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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 죽은 남자 ㅣ 스토리콜렉터 18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내 ‘체질’을 알아차린 첫 계기는 식사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식탐이 대단했다고 한다. 매일 같은 메뉴가 이어지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어린 마음에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계란말이랑 감자샐러드야?” 무심결에 이렇게 중얼거렸다가 어머니께 혼이 났다. 무슨 소리야. 어제는 햄버그스테이크였잖니. <본문 중에서>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95년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국내에 작품이 소개되었다. SF와 신본격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착안은 얼핏 이질적이고 부조화라는 색안경을 피해가기 어려울 법도 한데 읽어보고 나면 남들이 흔히 시도하지 않은 방식에서 느낀 기상천외함에 색다른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주류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분명 마니아들로부터 얻은 꾸준한 인기와 함께 이 작품의 국내출간을 갈망해왔던 분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난해하다기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게 되고 자극적이거나 잔인한 설정 없이도 이만한 수준의 미스터리를 창안해 낼 수 있는 작가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특정한 날의 특정 행동과 현상들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지만 오직 본인만이 캐치할 뿐, 주변 사람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진행된다는 설정은 작가도 시인했지만 빌 머레이 주연의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나 자신도 즉각 떠 올렸다. 타임루프를 이 영화에서 최초시도하지 않았음에도 이유 불문하고 단단히 각인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정한 날로 되돌아가서 반복함정에 빠진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대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상상은 누구라도 한번 즈음은 해보지 않았을까? 이러한 SF적 설정에다 미스터리가 가미되면 그땐 어떠한 화학작용을 일으킬지, 그 엉뚱 발랄함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더군다나 20여 전에 출간될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타임루프가 시도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실로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시작부터 사건의 절정이지만
주인공은 설정을 설명한다.
등장인물들이 한곳에 모인다.
불온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사건은 일어난다.
역시나 사건은 일어난다.
질기게도 사건은 일어난다.
여전히 사건은 일어난다.
그래도 사건은 일어난다.
싫어도 사건은 일어난다.
사건은 마지막으로 몸부림친다.
그리고 아무도 안 죽기도 한다.
사건은 역습한다.
나선을 빠져나올 때
시간의 나선은 끝나지 않는다.
목차부터가 유머러스하지만 각 파트별로 사건이 어떤 식으로 발단되어 전개되고 결말을 맡게 될지 기본적인 설명을 함축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타임루프가 가진 구간반복이라는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독자들은 어떻게든 나선형처럼 돌고 또 돌아야한다. 이것은 마치 원을 그릴 때 시작점에서 출발하여 정확히 그 지점으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안으로, 어떨 때는 밖으로 뒤틀리면서 계란형이 되었다가 보름달형이 되는 식으로 원형에서 탈피한 그림으로 완성되는 방식이 반복함정이었다.
그래서 고등학생인 소년 오바 히사사타로는 사건이 반복된다는 걸 알고 인지하고 있다. 큐타로라고 잘못된 이름으로 오해받는 히사타로가 어느 순간 체험하기 시작한 건 원인을 알길 없는 이상 체질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전예고도 없이 어떤 날이 딱 아홉 번 반복된다. 어제와 오늘은 달라야 하는데 내일까지 똑같이 반복될 때 시작된 첫 날은 오리지날이 되고 다음 날 부터는 자신의 의도한 바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시킬 수 있음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입맛대로 규칙을 유리한 쪽으로 이용해왔다, 입시에서도 문제를 반복 입수하여 만점을 받고 천재 소릴 듣지만 이후에는 다시 꼴통으로 전락하는 등 실력을 요행으로 얼렁뚱땅 넘긴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설날에 히사타로는 외할아버지 댁을 방문하게 된다. 사업에 성공해 가진 게 돈 뿐이지만 과거 괴팍한 성격 때문에 가족들과 불화를 겪어 세 딸 중 두 딸과 의절하고 지내왔던 외할아버지는 오랜만에 가족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재산과 사업체를 지정된 후계자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수시로 마음이 바뀌어 후계자를 갈아치웠지만 공인된 유언장을 작성해 확정짓겠다는 말씀에 지금까지 서먹하게 지냈던 히사타로네 가족들과 이모네 가족들까지 모두 할아버지의 환심을 얻어 재산과 사업체를 독차지할 속셈에 각자가 동상이몽을 꿈꾼다.
이제 가족들 사이는 경쟁관계로 인해 긴장과 반복, 대립이 극심해지는데, 다음 날 히사타로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또 ‘반복함정’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인 ‘타임루프’에 빠졌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계속 반복해서 겪게 될 그 날에 할아버지가 갑자기 시체로 발견된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할아버지가 살해되었는지, 범인은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히사타로는 바쁘다. 반복함정에 빠질 때마다 범인의 살인시도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럴 때 마다 철저히 어긋나버린다. 범인은 날마다 다른 사람이 되니까, 나비효과가 되어 매일 다른 결과를 낳는데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스터리가 이토록 유쾌하게 전개되는 경우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웃음은 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지속되면서 끊임없이 낄낄거리게 하지만 미스터리물이 가진 고유의 기능을 결코 잊지 않는다. 변수란 녀석은 본래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살인이 어떤 억제력을 뿌리치고 일정의 뒤틀림을 가져다준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 달리 표현하는데 반복현상은 논리를 설명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고 반복학습과 수정작업을 통해 최적의 답안을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히사타로의 고민은 깊어지고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긋남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오리지날이라고 부르는 첫날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사실 <일곱 번 죽은 남자>는 신본격을 표방하고 있지만 고도의 두뇌게임을 요하지 않는다.SF라지만 과학지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니 미스터리를 선호하지 않는 일반 독자층도 충분히 선호할 만하다. 이것은 어차피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흐름에 주목하다보면 범인의 정체나 살해 동기 같은 일반적인 미스터리의 해법보다는 반전에서 지금까지 구상된 트릭들이 의외성이 아니라 규칙의 반복에서 빚어진 착각이라는 개념임을 알게 된다. 퍼즐이 아니라 넌센스 퀴즈 같은 타입이니 재미와 새로움을 추구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 점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자칫 마이너틱한 이미지로 전락해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저자는 정통계열에서 벗어난 점을 인정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미스터리의 한 계보로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직구만으로 타자를 상대할 수 없으니 이 같은 변화구도 때론 필요하다. 강속구 투수는 수도 없이 보아왔지 않은가? 유희왕 같은 투수는 변칙이 자신 있게 살아남는 또 다른 유형이자 요령인 것이다. 아웃만 시켜낸다면 정통파나 기교파냐 하는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