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마쓰모토 세이초는 동기야말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에서 가장 중요해서 동기 없는 범죄는 없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숨겨진 의식, 깊은 곳에 있다는 그 의식이 이번 작품에서 어떻게 그려질지가 못내 궁금했다. 우선 프롤로그1에서는 묻지 마 살인으로 충격을 던진 후 50년 후로 시간대가 훅 하고 넘어가서 주인공 소타의 유년시절로 전환된다. 이제 상이한 시대별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 엮이게 될지를 차근차근 지켜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매년 칠석 무렵 온가족이 연례행사처럼 나팔꽃 시장을 둘러보던 일이며 우연히 만난 소녀와의 풋풋한 사랑이 뜬금없이 이별을 고하는 이야기 등이 여러 갈래의 줄기처럼 뻗어 나간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유망한 수영선수였던 리노는 사촌의 자살, 할아버지의 타살 등과 겪는데 개별적 상황에 맞게 펼쳐지는 이야기들을 행여나 놓칠세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다. 마침내 그 많은 줄기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뿌리에 마침내 도달하게 되면서 책 제목에 이미 동기를 암시하는 힌트가 들어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수긍이 간다. 때문에 에도시대에 존재했던 나팔꽃이 지금에는 왜 없을까란 의문을 소재로 채택한 의도는 한동안 읽어본 작품마다 위화감이 들게 했던 작가의 전작들의 경우와는 달리 역사와 과학에서 무리 없이 차용하여 매끄럽게 소화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추리적 기법으로의 활용에 있어서 모범적인 답안을 보였다고 보이고 그것으로써 소재고갈에 시달릴 것만 같은 이 장르에 재생이라는 호흡기를 다시 붙였다고 생각한다그리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세상에 남겨진 빚이라는 유산.” 이 표현이 참 맘에 든다. 원자력관련 전공을 밟은 소타가 졸업 후 진로문제에 고심하다 사건이 해결되고 난 뒤 이것을 누군가는 짊어져야할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의연한 자세가 돋보인다. 2

 

011년 동일본 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결부 지으려 하는 이유도 마침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처음엔 소타의 전공인 원자력공학과 살인사건의 배후와 진실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에 주목해서 읽어나갔지만 나중에는 그 결과를 두고 굳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게 된다굳이 따지고 들어가면 맹점이 될지도 모르나 중요한 점은 과거와 현재에서 빚이라는 유산이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자연히 소멸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감당해내야만 한다는 현실감각이란 것이다.

 

어찌 소설 속 현실로만 치부하고 말 것인가. 타산지석은 이럴 때 써야하는 법이다. 따라서 모두를 슬픔으로 고통 받게 한 근래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싫든 좋든 정신 바짝 차리고 눈을 부릅뜨고 의연하면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그렇기 때문에 동기나 소재의 차용도 만족스럽지만 현 세태를 시의적절 하게 반영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도는 분명 합격점을 줄만 하다. 결국에는 트릭과 반전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자. 대신 이번 작품은 비록 불같은 강속구는 아니지만 핀 포인트 같은 제구력으로 타자를 아웃시킬 줄 아는 그의 비범함이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멋지게 입증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남자에게 첫사랑이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감정, 처음 느꼈던 그 설렘, 행복을 나누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첫사랑을 떠올린다고 하지만 소타가 느끼는 첫사랑의 두근거림에 나도 감정이입 되어 집중하며 읽었기에 그에게 첫사랑과 성인이 되어 만난 새로운 사랑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지 결말 없는 상상을 해본다. 그건 두 사람 모두 잡는다면 만족스럽겠다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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