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 - 지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개정증보판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문예춘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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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헤르만 헤세는 아마도 괴테와 더불어 독일인들의 내면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대문호이자 다른 한 편으로는 문명정신과는 이질적인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유년시절부터 헤세의 인간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을 키워준 힘은 그가 자란 독일의 산간도시와 알프스 산맥의 산간마을의 자연에서 자연스레 형성되었으니 개인적 삶과 체험에서 축적된 세계관에는 그를 독일스러움과 그렇지 않은 면을 동시에 갖춘 상대성이 깊이 서려있다 봐야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출간된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는 예전에 이미 국내에 선보인 적 있으나 누락된 분량의 한계를 복원하여 새롭게 개정판으로 다시 소개된 셈인데 산문집의 형식을 빌려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개인적 감성을 응축한 문체로, 조화와 이상을 꿈꾸는 현대인들을 과거로의 향수에 젖게 만든다. 그 운치와 푸근함이 진정 세련되었으니 깊이를 논해서 무엇 할까?

 

 

그리고 원래 국내제목은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가 아니었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차라리 잘된 일이다. 내가 떨쳐버리려고 해도 어느새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는 그 표현이 얼마나 감성을 자극하는 지, 그리움이 동반하는 외로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데 글로만 빛나는 것이 아니더라. 헤세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글과 어우러져 한 편의 수채화로 거듭나고 있는데 글만 잘 쓰는 줄 알았던 그에게 이런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작가가 아니라면 화가 겸업도 가능할 그 비범함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따로 전시회로 만나고 싶을 정도로 세상을 보는 순순한 심성이 보석같이 반짝이는 색채로 붓이 캔버스에 펼쳐놓은 낙원인 듯하다. 

 

 

결국 글과 그림을 통해 삶을 살고 사랑하는 일에는 여러 경로가 있음을 그는 말한다. 만남과 작별, 탄생과 사멸, 자연이 빚어낸 꽃망울과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나그네를 숭고한 고향으로 이끈 세상만물의 공로에 예찬을 늘어놓으며 경이로움에 젖는다. 맹목적인 소유욕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헤세의 지혜 앞에서는 성숙된 인간만이 꿈꿀 수 있는 단순함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욕망에게 속박되어 있는 나, 그리고 현대인들이 새삼 자유로운 영혼 속에서 살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무의미하게 소모되고 있음이 안타까워 그렇게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자연과 인간, 예술을 이해하려 고뇌했던 헤르만 헤세만의 치열한 여정은 모든 사소한 일에도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조국 독일이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에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따뜻한 시선과 온기가 시간을 초월한 시공간 속에서 여전히 공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그 섬세함에 마음은 무장해제 되어 버리니 헤세의 글과 그림이 인도하는 대로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보자. 슬그머니 추운 겨울 옆구리를 녹이는 감동이라는 환희에 온 몸이 떨려올 테니. 이것이 헤르만 헤세 식 미학적 진수이다. 동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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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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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불가해한 상황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기우제가 몇 년 만에 나라 지방의 산골마을에서 행해지는 모양이야.”

 

괴담을 수집하며 전국을 방랑하는 환상 소설가 도조 겐야에게 이러한 정보는 자다 가도 벌떡 일어나 문제적 장소로 달려가게끔 만드는 마력의 주술이었을 것은 당연하다. 괴담이라면 밥보다 더 좋아하는 괴짜인 그가 괴상사 편집담당자인 소후에 시노 양과 함께 당도한 곳은 물의 신 미즈치 님을 숭배하는 어느 마을이었다. 하미라는 그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동서로 된 분지에 마을 네 개가 모여 사는 곳이다. 각각 사요 촌, 모노다네 촌, 사호 촌, 아오아 촌 순서로 자리 잡기 시작한 전형적인 논농사 마을이다.

 

벼농사를 지을 시기에 가뭄이 들어 순서를 정해 마을마다 번수를 실시하는 수리조합이 있고 미즈치 님을 모시는 신사가 각 마을마다 있는 곳이다. 그런데 미즈치 님을 모시는 기우제를 관장하는 신사들에게는 암묵적으로 서열 내지 우열 같은 자존심 싸움이 존재한다. 토착세력으로 권력이 되고 전승이라는 이름의 기우제는 비가 많이 올 때 감의‘, 가뭄일 때 증의라는 형식으로 나뉘면서 지금까지 계승되어 왔다. 문제는 과거에 기우제 도중 기우제를 집전하는 역할을 맡은 신관 두 사람이 빠져 죽거나 심장마비로 죽는 사고가 있었는데 십 삼년 만에 다시 기우제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가는 곳 마다 괴이한 살인사건과 맞닥뜨려 명탐정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도조 겐야에게 여지없이 참극이 발생한다. 역시 그는 불길함을 몰고 가는 먹구름 같은 존재였나 보다. 이번만큼은 기우제를 관람하는 제3자의 입장에 서려 했지만 꺼림칙한 그의 경력들을 이번에도 활용할 시점이 돌아온다.

 

모두가 지켜보는 호수 한 가운데 무대가 있었고 공물을 물에 빠뜨리는 집전을 담당하는 집배에서 신관이 흉기에 찔려 살해된다. 외부에서 집배로 몰래 들어 갈 루트도, 물 밖으로 빠져나간 그 누구도 목격되지 않은, 말 그대로 완벽한 호수 밀실사건이었던 것이다. 정말 특이한 살인사건이다. 흔히 밀실 살인이라고 한다면 건물이라는 유형화된 공간을 의미하는 데 이곳은 물이라는 형태이다. 물을 관리하고 물에 경외하고 물에서 참극이 발생함으로서 모든 일이 한 번에 이루어진 특정한 공간이 된 셈이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시점은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가며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비극은 괴이라는 모습으로 이미 예견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데 살인범이 살인방법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수단을 간접적으로 지칭하기 위해서라도 군국주의 일본이 자국민에게 영향을 미친 특정 세계관을 통해 일본이란 나라가 원래부터 끔찍하고도 어리석은 인습에 매어 많은 희생을 낳은 우매한 마을이라는 점을 우화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전쟁 중의 일본이 미쳐 돌아갔던 것처럼 가족이 죽어도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기뻐했던 반응들이 이 마을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지 않나 싶다. 개인 의사로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 아니라 제3자에 의해 의문사를 맞이했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란 점에서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반성과 각성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도조 겐야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듣는다.

 

또한 이번 작품은 그간 악몽처럼 되풀이 되면서 심령공포의 진수를 보였던 것에 비추어보면 특유의 괴이는 여전하나 등장하는 빈도 수 라든지 그 공포의 강도가 현저히 낮아졌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읽으면서 전신을 휘감던 오싹함이 많이 가시는데 괴이를 자연현상으로 풀어내던 과정과 전개들도 이번에는 석연치가 않다. 그동안 완전한 해소까진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선에선 분명한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냥 괴이현상을 보여주는 것에만 그친 이번 설정은 좀 아쉽기는 하다. 아니면 나 자신이 힌트 내지 정답을 보고서도 이해를 못한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자꾸 속편 이야기가 슬슬 흘러나오는 이유가 그런 부분에 대한 보충설명이 차후에 제대로 실현되기 위한 사전포석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해당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반면 축소된 공포대신 눈에 자꾸 밟히는 것은 뜻밖에도 달달한 로맨스이다. 도조 겐야가 비록 민속학과 괴담에 정통한 전문가라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혜안은 없다는 점을 누군가도 지적하고 있지만 나 자신도 그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면 그도 나도 다를 바가 없나 보다, 연모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곳곳에서 포착되지만 도조 겐야는 추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정작 여자의 마음은 몰라준다. 철저히 그런 방면에선 둔하다. 왜 여태 몰랐던 것일까? 그래서 무심한 남자를 악마라고 원망하는 그녀의 투정은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다. 몇 차례 스킨십의 기회가 있었지만 매몰차게 내쳐버려 안타깝지만 향후 이 시리즈를 즐기기 위한 또 다른 깨소금 같은 역할이 되지 않을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잠시 해 본다. 히죽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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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3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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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첩보스릴러의 대가 존 르 카레의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7번째 작품이자 카를라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스마일리의 사람은>은 냉전시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데올로기라는 강박관념에 쓸쓸한 퇴장을 고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냉전(COLD WAR)’이라는 용어는 1945년 가을부터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축으로 하여 두 진영 간에 새로 팽배하기 시작한 긴장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1989년까지를 그렇게 불러왔다. 혹자들은 냉전은 전쟁이 아닌 평화라고 주장한다. 긴장과 대립은 있었지만 전면은 없었으니까. 대신 보이지 않는 장막 뒤에서는 스파이라는 척후병이자 불침번을 내세워 휴식 없는 상호감시와 정보전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과대망상에 빠진 또 다른 전쟁이었던 것이다. 교착 상태에 놓인 이 무의미한 소모전은 기만과 교란이라는 선동적인 형태를 통해 각자가 신경쇠약에 빠지도록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견고한 내부단속에 따른 체제결속을 유지하는 또 다른 임시방편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스마일리가 은퇴라는 뒤안길에서 다시 첩보전의 현장으로 소환되어 평생의 숙적이었던 늙은 여우 카를라와 벌이는 마지막 대결은 젊고 날렵한 최첨단 첩보물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한 숙명과 회자정리라는 개념이 차별화된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진정한 은퇴식을 지금에서야 다시 열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서커스(영국 정보부)에서 은퇴한 늙은 스파이 스마일리에게 블라디미르 장군의 사망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것은 일종의 과업이자 묵은 빚을 청산해야만 하는 의무였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장군은 에스토니아 출신 망명자로서 자신과 함께 이념과 사상이라는 기치 아래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함께 수행하였던 동지이자 이용당하다 버려진 스파이들의 고독과 비참한 노후를 대변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죽음은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외면될 뻔한 처지에 놓였다가 스마일리에 의해 정식으로 조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블라디미르가 죽기 전 스마일리와 만나고자 했고 샌드맨을 잡을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정황도 포착한다. ‘샌드맨은 바로 스마일리의 영원한 숙적이자 모스크바 센터(KGB)의 총 책임자 카를라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치명적인 단서를 알아보던 중이었고 그 사실로 인하여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죽은 스파이들과 재회할 수 있는 별도의 저 세상이 있다면 못 풀었던 오해를 풀고 싶었다는 스마일리.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여 늙은 여우 카를라를 포획할 마지막 덫을 설치한다. 이제 여우 한 마리가 덫으로 걸어 들어오기만을 초조하기만을 기다리면서도 그의 마음은 엉켜진 실타래처럼 복잡하기도 하다.

 

 

적수로서 분노라는 감정을 품고 있지만 야만적인 관료 시스템을 거부한 채, 24시간 동안 생존이라는 서바이벌을 달성하기 위해 신념과 기지로 살아남아야 했던 카를라에게서 그도 한낱 인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스크바의 무기였고 잔혹한 살인마라고 불렸던 블라디미르의 죽음이 한낱 치정 따위도 아닌 이유로헛된 선택을 했으리라고 평가 절하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그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조국의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했었다. 이렇게 쓸모없는 소모품처럼 폐기되는 처사가 비정하면서 인간성과 신념이 희생당하는 현장에서 모두가 거울처럼 닮아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스마일리와 카를라가 시선을 교환하는 장면에선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처지를 엿보았을 것이라 짐작되기에 세월은 숙명을 뛰어넘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서글픈 송별식으로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첩보스릴러의 클래식으로 기억될 만한 애잔하고 서정적인 엔딩이자 인생을 처연하게 함축시킨 드라마였다. 가을에 더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

 

 

다른 한편 적수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분명하게 인간의 얼굴을 드러냈다. 지금껏 스마일리가 죽어라 추적했던 야수도 광인도 로봇도 아니었다. 그도 분명한 인간이었다. 스마일 리가 조금만 손을 내밀어도 절박한 사랑 따위에 무너지고 말 그런 인간... 그건 스마일리 자신이 실타래처럼 꼬인 삶을 통해 터득한, 누구보다 잘 아는 약점이기도 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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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 죽은 남자 스토리콜렉터 18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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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체질을 알아차린 첫 계기는 식사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식탐이 대단했다고 한다. 매일 같은 메뉴가 이어지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어린 마음에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계란말이랑 감자샐러드야?” 무심결에 이렇게 중얼거렸다가 어머니께 혼이 났다. 무슨 소리야. 어제는 햄버그스테이크였잖니. <본문 중에서>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95년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국내에 작품이 소개되었다. SF와 신본격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착안은 얼핏 이질적이고 부조화라는 색안경을 피해가기 어려울 법도 한데 읽어보고 나면 남들이 흔히 시도하지 않은 방식에서 느낀 기상천외함에 색다른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주류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분명 마니아들로부터 얻은 꾸준한 인기와 함께 이 작품의 국내출간을 갈망해왔던 분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난해하다기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게 되고 자극적이거나 잔인한 설정 없이도 이만한 수준의 미스터리를 창안해 낼 수 있는 작가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특정한 날의 특정 행동과 현상들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지만 오직 본인만이 캐치할 뿐, 주변 사람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진행된다는 설정은 작가도 시인했지만 빌 머레이 주연의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나 자신도 즉각 떠 올렸다. 타임루프를 이 영화에서 최초시도하지 않았음에도 이유 불문하고 단단히 각인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정한 날로 되돌아가서 반복함정에 빠진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대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상상은 누구라도 한번 즈음은 해보지 않았을까? 이러한 SF적 설정에다 미스터리가 가미되면 그땐 어떠한 화학작용을 일으킬지, 그 엉뚱 발랄함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더군다나 20여 전에 출간될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타임루프가 시도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실로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시작부터 사건의 절정이지만

주인공은 설정을 설명한다.

등장인물들이 한곳에 모인다.

불온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사건은 일어난다.

역시나 사건은 일어난다.

질기게도 사건은 일어난다.

여전히 사건은 일어난다.

그래도 사건은 일어난다.

싫어도 사건은 일어난다.

사건은 마지막으로 몸부림친다.

그리고 아무도 안 죽기도 한다.

사건은 역습한다.

나선을 빠져나올 때

시간의 나선은 끝나지 않는다.

 

 

목차부터가 유머러스하지만 각 파트별로 사건이 어떤 식으로 발단되어 전개되고 결말을 맡게 될지 기본적인 설명을 함축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타임루프가 가진 구간반복이라는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독자들은 어떻게든 나선형처럼 돌고 또 돌아야한다. 이것은 마치 원을 그릴 때 시작점에서 출발하여 정확히 그 지점으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안으로, 어떨 때는 밖으로 뒤틀리면서 계란형이 되었다가 보름달형이 되는 식으로 원형에서 탈피한 그림으로 완성되는 방식이 반복함정이었다.

 

 

그래서 고등학생인 소년 오바 히사사타로는 사건이 반복된다는 걸 알고 인지하고 있다. 큐타로라고 잘못된 이름으로 오해받는 히사타로가 어느 순간 체험하기 시작한 건 원인을 알길 없는 이상 체질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전예고도 없이 어떤 날이 딱 아홉 번 반복된다. 어제와 오늘은 달라야 하는데 내일까지 똑같이 반복될 때 시작된 첫 날은 오리지날이 되고 다음 날 부터는 자신의 의도한 바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시킬 수 있음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입맛대로 규칙을 유리한 쪽으로 이용해왔다, 입시에서도 문제를 반복 입수하여 만점을 받고 천재 소릴 듣지만 이후에는 다시 꼴통으로 전락하는 등 실력을 요행으로 얼렁뚱땅 넘긴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설날에 히사타로는 외할아버지 댁을 방문하게 된다. 사업에 성공해 가진 게 돈 뿐이지만 과거 괴팍한 성격 때문에 가족들과 불화를 겪어 세 딸 중 두 딸과 의절하고 지내왔던 외할아버지는 오랜만에 가족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재산과 사업체를 지정된 후계자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수시로 마음이 바뀌어 후계자를 갈아치웠지만 공인된 유언장을 작성해 확정짓겠다는 말씀에 지금까지 서먹하게 지냈던 히사타로네 가족들과 이모네 가족들까지 모두 할아버지의 환심을 얻어 재산과 사업체를 독차지할 속셈에 각자가 동상이몽을 꿈꾼다.

 

 

이제 가족들 사이는 경쟁관계로 인해 긴장과 반복, 대립이 극심해지는데, 다음 날 히사타로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또 반복함정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인 타임루프에 빠졌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계속 반복해서 겪게 될 그 날에 할아버지가 갑자기 시체로 발견된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할아버지가 살해되었는지, 범인은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히사타로는 바쁘다. 반복함정에 빠질 때마다 범인의 살인시도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럴 때 마다 철저히 어긋나버린다. 범인은 날마다 다른 사람이 되니까, 나비효과가 되어 매일 다른 결과를 낳는데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스터리가 이토록 유쾌하게 전개되는 경우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웃음은 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지속되면서 끊임없이 낄낄거리게 하지만 미스터리물이 가진 고유의 기능을 결코 잊지 않는다. 변수란 녀석은 본래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살인이 어떤 억제력을 뿌리치고 일정의 뒤틀림을 가져다준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 달리 표현하는데 반복현상은 논리를 설명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고 반복학습과 수정작업을 통해 최적의 답안을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히사타로의 고민은 깊어지고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긋남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오리지날이라고 부르는 첫날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사실 <일곱 번 죽은 남자>는 신본격을 표방하고 있지만 고도의 두뇌게임을 요하지 않는다.SF라지만 과학지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니 미스터리를 선호하지 않는 일반 독자층도 충분히 선호할 만하다. 이것은 어차피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흐름에 주목하다보면 범인의 정체나 살해 동기 같은 일반적인 미스터리의 해법보다는 반전에서 지금까지 구상된 트릭들이 의외성이 아니라 규칙의 반복에서 빚어진 착각이라는 개념임을 알게 된다. 퍼즐이 아니라 넌센스 퀴즈 같은 타입이니 재미와 새로움을 추구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 점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자칫 마이너틱한 이미지로 전락해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저자는 정통계열에서 벗어난 점을 인정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미스터리의 한 계보로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직구만으로 타자를 상대할 수 없으니 이 같은 변화구도 때론 필요하다. 강속구 투수는 수도 없이 보아왔지 않은가? 유희왕 같은 투수는 변칙이 자신 있게 살아남는 또 다른 유형이자 요령인 것이다. 아웃만 시켜낸다면 정통파나 기교파냐 하는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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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닉 페어웰 지음, 김용재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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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없는 내 삶이 지겨울 때, 모든 걸 포기하고만 싶을 때

“이 두 글자를 기억해줘,GO!”

 

열네 살에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야 도달할 수 있는 머나먼 이국 브라질로 이민했던 소년은 무려 30여년 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고집하기 보다는 완벽한 현지인으로 동화된 삶을 살았던 그에게 기억에서 가물거렸던 한국은 낯설면서도 과거의 어느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끈이란 의미 때문에 조금이나마 의식해야만 했을 것 같다. 한국 이름으로는 이규석, 브라질 이름으로는 닉 페어웰(닉 페어웰로 불러주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한국인이라는 뿌리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될 듯). 닉 페어웰은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브라질에서 펴낸 책 한 권이 가져다 온 돌개바람. 브라질 청소년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의 삶을 바꾼 책이라며 최고를 외치는 이 책 <GO>에는 어떠한 메시지가 있어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이 책의 현지에서의 인기는 실로 놀랍고 화려하다. 성인이 주인공이고 내용도 그러하지만 브라질 교육부의 심사를 거쳐 선정된 공립고등학교 필독서라고 하니 읽고 나서도 좀 의아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브라질 청소년들이 <GO>라는 단어로 문신도 새기고 티셔츠 운동화도 입고, 신는 등 가히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은 인생에서 낙오하고 실패한 주인공이 자신을 구원하면서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자는 그 단순명료한 메시지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청춘들의 내면에 단비를 내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것이다.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았더니 그제서야 이 모든 현상들이 이해되고 정립되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나는 가난하다. 고정적인 직장도, 친구도, 당연히 여자 친구는 더더욱 없다. 작은 월세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상파을로의 바에서 디제잉을 한다. 그의 삶은 여러모로 남루하고 보잘 것 없지만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하는 것은 어릴 적 아버지가 엄마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에서 자책과 원망의 한숨이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마나 희망이랄까,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이겠다.

 

 

<쿠비코바>라는 제목으로 구상 중인 소설은 동유럽 국가출신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과 똑같은 입장에 놓여있는 한 남자가 그녀를 만나는 이야기인데 상상이 현실에 이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내 인생의 여자가 있었으면, 되어 준다면 이라는 바람이 소녀 진저를 만나 사랑에 빠지도록 된 것이다. 사랑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놓았다. 진저를 통해 구원받고 그녀의 소개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맡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은 기쁨과 보람에 설렌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그러나 행복의 나날들은 길지 않았다. 한순간의 오해와 실수로 그녀에게 이별통보를 받아 실연당한다. 이제 상심과 고통에 절어 다시 과거의 추레했던 시절로 퇴행해버린 나. 희망은 없다. 그녀가 없다면.

 

 

아무런 미래가 없는 루저라는 현실은 인생에서 진정 자신이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주저앉아 버린 진실에서 기인한다. 찾았다고 생각해서 시도라도 했다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그러지 못했다면 남는 것은 자기연민 뿐이다. 삶은 다시 재기할 때까지 기회를 무한리필해주지도 않고 냉정하게 빨리 흘러가 버리는 것만 같다. 이제야 자신의 삶으로 돌려놓을 인연을 만났는데... 부족했던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으로, 더 나은 삶으로 변모시키고 싶었던 나의 소망은 누구라도 자신을 대입시키고 응원해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을 거다. 더 잘 할 수 있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가슴에 난 실연이라는 상처는 살아갈 의지라는 연고로 치유해아만 한다. 그러기에 나의 방황은 길었다.

 

 

할아버지의 바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야만 했던 주인공의 아버지를 보라.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이타주의라는 도덕적 굴레에 얽힌다면 진심 행복하기 힘들다. 남들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즐겁지가 않다면.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자신의 의지와 시간이라는 현상은 슬픔, 분노, 좌절,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과정들을 순화시키고 어느 정도 리셋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용서 못할 것도 없이. 연약함과 불안, 비참함에서 허우적거리기엔 인생은 길지 않기에 나는 멋지게 일어선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도하는 수 밖에 없다, 누구의 방해도, 입김도 없이 말이다.

 

 

나는 말한다. “삶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 네가 내 삶을 통해 보았듯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으로 가득해. 하지만 모든 게 최악일 때는 두 글자로 된 단어 하나를 떠올려봐. GO. 가, 앞으로 가. 글을 써, 그림을 그려, 사진도 찍어, 춤을 춰, 바느질을 해, 연기해, 노래해. 그러니까 모든 상황이 최악일 때마다 딱 한 단어만 기억하는 거야. GO. 가, 앞으로 가. 그냥 해봐.” 포기하는 순간 삶은 죽음이다. 최악이라는 나락에 빠지지 않으려면 안주하지 말고 벽을 깨고 나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만 한다. 그러면서 저자가 전제조건으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능력을 갖추기를 바라고 있다.

 

 

혼자서 잘 났다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생각만큼 만만치가 않은 세상이니까. 곁에서 부축해주면서 같이 보조 맞추어 걸어줄 나, 당신 그리고 우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면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팝 뮤지션, 특히 록 밴드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전해지는 추억에 대한 향수이다.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그때 그 시절에 들으며 추종했던 밴드들이 그리워서 맘 한구석이 잠시 감상에 젖는다. 당대의 대중문화가 심어놓은 소통은 단절되었지만 끄집어낼 수 있는 기억들이 있다는 점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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