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살고 있지만 - 스물다섯, 저마다의 이야기 그리고 인터뷰
황연웅 지음 / SISO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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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계기

 가끔 너무 힘들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다들 이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걸까? 다들 힘들다고 하는데, 지금 나는 정말 너무 힘든데, 이 고통을 아무 내색 없이 참아내는 걸까?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독서iNG

응, 나는 여러 일을 하면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라는 질문을 던졌었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내가 이걸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는 순간, 그 순간이 '몰입' 아닐까?

 되게 멋있다.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는 순간.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일을 시작할 때, 일하는 목표를 세우고 시작한다. 책을 읽을 때도 이 책을 읽는 목표를 세우고 읽는다. 중간에 다른 길로 새는 걸 방지하고 싶고, 혹여 슬럼프가 왔을 때 목표를 보며 빨리 극복하기 위함이다. 아직 내가 '몰입'할 대상을 찾지 못했단 증거겠지. 

 나도 몰입할 대상을 찾고 싶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지만 나는 이미 사람들과의 관계가 벅찬 상태야. 이렇게 지내면서 점점 비관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외톨이가 된 것 같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걸 아는데, 관계가 이미 벅차다. 딱히 많은 사람과 맺어진 것도 아닌데 그조차도 버겁다. 관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일까. 

 본격적인 인간관계가 시작될 텐데 '적당한' 관계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불안을 내 삶이라고 생각했고, H는 불안을 불안으로만 바라볼 줄 알았다.

 행복하면 그냥 그 순간 행복하다. 그 행복을 내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불안, 우울, 무기력은 그 감정이 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질까.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딱 끝낼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난 선택을 잘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직접 선택하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불안한 게 무슨 상관이야?

 난 잘된 선택을 직접 하고 싶다. 그래서 나를 흔드는 수많은 불안이 신경 쓰인다.



후회보다 반성이 더 유리하다는 걸 알았거든. 덕분에 불안해도 직접 선택하는 삶을 유지하고 있어. 앞으로도 유지하고 싶고.

 내 문제를 찾았다. 후회만 한다. 후회하면 거기서 앞으로 행동 방향을 얻어 반성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으니 계속 같은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  

 "불안해도 직접 선택하는 삶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인생" 어떤 인생일까. 불안을 즐긴다는 게 뭔지 나도 경험해 보고 싶다.



예전에는 불합리한 것에 화를 내고, 내 목소리를 잃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했어. 근데 화를 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고, 내 목소리를 내면 달라지는 건 환경이 아니라 날 보는 시선이란 걸 느꼈어. 의미 없다고 느껴지자 귀찮아지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켜. 그렇다고 분노가 오래가는 건 아니야. 말을 해도, 하지 않아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참는 게 아니라 잊어버리는 거지.

 완전 나다. 예전에는 내 목소리를 내는 일이 나에게 중요했다. 그런데 목소리를 낼수록 내가 나를 찌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황은 똑같은데, 나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나도 침묵을 택하고 최대한 그것을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연습을 했다. 

 근데 더 단단한 내가 되었을 때, 불합리에 다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너무 지친 상태다.



형태도 모르는 성공을 막연하게 기다리며 살았다. 나는 크게 될 사람이니 성공이 다가올 거라고 믿으며 덩그러니 제자리에 머물렀다.

 나도 그랬다.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성공을 구체화하지 않았다. 구체화하는 순간 해야 할 일이 생기고 그럼 움직여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건 여유로운 성공이었으니까. 

 치열하게 노력할 자신이 없는 자의 구차한 변명이다.



그들이 용서를 구하는 게 정말 나를 위한 사과가 맞는 걸까? 내 상처가 계속 남아 있는 한, 난 굳이 용서해야 할 가치를 못 느끼겠어.

 용서는 받는 사람 마음이다. 받는 사람이 원치 않는 사과를 던지며 용서를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내 상처가 남는 한, 용서할 가치가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계속 기억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머릿속에서 그 사람의 존재를 지워버리겠단 뜻이지. 뭐 가끔 불쑥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감상

 저마다 다채로운 스물다섯 명의 스물다섯 살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여러 사람의 모습에서 내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이 특히 신기하고 재밌었다. 버티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몰입으로 그 답을 찾은 사람도 어쨌든 그들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다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다들 아무런데 아무렇지 않은 척 산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에는 사회가 냉정하다. 사회를 살아갈수록 내가 내뱉는 말은 나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거나 때로는 약점이 되어 돌아온다. 이런 상황을 계속 겪다 보면 침묵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스물다섯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지금 쓴 코멘트와 비교하며 그때의 나는 뭐가 달라졌을지 기대된다. 원하는 게 있다면,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은 나였으면 좋겠다. 해야 할 일을 이유 없이도 기꺼이 즐겁게 하는 나이길 바란다.

 스물다섯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잘 견뎠다고, 기특하다고 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장을 덮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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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일기
문기현 지음 / 작가의서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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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일기 쓰는 걸 싫어한다.

 예전에 너무 힘들었을 때, 일기를 쓰면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일기라고 할 것도 없이 A4용지에 날짜와 오늘 ~해서 ~감정이었다. 를 적은게 전부였다. 5일째 되는 날, A4 용지에 그날 느꼈던 감정을 줄줄 써 내려 가면서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낮에 느꼈던 감정이 글로 써 내려가니까 고스란히 되살아나서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울었다. 5일 동안 쓴 내용을 쭉 봤는데 우울하다, 울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죽고 싶다는 것과 같은 말로 도배되어있는 A4 1쪽이 내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아 너무 서러웠다. 그 뒤로 나는 내가 당일 느낀 감정을 절대 기록하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는 감정 '일기'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을 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나는 그 A4용지를 책장의 책 사이에 끼워두고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버리긴 찝찝하고, 그때의 감정을 마주할 용기는 없어서였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진 더더욱 않다.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책을 출간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독서iNG

조금만 더 열심히, 아니, 정말 열심히 살았더라면 지금의 현실에서 느끼는 모든 것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얼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해요? 그래요. 아파하고 울고 앉아 있는 영혼에게 말을 걸어 봤어요.

 이래서 감정을 기록하는 게 싫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반추하고 또 반추한다.

 저 날 작가는 아마 영혼에게 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친 영혼은 질문에 대답할 아니 질문을 들을 힘조차 없었을 테니.



잠시, 나를 죽여가고 있을 뿐이다.

아주 잠깐만 나를 옥죄며 갈 뿐이다.

 매번 내 목은 내가 조른다. 그렇게 내가 내 숨통을 조이는데, 그 시간이 제법 흘렀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할지, 아니 언제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에, 당신도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아프고 쓰러질 듯한, 힘든 시간이 찾아온다면 다른 사람을 찾지 말고 가장 먼저 가족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당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봐 왔고, 당신의 온전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글쎄요.

 누군가에게 집은 안식처가 아닌 상처가 덕지덕지 붙은 공간이다.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봤고, 내 온전한(사실 나는 온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서 더 피하고 싶은 게 가족이다.



우리는

시간을 살아가는 걸까.


무뎌진 나를 버텨가는 걸까.

우리는 무엇일까.

 그냥. 그냥 사는 존재. 

 삶에 이유를 찾을수록 불행해진다.

 눈앞에 놓인 현실에 집중하는 수밖에.



따뜻한,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며 아프지 않았겠습니다.

 내 감정은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다. 주변에서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결국, 마지막 해결은 나 자신의 몫이다.

 저런 생각이면 따뜻한 사람 백 명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춥고 고독해서 아플 것이다.



조금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수한 감정적인 변화를 겪고 그 상황을 이해하며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을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무수한 감정 변화를 겪었고, 그 상황도 나름대로 이해하려 했고, 아프기는 누구 못지않게 아팠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그대로 인 것처럼 느껴진다.



울어야 하는데 꼭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나도 그랬다. 너무 많이 자주 울다가, 끝에는 항상 나에게 왜 우는지 물었다.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음이 서러웠고 이유 없는 눈물이 짜증 나 더 울었다.

 그러다 결국 이유 없음이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격한 감정을 수없이 겪다 보면 냉정해진다는 말, 아니, 오히려 차분해진다는 말, 나는 지금 그러한 감정들 사이를 걸어 다니고 있다.

 그렇다. 나도 격한 감정을 수없이 겪고 타인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 모양으로 사는 게 아닌데, 저 사람인들 저렇게 살고 싶어서 저 모양으로 살까. 그냥 살아온 인생이 반영된 결과물이 저거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분노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다 떠나서 감정이 소진된 상태라 타인에게 나눠줄 감정이 없다.



자신에 대한 존중, 그만큼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였기에 온전한 슬픔도, 잦은 고독도, 이유 모를 상처도 용기내어 남길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작가가 이 책을 낼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작가는 자신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세상에 일기장을 공개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의 내가 이해되지 않고 존중이 안 된다. 당연히 그 시절의 감정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A4 한 쪽짜리도 공개하기 싫었나 보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감상

 슬픔, 고독, 우울, 방황하는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해지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과거에 내가 느꼈던 감정이 정확히 문장으로 표현되어있음을 보고 한층 더 우울해졌다. 역시 나는 일기랑은 안 맞는 사람인가보다.

 책을 읽는 순간마다 감정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건 평생 숙제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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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 콘서트
윤종길 지음 / 디지털애그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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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는 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다양한 책과 영상을 접하고 생활습관을 바꾸려고 노력 중인데, 여러 사람이 바라보는 환경에 대한 시각과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독서iNG

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똑똑한 종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찰스 다윈-

 우리는 단지 적응을 잘했을 뿐이다. 강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다.


지구인 인터뷰


이처럼 속도에 민감한 '속도 중심'의 한국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엘빈 토플러 "미래학자의 깊은 통찰력" 중 일부'

 자원이라곤 사람밖에 없다. 내가 자원이 되려면 남들보다 뛰어나야 하는데 그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 중 제일 빠르고 확실한 게 속도다. 그렇게 사회가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리게 되었다. 

 근데 지금 병이 난 것 같다. 다들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의식주를 포함한 많은 부분에서 과잉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 수 있는데 우리는 너무나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철수 "밥은 하늘이고 생명입니다." 중 일부'

 나는 풍요롭고 넘치게 사는 게 좋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사는 인생이 자연과 다른 생명의 존재에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사실 내 존재에는 큰 위협이 없어서 심각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데, 여러 자료와 현상이 심각성을 증명한다.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한 시기다.


디지털 시대에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인터넷상의 익명성은 인간의 폭력 본능을 부추깁니다. 

'재런 레이니어 "'집단지성' 절대 진실의 오류" 중 일부'

 인간의 폭력 본능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추악한 밑바닥이다. 이런 인간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게 가능할까? 건강한 디지털 시대를 위한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국민이 먹을 식량의 75%를 수입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지금의 풍요와 행복은 애써서 가꾸고 대비하지 않으면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박현출 "풍성한 식탁은 과연 지속 가능할까요?" 중 일부'

 내 식탁의 풍요가 해외에 저렇게나 많이 의존하고 있을지 몰랐다. 우리나라도 국토의 특성을 살리고 스마트팜을 잘 접목해 식량 의존도가 낮아졌으면 좋겠다.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해요. 그래야 풍족하진 않더라도 자존감과 함께 자신감이 유지될 수 있어요 

'쿤 타라 모타, 티팬냐 파통 "맹그로브 나무 한 그루 심기" 중 일부'

 솔직해서 너무 좋았다. 

 행복의 의미에 떠오르는 가족, 친구, 소소한 일상과 같은 전형적인 답이 아닌 솔직한 답변이라 와닿았다. 어느 정도의 돈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한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식사할 때 너무 많은 반찬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요. 소박하게 먹을 수 있는 만큼만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요?

 '죠프리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중 일부'

 익숙함이 참 무서운 게 식당에 가면 최소 반찬이 5종류 이상 나오고 그중 절반은 손도 안 댄다. 그런데도 그 버려지는 음식에 대해 오랜 시간 별 생각 없이 살았다.  

 몇 년 전부터는 안 먹는 밑반찬이 상에 오르면 다시 가져가시라고 말한다. 이런 문화가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남아공은 생태계 보전이 아주 철저한 나라입니다. (중략)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보다 희귀한 보호 시굴을 훼손할 경우 더 큰 벌을 받으니 남아공에 여행을 가게 된다면 꽃은 꺾지 마세요. 

'아넬레 "넬슨 만델라는 지금도 우리의 '파파'" 중 일부'

 사진 찍기에 희생되는 수많은 벚꽃, 유채꽃, 핑크 뮬리가 떠올랐다. 벚꽃 좀 꺾는다고 우리 사회에 당장 아무런 피해도 오지 않는다. 

 근데 이런 안일한 생각이 환경을 대하는 태도 전반에 퍼지는 것이 문제다.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


거대 기업들은 GMO 종자가 기아와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반대로 보입니다. 농부 스스로 자가채종을 못하게 하는 다국적기업의 씨앗 독점과 드넓은 밭에 단일종만 생산하는 방식은 인류에게는 재앙이 될지도 모릅니다.

'베벡 싱 "다국적 기업에 저항하는 인도 농부들" 중 일부'

 나도 GMO가 여러 문제를 해결할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단일종만 심었는데, 그 종에 취약한 질병이 발생한다면? 

 다시 식량 문제가 생기고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이 다른 GMO가 등장할 것이다. 또 질병이 생기면 식량문제->새로운 GMO 등장. 이런 문제가 쳇바퀴 돌듯 반복될 것이다. 

 한 끗만 더 생각하면 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그다음을 생각하는 게 참 어렵다.


한국의 미디어가 전하는 파키스탄에 대한 뉴스는 온통 테러와 전쟁, 폭격 등이 주를 이룹니다. (중략) 파키스탄은 좋은 뉴스도 많은 곳이랍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곳이고, 세계 6위의 인구를 가진 만큼 잠재력이 큰 나라로 봐주면 좋겠습니다.

'자히드 후세인 "서울은 정말 글로벌 도시일까요?" 중 일부'

 미디어는 참 중요하다.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테러, 아름다운 풍광 모두 파키스탄의 모습인데 주로 우리가 접하는 매체는 테러를 다룬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9시 뉴스에서 파키스탄의 아름다운 풍광을 소개하는 건 뉴스의 취지에 안 맞다. 내가 직접 유튜브나 다른 미디어를 통해 찾아보는 수밖에 없는데, 그런 수고를 굳이 하면서까지 알 이유가 없으니 편견과 선입견이 굳어진다.



지구인 에세이


물론 모든 사람이 지구를 살리겠다고 문명의 혜택을 저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내가 먼저 친환경적 생활 습관을 지녀보는 것은 어떨까?

 방바닥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다. 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창문을 열었더니 추워서 다시 창문을 닫았다. 그렇게 창문을 여닫다가 환경 책을 읽으면서 이게 무슨 모순된 행동인가 싶어 보일러를 껐다. 

 낮에는 보일러를 틀지 않거나 낮은 온도로 설정해둬야겠다.


미래 세대의 행복을 갉아먹지 않으려면 현재 세대가 지금보다 조금 더 불편하게 살기로 각오해야 한다.

 미래 세대를 위해, 말라가는 북극곰을 위해, 살 곳을 잃은 코알라를 위해. 

 이런 말은 더는 우리에게 환경보호를 위한 자극제로 작용하지 않는다. 막말로 내가 살지도 않을 땅에 사는 미래세대가,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북극곰과 코알라가 나랑 무슨 상관인가. 

 환경문제는 미래세대가 아닌 우리 세대에 즉, 나를 위해 해결해야 할 일임을 강조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를 요구해야 한다. 기후 변화로 농산물 가격이 오르고, 이산화탄소 배출이 급증해 미세먼지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고, 바다로 흘러간 플라스틱이 물고기 먹이가 되어 내 식탁에 오른다. 

 더 두고 볼 수 없는 지금 내가 직면한 문제이다.



감상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얘기하는 큰 틀은 비슷하다. 누구나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 결론은 자연은 소중하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지겹도록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 계속 말하는 게 아닐까? 좀 더 획기적인 환경 보호를 위한 방법이 절실하게 필요함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다양한 세상에서 살아온 다양한 관점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에 의문을 품게 해준 생각도, 확신을 가지게 해준 생각도 있었다. 또한 다양한 국가의 사례를 살펴보며 우리나라랑 비교할 수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요즘 환경과 관련된 여러 정보를 접하는데, 그동안 좁았던 내 시야가 확장되는 것 같아 속이 시원하다. 책이나 영상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내가 일상에서 지속해서 실천 가능한 작은 일을 찾으려고 한다. 이번 책은 '필요할 때만 난방 틀기'로 정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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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버블
지야 통 지음, 장호연 옮김 / 코쿤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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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바꿨다. 이 변화는 급속히 일어나 모두가 알아챘지만,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것들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고, 더 나아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얻고 싶었다.


독서 iNG

1장. 열린 유리병

유리병이 열렸다. 나는 뛰어나갈까?


미생물은 다세포 생물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산소를 생산한다. 우리는 산소가 주로 나무들이 호흡으로 내뿜는 물질이라고 배웠지만, 실제로 산소의 28%만이 우림 지대에서 나온다.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하찮은 미생물 따위가 우리가 숨 쉬는 산소를 생성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 인간과 미생물이 공생이란 관점을 보고 '버블'이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장 속에 있는 유익한 균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인간'인 내가 미생물 따위랑 공생한다는 관점을 무의식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나 보다.

 무의식중에 기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생이 맞았다. 그들에게 내가 기생하고 있었다. 진짜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구나.


오늘날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크기가 줄어드는 반면, 인간과 가축화된 동물들은 급속히 부풀어가고 있다.

 인간 때문에 지구 온도가 올라가 야생 동물들은 크기가 줄어드는데, 인간은 부푼다. 사람들의 비만율이 높아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야생 동물의 크기가 작아지는 건 몰랐다. 

 인간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지구 곳곳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규모맹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규모의 감각을 잃으면 느낄 수 없고, 느낄 수 없으면 적절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읽기 때문이다.

 점점 사회가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를 알겠다. 무한히 작거나 무한히 큰 것에 대해 탐구하면서 그것을 우리 입맛에 맞게 사용한다. 근데 사용만 한다. 크기가 너무 터무니없이 작거나 커서 그 이상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용한 것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모른 척하고 있으니 세상이 엉망이 될 수밖에.



 유리병에 가뒀던 벼룩은 뚜껑을 열어도 도망을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고 금세 뚜껑 밖으로 나가버린다. 

 반면 인간은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확신하면 웬만해서는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벼룩으로 친다면 평생 유리병에 갇혀 사는 것인데,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데다 보여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인류가 얼마나 지속할지 의문이다.


1장. 열린 유리병 코멘트: 유리병이 열리면 뛰어나가는 벼룩, 유리병이 열려도 쳐다보지도 않는 인간


2장. 마음의 폭탄

내 살가죽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 피는? 내 장기는?


재활용되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의 대략 3분의 2는 우리가 먹는 식물과 식물이 내쉬는 이산화탄소에서 나오며, 나머지 3분의 1은 수억 년 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던 석유와 가스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마시는 물이 단순히 지하수가 정제된 것으로 생각했지 그 지하수의 근원은 어디일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 샤프로 글을 쓰는데 이 탄소도 수억 년을 돌고 돌아 지금 여기 쓰이고 있다.

 '재활용'을 원소의 관점에서 보는 게 새로웠다.


우리의 두 번째 맹점은 우리가 주위의 우주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천문학자 미셸 탈러가 말했듯이 "사실 우리는 하늘 위에 올려다보이는 죽은 별들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게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다. 나는 죽은 별이지만, 죽은 별은 내가 아니다. 

 잠시 우주의 원자를 빌려 쓰고 죽을 때 내놓고 가야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화장하는 장례 방식이 문득 기이하게 느껴졌다. 잠시 와서 빌려놓고 그걸 엉망으로 되돌려준다. 인간은 참 이기적인 존재다.


2장. 마음의 폭탄 코멘트: 나는 죽은 별이지만, 죽은 별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다른 것들과 긴밀히 연결된 우주의 아주 미세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빌려 쓴 걸 고스란히 잘 반납하고 돌아가야한다.

3장. 눈을 맞추다


느끼고 생각하고 말할 정도의 의식을 갖춘 종은 유일할까?


지구상에 적어도 870만 종의 다른 동물들이 있고 저마다 자신만의 지각하는 방법이 있다.

 인간이 다른 종과 다르게 특별한 점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들 말한다.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악성 종양과 양성 종양을 구별해 내는 집비둘기도 사고한다. 그럼 인간과 집비둘기는 같은 사고를 하는가? 이렇게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여러 가지를 할 줄 알아서 다른 종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지각 방법을 가졌지만 인간은 그 개별 수준에 못 미치더라도 일정 수준을 가지고 있고 부족한 부분은 기계가 다른 것들의 힘을 통해 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동물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이를 열등하다고 믿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보는 게 눈앞의 사물을 인지하는 능력인데, 망막으로 할 수도, 초음파로 할 수도, 심지어는 혀를 튕겨서도 할 수 있다. 

 다름을 열등으로 인식하는 내 좁은 사고가 부끄러웠다. 다른 건 그냥 다른 거다.


우리의 맹점은 인간이 예외라는 믿음이다. 인간만이 느끼고 생각하고 말할 정도의 의식을 갖춘 유일한 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슬로보드치코프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프레리도그도 주위의 세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왜 나는 그동안 인간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찮은 동물 따위와 인간의 지능을 비교에 두기 자체를 꺼리는 교육의 폐해일까.

 책을 읽어나갈수록 의문이다. 그럼 인간은 도대체 뭔지. 더 나아가 나는 뭐 하는 인간인지. 혼란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한 가지 기본적인 것이 있다. 우리 종이 어떻게 생존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히 까막눈이다.

 나는 그냥 나인데. 그냥 생존하는 건데. 책을 읽으며 계속 사고에 충격이 가해졌다. 

 다음 장에서 작가가 어떤 충격을 던질지 기대된다. 나는 어떻게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일까?


3장. 눈을 맞추다 코멘트: 다른 종에게 눈을 맞춰야 한다. 인간을 절대 개체가 우월해서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동물들이 가진 능력의 평균치를 여러 개 가졌을 뿐이다. 그게 지구를 마음대로 제 것인 양 쓰고 다른 동물 위에 군림할 권리는 못 된다.


4장. 재앙을 향해 다가가다


야생의 닭 vs 양계장의 닭 vs 치킨너겟

뭐가 가장 자연스러운가요?


다양한 지리적 선호도를 충족시키고자 완벽한 '황금빛 색상'을 원하는 양계업자들은 모이에 붉은색 카로필과 노란색 카로필을 추가하기도 한다.

 기도 안 찬다. 그동안 노른자 색깔을 보면서 신선함을 판단했는데, 그게 전부 기만이었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꾸며진 건지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다.


세상에는 수백만 종의 다른 종자들이 있지만 12종의 식물과 5종의 동물이 전 세계 소비 식량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의존도가 생각보다 더 심하다. 동물만 해도 소, 닭, 돼지, 오리, 아마도 염소...? 이렇게만 먹는다.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왜 몰랐을까. 

 심지어 품종도 가장 소비가 잘되는 단일종인 경우가 많아 식량 위기가 마냥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생물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가 식량으로 키우는 식물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자연기금에 따르면 전 세계 생물 다양성 손실의 60%는 우리가 우리 식량을 먹이기 위해 사용하는 땅에서 기인한다.

 먹어서 없애고, 먹겠다고 없애고. 나도 같이 소비를 하는 입장인데, 육식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이 생각만 몇 년 째 인지 모르겠다. 여러 매체를 통해 육식을 폐해를 접했지만 당장 피부로 와닿는 불편함이 없고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육식을 줄이지 못한다.

 지구가 인간만의 것이 아닌 게 자명한데, 이렇게 주인인 양 쓰다 우리는 정말 멸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만들기 위해 자연스러운 것을 파괴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과 부자연스러운 것의 의미가 뒤바뀌는 날이 언젠가 올 것 같다. 닭고기(이마저도 부자연스럽지만)보다 치킨 너겟이 자연스럽고, 나무늘보가 사는 땅보다 우리가 먹을 소를 기르는 방목지가 더 자연스러운.

 자연스러운 것은 뭘까? 원래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원래'는 언제를 기준으로 하는 걸까. 빅뱅을 자연스러운 기준의 시작점으로 본다면 그보다 한참 뒤에 존재하게 된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존재인가? 아니면 지구에 녹아들어 살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존재인가? 만약 그렇다면 치킨 너겟이 닭고기보다 더 많이 소비되는 날이 온다면 치킨너겟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럴 것 같다. '닭'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마트에 파는 닭고기나 양계장의 닭들이 떠오른다. 이들도 원래는 야생을 뛰어다니던 짐승이었다. 닭고기에 육질을 위한 첨가제가 있어서 부자연스럽다고 하기엔 닭고기는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존재다.


우리는 가축 동물의 생명 활동을 유린하는 과정에서 그들로부터 자연스러운 교미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이제는 개체 수를 늘리는 방안도 손에 넣었다.

 내가 먹는 고기가 이런 식으로 오는지 몰랐다. 조그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건데. 그 한 끗이 참 어렵다.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자부터 통제하는 사실에 인간 욕망의 밑바닥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인간에게 이럴 권리가 없는데, 이들은 무엇을 명분으로 이런 행동을 행하는 걸까.


한때 남부럽지 않게 풍부한 어장을 끼고 살았던 서아프리카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먹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들의 물고기가 우리의 닭을 살찌우기 위해 해외로 수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항공기를 띄워 물고기를 잡는 건 알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많이 잡는다고만 생각했다. 잡으면 분명히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나올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조차 없었다. 닭 사료로 가다니...

 그 지역 사람들은 굶고, 물고기는 바다를 건너 닭과 다른 지역 인간들의 배를 채운다. 세상이 너무 이상하다. 자본주의에 미쳐 나머지 모든 것들이 다 등한시되는데, 그 정도가 심하다.

 재앙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영국의 저술가 조지 몽비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자손들이 혐오스럽게 여길 우리 시대의 광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기나 알, 젖을 얻으려고 동물을 대규모로 가둬둔 것이 틀림없이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동물 애호가라고 여기며 개와 고양이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수십억 마리의 다른 동물들에는 잔혹한 박탈을 가한다. 추악한 위선이다. 미래 세대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알고는 경악할 것이다."

 귀여우면 살아남고 맛있으면 살해되고. 추악한 위선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안 본 것이겠지. 음식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보는데 아보카도, 꿀, 생선과 같이 평소 내가 먹지 않는 음식 편은 잘만 봤다. 그러다 닭이 나왔는데, 그 부분을 볼 수가 없어서(보기 싫어서) 건너뛰었다.

 또한 식품 업계에서도 신선한 육류 뒤 비도덕적인 피비린내 나는 과정이 밝혀지는 것을 기를 쓰고 막고 있다. 그렇게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시대에 산다.


4장. 재앙을 향해 다가가다 코멘트: 재앙에 다 왔다. 다른 생물들이 죽어간다. 그런데 먹이사슬 너무 밑이라 아직 꼭대기에 영향이 미미하다. 그래서 아무도 관심이 없다. 우리는 재앙행 열차에 탑승했고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다.


5장. 검은색황금


지금 보고 있는 휴대폰. 충전할 때 그 전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레첸 베크가 '그리드'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가 휴대폰을 충전할 때 사용하는 전기는 "만든 지 1분도 채 안 된 새것이다. (중략) 수자원이 풍부한 나라에 사는 사람에게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에 가둬놓은 물이 흘러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바로 지금 사용하는 전기는 1초 전에는 물방울이었다."

 전기를 만들어뒀다 필요하면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실시간으로 만들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하나도 모른다. 살면서 한 번쯤 궁금했을 법도 한데 왜 여태 궁금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태양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비춘다.

 쨍쨍한 낮보다는 추운 겨울밤 전기가 필요한데, 태양이 없으니 춥고 에너지도 얻을 수 없는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물고기 대포'는 물고기를 댐 위로 옮기는 수송 수단으로 현재 연구 중이다. 압축 공기로 물건을 운반하는 공기 수송관과 비슷한 원리의 거대한 튜브다. 댐 아래에서 진공 튜브가 물고기를 빨아들여 시속 35㎞의 속도로 100피트 이상 끌고 올라가 댐 위쪽에 던져놓는다.

 네가 지금 사는 집에 내 별장을 좀 지으려고 해. 너희 집 허물게. 대신 근처에 천막을 설치해서 비나 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해줄게. 뭐 어차피 집이나 천막이나 몸만 보호할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인간으로 따지면 이런 상황 아닌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생활에 필수가 아닌 별장을 위해 누군가에게 생활의 필수인 집을 허물고 자기 마음대로 집을 천막과 동일시한다. 이토록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 형편없고 끔찍하다.


5장. 검은색 황금 코멘트: 검은색 황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에너지가 우리에게 오는 과정, 쓰는 과정, 쓰고 난 후의 부작용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이 큰 맹점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고 무자비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어떤 결과를 낼지 두렵다.


6장. 쓰레기와 보물


보물이 쓰레기가 될 수 있을까요?


 똥을 비료로 쓰는 것과 같은 우리가 내보내는 쓰레기에서 연료를 얻을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다. 쓰레기는 더 갈 곳이 없다. 

 튼튼하고 오래 쓰라고 만든 플라스틱, 토양에 적당한 거름을 주기 위해 개발된, 비료. 시작은 좋았다. 다만, 인간은 절제를 몰랐고 눈앞에 그 현상이 보이지 않는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지금 획기적인 '발명(혹은 발견)'으로 보이는 것 중에도 시간이 흘러 분명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 있을 것이다.


6장. 쓰레기와 보물 코멘트: 쓰레기와 보물은 한 끗 차이다.


7장. 시간의 지배자


아점, 점저. 이상하지 않으세요?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산업화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측정을 통해 일어났다."라고 예리하게 간파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을 바꾼 것은 증기기관이나 다축 방적기의 발명보다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것이다.

 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는 게 왜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해 뜰 때 일어나고 해 질 때 자는 게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였다면 지금과 같이 산업화한 사회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 건데 시계가 측정하는 보편적인 시간에 어긋나는 식사를 아점이나 점저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보인다.


화장실 문제는 사소해 보일 수 있겠지만, 시간이 본인의 것이 아닐 때 인간이 어떻게 품위를 잃게 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바쁜 날은 일부러 물을 마시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에 다녀올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너무 이상하다.

 그들은 나에게 시간만큼의 '노동'을 산 것인데, 왜 나는 그게 시간만큼의 '인격'을 산 것처럼 보일까.


우리가 시계를 발명하고 자체의 주기를 만들어 현실 거품 속에서 우리 행동을 통제하면서 자연의 시간 주기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시간의 인위적인 박동에 속박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식물과 동물 종들도 이런 불화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기온에 따라 결정되는 계절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3월에 피우던 꽃이 2월에 피고, 그렇게 그 꽃과 연결된 촘촘한 먹이 사슬이 천천히 망가지고 있다. 자연과 인간 모두 시간에 통제당하고 있다.

 여기서 이득을 보는 건 극소수의 돈을 가진 사람들인데, 지구가 이런 식으로 망가진다면 저들조차 피해 대상으로 전락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7장. 시간의 지배자 코멘트: 지배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확실히 피지배자이다.


8장. 공간의 침입자

침입자 = 약탈자들: 자연에는 인간, 아프리카 거주자들에게는 유럽


오늘날 부동산은 공간을 사고팔고 거래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땅이 '우리의 것'일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측정, 국경, 민족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명품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지구에 군림하기 위해 참 많은 가상의 것을 약속하고 있다. 가상의 것을 약속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지금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가 형편없어서 그런지 약속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든다.

 체제가 성립되면 필연적으로 이득을 보는 자와 손해를 보는 자가 나오고 대체로 이득을 보는 자가 이긴다. 대부분 체제는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인위적이며 자신을 가두는 체계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날 부유한 사람들은 비어있는 유령 맨션을 소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관에서 산다.

 '우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관점에서 돈을 가진 부유한 자들이다. 토지 소유자였던 영주들이 더 많은 토지 소유를 위해 만든 법을 지금 돈 있는 자들이 따르고 있는 것뿐이다. 제일 무서운 건 그 체제가 우리 삶에 스며들어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맹점이라는 말이 이제 뭔지 알겠다.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속박에 나는 묶여있을까.


8장. 공간의 침입자 코멘트: 내가 공간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공간이 나를 여기 묶어두고 있다.


9장. 인간 로봇


나는 인간일까요? 로봇일까요?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 위에, 우리 주위에, 우리 마음에, 우리 몸에 대체 왜 감시하는 눈들이 있을까? 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우리는 왜 이토록 면밀하게 감시를 받을까?

 그러니까. 상업성, 보안성 때문일까? 정말 그게 다인지 궁금하다. 왜 저렇게 개인에 대해 데이터를 모으고 그걸 분류화하려는지 납득이 잘 안 간다.


중국 무슬림 위구르족의 고향인 신장 자치구에서 1,88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2017년 '모두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도록 독려 되었다. 이 검사에서 주민들로부터 수집된 생체 데이터에는 DNA 샘플, 혈액 샘플, 지문, 홍채 스캔이 포함되었다. 이 모든 데이터는 감시 자료와 함께 처리되어 사람들을 '안전', '정상', '위험'으로 보류했다.

 답을 찾았네.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발악하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할지.

 돈이 그렇게 좋을까. 나도 돈이 좋긴 한데, 저렇게 추잡스럽게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벌고 싶진 않다. 사회가 미쳐 돌아간다.


9장. 인간 로봇 코멘트: 인간 로봇은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만들어낸 규율에 구겨 넣어진 인간이다. 심각한 건 자신이 규율속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10장. 제국은 옷을 입지 않는다.


돈을 주고 사는 공허함. 그 기저에 깔린 수많은 검은 손


가계에서 저금한 돈을 은행이 예금으로 받아서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대출 은행이 예금을 만들어낸다.

 아직도 왜 은행에 돈을 찍어낼 권리를 줬는지 모르겠다.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빚이 사회를 무너뜨리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이다.

 실제로 2009년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고 1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 체제가 견고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업은 법적 허구이며 양심, 지능, 인식을 갖지 않는다. 기업 변호사들이 생태계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일들, 가령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 같은 일은 기업도 하지 못한다.

 웃기네. 

 내가 사는 현실이 정말 허구 속에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규칙은 특정 집단에 의해 정해지고 그 집단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해진다. 어처구니가 없다. 

 근데 더 황당한 건 이런 현실이 너무 자연스러워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내 자신이다.


 소유 자체가 아니라 소유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가 가치(예를 들면 타인의 시선, 본인의 만족감)에 소비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알았다. 그럼 해결책을 소유를 소유 그 자체로 인정하고 부가적인 시선은 덧붙이지 않는 것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우리는 평생 공허함을 쫓다 내가 무엇을 쫓았는지조차 모르고 죽을 것이다.


10장. 제국은 옷을 입지 않는다 코멘트: 벌거벗은 제국은 돈다발 위에 세워진다.


11장. 사고혁명


거품에서 나올 시간!


'싸우거나 도주하는' 반응과 관련된, 편도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는 데는 인지적 비용이 드는 셈이다. 합의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갈등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은 사회적 동물에게 그것은 불안과 고통을 야기한다. 결국, 다수에 반기를 드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쉽게 반기를 들지 못하는데 이런 과학적 근거가 있을 줄 몰랐다.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시계의 시간, 주 5일 근무, 출퇴근 시간은 우주의 시간 질서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 냈고, 우리가 그것을 유지하며, 우리가 매달리는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누가 만들었을까. 시계의 시간, 주 5일 근무, 출퇴근 시간 모두 사용자, 노동자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 '효율' 특히 효율적인 노동에 맞춰진 것 같다. 

 다르게 말하면 저비용 고부가가치. 다른 무엇보다도 효율이 우선시되어 놓치는 게 너무 많아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대다수 제품이 자연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치킨 너겟은 닭처럼 보이지 않고, 석탄은 고대의 숲처럼 보이지 않으며, 비료는 공기와 닮은 점이 전혀 없다. 자연은 제품으로 탈바꿈되었다.

 우리가 자연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 못 하는데 기업과 단체들의 방해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연이 빠르게 제품으로 생산되고, 제품은 빠르게 쓰레기가 되고, 쓰레기는 빠르게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나는 세 과정 중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저 모든 과정의 가속화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가담 중이다.

 이쯤 되면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내 인생이 조금 편해지자고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경고를 무시하고 살았다. 더는 무시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11장. 사고혁명 코멘트: 작가는 보여줄 수 있는 만큼 보여줬다. 거품을 부수고 나올지 아니면 거품 안에서 현실을 바라보며 그대로 있을지는 독자인 나의 몫이다.


행동 방향

 육식을 줄이는 게 제일 시급한 문제 같다. 주 3회 정도 육식을 하지 않는 날을 만들어야겠다.

 페트병을 옷으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를 본 적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보고 내가 보탤 힘을 보태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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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흔들리지 않고
김도훤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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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사회 속의 나는 얼마만큼 있는 그대로 의 '나'일 수 있는 걸까?, 타인에게 나는 어디까지 흔들려도 되는 걸까? 와 같은 고민을 하였고 결국 흔들리는 모습 또한 내 모습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그런데 흔들리지 않는다는 제목에 호기심이 생겼고, 시인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 시집을 펼쳤다.


독서iNG

길을 건너는 동안 희망은 있다

다시 파란불이 켜지면

-'신호대기' 중 일부-

파란불이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염없이 파란불을 기다리거나 신호등을 고치거나. 

직접 신호등을 고치는 내가 되길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어제는

새벽안개 속으로 잠이 든 채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이유' 중 일부-

답을 못 찾았으면 못 찾은 것 그 자체를 정답으로 불 수 있지 않을까. 가끔은 새벽 안게 속에 잠재워두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이 불어야 삶의 이유를 찾는 갈대처럼, 나에게도 바람 같은 존재가 어느 날 불어오길

때때로 너의 역주행을 바라던 건 욕심이었다

-'일방통행' 중 일부-

욕심이다. 그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가치관에서 비롯되고, 그 가치관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체를 대변한다. 무슨 수로 타인의 인생 전체를 뒤집을 수 있겠는가


사랑이 끝나고 맞는 공허함

밤이면 멈춰진 시간 속을 되돌아가

마주할 두려움 때문이다

-'서성거리는 이유' 중 일부-

밤. 특히 새벽은 참 신기한 시간이다. 낮 동안 간신히 재워뒀던 감정이 썰물이 휩쓸고 간 듯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부분 쉽게 넘어가는 그 관문마다

나는 보통의 그들보다 많이 넘어졌고

그래서 다음 차례는 더 머뭇거렸다

거짓말처럼 그 순간마다 희망이 피어났다

-'넘어진 그곳에 꽃이 핀다' 중 일부-

글쎄. 다음 차례를 머뭇거릴 수 있었던 건, 꽃이 핀 그 자리를 볼 수 있었던 건 넘어졌던 내가 일어섰기 때문이다.

누구나 훌쩍 넘는 관문에서 크게 넘어진 나는 아직 못 일어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다음 차례가 두려워 안 일어난 것 일지도

가고자 하는 곳을 알지는 못했지만

문은 열렸고

숨 가쁜 우리는 서둘러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중 일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전제는 목적지를 아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버튼을 누를 이유도, 더 나아가 엘리베이터를 탈 이유가 없다. 또한, 문이 열렸다고 꼭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이 나를 집어삼킬 불구덩이 속인지 어떻게 알고 내리는가?


쉽게 결론 내어버린 관계는

씁쓸한 입맛을 남기고 사라진다

-'기준' 중 일부-

어쩔 수 없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 그 선택이 미흡해 보인다면 나는 그만큼 성장한 사람인 것이다.


감상

'당신의 일상이 당신의 것이길' 시작하는 부분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문구를 읽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가 주가 된 시집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에는 온통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처음 읽을 때는 나와 그리움의 대상을 동일시하는 건가 싶었지만, 시집을 덮은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살면서 마주한 모든 것을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그 당시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과거의 그리움이 흔들어도 다만 흔들리지 않길 바라는 소망이 시집 곳곳에서 묻어났다. 어쩔 수 없는 과거는 놓아줘야 내 정신건강에 이로움을 다시 한번 배워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과거의 그리움에 흔들려도 된다

다만 내 뿌리는 무사하길

사회 속에서 흔들려도 된다

다만 나 자신만은 무사하길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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