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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드러머 걸 ㅣ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4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평점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반목과 상처, 증오를 남긴 채 30년이 지난 현재도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역사와 국가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정보전을 낳게 마련이고 국제 정세의 민감한 흐름 속에서 개인의 존재와 가치가 어떻게 소모되고 희생당하며 잊혀져 가는지에 주목해온 그간의 작품세계와 궤를 같이 하는 작품 <리틀 드러머 걸>은 독일 바트 고데스베르트에서 사제 폭탄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겟은 이스라엘 노무관의 처삼촌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성발언으로 주목받아 왔던 탈무드 학자였던 것.
그러나 애꿎은 희생자만 발생하였고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된다.이에 이스라엘 정보국의 쿠르츠는 이 전쟁의 균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시키고자 한다. 쿠르츠는 이 비밀 첩보작전의 계획을 짜기 위해 정예요원 3인조를 불러 모았고 3인조의 급조를 통하여 특별한 지위에 올라선 사병조직을 결정한다. 이 첩보작전을 최전선에 수행할 엘리트가 필요하였는데 이 표적으로 영국 여배우 찰리를 물망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처럼 세심하고 치밀한, 당사자가 자신이 거미줄에 빠져든 줄도 모른 채, 서서히 포섭하여 세뇌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할 필요가 있었다. 자국민이 아닌 제3국의 인물을 첩보원으로 등용하자면 강압이 아닌 자연스런 교육이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적들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 마찰과 파장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에서다.찰리라는 여배우를 포섭, 세뇌하는 과정들은 한편의 연극대본을 짜서 사랑에 빠진 여심을 공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요제프라는 가명을 가진 요원을 자연스럽게 찰리의 주변에 투입한다. 그리고 조금씩 가까워지지만 직접적으로 이성으로서의 유혹을 섣불리 시도하진 않지만 이것만으로도 확실한 효과가 드러난다. 시크한 듯, 무심한 것처럼 굴다가 결정적일 때에는 밀당을 해서 두 사람 마침내 사랑에 빠진 연인사이가 된다. 사랑에 더욱 눈이 먼 쪽은 당연히 찰리였다. 요제프가 가르치면 귀를 기울였으며,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것이며, 죽으라면 죽겠노라고 맹세하는 가련한 여인이다. 찰리의 마음을 공략하고 조종하는 요제프.
찰리가 처음부터 테러전의 첩보원으로 발탁된 진정한 이유는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상당히 영리하고 배우로서의 재능도 갖춘 그녀지만 타고난 반골 기질은 임무수행에 더 없이 적합한 캐릭이었으니 유대인도 팔레스타인도 아닌 제3자로서 그나마 팔레스타인 측에 상대적인 호의와 지지를 보낸다는 정치적 성향을 다소 고려해야만 했다. 요제프는 그런 그녀를 아주 천천히 세뇌시킨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먼저 이용한 후 그녀의 직업적 특성인 연기라는 측면을 비집고 들어간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연극은 사적인 고백이 아니라 실용적이어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의식화 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더불어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이 논리를 그들은 대테러에 대항하는 선전선동으로 감화시키고자 했고 완전히 말려든 찰리를 보면서 이데올로기라는 맹목적 신념 앞에서 마치 무대에 캐스팅된 배우가 생과 사를 연기하는 것과 과연 다를 바 없는 것인지에 대한 회색빛 공허감이 밀려든다. 그런 만큼 배우에게 중요한 무대에서의 연극을 보다 더 큰 현실이란 공간에서 펼치는 그 연기란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만 찰리와 그녀를 지켜보는 나 자신이 소속에 대한 정체성에 상당한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는 과연 이스라엘의 편에서 일하고 있는 지, 아니면 팔레스타인의 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 마지막 페이지에 다가가면서도 끝내 확신할 수 없었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닐 것이다.
확신할 것은 단 하나, 비정한 세계에서 사랑 하나만을 믿고 전선을 누비고 다닌 그녀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객관적 시각에서 재조명할 기회를 던지고 무대 뒤로 쓸쓸히 사라지는 순간 그토록 역설했던 사랑의 고귀한 가치는 묵직한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