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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무사로서 당연한 각오일지도 모르지만, 싸움터에서 창칼을 휘두르고 있을 때라면 또 몰라도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일 것 같다. 그러나 슈코쿠에게는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터럭만큼도 없다. (P.26)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합니다. 오십 년 뒤, 백 년 뒤에는 수명이 다하지요.
나는 그 기한이 삼년 뒤로 정해진 것일 뿐.
하면 남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P.27)
모든 싸움은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된다. 그리고 사람 간의 인연도 사소함에서 비롯된다. 가로 나카네 헤이에몬의 휘하로 일하던 단노 쇼자부로는 우연히 성내 집무실에서 우발적인 시비에 휘말려 싸움을 벌여 힐복에 처할 뻔 했다가 조건부 사면을 받고 목숨을부지하게 된다. 대신 무카이야마촌에 유폐 중인 도다 슈코쿠를 은밀히 감시하라는 명을 받고 그를 만난다. 일찍이 군 부교와 요닌을 지내면서 문무를 겸하고 농민들을 가족같이 대해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 바로 도다 슈코쿠였다. 하지만 여인과 밀통하고 시동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실각해 7년 동안 유폐중이었다.
그 같은 죄목들은 도다 슈코쿠로서는 억울한 누명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조용히 가족들과 칩거 중이었다. 원래는 즉시 할복하여야 했으나 미우라 가보의 편찬을 수행중이라 집행을 유예받고 있었는데 3년간의 기한을 부여받아 일을 마치는 10년 째 되는 해에 할복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가보의 편찬을 도우라는 명목하에 그를 감시해야하는 단노 쇼자부로는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날은 점점 다가오고....
개인적으로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편인데 난세를 살아간 과거 속의 인물들의 치열한 삶들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에 대한 반면교사라는 소중한 교훈이자 간접적 체험의 장이 되기에 언제나 소재를 불문하고 동경과 선망의 장르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일본 역사소설들은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가장 재미도 있으면서 접할 기회도 많은데 전국시대가 아니더라도 영주와 무사는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은 단골소재들이다.
그렇다면 할복은 어떠한가? 무사다운 명예로운 자살이라는 사상이 아직도 현대를 살고있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과거의 제도이다. 오죽하면 할복을 "복부에는 인간의 영혼과 애정이 깃들어있다. 용사의 배를 갈라 무사도를 지킨다."고 정의하고 있을 정도니 비겁한 삶을 거부한 용기나 무사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방편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도다 슈코쿠의 입장에서는 도망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목숨이 아까워 밤잠을 설쳐야할 정도로 괴롭다. 그렇지만 유한적 삶을 소중히 여겨 의미있게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살아갈 뿐이다. 다만 그도 최후의 순간은 어떠한 심정일지 미리 짐작하지 못하는 것 말고는 가보편찬에 세월을 보내고 있어 3년 후는 기약이 없다. 그렇게 하루 하루 살아갈 날이 줄어들며 피말리는 세월 속에서 다가올 죽음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강직한 올곧음 때문에 단노 쇼자부로는 이윽고 도다 쇼코쿠의 인품에 점차 감화된다. 그러면서 이 남자가 감내해야 했던 사건들의 진실엔 그 얼마나 많은 고통과 인간적인 면모가 담겨있던지 나 또한 끊임없이 매료되었다가 때로는 안타까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또한 어느 시대를 살더라도 약육강식의 논리는 가진 자의 논리대로 밀어붙여 가지지 못한 자의 눈과 귀를 막고 수탈에 또 수탈을 가할 뿐이기에 기득권의 유지에 혈안이 되어 허울좋고 위선적인 체통은 무엇이 효율이고 무엇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를 외면한다. 그 점에서 전국통일이 이루어진 연후의 영주들이 농민들로부터 연공을 징수하면서 다져놓은 계급구조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경계선에 있다는 것도 도다 슈코쿠의 말 못할 처지를 지켜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는 현실에 낙담해서 고개 돌려 농민들의 피폐함을 결코 외면하지 않기에 시간만 허락했다면 갈등을 조정하고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공감대 형성에 앞장 섰겠지만 운명의 여신이 그의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아들 녀석의 친구인 아카기의 억울한 죽음을 항변하려는 아버지로서의 기개와 곁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가족들, 특히 아들 이쿠타로의 시선은 애잔하기 그지없어서 마음 속에 이루어질 수없는 미련이 계속 맴돈다. 때때로 세상의 비겁함을 비집어 들어가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불꽃같은 남자 도다 슈코쿠야말로 진정한 호인이자 무사도정신의 아이콘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앞에 다가온 죽음을 앞두고도 여름 한 철에 치열하게 노래하며 그 수명을 다할 저녁매미처럼 가을을 모른 채 하루살이 삶을 살아가는 이 남자를 보며 새삼 산다는 것에 우리 모두는 감사해야 한다. 애달픈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주변의 연들을 이어 살아가는데 힘을 주고 싶다는 그 방식을 기억하자. 진정한 "의"란 무엇인가를 이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