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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마일 ㅣ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평점 :
"그 애를 전에도 찾았어요. 그러니 다시 찾아줘요."
"나 한테 빚졌어요. 패트릭."
나는 분명 할 바를 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지배한 건 반박이 아니라 분노였다. 모호하고 비논리적이면서 지난 12년 동안 점점 더 깊어지기만 했다.
12년 전 내 판단은 틀렸다. 4400일이 지나는 동안 난 매일 그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판단은 옳았다. 아만다를 납치범들에게 남겨주었다면, 아무리 잘 돌봐준다해도 납치범들일뿐이다. 그녀를 되찾은 후 4400일동안 이 이론 역시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럼 뭐가 남는거지? 지금도 내가 잘못했다고 믿는 아내.
"아저씨가 원하는 건 면죄부예요. 그래서 스스로 양심이 깨끗한 성직자를 찾는 거죠. 그런 성직자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널 왜 집에 데려다줬냐고? 그건 상황 윤리냐 사회 윤리냐의 문제야.
내가 사회 윤리를 택한 거겠지."
언젠가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해도 그 일을 막기엔 나 자신이 너무도 무기력하다는 불안감이 내 삶을 장악해, 이따금 세 번째 팔처럼 가슴 한가운데에서 자라날 것만 같았다. (본문 중에서)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으러 돌아 왔습니다. 켄지와 앤지는 결혼을 해서 지금 네살배기 어여쁜 공주님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가 않아서 두하멜 스탠디포드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고 부족한 수입원때문에 파산의 위기에 내몰리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는 안타까운 상황이지요. 그래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쨍하고 해뜰 날을 꿈꾸는 불확실한 미래를 기약중입니다.
어느 날 새벽 3시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은 12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마음 한 켠에 꾹꾹 눌러담았던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내게 합니다. 납치당한 소녀 아만다를 찾아내어 친모에게 돌려주었던 그 사건. 그녀가 다시 실종되었다며 이모 베아트리체는 켄지에게 다시 찾아달라고 요청합니다. 12년전 사건은 켄지와 앤지 부부에게는 당시 둘 사이를 갈라놓을만큼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었지요. 엄마로서 최악이었던 친모 헬렌대신 아이를 제대로 키워줄 양부모에게 맡겨야된다는 앤지의 주장을 묵살하고 아무리 부모가 잘못했다해도 제멋대로 아기를 훔쳐, 제멋대로 아기를 키울 수 없으며,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켄지의 판단은 결국 아이를 친모에게 돌려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 12년의 세월이 흘러 켄지도 앤지도 화해하여 그들도 딸을 둔 평범한 부모가 되었지만 켄지에게는 결코 잊혀진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만다에 대한 꿈을 꿀 정도로 끝내지 못한 변비같았으니까요. 그렇게 12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 아만다는 이제 열여섯의 여엿한 숙녀가 되어있었고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하던 친 엄마 헬렌과 그녀의 새 남편 케니는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정서적 학대로 인해 고통받으며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길 기다리는 친구 소피와는 반대로 학교에서는 공부를 열심히하는 모범생으로 신망을 얻던 아만다는 세상의 게임에 적극 대응할 줄 아는 당차고 억척스러운 소녀로 성장해있어서 <가라 아이야 가라> 이후 아만다의 삶이 궁금했던 독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 다행이었던거죠.
하지만 삶의 질곡 속에 짓눌려있지 않고 스스로 개척하던 아만다 역시 다른 또래들처럼 올곧게 자랄 수 있는 가정환경이란 것을 무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켄지와 앤지가 수소문 끝에 찾아낸 아만다는 과거 자신이 겪어야했던 삶의 행보를 답습이라도 하듯 유사한 상황에 놓이면서 러시아 마피아 조직의 추적을 받고 있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말겠노라며 투쟁을 다짐하는 아만다는 사실상 이번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건의 발단이자 종결까지 그녀가 좌지우지 하니까요.
사실 켄지와 앤지는 이번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한 것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 같으면 혈기와 치기로 악에 맞서 총질해대며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무모한 커플이었겠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서 이들도 끝내 순응할 도리 밖에 없습니다. 나이 먹어 몸은 안 따라주지. 벌어먹여 살려야 할 딸을 생각하면 몸을 사려야 합니다. 특히 켄지의 딸내미 가브리엘라는 나무 얘기를 수백번도 더하고 얼꽝 부바 아찌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천하의 켄지도 아빠에게 안아달라며 안기는 아이 앞에 딸 바보 아빠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일테고 평생 처음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느낍니다. 분노대신 화해의 길을 진정 모색하는 것이죠. 이제 두 사람 모두 날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예전의 모습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그렇기 때문에 앤지도 부바도 역할이 미미했던 것이고 대신 켄지와 아만다의 재회를 통해 12년 전 사건에 대해 두 사람은 과거와 현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예상하는 자리로 대체됩니다.
아만다는 켄지가 친모에게 돌려주었던 행동을 원망했고 켄지는 미안해하면서도 딜레마가 낳은 아이러니임을 강조하며 어쩔 수 없었노라고 화답을 하는데 시시비비를 가리는 와중에서도 분명 아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야 할 인생 설계 앞에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둥 아만다의 기지로 범죄사건이 해결되면서 동시에 이 시리즈가 종착역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6편이 나오는 동안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의 매력과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빛을 발했던 유머, 그리고 하드보일드한 액션 속에서 때론 짠하고 때론 분노하며 때론 눈물도 흘리면서 깊은 정이 들었던 걸작 시리즈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네요. 켄지와 앤지의 쓸쓸한 은퇴, 부바의 여인 간의 로맨스의 싹이 움터면서 종결을 고합니다.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화려한 문체와 조영학 역자의 깨소금같은 번역 덕분에요.
bye bye 패트릭 켄지, 앤지 제나로(이쁜 딸 잘 키우삼)
bye bye 최종살인병기 부바 로고프스키(신규사업이 번창하기를, 그리고 청춘사업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