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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이신. 처음에는 이산으로 보였었다. 흐흠 그럼 정조 이산에 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분명히 이신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이었어, 라며 제목의 의미를 책을 통해 확인하니 한글로는 뜻을 알 수 없고 대신 한자로 표기했을 때만 속뜻이 분명해지는데.여기서 이신은 청나라 황제의 칙사,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황제의 오른팔이다. 황제의 나라가 명에서 청으로 바뀐 제후국 조선에서 이신은 아버지가 폐주 광해의 내금위장이었고 아버지는 반정의 무리에 맞서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역도의 자식이 지금은 조선을 감시하는 칙사라니 운명의 장난도 이만하면 지나치다고 해야겠다.
또한 이신의 과거를 제대로 아는 이가 조정에는 없다. 이 당혹스런 결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 못하고 구시대의 유산에만 답습하기에 급급한 임금과 조정신료의 우매함에서 비롯된 것일테다. 그랬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광해는 중원의 맹주가 교체되리란 예감에 여진과 명을 오가는 실리외교를 펼쳤고 국방강화에 힘써 장차 닥칠 화를 미리 방비하고자 했으니 임진년에 있었던 전란을 몸소 겪은 바 있던 광해의 행보는 선견지명이라는 혜안이었다.
그러나 정치는 이 같은 급진적 변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광해의 패륜을 빌미삼아 반정을 일으켰고 새로이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세력은 새로운 강자에 맞설 힘도 없이 후금을 오랑캐라 무시하는 간 큰 짓을 벌이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결국 터진 병자호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위정자들은 임진년 전란의 추태를 반복하더니 척화파의 주장대로 삼전도에서 백기 투항하는 치욕을 맛보게 된다.도무지 위정자란 집단은 학습능력이란 게 애시 당초 없나 보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되풀이하며 지들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다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만이 명분의 우선순위가 되어 실리추구에 대한 기본적 상식과 개념, 더 나아가 죄의식이 없기에 백성을 버리고 전란에 피신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나. 그까짓 허울 좋은 대의명분이 무엇이라고, 그까짓 자존심이 무엇일진대, 힘도 기르지 못한 채, 얻어터지면서 백성들만 사지의 고통으로 내몬단 말인가? 이신은 고통 받은 피해자 중 한사람이었다.
무려 50만이나 되는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갔고 포로였던 이신은 중도에 아내와 이별하게 된다. 이신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우여곡절 끝에 청 황제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손에 넣었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죄를 저질러 징계 차원에서 조선의 칙사로 파견된 것인데 황제의 눈에 들기까지의 과정은 조선의 위정자들의 시각에선 명에 대한 배신이자 오랑캐의 수족에 불과한 불충한 행위겠지만 이신은 어떡하든 살아남을 필요가 있었다.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야만 했고 징벌형인 칙사역은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피해자에게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된, 아이러니였다.조선인이 청 황제의 칙사가 되어 돌아오자 조선의 조정은 전전긍긍하며 각자의 속셈에 주판알을 튕기기에 여념이 없다.
행여 청 황제가 자신을 입조할까 불안에 떠는 임금, 이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자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꼭두각시 임금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역도의 무리들, 이신의 권세에 빌붙어 아첨하려는 자들... 세상은 이신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지만 뒤에서는 시커먼 속내를 품고 있는 버러지만도 못한 위정자들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신은 분노로 복수의 칼을 간다. 칙사라는 신분을 활용하여.아내는 살아있으면 아마도 환향녀 소리를 들으며 멸시와 천대를 받을 것이다. 흔히 화냥년이리고도 하는 호칭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갖은 고초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데들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한다.
나라가 힘이 없어 적국에 끌려가 씨받이가 되는 등 여성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상황을 겪어야만 했던 이들이 오히려 모국에서 상처를 치유할 위로와 배려를 받기는커녕, 오랑캐에게 더럽혀졌다는 이유에 이혼과 자살, 심지어 타살까지 당하는 야만적 위협에 많은 희생을 낳았다. 이쯤하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 파렴치한 위선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언제나 힘없는 백성들만 고통을 겪지만 위정자들은 인면수심의 집단들이라 소리 없는 울음은 소매를 적시고 망자의 한은 구천을 떠돌 뿐이다. 이신이 느끼는 분노는 백성들을 대변하며 그가 꿈꾸는 복수는 한 맺힌 칼끝이 되어 목젖을 직접 겨누게 될 때 응축된 울분을 해소시키려 하여 통쾌할 뻔했다.
대리만족이란 이런 것이다. 비록 복수의 칼날이 피를 보는 대신 이생의 지옥을 사무치도록 겪게끔 하는 선에서 그치는 결말이 아쉽기는 하나 숨소리가 들릴 지척까지 칼날을 들이댄 것만으로도 인정해야만 하겠다. 더 과감했다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목이 떨어져도 세상은 변하지 않음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같은 참담함이 마지막이 아니라 수백 년 후 다시 겪게 되리란 걸, 제2의 환향녀는 현재에도 편안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는 걸, 그 같은 데자뷰는 작년에 출간된 한승원 작가의 <겨울잠, 봄꿈>에서 겪었었는데 그렇다면 올해는 바로 이 소설 <이신>에서 폭풍 같은 흡입력을 통해 느껴보기를 바란다. 무엇을 깨닫고 반성해야하는지를, 그 칼끝이 어디를 향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