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오염 - 양극화 시대, 진실은 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는가
제임스 호건 지음, 김재경 옮김 / 두리반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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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이 존중받는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생각이 다른 것만큼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걸까? 그 틈을 비 집고 다양한 이해관계들이 얽혀 사회를 더 심한 양극단으로 갈랐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가 서로 경청하는 자세를 가질 때 오염된 광장을 되돌릴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계기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사회. 다름을 수용하지 않은 채 사회는 양극단으로 갈라지고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접하려고는 하지만 쉽지 않아서 나도 아마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진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광장에서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날 사람들은 귀에 들어오는 어떤 정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신경을 끄고 등을 돌린다. 결과적으로 광장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20쪽)

 가짜뉴스에 몇 번 속고 나면 정보를 믿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검증을 통해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 그냥 등을 돌려버린다.



 우리는 논쟁을 할 때면 정답이 단 하나 있다고 상정하지만 담론을 할 때면 우리 각자가 답을 하나씩 들고 있다고 상정한다. 따라서 함께 해결책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36쪽)

 상대방에게 내 의견을 설득시키려면 무조건 근거를 들고 와 상대방 의견을 반박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광장을 오염시키는 방법이라 놀랐다. 담론의 방식으로 상대방과 내 의견에서 공통점을 찾은 뒤 거기에서 뻗어 나가 해결책을 찾는다면 어쩌면 더 수월하게 합의 과정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코너는 모든 정치적 옹호자들에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내려놓고 존중을 담은 눈빛으로 다른 모두를 바라보라고 촉구한다. (52쪽)

 이게 참... 생각이 글러 먹은 것 같아 꼴도 보기 싫은 상대를 존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근데 저자의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적대심만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우리는 무엇을 믿을지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특정한 종류의 인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증거들을 마주했기 때문에 무언가를 믿게 될 뿐이다. (82쪽)

 내가 믿는 게 내 의지가 아니라는 말이 섬뜩하다. 보고 느낀 무의식이 만들어낸 결과가 믿음인 거면, 인식조차 되지 않는 무의식을 고쳐야 믿음을 고칠 수 있으니까 잘못된 믿음을 고치는 건 정말 힘든 일이겠구나.



라투르는 그러므로 이제 '진실'이라는 이견의 여지가 있는 낡아빠진 개념을 포기하고 그 대신 주장을 비교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99쪽)

 '사실'은 찾기 어려워도 꼭 찾아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을 여기서 하게 될지 몰랐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그들이 '개인이 아니라 기업'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평했다. (119쪽)
 개인보다 기업이 문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기업인데, 그 각각의 무슨 짓을 하는 개인을 사이코패스로 보긴…. 쫌 그렇다. 그래도 개인에게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 볼 순 없다. 기업 시스템 뒤로 숨기엔 사회에 끼친 민폐가 너무 크다.


따라서 스탠리는 언론의 자유 하나만 가지고는 합리적인 토론을 나눌 환경을 조성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에 더해 신뢰와 정직이 반드시 필요하다. (180쪽)
 언론이 공정하게 진실을 보도하는 게 상식적인데, 이런 말이 나오는 게 참 아이러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자주성을 잃어버리며 다른 존재에게 현실 인식을 대신 떠맡겨버린다. 비합리적으로 변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186쪽)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상에 정보가 넘치다 못해 흐르니 내가 굳이 생각을 안 해도 그럴듯해 보이는 걸 내 생각으로 삼으면 된다. 예전에 내 생각을 물어보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네이버를 켠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뒤로는 생각하려고 노력 중인데, 귀찮은 건 사실이다. 그래도 멍청하게 남의 생각을 내 생각인 양 가지고 살기 싫어서 사고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전력을 다해 밀어붙이는 일'과 '이해하지도 신뢰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협력하기 위해 앉아서 이야기하는 일'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과정인 셈이다. (210쪽)
 원하는 일을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하면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같이 일을 하기 위해 잠시, 아주 잠시만 함께하는 거라고 마음을 먹고 목표를 빨리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전략) 하지만 양쪽 진영 모두 자기 입장만 내세운 채 요지부동입니다. 뭐라도 타협하면 상대한테 승리를 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262쪽)
 타협하는 게 승리를 내어준다고 생각한다는 말 공감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언제까지 봐야 할지, 지구가 그 시간을 기다려줄지 의문이다.


간츠는 마틴 루서 킹이 불과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이끈 저항 운동인 버스 보이콧 운동을 떠올리면서 집단적인 힘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얻었다. 만약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는 데 발을 사용했다면 힘은 버스회사가 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버스에 타지 않고 직장까지 걸어가는 데 발을 사용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힘을 쥘 수 있었다. (299쪽)
 이렇게 대중이 합쳐서 무언가를 이뤄낸 모습이 정말 멋있다. 우리나라 촛불 시위도 생각나고. 근데 결정은 결국 대중이 하지만 그 기반에 수많은 검은 손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대중을 이끌고 대부분 상황에서 거기에 이끌려간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암스트롱은 우리가 늘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변화를 이루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그저 열을 내고 싶은 것인가?"(316쪽)
 맞아. 행동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그 행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일이 어그러진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항상 생각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다.


기후변화의 가장 큰 비극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주범이 아니라는 점이다. (353쪽)
 피해자 따로 가해자 따로. 가해자들이 경제 발전이란 명목하에 끌어 쓴 자원의 대가를 피해자들이 치루고 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는 게 아니라 모른 척 하나보다.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것과 같은 이런 열정은 어쩌면 우리가 더 큰 현실과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식할 때, 서양의 머리와 동양의 가슴을 연결할 때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357쪽)
 서양의 머리와 동양의 가슴을 합치는 게 아니라 모두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굳이 왜 동서양을 나누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감상
1부-2장: 진실, 힘을 잃다
진실이 힘을 잃는다는 게 신기했다. a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나오려면 그 전제는 a가 확정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왜 나는 항상 확정된 a를 가지고 담론을 하려고 했을까. 그러니까 담론이 아닌 논쟁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건 정말 중요한 가치관이다.

1부: 오염된 광장
오염된 광장의 현실과 그 원인이 적나라해서 앞으로가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특히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가 말을 하는 목적을 생각하는 습관을 지녀야겠다. 세상이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이라 굴러가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2부: 진실을 말하되 벌하려고 말하지 말라
오염된 광장을 정화하기 위해 중요한 건 '경청하는 자세'라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상대가 아무리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일단 경청한 뒤 그다음 대화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와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일단 경청한 뒤 조그만 공통점에서부터 대화를 다시 시작해 공통분모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대화를 해야 광장이 다시 정화될 수 있을 것 같다.

1부에서는 오염된 광장의 현실과 원인을 다루고 2부에서는 해결책을 다뤘는데, 사이다처럼 뻥 뚫리는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착잡한 1부보다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고 희망도 아주 쪼끔 보이는 듯했다.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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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파국 - 나는 환경책을 읽었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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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문제와 관련된 누군가의 주관적인 생각을 책 한 권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다. 인간의 생각이 주관적이긴 하지만 매체를 통해 가공되면 어느 정도 다듬어지기 마련인데, 그런데도 저자의 강력한 주관을 책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지구와 다른 생물에게 우리는 가해자이며 방관자다.


요컨대 저항도 못 하는 지금 북녘의 동포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김씨 왕조 체제'를 붕괴시키고 북의 붕괴를 재촉하기 위해 그들이 설사 굶어 죽더라도 쌀을 주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곧 손자들 세대를 살리는 길이라는 이야기였다. (p. 30)

 히로시마 원자폭탄 얘기를 들을 때는 몰랐는데, 북한 얘기가 나오니까 생각이 달라진다. 두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기부했을 때 지배층의 배를 불려준다는 사실은 동의한다. 그렇다고 아무 죄 없는 국민들이 굶어 죽는 건 너무 잔인하다. 생각할수록 어렵다. 생필품으로 기부를 하는 게 그나마 답일듯하다. 그마저도 팔아버린다면 노답이겠지만.



멀쩡하게 자족적으로 지구에 큰 해를 끼치지 않고 잘살고 있는 나라들을 '개발이 안 된 미개한 나라', '개발도상국', '선진국'으로 제멋대로 구분한 뒤에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개발된 선진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서구의 발전 신화가 어떤 치명적인 허구를 안고 있는지 이 작은 책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은 많지 않다.  (p. 48)

 개도국이란 단어가 갑자기 낯설다. 개발 대상의 기준은 무엇이고 어느 정도가 되면 그만 개발해도 되는 걸까. 아니 이미 시작한 개발을 멈출 수 있긴 할까. 부에서 빈으로 가기 어렵다는 말을 격하게 공감한다. <경제성장이 안된다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읽어보고 싶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개도국 입장에서 본다면 경제 성장을 이룬 대부분의 국가는 환경 측면에서 개발이 필요한 개도국일 것이다.



그레타는 1인 시위를 통해서 어른들이 미래세대인 청소년들의 허락도 없이 지구 자원(화석연료)을 앞당겨 사용하고, 여기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오래도록 살아갈 수 없도록 지구 기후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책임을 묻는 일부터 했다. (p. 54)

 그레타 툰베리 너무 멋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쉽지 않지만, 자신의 일상까지 바꿔가면서 옮기는 건 더더욱 어려운데 그걸 해냈다. 용기를 정말 본받고 싶고 그가 쓴 책이 궁금해서 꼭 읽어봐야겠다.



나는 그저 다른 생명체를 취해야만 존속이 가능한 생명의 생래적 속성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고기든 풀이든, 그것을 취할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인간일 뿐이다. (p. 95~96)

 육식도 혼란스럽고 채식마저도 혼란스럽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을 순 없어서 그냥 있는 대로 먹고살자고 포기했는데, 이렇게 생각해야겠다. 스스로 영양분을 못 만드는 종이기에 다른 생명체를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는 건 필연적이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출 수 있도록 해야겠다. 유기농 채소, 동물 복지 계란을 사는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야겠다.


사람들은 개구리가 사라지고 박쥐가 사라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학자들도 달려들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꿀을 제공하거나 작물의 가루받이를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p. 124)
 벌이 사라진다는 다큐멘터리는 본 적이 있는데 개구리, 박쥐가 사라진다는 건 이 책에서 처음 봤다. 인간은 이토록 이기적인 존재구나.


만약 문학이라는 세계를 몰랐더라면 내가 느끼고, 알고 있다고 믿는 세계가 얼마나 빈약하고 우스꽝스럽고 한심스러웠을까? (p. 155)
 문학을 통해 사고가 확장된다는 말 공감한다.


그는 온갖 편법으로 예산을 증액함으로써 그 돈의 용처가 화급한 부문들은 깡그리 외면했으며, 애당초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 서류조차 끝없이 조작했고, 공사와 설계가 같이 진행되는 기상천외의 어불성설을 감행하고 있으며, 자연을 대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양식이 담긴 모든 법률들을 헌 신발짝처럼 깡그리 묵살하고 위반했다. (p. 189)
 막장인 줄 알고는 있었는데 이 정도로 자기 멋대로인지는 몰랐다. 왜 그렇게 강을 꼭 개판 내야 했을까. 이 정도면 그 광기의 원인이 궁금해질 지경이다.


독일인들은 아마존의 인디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밑에서 발전된 무기로 무장한 그들이 선사시대의 동기에 자극받은 것처럼 동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욕망과 파국 226, 니얼 퍼거슨 <증오의 세기> 840쪽 인용)
 미친 거 아닌가?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아마존 원주민들이 나치 군부가 행한 패륜적 비교 대상에 왜 올라야 하는가? 니얼 퍼거슨(인용한 책의 작가)의 백인 우월주의가 역겹다.


이 책은 우르카리아 출신 기자 알렉시예비치가 1986년 체르노빌 사고 발생 이후 자그마치 10년에 걸쳐 1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생생한 증언집이다. (p. 229)
 이 책 꼭 읽어보고 싶다. 10년의 시간, 그 시계가 이미 우리나라에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초반이라 별 탈 없지만, 곧 저 책에 쓰인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일어난 것처럼. 재난은 국경을 피해가지 않는다.


이제는 '과학 만능의 시대'를 향해 질주하는 인간종의 맹렬한 노력들이 인간 스스로에게나 이 행성의 다른 생명공동체들에 얼마나 심대한 해악을 끼쳤는가. (p. 256)
 문제 해결할 때,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에 익숙한 나는 한 번도 내가 과학만능주의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중세시대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사상이 지금은 낯선 것처럼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과학만능주의도 어느 세대에서는 낯설게 느껴질까?


감상
-1부: 기후 행동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기후 변화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비교적 천천히 진행되는 편이다. 지구 온도가 올라가 빙하가 녹는 모습, 해수면이 상승하는 것을 주변에서 볼 일이 거의 없고 늘어난 자연재해는 기후 변화가 원인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몇십 년 전부터 계속 얘기되어오던 것들이라 심각한 건지 잘 와닿지도 않는다. 이게 문제다. 심각한 문제가 안 심각하게 보이는 게 문젠데,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2부: 사라지는 것들의 끝없는 목록
 수많은 것들이 사라지는데, 대부분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이익과 직결되는 벌에만 관심 있다는 부분이 제일 충격이었다. 인간이 동물을 막 대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리된 글로 읽으니 더 불편했다. 나는 이 책을 덮고 며칠 뒤 또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겠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3부: 조종은 언제 울려야 하는가
 결국 피해는 인간이 입는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시간의 차이 날 확률은 있겠지만 누구나 다칠 수 있고 언제나 다칠 수 있다. 이런 경각심 없는 상태가 지속한다면 머지않아 인류는 조종을 울릴 것이다.

-5부: 꿈꾸는 것 자체가 여전히 희망이다
 그 어느 장보다 가혹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래도 인간들의 이야기라 더 와닿고 공감됐다. 이 장의 소제목이 왜 '꿈꾸는 것 자체가 여전히 희망이다'일까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는데, 작가는 '이게 현실이야. 그래도 꿈꿀래? 근데 꿈꾸면 뭔가 조금은 달라질걸'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고기 먹는 횟수 줄이기다. 환경 관련 책을 읽으며 소고기는 되도록 먹지 않고 고기 먹는 횟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이제 일주일에 한 번만 고기를 먹도록 해야겠다.
 환경문제가 피부로 와닿게 직관적으로 보이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않아서 슬프다. 녹는 빙하는 눈에 안 보이고 늘어나는 자연재해는 다른 원인을 핑계로 환경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일 건데 더 많은 사람이 현실을 알고 조금씩 바뀌면 파국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고나서 읽고 싶은 책이 참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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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조선 갈등사 - 왕들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들춰 보다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시리즈
신정훈 지음, 김선우 감수 / 북스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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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져있던 조선 역사 지식이 연결되는 시간이었고 인물이 연결되면서 등장하니까 한 편의 드라마 보듯 책이 매끄럽게 읽혀서 좋았다.


-계기

 야사가 재밌어서 좋아하는데, 갈등 이야기는 사실이어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어떤 갈등들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독서iNG

#공민왕

 남자 기생들이랑 놀다가 칼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한심하다고만 생각했지 왜 칼을 맞았는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역시 이유가 있었구나.


#태종

 방원이 진짜 권력에 미쳤구나... 아내이기 전에 자기랑 같이 고생한 조력자 아닌가? 은혜도 모르는 짐승 새끼구나.


#양녕대군

 세자 짤리고 싶어서 반항한 거 아닌가? 그 짓거리를 해놓고 짤려서 슬퍼하는 건 무슨 심보야... 역시 세상은 또라이가 너무나 많다.


#민씨가문

 지배층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비리를 저질렀는데, 그게 나한테도 일부 도움이 된다. 부산에 생긴 버스전용차로처럼. 그럼 이걸 나는 좋아해야 될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고종

 먼 과거도 아니고 자기 인생에서 몇 번이나 봤으면서 또 등신같이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니...


#이완용

 완용이 정말 워커홀릭이구나. 이 책에 나온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듯하다.


-감상

 갈등 위주로 역사를 서술하니까 재밌고 술술 읽힌다. 또한 교과서로 배웠을 때는 뚝뚝 끊겨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니까 더 이해가 잘됐다.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됐고, 마지막 민씨가문의 횡포와 을사오적의 만행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봐도 화가 난다. 권력에 미쳐 나라를 팔아먹은 천하의 썩을 매국 세력들이다.

 권력을 얻기 위한 수많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지배층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민중들이 일으키는 반란이 여러 번 등장했는데,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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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 - 애매하게 가난한 밀레니얼 세대의 '돈'립생활 이야기
신민주 지음 / 디귿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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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방에 대한 얘기가 아닌 기본소득에 대한 얘기다. 방은 기본소득이 실행될 때, 달라진 사회 모습이 나타날 하나의 공간에 불과하다. 얼마나 많은 게 달라질지 가늠도 안 되는데, '돈을 받는 일만 소중하다'는 인식은 특히 사회에 꼭 자리 잡았으면 한다. 돈을 받지 않거나 돈이 안 되는 일이라고 무시당하는 일이 너무 많은 지금 사회니까.


계기

 '보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을 실감한 적이 있다. 고시원에 4개월 정도 살아야 했던 적이 있는데, 방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방이 킹사이즈 침대 정도의 크기였나? 그것보다 더 작았나 그랬던 것 같다. 키가 작은데, 침대에 올라서면 천장에 머리가 거의 닿을 듯했다. 4개월 정도만 살면 되는 거라 이 일이 끝난 이후에 절대로 고시원 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점점 살수록 이 정도면 살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본가에 가서 방에 누웠는데 방 크기며 높이가 고시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고 높았다. 이때, 사람이 보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내 시야가 참 좁아졌구나 싶어 충격받았다. 주거 공간은 최소로 보장 받아야 하는 권리고 '의식주'에 왜 주가 들어가는지 알 수 있었다. 기본소득이 실행되면 국민들이 최소한의 주거 공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그것보다 기본소득은 뭔지 궁금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


집 살 돈 없는 사람들만 남들보다 친절해야 하고, 복잡한 절차들을 지켜야 하며, 집주인의 비위를 맞춰서 온갖 무리한 일을 참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돈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기에 더 많이 친절해야 했다. (p. 37)

 돈이 없다는 게 막 대해도 된다는 뜻이 아닌데... 돈 앞에서 사람 수가 적어지는 현실이 참 씁쓸하고 싫다. 돈이 없으면 기본적인 인권도 포기해야 하는 게 지금 현실 같다.


10년 전쯤부터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계급인 이들을 프레카리아트라 불렀다. 그리고 10년 후인 이제는 불안정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지고 너무도 명확해져서 이제는 그 표현을 잘 쓰지 않게 됐다. (p. 64)

 불안정한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는 게 놀랍다. 저자의 말처럼 지금은 그런 사람이 빗자루로 쓸어도 넘칠 만큼 차고 넘치니까. 단어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성, 소멸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씁쓸한 적이 없었다.


웃음을 만 원 정도의 돈으로 팔고 있다 보면, 나라는 인간의 가치도 만 원 정도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p. 71)

 일자리에서 내가 나답지 못하다는 말이 슬프다. 커피를 만들려고 간 건데 웃음도 같이 판다. 짜증 나도 웃고 화가 나도 얼버무리며 고객을 달래야 한다. 나는 최저시급과 내 자아를 바꾼 걸까.

특히 20대 여성 자살률 증가율이 세대 효과만을 분석했을 때, 전쟁에 징집되거나 학살을 경험한 타국의 젊은이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p. 88)
 20대 여성 자살률 증가율이 높아진 지 몰랐다. 재난은 모두를 치고 지나간다. 불공평하게.
 
우리에게 익숙한 "누가 자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기본소득은 언제나 "모두가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p. 101)
 어디까지를 모두로 인정해야 할까. 세금을 내는 사람 기준이라고 하면 무직자나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제외된다. 이 땅에 사는 모두라고 하기에는 이 땅에 산다는 걸 판별할 기준이 없어 터무니없다.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이건 안될까?

나라살림연구소에서 발행한 보고서를 보고 서울시의 한 해 예산안에서 쓰지 못하고 남는 돈이 매년 3조 원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 우리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3조면 모든 서울 시민에게 30만 원씩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p. 156)
 애먼 보도블록 좀 그만 부셔라.

그러나 역설적으로 기본소득은 지금까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던 여러 가지 일들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임금노동 외에 돈을 받을 수 있는 창구가 생기게 된다면 돈을 받는 일만이 소중하다는 믿음을 그만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p. 163)
 돈이 노동의 대가기 때문에, 돈이 안 되는 일은 노동이 아닌 것 즉, 노는 일이 되어버리는구나... 대표 적으로 육아는 정서적, 육체적으로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노동인데, 그 누구도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돈이 안 되니까.

어느 날 갑자기 지급된 기본소득을 모두 읽어도,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돼도, 모아놓은 돈이 없어도 다음 시기에 다시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삶은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즉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죠. (p. 180)
 기본소득은 실패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말이 참 따뜻하다. 실패할 자격조차 없는 지금 너무 숨 막힌다.


감상
 기본소득과 거주지를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주거지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상상 이상이었다. 기본소득이 그 답이 될지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기만의 공간이 필수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아픈 게 죄가 되고 더딘 회복이 민폐가 되는 이 사회. 수많은 탈락자를 만들어낸 이 사회의 탈락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질병은 그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다. 다만 시기가 조금 다를 뿐. 그러니 부디 아픔이 죄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픔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재난지원금이 왜 모두에게 지급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인터넷에서 재난지원금을 선별적으로 지급하면 사용하는 것 자체가 가난을 증명하는 꼴이라는 글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복지제도를 위해 인증은 불가피하지만, 그 과정이 잔인하다. 이런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있는 건 찬성인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앞이 막막하다. 이 막막한 여정의 첫걸음을 시작한 작가가 대단하다.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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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편의 이야기, 일곱 번의 안부
한사람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1월
평점 :
절판


1. 유기동물들에게 묻는 안부 

 -안락사회-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왜 데려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반려동물을 자신의 액세서리 그 이상 그 이하 취급도 안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끄러워지면 버리고, 늙으면 버리고, 아프면 버린다.

 이 모든 과정을 부추기는 데는 펫샵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새끼일수록 비싼 값을 받고 유행에 따라 품종을 다르게 판매한다. 그 개는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당했고 자유를 끊임없이 갈구했지만 결국 죽었다. 독일에서는 반려동물을 입양할 때 절차가 까다롭고 펫샵이 아닌 유기견 보호센터를 통해서만 입양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키우는 동물을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로 인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 혼자가 편한 너에게 묻는 안부

 -코쿤룸-

 어떤 한 사람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지친 나머지 모든 관계의 문을 닫아버렸다. 혼자 있는 게 편한 주인공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쓰인 여러 장치들을 봤을 때, 나도 안도감을 느꼈다. 이렇게 계속 살고 싶다. 이소정 씨의 인생에 주 2회 사무 실근무와 지금 나의 인간관계를 추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인생일듯하다. 혼자이고 싶은 나에게 부러운 인생이었다.



3. 불안정한 세상을 살아가는 너에게 묻는 안부 

-집구석 환경 조사서-

 숨이 턱턱 막혔다. 인생의 묘미는 불확실이라지만 그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불확실일 때 얘기다. 손바닥 뒤집히듯 휙휙 바뀌는 불확실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뭘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건지 생각이 많아지는 소설이었다.

 남들이 다 그러고 사니까…. 라는 말보다 폭력적인 말은 없을 것이다. 모든 꿈과 희망, 미래를 저 말 한마디로 짓밟을 수 있다. 남들 다 얌전히 사는데 너도 좀 그래라.



4. 한 방을 노리는 너에게 묻는 안부 

-아름다운 나의 도시-

 한심 한심 한심 그 자체다. 겉멋 들어서 분수에도 안 맞는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주인공은 명품을 위해 빚과 카드 돌려막기 궁극에는 고객의 계약금까지 손을 댄다. 그는 마지막 계약 건이 그를 구해줄 동아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나중에 교도소에 사기죄로 갇힐 초석을 지금 다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만만한 사람들 골라서 등쳐먹을 생각하지 말고 본인 능력에 맞게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살길 바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도는 다르지만 나도 인풋 대비 큰 아웃풋을 바란다. (물론 저렇게 터무니없이 도박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진 않는다;) 지금 이런 사상이 심해지면 나도 저런 인생을 살게 될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아닐 것 같다. 저건 아니다.



5. 가정의 기억이 쓰라린 너에게 묻는 안부 

-기억의 제단-

 아픈 기억을 도려내고자 한 사람을 현재를 놓아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미친 듯이 현재에 몰두하려고 한다. 가정에서 받은 폭력은 누구에게 보상을 받을 수도 없다. 그냥 현재의 내가 오롯이 다 감당해야 할 뿐이다. 받을 수 있는 거라곤 가해자의 사과인데 그마저도 안 받고 싶다. 그냥 기억에서 그 부분만 싹둑 잘라버리고 싶다. 기억의 제단이라는 제목이 참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6. 공허한 너에게 묻는 안부 

-조용한 시장-

 누군가는 평생을 일한 직장에서 잘려서 허무하고, 누군가는 입사조차 못 해 씁쓸한 현실. 일은 도대체 누가 하는 걸까. 쫓겨난 사람 수만 명,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람 수만 명인데 극소수만 일을 한다. 자아실현의 매개체가 주로 일이었는데, 다른 활동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 같다. 사회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는데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하다. 미래의 우리는 무엇을 양분 삼아 자아실현을 이룰까.



7. 엄마와 인간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너에게 묻는 안부 

-클라타임네스트라-

엄마란 단어는 참 잔인할 정도로 많은 것을 빼앗는다. 주인공은 엄마에게 모성애를 확인받고자 했고 결국 확인받았지만, 그 후 남은 건 비참함 뿐이었다. 엄마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그냥 자기 이름 세 글자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느끼고 싶은 감정을 느끼며 본인이 원하는 인생을 지금부터라도 살았으면 한다.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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