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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닉 페어웰 지음, 김용재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평점 :
보잘것없는 내 삶이 지겨울 때, 모든 걸 포기하고만 싶을 때
“이 두 글자를 기억해줘,GO!”
열네 살에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야 도달할 수 있는 머나먼 이국 브라질로 이민했던 소년은 무려 30여년 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고집하기 보다는 완벽한 현지인으로 동화된 삶을 살았던 그에게 기억에서 가물거렸던 한국은 낯설면서도 과거의 어느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끈이란 의미 때문에 조금이나마 의식해야만 했을 것 같다. 한국 이름으로는 이규석, 브라질 이름으로는 닉 페어웰(닉 페어웰로 불러주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한국인이라는 뿌리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될 듯). 닉 페어웰은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브라질에서 펴낸 책 한 권이 가져다 온 돌개바람. 브라질 청소년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의 삶을 바꾼 책이라며 최고를 외치는 이 책 <GO>에는 어떠한 메시지가 있어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이 책의 현지에서의 인기는 실로 놀랍고 화려하다. 성인이 주인공이고 내용도 그러하지만 브라질 교육부의 심사를 거쳐 선정된 공립고등학교 필독서라고 하니 읽고 나서도 좀 의아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브라질 청소년들이 <GO>라는 단어로 문신도 새기고 티셔츠 운동화도 입고, 신는 등 가히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은 인생에서 낙오하고 실패한 주인공이 자신을 구원하면서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자는 그 단순명료한 메시지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청춘들의 내면에 단비를 내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것이다.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았더니 그제서야 이 모든 현상들이 이해되고 정립되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나는 가난하다. 고정적인 직장도, 친구도, 당연히 여자 친구는 더더욱 없다. 작은 월세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상파을로의 바에서 디제잉을 한다. 그의 삶은 여러모로 남루하고 보잘 것 없지만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하는 것은 어릴 적 아버지가 엄마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에서 자책과 원망의 한숨이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마나 희망이랄까,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이겠다.
<쿠비코바>라는 제목으로 구상 중인 소설은 동유럽 국가출신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과 똑같은 입장에 놓여있는 한 남자가 그녀를 만나는 이야기인데 상상이 현실에 이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내 인생의 여자가 있었으면, 되어 준다면 이라는 바람이 소녀 진저를 만나 사랑에 빠지도록 된 것이다. 사랑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놓았다. 진저를 통해 구원받고 그녀의 소개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맡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은 기쁨과 보람에 설렌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그러나 행복의 나날들은 길지 않았다. 한순간의 오해와 실수로 그녀에게 이별통보를 받아 실연당한다. 이제 상심과 고통에 절어 다시 과거의 추레했던 시절로 퇴행해버린 나. 희망은 없다. 그녀가 없다면.
아무런 미래가 없는 루저라는 현실은 인생에서 진정 자신이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주저앉아 버린 진실에서 기인한다. 찾았다고 생각해서 시도라도 했다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그러지 못했다면 남는 것은 자기연민 뿐이다. 삶은 다시 재기할 때까지 기회를 무한리필해주지도 않고 냉정하게 빨리 흘러가 버리는 것만 같다. 이제야 자신의 삶으로 돌려놓을 인연을 만났는데... 부족했던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으로, 더 나은 삶으로 변모시키고 싶었던 나의 소망은 누구라도 자신을 대입시키고 응원해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을 거다. 더 잘 할 수 있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가슴에 난 실연이라는 상처는 살아갈 의지라는 연고로 치유해아만 한다. 그러기에 나의 방황은 길었다.
할아버지의 바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야만 했던 주인공의 아버지를 보라.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이타주의라는 도덕적 굴레에 얽힌다면 진심 행복하기 힘들다. 남들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즐겁지가 않다면.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자신의 의지와 시간이라는 현상은 슬픔, 분노, 좌절,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과정들을 순화시키고 어느 정도 리셋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용서 못할 것도 없이. 연약함과 불안, 비참함에서 허우적거리기엔 인생은 길지 않기에 나는 멋지게 일어선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도하는 수 밖에 없다, 누구의 방해도, 입김도 없이 말이다.
나는 말한다. “삶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 네가 내 삶을 통해 보았듯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으로 가득해. 하지만 모든 게 최악일 때는 두 글자로 된 단어 하나를 떠올려봐. GO. 가, 앞으로 가. 글을 써, 그림을 그려, 사진도 찍어, 춤을 춰, 바느질을 해, 연기해, 노래해. 그러니까 모든 상황이 최악일 때마다 딱 한 단어만 기억하는 거야. GO. 가, 앞으로 가. 그냥 해봐.” 포기하는 순간 삶은 죽음이다. 최악이라는 나락에 빠지지 않으려면 안주하지 말고 벽을 깨고 나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만 한다. 그러면서 저자가 전제조건으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능력을 갖추기를 바라고 있다.
혼자서 잘 났다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생각만큼 만만치가 않은 세상이니까. 곁에서 부축해주면서 같이 보조 맞추어 걸어줄 나, 당신 그리고 우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면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팝 뮤지션, 특히 록 밴드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전해지는 추억에 대한 향수이다.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그때 그 시절에 들으며 추종했던 밴드들이 그리워서 맘 한구석이 잠시 감상에 젖는다. 당대의 대중문화가 심어놓은 소통은 단절되었지만 끄집어낼 수 있는 기억들이 있다는 점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