성장해있어서 <가라 아이야 가라> 이후 아만다의 삶이 궁금했던 독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 다행이었던거죠.

 

하지만 삶의 질곡 속에 짓눌려있지 않고 스스로 개척하던 아만다 역시 다른 또래들처럼 올곧게 자랄 수 있는 가정환경이란 것을 무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켄지와 앤지가 수소문 끝에 찾아낸 아만다는 과거 자신이 겪어야했던 삶의 행보를 답습이라도 하듯 유사한 상황에 놓이면서 러시아 마피아 조직의 추적을 받고 있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말겠노라며 투쟁을 다짐하는 아만다는 사실상 이번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건의 발단이자 종결까지 그녀가 좌지우지 하니까요.   

 

사실 켄지와 앤지는 이번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한 것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 같으면 혈기와 치기로 악에 맞서 총질해대며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무모한 커플이었겠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서 이들도 끝내 순응할 도리 밖에 없습니다. 나이 먹어 몸은 안 따라주지. 벌어먹여 살려야 할 딸을 생각하면 몸을 사려야 합니다. 특히 켄지의 딸내미 가브리엘라는 나무 얘기를 수백번도 더하고 얼꽝 부바 아찌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천하의 켄지도 아빠에게 안아달라며 안기는 아이 앞에 딸 바보 아빠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일테고 평생 처음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느낍니다. 분노대신 화해의 길을 진정 모색하는 것이죠. 이제 두 사람 모두 날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예전의 모습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그렇기 때문에 앤지도 부바도 역할이 미미했던 것이고 대신 켄지와 아만다의 재회를 통해 12년 전 사건에 대해 두 사람은 과거와 현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예상하는 자리로 대체됩니다.

 

아만다는 켄지가 친모에게 돌려주었던 행동을 원망했고 켄지는 미안해하면서도 딜레마가 낳은 아이러니임을 강조하며 어쩔 수 없었노라고 화답을 하는데 시시비비를 가리는 와중에서도 분명 아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야 할 인생 설계 앞에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둥 아만다의 기지로 범죄사건이 해결되면서 동시에 이 시리즈가 종착역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6편이 나오는 동안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의 매력과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빛을 발했던 유머, 그리고 하드보일드한 액션 속에서 때론 짠하고 때론 분노하며 때론 눈물도 흘리면서 깊은 정이 들었던 걸작 시리즈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네요. 켄지와 앤지의 쓸쓸한 은퇴, 부바의 여인 간의 로맨스의 싹이 움터면서 종결을 고합니다.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화려한 문체와 조영학 역자의 깨소금같은 번역 덕분에요.   

 

bye bye 패트릭 켄지, 앤지 제나로(이쁜 딸 잘 키우삼 

  bye bye 최종살인병기 부바 로고프스키(신규사업이 번창하기를, 그리고 청춘사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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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노트
우타노 쇼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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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망"이라는 단어는 "1.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림. 또는 그런 상태. 2. 인간이 극한 상태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 상태"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습니다. 다른 의미로는 동음이지만 한자표기가 다른 것으로 "간절히 바라다." 라는 뜻도 있죠.  

 

<절망노트>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의미가 조금씩 믹스되어 학교라는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과 한계점에 도달한 피해자의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을 집요하리만치 파고 들어가는 미스터리라고 하겠지요. 아버지는 존 레논을 추종한 나머지 음악에 미쳐 가족의 생계에 무관심한 무능한 가장, 어머니 또한 남자 잘못 만난 죄로 가난의 굴레를 못 벗어나서 답답함을 안겨주는, 역시 원망스러운 사람. 게다가 아버지란 사람은 자식의 이름을 존 레논의 아들 이름을 따서 짓는 바람에 "다치가와 숀"은 졸지에 "다치('서다'라는 뜻)"와 "숀('소변'의 줄임말)"의 합성어가 되어 "다치숀(서서 소변을 보는 사람)"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으로 변환,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도록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제 숀의 분노와 원망은 깊어만 갑니다. 

 

어눌한 말투에 비호감적인 외모나 성격, 왜소한 체격이라는 악조건을 모드 갖춘 숀은 그야말로 또래 아이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그중에서 고레나가라고 불리는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으며, 체격도 커서 선생님을 비롯하여 같은 반 아이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는 실세입니다. 그런 녀석과 똘마니들은 친구라는 미명하에 숀에게 폭력을 가하고 가학적인 장난을 치며 갈취까지 합니다. 숀은 괴롭다 못해 담임 선생님께 호소하지만 이미 고레나가는 모두에게 호감가는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던 터라 누가 봐도 찌질한 숀이 모함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죠. 오히려 고레나가같이 성격 좋은 아이와 어울리다 보면 숀도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옹호하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가 절망이다 보니 삶에 대한 희망은 내려놓은 지 오래이고 자신의 나약함을 자학하다 우연히 학교에서 주운 돌을 "오이네프기프트 신"으로 명명하고 절절한 소망을 빕니다, "고레나가를 제발 죽여 달라고"요. 그것을 "절망노트"라는 곳에 일기형식으로 써서 매일 매일의 괴로움을 함께 기록합니다. 그런데 신은 진정 있었던 것일까요? 고레가나가 죽습니다. 절망노트의 존재를 알고 숀을 용의자로 의심하던 다른 아이도 연달아 죽습니다. 그 죽음들은 신의 천벌이라고 믿고 싶은 숀의 마음을 둘러싼 슬프고 안타까우며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그런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가해 관련자들의 죽음에 얽힌 진실과 트릭들은 웬만하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았지만 우타노 쇼고가 반전의 대가답게 숨겨놓은 진짜 반전은 평소 추리실력이 딸려서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여서 놀랐습니다. 물론 뒤늦게 복선을 암시하는 단어가 중간에 들어있다는 걸 알게되었고 당연하다고 믿어서 그대로 흘려버린 현 상황에 비틀기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새삼 진실은 편견 없이 균형된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숀 처럼 왕따 당하는 아이는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왕따란 것이 없었다가 아니라 왕따 시키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꼴보기 싫으면 차라리 상대를 안했지 일부러 나서서 물리적,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으로서 잘못된 행동에 대한 공분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다른 아이에게는 가차없이 징벌을 내립니다. 못마땅하고 괘씸해서 일부러라도 괴롭히지 않는다면 살아갈 이유라도 없는 것처럼 무차별적이고 잔인합니다. 열린 마음이란 애시당초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약하다고 판단되는 아이에게는 짓밟아서라도 자신의 열등감을 대신 해소하려고 하죠. 

 

그렇기 때문에 결말은 막연히 작위적이라고 하기보다 현 세대의 아이들은 전혜 예측 불가능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수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부모에게 자식은, 자식에게는 부모는 어떤 의미일까요? 과연 축복일지 로또일지는 불확실합니다. 부모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이런 아이들이 커서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난이 죄가 되고 왕따 문제는 학교에서 출발하여 사회에까지 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붕괴된 연결고리라는 점에서 다치가와 숀이라는 아이는 불쌍하고 가엽지만 한 겨울 삭풍같은 섬뜩한 요기도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남이 아니라 우리가 키우는 아이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혹자가 그 당시에 혹시 가해자가 아니면 피해자 중의 한 명은 아니었냐고 물어본다면 자신있게 대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않은, 일그러진 자화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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