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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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헤이는 여자라는 성에 뒤흔들렸다. 남자의 내면을 손쉽게 꿰뚫어 보고 약점을 파악해 계속 피해자로 남게 하는 동시에 가해자로 변모하는 여자라는 존재에. 

자신의 아내인 가나미라는 여자는 타고난 날카로운 칼을 지금에 와서는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성() 전략이었다. (P. 268.)

 

 

다카노 가즈아키는 <제노사이드>에 관한 인터뷰에서 부조리한 현실 문제를 소재로만 그치지 않고 정면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자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고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노라고 밝힌 바 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지적인 면에서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을 수도 있으며, 책을 쓸 때에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를 모두 고려한다고 말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장편 소설 <K.N의 비극>은 임신과 중절이라는 사회적으로 민감할 소재로 주제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지만 성공못했다. 

 

 

싸락눈이 불어 닥치는 어두운 밤에 신사입구를 찾아 계단을 오르는 두 소녀가 있다. 신사 안에서는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있었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두 소녀는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눈보라가 심해지기 전에 되돌아가면서 이날의 일을 모두에게 비밀로 하기로 약속한다.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 자리에 오른 젊은 무명 자유기고가 나쓰키 슈헤이는 어마어마한 인세 수입 덕분에 새 아파트를 구입, 이사하면서 아내 가나미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어느 날 가나미는 임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기쁜 마음에 남편에게 소식을 전하지만 슈헤이는 아직 불안정한 수입과 대출상환금이라는 경제적인 문제로 키울 여력이 없으니 차후를 기약하고 중절 수술을 하자고 제안한다. 가나미는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지만 어쩔 수없이 남편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기로 동의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나미에게 다른 여성의 인격이 나타나고 정신과 의사 이소가이가 그녀의 치유를 위해 나서면서 불안과 두려움은 두 부부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분쿄의료대학병원 정신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소가이는 도다 마이코라는 기혼여성의 상담을 맡았었다. 그녀는 불임이었고 시어머니로부터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멸과 압박을 받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소가이의 집중관리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뛰어내려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었다. 이 일에 충격을 받은 그는 휴직계를 내고 쉬려 했지만 슈헤이의 간절한 요청에 가나미의 정신적 치료를 맡기로 한 것이다.

 

 

이쯤해서 모성애에 대한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그것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여성 특유의 욕구가 아니던가? 부성애로 한데 묶을 수 없는, 절실한 갈망. 임신은 일종의 강박관념인 것인가?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결정적 공신은 여자들이 아이를 계속해서 출산해왔기 때문에 종족번식이라는 숙명의 달성이 가능했다. 하지만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세계에서는 이러한 고정관념이 점차 변하고 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공포, 거부감 등은 결혼이 의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는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라며 반발심리가 등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출산율은 떨어지고 인구감소 문제에다 섹스라는 행위는 종족번식이라는 본능이 아니 쾌락이라는 유희로 활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준비되지 않은 임신은 인공임신중절로 이어져 유기되어 살 처분 되는 애완동물보다 소리 없이 죽어나가는 태아들이 훨씬 더 많게 된다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모가 원하지도 않은 아이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성가신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지워버리고 싶은 아이도 있는가 하면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아이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슈헤이처럼 현실적인 이유로 아이를 포기한다면 제3자의 입장에서는 비윤리적인 처사로 비난하게도 되고,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할 개인적 부담으로 용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심경이 복잡해진다. 가나미의 경우처럼 중절에 동의하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 낳고 싶다는 절대적 갈망이 또 다른 자아분열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 모호한 여성의 존재는 빙의 인격인지 진짜 영혼이 빙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슈헤이의 개인적 판단과 이소가이의 의학적 소견이 충돌하며 정신분석학적 이론이 총 동원된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이다. 그리고 슈헤이를 통해 드러난 숨겨진 과거는 생명이란 어떠한 이유로도 보호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이기에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지금부터는 내리막길이다. 슈헤이의 내면의 변화와 결단은 처음부터 예상 가능하다. 그리고 가나미의 또 다른 인격의 정체에 대해서도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설마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예상이 결국으로 마감 짓는다. 그리고 또 예상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 결말에 도달하기 전에 벌여놓았던 판을 잘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갈등은 모호하게, 흐지부지하게 덮어버리는 일에 급급했다. 허탈한 마무리에 그나마 달궈 놓은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급속도로 식어버리는 분위기는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어차피 전형적인 시나리오대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번 정도는 반전을 내놓던지 공포라도 집중 부각시키던지 했으면, 아니면 미스터리에 대한 논리적 해결이라도... 전혀 준비된 것도 없이 손님을 집으로 초대한 꼴이다.

 

 

가나미의 불안한 심리상황에 대한 호기심만 부추기고 피임의 중요성을 강조한 성교육 홍보는 순진하다.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도덕적 불감증에 대한 비판과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준비된 마음가짐까지 교훈에 대한 강박증만이 남고 재미라는 양념을 빠뜨렸으니 싱겁기 그지없구나. 섣부른 기대는 절대 금물, 다카노 가즈아키의 명성에 기대기에는 플롯이 너무 부실하다. 훅 불면 그냥 날아가 버릴 것 같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두에서 인용한 저 문구는 남자라면 격하게 공감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에게 여신일 때도 있고 미스터리하면서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니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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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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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7년의 밤>은 한국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고 그 해 각종 언론과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크나큰 화제를 모았었다. 순수문학이 아닌 장르문학에서 해외작품들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있던 한국문단을 수호하는 대항마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고도 평가 받았었고. 역동적이고 묵직한 서사의 힘은 실로 엄청났고 대단했던 것이 <7년의 밤>이었으니까. 이제 한국에도 이런 작가가 나오는구나....  2년여 만에 나온 이번 신작 <28>은 출간 전부터 주요 언론과 독자들이 올해 한국문학 최고의 기대작이라는 예정된 평가를 받으며 모두가 세상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화제작이 되어 버렸다. 나도 개인적으로 사전예약을 통한 구매란 걸 처음 경험해보았으니 마치 아이의 출산만을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두근두근 심장이 뜀박질하는 설레임.  

 

 

인구 29만이 살고 있는 수도권 인근도시 화양시에 정체불명의 괴질이 발병한다. 아파트에서 개 번식업을 하던 중년남자는 개에 물린 이후로 눈이 빨갛게 붓고 전신에서 피를 흘리는 증상을 보이더니 사망하고 만다. 이것이 최초의 발병 시점. 이 남자를 구조했던 119구조대원들도 하나 둘씩 빨간 눈 괴질에 감염되어 차례차례 죽어나가면서 이 병은 화양시 인구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는 전염병으로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화양시 전체에 비상사태, 아니 사실상 계엄령이나 마찬가지인 도시봉쇄를 통하여 화양시 외부로 동 괴질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한다. 이제 화양시는 고립된 도시, 죽음의 도시가 되면서 무법천지가 되고 도시 밖을 탈출하려는 시민들과 이를 저지하는 군인들 간에 피 흘리는 사투가 벌어지게 되고. 

 

서재형은 알래스카에서 한국인 최초로 아이디타로드 개썰매 경주에 참가했던 썰매꾼이었다. 11년 전 자신의 개 썰매팀 쉬차를 이끌고 결승점으로 질주하던 중에 화이트 아웃에 갇히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늑대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개 썰매와 자신을 이어주는 줄을 끊고 살아남는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개들은 몰살당했다썰매 개들의 어머니인 암컷 마야는 다갈색으로 물었었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라고. 그는 살아남았지만 세계 각국의 동물보호단체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면서 사랑했던 썰매 개들을 늑대무리에게 희생양으로 내놓았다는 죄책감이 트라우마 되어 평생을 시달린다. 살려내지 못했다는 마음의 짓누름은 귀국 후 화양시에서 유기동물 보호소 드림랜드의 수의사로 살게 하면서 조금이나마 속죄하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트라우마는 이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구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절실하게 잇는 공감이자 인연으로 안내하는 거대한 증언이 되어 계속 반복된다.  

 

 

한진일보 기자 서윤주드림랜드에 대한 익명의 제보를 받고 서재형유기견들의 보호자인가? 악질적인 개장수인가?”라는 기사를 써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감동어린 미담으로 TV에 출연했던 서재형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결정적으로 개 썰매팀 쉬차의 개들을 몰살시킨 장본인으로 보도한다. 이것이야말로 악의적인 제보에 대한 확인절차 없이 무책임한 언론보도가 진실을 어떻게 호도하는 것인지 제대로 입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서윤주서재형을 직접 만나 취재하는 과정에서 빨간 눈 괴질이 개에게서 인간에게 전염되는 병으로 보도함으로써 끔찍한 후폭풍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작가 정유정은 돼지들을 살 처분하는 동영상을 보고 소설 <28>의 시놉시스를 떠 올렸다고 한다. 만약 살 처분해야 하는 대상이 돼지가 아니라 반려동물인 개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방식은 철저히 이분법적이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들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이 없다. 인간과 개 모두에게 전염되는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이 괴질은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이 개에게, 개가 개에게, 개가 인간에게 전염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의학적으로도 입증되지 않은 대재앙.  

 

 

화양시들의 개들은 모두 깊은 구덩이 안에서 집단 생매장을 당하게 된다. 이 모든 발병의 원흉으로 개들이 매도당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개들은 죽음을 직감하면서 두려움에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날뛴다. 구덩이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개들은 군인들에게 눈을 찔리고 몸뚱이를 꿰뚫린 채 피바다 되어 무저갱으로 떨어져간다. 인간들만이 우월한 종자로 단정 짓고 자신들만이 생존하기 위해 말 못하는 짐승들의 살려달라는 비명을 무참하게 짓밟는다. 진실이라는 가치가 야만적으로 압살당하고 만다. 그제서야 서윤주는 깨닫게 된다. “살려주세요.”라는 개들의 절규와 살아남았지만 고립된 인간들의 살려주세요.”는 결코 다르지가 않다는 점을. 

 

 

여기 또 하나의 시점이 존재한다. 약탈, 강간, 살인이 난무하는 무간지옥 화양시에서 희생양으로 전락한 개들의 분노와 생존본능을 대변하는 팀버울프 링고가 있다. 주인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버림받고 투견으로 길러졌던 링고는 인간을 철저히 증오하고 불신한다. 우연히 서재형이 키우는 암컷 스타를 만나 첫눈에 반하면서 그녀만을 바라보며 그녀를 지키며 평생을 함께하는 행복을 꿈꾼다. ‘링고스타는 이름을 합치면 비틀즈의 멤버 링고스타가 되는데, 둘은 이름처럼 갈라놓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가 되지만 불행은 스타의 죽음으로 링고를 좌절이라는 상실감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개입된 동해기준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다짐한다.

 

 

이 소설은 위에서 언급한 서재형’, ‘서윤주’, ‘링고’, ‘박동해’, ‘한기준’, ‘노수진까지 모두 다섯 명의 인물과 한 마리의 개의 시점이 번갈아 교차하며 이야기를 하나의 결승점으로 몰고 간다. 전염병이라는 소재는 일반적이나 시종일관 강력한 흡입력으로 깊은 울림과 생생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구축해 둔 인간본성에 대한 탐구가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어떠한 낙관적인 기대나 희망도 없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안타깝고 무고한 죽음이 연이어 계속된다는 전개가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이 사람 만큼은 살려내고 싶다고 바람을 걸어보지만 냉정하게도 그 가혹한 운명은 비켜가지 못했다. 죽어도 싼 놈이 있는가 하면 미처 피지 못한 한 떨기 생명 앞에서는 전염병에 대한 역학적 분석은 한낱 헛된 소망일뿐이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이라는 특급열차에서 하차하지 못하고 끝내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비극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차라리 죽느니만 못 한.... 

 

  

그래서일까? 다 읽고 나면서 긴 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을 숨을 죽여 가며 읽었던 것 같다. 실로 어마어마하다. 섬세한 묘사에 더해진 치밀한 긴장감, 게다가 미칠 듯이 폭주하는 이야기라는 힘은 외면하기가 힘들다. 한국소설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흡족함이란...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야성과 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구원과 속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군림하고 지배할 권리가 있는 포식자가 아님을 안다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외경심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라고 읽은 소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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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1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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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본격 미스터리에서 괴기 환상소설로 독서와 취향이 바뀌었느냐는 료코와의 대화를 한 번 곱씹어 본다. 미쓰다 신조의 자전적 요소가 과연 포함되어 있느냐는 것도. 괴담을 좋아하지만 일부러 체험을 목적으로 특정 장소를 찾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아니 일가족 참살사건이 과거 발생했던 흉가란 점을 사전 인지 못했다며 부동산 주인을 원망하지만 한눈에도 불길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그 저택에 기거하며 괴기소설을 쓰겠다고 착안한 것부터가 정상의 범주에 벗어난 일이다. 괴담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좋아하는 미쓰다 신조는 단지 즐기고자 할 뿐이지 괴이가 반드시 일어나란 법은 없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창작의욕을 불태운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기에 처음부터 무섭다는 감정이 어디서 촉발하는 것인지 실체가 없다.

 

 

그래서 호러라는 공포는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 같은 음습하고 서늘한 느낌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나중에는 조금씩 무감각해진다. 무섭지가 않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미스터리로 몰고 가서 결말에서 호러와 결합한 후 두 가지 다 원만한 선에서 해몽을 해 주었더라면 효과만점이었을 텐데 결말은 소문대로 맘에 들지 않았다. 액자식의 색다른 구성과 전개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만족했지만 미스터리는 봉인되고 호러만 남는구나

 

 

확실히 괴이라는 정체에 대해서는 개인별로 체감온도가 다르겠지만 미쓰다 신조의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라면 그것의 유형이랄까,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지간해서는 참신하게 받아들여지기가 힘들다. 익숙해진 공포는 괴이를 미지로 간주하고 모든 현상의 원인이 되어버린다면 논리적으로 납득은 불가하다. 이제까지 미쓰다 신조는 호러와 미스터리의 결합을 통해서 분석이 가능한 원흉과 그렇게 할 수 없는 원흉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서 현실이 누리고 있는 부조리를 적정한 수준에서 추정해내었다.

 

 

그러한 안배가 이번에는 완전히 깨어졌기 때문에 원성이 자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자들이 원하는 가이드라인에 관한 협상에서 처절히 실패한 이유는 기시감의 반복 때문이고 단서는 실종되었으니 잔혹함으로만 승부를 걸기에는 욕구불만이 상당하다. 최소한 영국과 일본에서 벌어진 일가족 참살이 일어난 시간적 주기 ‘7’이라는 수학적 공식만이라도 의문을 해소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이 모든 원인은 문제의 서양식 저택에 홀려서 그렇단다. 무엇에 씌었다는 이상한 느낌이란다. 

 

 

그리고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같다는 건 이 시리즈의 특성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미심쩍은 의문은 남는다. 동인지 미궁초자에 수록된 단편 중 안개저택오락으로서의 살인<작자미상>에서 이야기를 먼저 읽었기에 언급은 반갑지만 <기관>의 미쓰다 신조와 <작자미상>의 미쓰다 신조는 별개의 인물인 것일까? <기관>에서는 직접 해당 소설을 집필한 작가지만 <작자미상>에서는 해당소설을 읽은 독자로 나오기에 신분과 역할은 다르고 괴이를 직접 체험한다는 공통점만이 두 작품을 연결했다가도 구분 짓게 만드는 착각이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러적 분위기에 길들이는 감각으로 등장하는 괴이하고 섬뜩한 웃음소리, 발자국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고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 ‘문을 열어 봐, 나야’. 같은 청각적 요소들은 과거에 일어난 참극에 대한 기억을 되돌리게 하는 자극이 되기도 한다. 망상, 악몽, 작품해설까지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일정부분 진실처럼 보이는 부분과 동·서양 호러 대중문화에 대한 마니아적 지식의 나열도 나중에 다시 확인하고픈 흥미를 돋운다는 점에서도 좋은 점수를 추가로 주고 싶다.

 

 

결국 이 소설을 즐길 수 있느냐의 판단여부는 작가의 의도대로 현실에 가깝게 믿도록 하기 위한 교묘함에 얼마나 흥을 느낄 수 있는지, 그 함정에 얼마나 깊게 빠질 수 있는지를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허구를 즐기는 방법 외에는 더 이상 없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일단 이번만큼은 미쓰다 신조 월드가 연착륙 못하고 불시착 했다는 개인적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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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 전설 살인사건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우치다 야스오 지음, 김현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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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에서 3대 국민탐정이라고 하면 '긴다이치 코스케','가미즈 쿄스케' 그리고 '아사미 미쓰히코'를 지칭한다고 한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부 읽어 보았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읽어본 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영예스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으니 아직 이쪽 세계에 대한 정보는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는 셈이다. 뒤늦게라도 알게 되었으니 시간이 허락하는 한 차츰 찾아서 읽어나가 보자.  

 

  

프리랜서 작가 '아사미 미쓰히코', 당년 33세. 아니 영원한 33세이던가? 왜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인지... 마치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에 등장하는 형사들이 늙지도 않는 것처럼 꽃미남 이미지를 계속 고수하고 싶은가 본 데 상큼한 허우대와는 달리 어딘가 어설픈 구석이 좀 보인다. 은근 마마보이인데다 경찰청 국장인 형에 대한 컴플렉스가 상당히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사건현장에서는 항상 누구네 동생으로 통하다보니 그건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탐정으로 활동하는데 상당히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 필요시에는 즉각 굽히고 들어와 협조하는 경찰들에게 내놓을 카드로 최적이다. 이렇게 든든한 보험을 본인이 꺼려해서 문제지만.

 

 

사건발생은 계절의 여왕 5월, 고치 현으로 가는 호화 쾌속선 '시 플라워'에서 한 남자가 실족사 한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은 이 배의 항해사 '호리노우치'였고 그의 증언에 따라 남자의 미망인에게 거액의 사망보험금이 지급된다. 하지만 시체는 발견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2년이 지난 후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 맨션에서는 또 다른 남자가 추락사한다. 그런데 2년 전 죽은 남자랑 이번에 죽은 남자가 그 당시 여객선의 승객이었음을 '호리노우치'가 기억해낸 것이다. 단지 우연의 일치라기엔 이상하다 싶어 친구인 '아사미 미쓰히코'에게 두 사건의 연관성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다. 2년 전의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시 플라워'의 종착지인 고치 현을 찾아간다. '아사미 미쓰히코'는 숨겨진 마을이라는 '오추도 마을'에서 죽은 두 남자의 고향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도 듣게 되는데....

 

 

현실과 허구의 미묘한 조화가 이 시리즈의 성공을 이끈 주요 원동력 중 하나라고 하는데 소설 속 주인공의 집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는 않지만 주변 건물들은 실제로 존재해서 '아사미 미쓰히코'라는 인물에 대한 동경과 소설 속 트릭들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사실 '아사미 미쓰히코' 라는 캐릭터는 스스로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독자적인 느낌마저 주기 때문에 이번 '헤이케 전설 살인사건'처럼 처음부터 범인을 드러내고 범행을 모색하는 단초를 먼저 밝혀서 결과를 원인으로 되짚어 가도록 유도한 역행은 의도하지 않은 수순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사미 미쓰히코'의 추리과정을 따라가며 범인들이 자신했던 "완전범죄""안전범죄"의 구별을 어떻게 해낼 것인지 예측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정서를 관통하는 흐름은 '고향'이다. 산업화라는 예견된 구조 속에서 물질만능주의가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젊은 층들이 고향을 벗어나 도시라는 시공간을 먹이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가 되어 떠돌 때에는 남겨진 자의 회한과 떠난 자의 망향으로 인한 상실감이 다스리기 힘든 슬픔으로 다가온다. 떠날 때는 쉽게 떠나서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각오였지만 '헤이케' 일족이 '겐지'의 추적을 피해 숨어든 오추도 마을에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를 끊을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는 전설처럼 후손들은 더 이상 돌아갈 방법이 없다.

 

 

'헤이케'의 후손으로 태어나 터전을 지키지 않은 그들에게 과거라는 뿌리와의 단절은 슬픈 애환이 되어 가슴 먹먹하게 한다. 결국 트릭을 깨뜨리는 망치가 '아사미 미쓰히코'라면 반전이라는 가면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개탄이다. 사회문제를 여행이라는 여정을 통해서 만나는 달달한 로맨스도 참 좋고 바깥의 어둠보다도 더 칠흑같은 어둠을 응시하는 진실에 대한 동정도 아릿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쁘다고 비방하는 사람을 약자로 간주하고 옹호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남자 '아사미 미쓰히코'에게는 여백이라는 매력과 섬세한 감성이 살아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꽃미남이라 질투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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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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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11 테러로 인해 아내 모니카를 잃고 삶의 방향을 상실한 채 살아가던 FBI 요원 사이먼 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그런데 발신일자는 바로 십 년 전 오늘. 편지가 배달되는 날부터 매일 한 명씩 죽게 될 것이고 그들을 제거하는 이유는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가로막는 공공의 적이기 때문이니 뉴저지에 사는 엘리슨 로자를 찾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단서를 찾으라는 내용에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여겼지만 이윽고 편지는 현실이 된다. 세계적인 곡물 기업의 총수 나다니엘 밀스타인이 암살된다. 정작 용의자는 십 년 전 죽은 한 남자로 밝혀지는데 엘리스의 눈앞에서 권총 자살을 한 한국 남자 신가야였던 것이다. 십 년 전 자살한 남자가 용의자로 지목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거물급 인사들이 연달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모든 사건의 용의자는 신가야이다. 현재 벌어지는 사건과 관련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사이먼은 엘리스의 과거 기억을 더듬어간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따라오는 어떤 조직이 있다. 

 

 

저장하였으므로 사라지는 것이 기억이라고 한다. 정보 자체는 기억하지 못하고 정보 공간만 기억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과잉 기억 증후군이라는 현상은 희귀한 존재이다. 망각 능력이 상실되어 기억을 통제할 수 없다면 머릿속이 기억으로 가득 차 과거라는 철장 속에서 평생 갇혀 살아야 한다는 끔찍한 형벌이 되어 버린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재능을 망각하고 예상치도 못한 급류에 떠 밀려가 버린 엘리스와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고 열등감이라는 패배에 평생을 자학했던 사이먼 켄의 비극은 911 테러에서 기인했다. 둘만의 공통점!

 

 

미래를 본다는 능력 또한 정답을 알고 있는 거랑 같을 수는 없다. 읽을 수 없는 미래가 분명 있다. 미래를 바꿀 수도 있고 알면서도 손을 대면 안 되는 미래도 있을 수 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답을 구할 수 없다면 어설픈 대응은 돌이킬 수 없는 결말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점을 절묘하게 예측하고 대비한 신가야의 복수는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기억하는 궁극의 아이들을 이용하여 돈과 권력을 쥐고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악마 개구리라는 집단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 된다. 그렇다면 수천 년 전부터 발견되어 온 미래를 기억하는 아이들이라는 신비스러운 존재가 이 모든 탐욕의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어떤 존재이던가? 열 살 전후로 능력에 징후가 포착되며, 고대에는 한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끄는 기여도로 어린 나이에 신관으로 추앙받는다. ‘궁극의 아이들은 오드아이가 신체적 특징이고 존재 자체는 베일에 가려져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정신병자 취급을 당한다. 천재도 거시적인 차원에서 트레이닝을 못시키면 평범한 구성원으로 전락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이 중요하듯이 악마 개구리가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뛰어난 수완으로 세계를 좌지우지 했으니 그런 그들의 배후에는 궁극의 아이가 존재했던 것. 보통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은 그래서 항상 타인의 질투, 시기, 호기심에 보호받지 못한 채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용에 혈안이 되는 세력 앞에서 불행이라는 운명을 거부하지 못한다. 

 

 

신이 되고 싶었던 괴물과 신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수천 년 동안 관계를 이어오며,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었다. 신가야가 짜놓은 퍼즐조각을 10년간에 걸쳐 하나씩 맞추다보면 완성된 퍼즐에서 악연을 붕괴시킬 단서가 발견될지는 그 누구도 예상 못했으리라. 아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림자를 키워온 어둠의 실체가 있다는 사실도 인지 못한 상태에서 음모론이 파생하는 거대한 게임이 풍부한 상상력의 극치 속에서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워싱턴에서 벌어진 계속된 암살 사건, 911 테러, 고향 티벳으로 돌아가는 14대 달라이 라마 으뜬 갸초, 센카쿠 열도 분쟁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그리고 이 모든 상황들에 연계되어 있는 한반도의 안보까지. 한국 추리소설의 한계를 넘은 글로벌적인 스케일 과 숨 가쁜 서스펜스들은 분명 한국 장르소설이 한 단계 일취월장한 파급력이라 놀랍기만 하다. 장용민이라는 작가는 정유정 작가와 더불어 주목할 만한 가치가 분명 있는 장르소설의 대가인 것 같다. 정유정 작가의 이번 신작 <28>도 그런 기대감에 주문했으니까.

 

 

또한 신가야가 모든 계획을 수립하고 시나리오를 짜며 복수극을 주도했던 탓에 엘리스는 얼핏 수동적인 역할에 나태하고 패배에 찌든 여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가야가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은 복수극만이 아니다. 꿈을 포기하지 말고 꿈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 딸 미셀과 함께 기다렸던 행복을 놓치기 싫다면 운명이라는 뿌리를 바꾸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구원적 메시지에 포함되어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작가의 의도대로 거대한 음모론이 나무라면 숲은 사랑 이야기이다. 꿈꾸면서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이 스릴러라는 집에서 멋지게 태어난 것이다. 글쓰기는 집을 짓는 것과 흡사하다는 작가의 소감대로. 물론 신가야와 엘리스의 사랑 이야기는 진심 오글거리기는 했다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즐거운 독서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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