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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날이 무지무지 덥다. 찌는 무더위에 잠이 좀처럼 오질 않아서 책과 함께 긴긴 밤을 사투 속에 보내고 있는 상황,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사무실에서 이 책을 수령하였다. 여직원이 무슨 책이냐며 호기심을 비치면서 책을 문득 들어보더니 단박에 기겁을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시무시한 책의 제목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으니, 나를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어찌 이런 극악무도한 책을 읽느냐며, 게다가 목이 뎅강 잘려나간 인형의 표지그림까지 지적하며 혀를 끌끌 차기까지 하네. 음지에 숨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장르소설 독자의 고충을 또 한 번 되씹게 되는 현실에 한탄하면서 이 계통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며 따져들고 싶었지만 참고 넘어가 버렸다. 게다가 난 남자라구, 쯧.....
그렇게 섬찟한 포스의 제목을 보여주는 사쿠라바 가즈키의 이 이야기는 우리네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소비자금융, 즉 사채지옥의 끔찍함과 벌린 입 속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피폐하다 못해 나락의 구덩이로 떨어져버린, 파괴된 삶을 몸서리치게 다룬다. 소설 속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자면 중년의 번역가 요시노 사토루는 고학생 시절 하숙했던 고서점에 들렀다가 자신이 지냈던 방에 하숙하고 있는 묘령의 여인 시로이 사바쿠를 알게 된다. 사토루는 대학 강사와 번역가로 남 보기엔 번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사채 빚에 내몰리고 있는 채무자 신세이다. 사바쿠도 요란한 대출광고에 현혹되어 결국 다중 채무자로 전락하고만 신세로 둘의 관계는 처음에는 사토루의 성적 욕망에 의해 육체적인 관계로 시작하지만 이윽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토루에게서 본능적으로 돈 냄새를 맡게 된 사바쿠는 그가 번역에 대한 인세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채고 돈을 달라고 보채기 시작한다. 비디오로 둘 만의 정사를 녹화, 이를 협박용으로 쓰려고 했고 이를 눈치 챈 사토루는 외딴 오두막으로 그녀를 유인해 토막 살인해 버린다. 그녀의 손가락을 잘라 병 속에 수집품처럼 지니고 다니는 사토루는 그녀가 자신처럼 사채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게다가 성형수술에 가명까지 써서 위장된 신분을 쓰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사바쿠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차" 속의 그녀랑 무척이나 닮아있다. 내가 본 "화차"는 소설이 아니라 한국 영화이고 사바쿠는 본인의 무분별한 소비행태에서, 영화 "화차"의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아버지의 빚이 족쇄처럼 대물림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비참한 현실과 죽음이라는 엔딩은 끝내 둘 다 피해가지 못했다.
그렇게 돈이라는 것은 말이지. 우리가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성취의 열매로 뚝 떨어져 손에 쥐게 될 만큼 그리 눅룩치 않다. 화사한 돈 꽃을 피우고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우리들 소망이지만 이 소설에선 순진한 믿음이 아니냐며 독자들을 맘껏 조롱하는 거 같다. 현실에서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소득은 없고 카드 빚은 날로 늘어 사채에까지 손을 대고 마는 많은 사람들, 사채란 것은 금전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튼튼한 동아줄인 것처럼 미소 띈 가면으로 '돈은 얼마든지 가져다쓰세요' 라며 선심 베풀 듯 한다.
'빌려 쓴 돈 곧 갚아야지'라며 다짐하건만 사바쿠처럼 지옥은 입을 벌려 어느새 집어삼키기 시작하고 정신차려보면 자신의 몸뚱이는 이미 토막 나 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는 못 되돌릴 과거의 핑크빛 삶은 책장을 넘길수록 막막한 한숨으로 갈기갈기 찟겨 다가오는데 불안, 절망, 공포가 한데 섞여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게서 마구 휘둘리면서도 끝내 읽는 것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개별적 시점이 하나의 틀을 완성해나가는 구성에서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썩어 문드러진 삶의 냄새에서 경각심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매일같이 사채광고는 전화로도 걸려오고, 휴대폰 문자로도, TV에서도 돈이 넘쳐흐름을 주체 못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그것을 살아가는 동안 끝내 피해갈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장담 못한다. 그냥 어둡고 무겁고 비참한 이야기들에서 교훈을 반추하고 현재의 힘든 삶을 헤쳐 나가며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나아가자고 밖에 내 놓을 결론은 없겠다. 그렇다면 돈에 지배받지 않고 우리네는 멀지않은 미래에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 왔는지는 사토루의 노년에서 해답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본래, 돈이라는 것에는 폭력성이 있네."
돈이란 말이지, 없으면 사람을 곤궁하게 만들고.
있으면 있는 대로 질투나 원망을 사게 만드는,
굉장히 성가신 물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