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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평점 :
슈헤이는 여자라는 성에 뒤흔들렸다. 남자의 내면을 손쉽게 꿰뚫어 보고 약점을 파악해 계속 피해자로 남게 하는 동시에 가해자로 변모하는 여자라는 존재에.
자신의 아내인 가나미라는 여자는 타고난 날카로운 칼을 지금에 와서는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성(性) 전략이었다. (P. 268.)
다카노 가즈아키는 <제노사이드>에 관한 인터뷰에서 부조리한 현실 문제를 소재로만 그치지 않고 정면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자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고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노라고 밝힌 바 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지적인 면에서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을 수도 있으며, 책을 쓸 때에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를 모두 고려한다고 말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장편 소설 <K.N의 비극>은 임신과 중절이라는 사회적으로 민감할 소재로 주제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지만 성공못했다.
싸락눈이 불어 닥치는 어두운 밤에 신사입구를 찾아 계단을 오르는 두 소녀가 있다. 신사 안에서는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있었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두 소녀는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눈보라가 심해지기 전에 되돌아가면서 이날의 일을 모두에게 비밀로 하기로 약속한다.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 자리에 오른 젊은 무명 자유기고가 나쓰키 슈헤이는 어마어마한 인세 수입 덕분에 새 아파트를 구입, 이사하면서 아내 가나미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어느 날 가나미는 임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기쁜 마음에 남편에게 소식을 전하지만 슈헤이는 아직 불안정한 수입과 대출상환금이라는 경제적인 문제로 키울 여력이 없으니 차후를 기약하고 중절 수술을 하자고 제안한다. 가나미는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지만 어쩔 수없이 남편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기로 동의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나미에게 다른 여성의 인격이 나타나고 정신과 의사 이소가이가 그녀의 치유를 위해 나서면서 불안과 두려움은 두 부부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분쿄의료대학병원 정신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소가이는 도다 마이코라는 기혼여성의 상담을 맡았었다. 그녀는 불임이었고 시어머니로부터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멸과 압박을 받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소가이의 집중관리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뛰어내려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었다. 이 일에 충격을 받은 그는 휴직계를 내고 쉬려 했지만 슈헤이의 간절한 요청에 가나미의 정신적 치료를 맡기로 한 것이다.
이쯤해서 모성애에 대한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그것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여성 특유의 욕구가 아니던가? 부성애로 한데 묶을 수 없는, 절실한 갈망. 임신은 일종의 강박관념인 것인가?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결정적 공신은 여자들이 아이를 계속해서 출산해왔기 때문에 종족번식이라는 숙명의 달성이 가능했다. 하지만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세계에서는 이러한 고정관념이 점차 변하고 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공포, 거부감 등은 결혼이 의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는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라며 반발심리가 등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출산율은 떨어지고 인구감소 문제에다 섹스라는 행위는 종족번식이라는 본능이 아니 쾌락이라는 유희로 활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준비되지 않은 임신은 인공임신중절로 이어져 유기되어 살 처분 되는 애완동물보다 소리 없이 죽어나가는 태아들이 훨씬 더 많게 된다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모가 원하지도 않은 아이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성가신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지워버리고 싶은 아이도 있는가 하면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아이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슈헤이처럼 현실적인 이유로 아이를 포기한다면 제3자의 입장에서는 비윤리적인 처사로 비난하게도 되고,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할 개인적 부담으로 용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심경이 복잡해진다. 가나미의 경우처럼 중절에 동의하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 낳고 싶다는 절대적 갈망이 또 다른 자아분열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 모호한 여성의 존재는 빙의 인격인지 진짜 영혼이 빙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슈헤이의 개인적 판단과 이소가이의 의학적 소견이 충돌하며 정신분석학적 이론이 총 동원된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이다. 그리고 슈헤이를 통해 드러난 숨겨진 과거는 생명이란 어떠한 이유로도 보호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이기에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지금부터는 내리막길이다. 슈헤이의 내면의 변화와 결단은 처음부터 예상 가능하다. 그리고 가나미의 또 다른 인격의 정체에 대해서도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설마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예상이 결국으로 마감 짓는다. 그리고 또 예상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 결말에 도달하기 전에 벌여놓았던 판을 잘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갈등은 모호하게, 흐지부지하게 덮어버리는 일에 급급했다. 허탈한 마무리에 그나마 달궈 놓은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급속도로 식어버리는 분위기는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어차피 전형적인 시나리오대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번 정도는 반전을 내놓던지 공포라도 집중 부각시키던지 했으면, 아니면 미스터리에 대한 논리적 해결이라도... 전혀 준비된 것도 없이 손님을 집으로 초대한 꼴이다.
가나미의 불안한 심리상황에 대한 호기심만 부추기고 피임의 중요성을 강조한 성교육 홍보는 순진하다.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도덕적 불감증에 대한 비판과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준비된 마음가짐까지 교훈에 대한 강박증만이 남고 재미라는 양념을 빠뜨렸으니 싱겁기 그지없구나. 섣부른 기대는 절대 금물, 다카노 가즈아키의 명성에 기대기에는 플롯이 너무 부실하다. 훅 불면 그냥 날아가 버릴 것 같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두에서 인용한 저 문구는 남자라면 격하게 공감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에게 여신일 때도 있고 미스터리하면서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니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