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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찰스 부코스키 지음, 공민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일시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작가들의 글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책.
다짜고짜 ㅋㅋㅋ 출판사에 참 고마워요.
세상에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읽을거리들을 남겼고
출판사가 발굴했고 독자가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연결해 줬으니 말입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다소 거창하게 시작하는 책리뷰 ㅋㅋㅋ
찰스 부코스키 라는 작가가 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하려다 보니.
책에 대한 흥미가 커질수록 다양한 책들을 뒤져보게 되고
그런 가운데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나온 찰스 부코스키의 글들이
언젠가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찰스 부코스키 라는 작가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더라구요.
인터넷서점이나 오프라인 대형서점에서도 찰스 부코스키의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언젠가는 찰스 부코스키의 글을 꼭 읽어봐야지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이번에 도서출판 잔에서 나온 신간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으로
제 생애 처음 찰스 부코스키의 글을 만나봅니다.
그런데 찰스 부코스키의 첫 책이 음탕한 늙은이의 이야기라니......
뭐 나쁘다는 건 아니구요..... 너무 첫 만남이 강렬했지 말입니다. ㅋ
본격적으로 찰스 부코스키의 산문집 속에 들어가기 전에
그에 대한 문단의 평가가 궁금했어요.
미국 주류 문단의 이단아에서 전 세계 독자들이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최고의 작가라니!
미국 주류 문단의 이단아라.....
주류 문단에 속하려면 아무래도 작가 고유의 문체, 글의 주제나 형식이 독창적인가를 볼 때
그렇다면 찰스 부코스키도 그럴만해 보이는데 이단아라고 말하는건
아마도 글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날 것이어서?^^;
그도 그럴것이 대학을 다니다가 2년만에 중퇴하고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니체, DH로렌스, 알베르 카뮈, 카프카 등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독학으로 작가훈련을 시작하다보니 다듬어지거나 정제된 글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이 현재로선 유일무이하게 접한 작품이긴 하지만
찰스 부코스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거침없고
너무 솔직한 것이 주류에 속할 수 없다면 없는 이유랄까.
작가라는 지성인이 풍겨야 하는 고상함이라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욕을 입에 달고 있고 싸움과 술, 창녀와 어울리는 것이 일상인 작가.
가끔 단편원고를 기고하는 것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작가.
그렇다고 글 쓰는 일에 대해서 소명처럼 여기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돈이 필요한 사람일 뿐이라서일까.
찰스 부코스키 작가를 모르고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이 산문집 만으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수밖에 없을 터라서
왜 주류 문단의 이단아로 평가받는지 이해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최고의 작가라는 평가를 얻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사람!
소위 작가로서의 품위를 지키고자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그저 자신의 삶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따름이지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작가.
때로는 미국의 삶의 방식을 조롱하듯 비판하는 작가여서일까......
소설가들이 자신의 작품 속 분신과도 같은 인물에게 입체적인 성격을 부여하여
독자들로부터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듯
찰스 부코스키가 저에게 첫인상부터 매력있고 입체적인 작가로 인연을 맺게 되었네요.
한번 만나보니 그의 다른 작품들이 무진장 궁금하다는.^^
물론 책 한권 만난 것으로 섣부르게 한 사람의 작가를 재단할 마음은 없지만
처음으로 만난 작품에서 받은 첫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이 상태가 왠지 영원할 것 같기도 하구요.^^
나중에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되고 이 편견을 깨뜨리는 경험을 준다해도 뭐 기꺼이~~
아주 흥미롭고 강렬했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가, 찰스 부코스키!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은 2층짜리 작은 월세방에서 창간한 지하신문 '오픈 시티' 에
찰스 부코스키가 14개월동안 연재한 칼럼을 추려서 엮은 산문집입니다.
원고를 받아준 신문사 대표는 작가의 지인인듯 싶었고
자신의 원고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던 점이
찰스 부코스키로 하여금 무엇이든 쓰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기도 했었구요.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날 것의 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닐까.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이라는 제목이 정해지고 나서부터 알아서 글이 술술 풀렸다고 하니....^^
작가는 자신을 그저 야한 이야기를 쓰는 늙은 남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제가 본 찰스 부코스키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삶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고
그것을 시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고 거기에 유머와 재치도 담아낼 수 있는 이런 글쓰기는
저로선 충분히 부러울 따름입니다.
이 책 속에서 섹스에 대한 내용과 작가의 사유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될 건 없으니까요.
사랑, 섹스..... 다 인간이 하는 행위이니까 부자연스러울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가도 사람이고 작가도 섹스는 하겠죠.^^;
섹스가 글의 저급한 소재라는 도식도 동의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해서 쓴 작가에 대한 평가도 낮게 평가한다는 것은 더더욱 동의할 수 없으니.
불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든지 공감합니다.
이런 글을 읽으려고 내가 이 책을 산 것은 아닌데.... 라는 후회를 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세상에는 보이지 않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찰스 부코스키처럼 인간의 자연스럽고도 끌리는 행위에 대해서
이다지도 솔직하게 (민망할 때도 있지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다 비슷한 작가들만, 다 비슷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세상은 재미 없잖아요.^^
그래서 예술이 있어 다행인 것이죠.
이와 같은 예술에 대한 찬양은 찰스 부코스키도 아마 동의할 겁니다. ㅎㅎㅎ
제목이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이고 내용에도 창녀와의 섹스,
처음 눈이 맞은 여자들과의 섹스는 허다하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내와 자매지간인 사람과도 잠자리를 가질 정도로
섹스에 대한 경험담이 관심 없는 이에게는 쓸데없이 세세하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몇 가지 칼럼들 속에는 혁명, 청년, 칼 마르크스에 대한 의견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언급,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꿰뚫어 보는 글들도 적지 않았어요.
좋아하는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의 내용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칼럼도 눈에 띄었구요.
사람에게는 평소의 모습과 다르거나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어떤 특별한 순간이 때때로 찾아오곤 하는데
그 순간을 포착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문을 해보는 찰스 부코스키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현실을 외면하려는 비겁한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을 단순히 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카치오를 읽어보라고,
<데카메론> 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하는 문장을 보면서
호기심이 발동하게 되더라구요. ㅋㅋ
이렇게 또 찰스 부코스키가 <데카메론> 을 읽게 하는구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이골이 난 작가는
사람은 항상 배신한다.
그러니 절대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라고도 말하고 있고
동성애를 싫어한다고 고상하게 말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그냥 다 같이 동성애자가 되고 편안해지면 어떨까 라고 웃지 못할 조언을 하기도 하는데
마지막 말이 묵직하게 들려옵니다.
자신이 아는 건 너무 많은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거라고.
세상의 시선에 갇혀살지 말고 그로 인해 두려워하지도 말고 자유롭게 살라며
자신의 모습을 산문집에 드러내 보여주는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찰스 부코스키와 이 말을 남긴 제가 참 좋아하는 작가가 보여준 작품 세계는 사뭇 다르지만
왜 묘하게 겹치는 것 같죠 저는?^^;
살아가면서 사소한 것이라고, 당연하고 마땅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인데
찰스 부코스키가 말은 안하고 눈빛으로 방향을 짚어주는 듯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문장들이 몇 군데 있었어요.
그런 문장들 몇 개만 남겨봅니다.
P. 53-54
그 직후 뉴욕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도시는 사람을 죽이려고 세워졌으며, 운 좋은 동네도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곳에 속한다.
뉴욕에 살고 싶으면 운이 따라 줘야 한다.
난 그런 운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P. 60
아무튼 내가 하려는 말은 사람들이 경마장을 찾는 이유는 그들이 고통에 빠졌기 때문이고,
너무 절망적이라 인생에서 현재의 위치에 직면하기보다는 더 큰 고통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잘난 인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머저리가 아니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앉아 개미들이 뭉치는 걸 꼼꼼하게 살핀다.
.....
우리는 낚이고 뺨을 맞고 바보처럼 잘렸다.
너무 멍청해서 우리 누군가는 결국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들은 논리적인 말로 무장하고 고문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전문가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기에 아주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그게 전부이기에 올바른 것일 수밖에 없는 거다.
P.73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을 것은 우리의 미치광이, 우리의 암살범이 우리의 현재 삶,
훌륭한 미국 전통 방식의 삶과 죽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우리 모두 겉보기엔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게 기적이다!
대신 꽤 암울하게 존재해 왔으니 우리는 있는 그대로 광기에 대해 솔직히 말해야 한다.
.........
그리고 지금 전투복을 입은 내 친구여, 너만의 글을 써라......
P. 91-92
글을 쓸 곳은 단 한군데뿐이다. 바로 타자기 앞에 혼자 있는 것이다.
길거리로 나가는 작가는 길거리를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공장, 사창가, 감옥, 술집, 공원 연설가까지 충분히 만났고 백 명의 백 가지 삶을 엿보았다.
......
타자기 앞에서 벗어날 때는 기관총을 챙겨라.
쥐들이 따라붙을거다.
카뮈가 석학들 앞에서 연설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글은 이미 죽었다.
카뮈는 연설가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작가로 시작했다.
그를 죽인 건 자동차 사고가 아니다.
......
많은 사람이 혁명이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난 그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죽는 꼴을 보기 싫다.
다수를 죽일 수 있지만 살아야 하는 소수의 훌륭한 인물만 축내는 꼴이 된다는 말이다.
결국은 정부가 사람들을 끝낼 것이다.
양의 옷을 입은 새로운 독재자가.
이념이란 총이 있어야 유지되는 것일 뿐이다.
P. 99
젊은이들이 마침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이가 점점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매번 감정에 휘들리고 그 휘둘림에 죽음을 당한다.
늙고 완고한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그들은 혁명이 매국의 방식으로 투표를 불러오리란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총알 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다.
단순히 더 현실적이고 더 인간적이 되어 쓰레기를 몰아내는 것으로 그들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영리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
앞에서 말했듯이 차가운 똥이나 따뜻한 똥이나 다 똥이다.
내가 암살에서 벗어난 유일한 비결은 내가 작은 똥이고
정치색이 없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기 때문이다.
난 인간의 정신 말고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P. 192
대중은 작가 혹은 작품에서 필요한 것을 취하고 남은 걸 버린다.
하지만 그들이 취하는 건 일반적으로 그들에게 가장 덜 필요한 거고,
그들이 버리는 게 오히려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난 대중이 알아차릴까 봐 걱정할 필요 없이 나의 성스러운 기회를 마음껏 누릴 수 있고
우리 위에 더 높은 창조주는 없으니 다들 같은 똥밭에 있는 것이다.
지금 난 똥밭에 있고 다른 이들도 각자의 똥밭에 있는데
내가 냄새를 더 잘 풍긴다고 생각한다.
포크너랑 셰익스피어 저는 좋아하는데 찰스 부코스키는 피하라네요....
조지 버나드쇼는 이 시대 가장 과대평가된 허상이라고.....
찰스 부코스키의 글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이 그런 것인지.....
자신의 생각을 일관성있게 견지하고 풀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들어와 흐름을 끊어서 다소 집중하기가 어렵기는 했어요.
그래서 저도 나름 필요한 것을 취한다고 필사 노트에 적으면서 취했는데
찰스 부코스키가 말한 것처럼 혹시나 가장 덜 필요한 걸 취한건가 슬쩍 뒤돌아보게 됩니다....^^;
제가 버린 것이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음탕한 늙은이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참 멋스럽게 잘 표현해낸 표지는 맘에 드는데
책의 모양이 변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금방 중고책이 된듯한 이런 느낌은 좀 별로였어요....ㅠㅠ
요즘은 책 제본형태도 독자를 끌어당기는데 참 중요한 요소인데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도서출판 잔의 스타일이 이런 거라면 뭐 받아들여야죠.....
동시에 출간된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도 궁금하긴 하거든요. ㅎㅎ
어쨌든.....호불호가 분명한 찰스 부코스키의 글과의 강렬했던 첫 만남, 인상깊게 남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