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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노트
우타노 쇼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절망"이라는 단어는 "1.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림. 또는 그런 상태. 2. 인간이 극한 상태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 상태"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습니다. 다른 의미로는 동음이지만 한자표기가 다른 것으로 "간절히 바라다." 라는 뜻도 있죠.
<절망노트>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의미가 조금씩 믹스되어 학교라는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과 한계점에 도달한 피해자의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을 집요하리만치 파고 들어가는 미스터리라고 하겠지요. 아버지는 존 레논을 추종한 나머지 음악에 미쳐 가족의 생계에 무관심한 무능한 가장, 어머니 또한 남자 잘못 만난 죄로 가난의 굴레를 못 벗어나서 답답함을 안겨주는, 역시 원망스러운 사람. 게다가 아버지란 사람은 자식의 이름을 존 레논의 아들 이름을 따서 짓는 바람에 "다치가와 숀"은 졸지에 "다치('서다'라는 뜻)"와 "숀('소변'의 줄임말)"의 합성어가 되어 "다치숀(서서 소변을 보는 사람)"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으로 변환,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도록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제 숀의 분노와 원망은 깊어만 갑니다.
어눌한 말투에 비호감적인 외모나 성격, 왜소한 체격이라는 악조건을 모드 갖춘 숀은 그야말로 또래 아이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그중에서 고레나가라고 불리는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으며, 체격도 커서 선생님을 비롯하여 같은 반 아이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는 실세입니다. 그런 녀석과 똘마니들은 친구라는 미명하에 숀에게 폭력을 가하고 가학적인 장난을 치며 갈취까지 합니다. 숀은 괴롭다 못해 담임 선생님께 호소하지만 이미 고레나가는 모두에게 호감가는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던 터라 누가 봐도 찌질한 숀이 모함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죠. 오히려 고레나가같이 성격 좋은 아이와 어울리다 보면 숀도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옹호하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가 절망이다 보니 삶에 대한 희망은 내려놓은 지 오래이고 자신의 나약함을 자학하다 우연히 학교에서 주운 돌을 "오이네프기프트 신"으로 명명하고 절절한 소망을 빕니다, "고레나가를 제발 죽여 달라고"요. 그것을 "절망노트"라는 곳에 일기형식으로 써서 매일 매일의 괴로움을 함께 기록합니다. 그런데 신은 진정 있었던 것일까요? 고레가나가 죽습니다. 절망노트의 존재를 알고 숀을 용의자로 의심하던 다른 아이도 연달아 죽습니다. 그 죽음들은 신의 천벌이라고 믿고 싶은 숀의 마음을 둘러싼 슬프고 안타까우며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그런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가해 관련자들의 죽음에 얽힌 진실과 트릭들은 웬만하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았지만 우타노 쇼고가 반전의 대가답게 숨겨놓은 진짜 반전은 평소 추리실력이 딸려서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여서 놀랐습니다. 물론 뒤늦게 복선을 암시하는 단어가 중간에 들어있다는 걸 알게되었고 당연하다고 믿어서 그대로 흘려버린 현 상황에 비틀기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새삼 진실은 편견 없이 균형된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숀 처럼 왕따 당하는 아이는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왕따란 것이 없었다가 아니라 왕따 시키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꼴보기 싫으면 차라리 상대를 안했지 일부러 나서서 물리적,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으로서 잘못된 행동에 대한 공분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다른 아이에게는 가차없이 징벌을 내립니다. 못마땅하고 괘씸해서 일부러라도 괴롭히지 않는다면 살아갈 이유라도 없는 것처럼 무차별적이고 잔인합니다. 열린 마음이란 애시당초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약하다고 판단되는 아이에게는 짓밟아서라도 자신의 열등감을 대신 해소하려고 하죠.
그렇기 때문에 결말은 막연히 작위적이라고 하기보다 현 세대의 아이들은 전혜 예측 불가능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수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부모에게 자식은, 자식에게는 부모는 어떤 의미일까요? 과연 축복일지 로또일지는 불확실합니다. 부모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이런 아이들이 커서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난이 죄가 되고 왕따 문제는 학교에서 출발하여 사회에까지 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붕괴된 연결고리라는 점에서 다치가와 숀이라는 아이는 불쌍하고 가엽지만 한 겨울 삭풍같은 섬뜩한 요기도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남이 아니라 우리가 키우는 아이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혹자가 그 당시에 혹시 가해자가 아니면 피해자 중의 한 명은 아니었냐고 물어본다면 자신있게 대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않은, 일그러진 자화상이기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