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 채식주의자 - 입맛과 신념 사이에서 써 내려간 비거니즘 지향기
정진아 지음 / 허밍버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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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채식주의 #비건 #비거니즘 #환경보호 #동물권

#허밍버드 #에세이추천 #불완전채식주의자 #정진아

얼마전에 읽은 책이, 아니 만화책이 있었다.

<나의 비거니즘 만화>.

비건이 직접 쓰고 그린 비거니즘 만화인데

다른 존재의 고통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닿아 도서관에서 빌려봤고

완독 후에는 책을 주문했었다.

인간과 종이 다를 뿐 그것이 동물을 당연히 차별해도 될 이유는 결코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동물권에 대한 생각이 비건, 비거니즘과 관련있는 신념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부끄럽게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더 비거니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이 책 저 책 찾아보다가

<불완전 채식주의자> 를 발견했고 운좋게 서평단으로 만나보았다.

제목부터 비건에 대한 장벽이 그리 높게 와닿지 않은 것도 한 몫 했을수도.^^

하지만..... 읽고 보니 완전 채식, 비건이 되는 길은 나로선 멀어 보였다....ㅠㅠ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저자처럼 욕구와 신념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비거니즘을 지향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일기 때문.

'처음부터 고기로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 는 저자의 한 줄 문장이 계속

뇌리에 맴돌며 죄책감과 왠지 모를 미안함은 여전하지만

비육식을 실천하는 걸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고기를 시도 때도 없이 먹는 건 아니지만

정말 먹고 싶을 때도 나의 욕구를 누르고 신념을 쫓는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맛있는 음식을 모르면 몰라도 한 번 맛을 봤다면

그 맛이 자꾸만 맴도는데 이 또한 사는 재미인 것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까?

고민이 더 깊어졌다.....ㅠㅠ

얼마전 비평의 의미에 대한 책에서 본 문장이 지금 떠오른다.

"가치를 전달함으로써 독자를 움직이게 하는 글"

정진아 작가의 <불완전 채식주의자> 가 지금 내게 그런 글을 심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정진아 작가도 완전 채식은 너무 어렵다며

입맛과 신념 사이에서 비거니즘을 지향하며 불완전하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천해 나가겠다고 했으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실천부터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게 된다.

실천의 정도는 각자 다 다르더라도

정육점에 포장되어진 붉은 고기덩어리를 보면 먹고 자고 싸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동물을 떠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걸로.

그리고 혹여 고기와 비고기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고기는 선택하지 않는 걸로.

너무나 사소한 것일지라도 시작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일이

단순히 채식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동물권과 환경보호, 빈곤 문제 등 이 세상과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에 서게 되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더라도, 천천히..... 이 과정이 쌓이면 분명한 변화도 볼 수 있으리라 믿으며.

"동물이 살기 좋은 사회에서는 사람 또한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모든 생명이 각자의 가치를 존중받는 세상을 꿈꾼다."

동물자유연대에서 반려동물과 길고양이 정책을 담당하고 현재 사회변화팀에서 일하는

정진아 작가의 이 소개 한 줄에서부터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피터 싱어의 책 제목이 떠오른다.

동물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물해방 운동에 전념했던

헨리 스피라의 삶을 피터 싱어의 시선과 통찰로 담아낸 평전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듯이,

그 이전에는 헨리 스피라 같은 운동가가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어서 지금까지 그 물줄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책을 통해 가치를 전달하는 사람들,

생각에 머물지 않고 실천을 통해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장 소극적일지라도 나처럼 같은 세상을 꿈꾸며 책을 통해

조금씩 실천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서 후대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가치를 전하고 그들도 이어갈 수 있도록

지금의 이 크고 작은 행동들은 모두 의미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생명을 해친 죄보다 재물을 망가뜨린 죄를

더 무겁게 여기고,

동물을 학대한 사람이라도

동물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게 동물의 생명이나 안전보다

소유자의 재산권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며,

그 재산권에는 물건으로서의 동물을

소유할 권리도 포함된다.

<불완전 채식주의자>

채식을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차별 없이 바라보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각하게 자본주의 체제로 매몰되어

돈이나 재산권이 지상 최대의 가치라고 믿는 사람들의 반인륜적인 행태를

뉴스에서 접하게 될 때면 이 문제의식은 왜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심어지지 않을까 답답함이 밀려온다.

모든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인식으로

나아감으로써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 방향이 지구인들에게도 이롭다.

인간은 이 지구에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이고

자연과 이 모든 만물은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움직이는 사람들로 인해서

교육에서는 학교에서 급식을 선택하고 또 의무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법제화하는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던졌던 저자의 질문이 개인적으로

<불완전 채식주의자> 에서 준 가장 큰 울림이었다.

만약에 자기가 지금 해결을 위한

어느 부분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문제의 한 부분이다.

<불완전 채식주의자>

 

저자가 경험한 다양한 사례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말로 대화할 수는 없어도

눈빛과 몸짓으로 소통하는 약한 생명을 돌보고자 먼저 손을 내민 사람들이

근거 없는 혐오에 맞서야 하는 현실을 대할 때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보란 듯이 더 미친 여자가 되어 주자는 저자의 말이 내게는

각자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는 일이 곧 자신의 삶을 지키는 것이고

더불어 동물의 소중한 생명과 안전까지도 지키는 일이라고 들려온다.

그러니까 흔들림없이 하자고!

 

2010년 말에 발생한 구제역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살처분되는 상황을

직접 목도하면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정진아 작가.

동물들도 삶의 기쁨을 자기 방식으로 느낄 줄 아는 존재라는 인식이

인간에게는 너무 부족했지만 그래도 점점

비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는 게 그나마 고무적이다.

윤리나 도덕 같은 민감한 주제를

대화에 올릴 자신이 없었다.

그냥 나 혼자 실천하면 되지 굳이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합리화했다.

나는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용기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불완전 채식주의자>

비거니즘이라는 신념의 방식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더라도

각자의 삶에 있어서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이니만큼

최소한 근거없이 조롱하거나 힐난하지는 말았으면!

 

동물권이나 환경보호, 빈곤 문제까지 얽혀 있는 비육식에 뜻이 있는 이들이라면

비거니즘 방식이 동물성 식품 일체 금지하는 "비건" 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다른 방식들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닭고기 같은 가금류는 허용하는 채식, 폴로 베지테리언.

모든 육류는 금지하고 해산물은 섭취가능한 페스코.

우유와 달걀만 먹는 채식, 락토오보.

"문제와 해결, 어디에 속할 것인가"

나 또한 고기를 계속 먹는 일이 문제의 한 부분에 속함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완전 채식은 못 해도,

비육식까지는 아니어도,

육식을 하는 횟수를 줄여가는 노력에서부터 차근차근.

급하게 하다 보면 그냥 포기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무해한 사람' 이고 싶다는 나의 바램이 사실은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생각이었는지

<불완전 채식주의자> 를 통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것을 포함해서

현대사회에서 누리는 지금의 풍요와 편리함은 전부

다른 생명을 착취해 얻어낸 산물임을 잊지 말자.

동물 학대, 기후 위기, 공장식 축산업의 실태 등등

전반적인 사회 문제에 관심을 놓지 않으며 나는 나대로 비거니즘을 지향하고자 한다.

나 또한 동물의 고통을 이미 착취하는 구조 안에서

문제의 한 부분안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불편한 감정도 감수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보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걸로.

저자의 내면도 가감없이 드러내며 솔직한 고백과 용기있는 실천에

나까지 자기고백의 글이 되어 부끄럽지만

이 에세이는 많은 이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결혼 대신 억압의 대상과의 연대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정진아 작가는

지금도 자신의 욕구보다 동물을 우선으로 두고 애쓰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진솔한 글이 술술 잘 읽힌다...... 필사해야 할 구절도 많아서 가끔씩 멈춰야 하긴 하지만.^^

<불완전 채식주의자> 에서 저자가 언급한 레퍼런스들을 빌려서

확장독서로 이어보려 한다.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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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 '아무 몸'으로 살아갈 권리
김소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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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잣대에 의해 이미 내면화 되어버린 '아름다운 몸'의 기준은

건강하지 못하게 한 곳으로만 향하고 있는데

그것이 개인의 개별성과 자율성을 침해하고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관점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한겨레출판 에세이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를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었다.

차별과 혐오가 극심한 이 시대에

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은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의 시야를 드러낸다.

자기 자신과도 친구가 되는 일이 너무나 어려워진 현 사회에 대해서

저항심과 분심에서 시작되었다 밝히고 있는 김소민 작가는

13년간 한겨레 기자로 일했고 국제구호 NGO '세이브더칠드런' 에서

1년 7개월간 일했으며 지금은 글쓰기 노동자로 반려견 몽덕이와 살고 있다.

또 한 명의 좋은 에세이스트를 만난 느낌!

하니포터 3기의 인연으로 만나게 된 운명 같은 책!

누구에게 추천해도 자신있는 책!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취향일테지만

한겨레출판이 내는 목소리에는 매번 한목소리를 내고 싶어진다.

그래서 하니포터 3기를 지원했고 기쁘게도 3기 타이틀을 얻게 되면서 만난 첫 책이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였다.

4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이 책을 고른 '나님' 아주 칭찬해.

탁월한 선택이었다! ㅎㅎㅎ

게다가 이번 책은 좋아하는 보라색과 레몬색의 조합이 꽤 감각적이기까지~

'아무 몸' 으로 살아갈 권리 라는 부제를 지닌 이 한겨레출판 에세이는

너무 자주 필사를 부르는 바람에 완독이 늦어지기도 했었다.

병렬 독서를 하다 보니 그렇기는 하지만

하니포터로서 신간 리뷰를 빨리 남겨야 하는 미션 수행을 생각하면

빵점인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자기변명을 해보자면 책리뷰를 남기는 행위는 내게 매 순간 진심이고

특히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에세이는

온전히 책리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렸던 듯도 싶다.

그만큼 이 책이 참 좋았다!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운 문장들은 이렇게 곳곳에 흔적을 남겨 두면서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소비했고 또 진지하게 수용했다.

취약함을 드러내도 되는 존재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취약한 데가 있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내가 마음깊이 사랑을 느꼈던 순간은

내 약함을 타인이 그대로 수용했다고 느꼈을 때였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김소민 작가의 에세이는

관리당하는 몸 / 추방당하는 몸 / 돌보는 몸 /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인기척

이라는 챕터로 구성되어 다양한 몸을 화두를 삼았다.

지금까지 발생했던 사회적 이슈들을 통해서 드러난

혐오와 차별의 문제들을 연민어린 시선을 견지하며

진중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접근했던 방식이 좋았다.

실제로 책 읽으면서 혼자 피식거렸던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여기 ㅋㅋㅋ

과자 부스러기가 배 위로 떨어질 가능성은

김민경이 운동하는 모습에 자극받았던 당시

누워서 과자를 먹었을 작가의 자세가 상상되었기 때문에~~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를 읽다 보면

현실적인 사회 구조적 모순들을 책 속에서 만나며 분노와 슬픔이 수시로 교차하곤 한다.

무겁고도 답답한 심경이었다가 김소민 작가의 삶에 스며든 이런 일상 유머를 접하게 되면

다시 긴장이 풀리면서 이완되는 느낌에 책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쯤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책 한권을 오래 끼고 읽게 된 것은

아마도 한 장 한 장 아껴두려는 마음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이라영 작가의 추천사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남의 약함을 차별하면 안된다면서

내 약함은 아무에게도 안 들키려고

오늘도 분투한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딱 지금 자본주의와 경쟁, 능력 지상주의로 치닿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득권들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이분법이라는 잣대로 간편하게 위계 질서를 만든다.

남성과 여성, 문명과 야만, 장애와 비장애, 젊음과 늙음으로 혐오의 대상을 차별한다.

월경 혐오 (생리충), 여자애는 소심하다는 폄하섞인 편견들, 나잇값, 아줌마라는 자격지심,

내 안의 분노를 타자에게 투사하기, 장애인과 소수자에 대한 일상 속 고찰,

권력이 있는 방향으로 알아서 엎드리는 현실,

사회적 합의에 대한 정치인들의 소명, 돌봄이라는 실존적 행위,

무연고 장례를 지원하는 사람과의 인터뷰, 고립보다 연대를 선택하는 인류애.

이렇게 기억에 남는 내용들 중에서도 특히 최근에 여러 논쟁을 불러왔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 부분이 가장 인상깊게 남는다.

종부세 깎아주는 데는 발 빠르면서

이동권 보장하는 것에는 너무 더딘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

요구하지 않아도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처절하게 투쟁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인식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여당이 된 당대표의 입에서 나온

'수백만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다' 는 말에서

장애인도 시민이라는 인식이 보이지 않음에 참담했다.

명백하게 차별하고 있으면서 본인은 소수자를 비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그 행태를

그대로 받아옮기는 언론이 차별을 부추기는 꼴이다.

이 사회는 권력에 따라 전달되는 목소리의 강도가 다르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죽어야 들린다.

부조리한 현실을 직면하는 일이 고통스럽고 기빨리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우아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 하나 없고,

우리는 누구나 '아무 몸'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으니까!

취약하거나 불완전하다는 것은 인간의 전제조건일 것인데

부와 아름다움이라는,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너무나 쉽게 타인을 공격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며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한다.

서로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희망사항을 내려놓고 싶지는 않다.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관계로 발전할 여지에 대해 다함께

잠시 멈춰서 타자를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다시 생각해 보기로.

'개별성' 을 봐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일 수가 없다.

개개인의 몸에 스며들어 있는 그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서로를 끌어안는 연민과 사랑이 시작된다.

개인의 삶에 대한 존엄성이 힘을 잃어가는 시대에

'있는 그대로' 의 몸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곱씹어 보고 싶은 에세이를 간만에 만났다!!!

올해 손꼽는 책 목록에 올릴만한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도서관에 갈 이유 하나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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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말하는 죽음학 수업
박중철 지음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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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being 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well-dying 은 왜 들리지조차 않을까?

 

우리 주변에 장애인이 없는 게 아니라

 

타인의 차별섞인 시선이 두려워 밖으로 나오지 않고 꽁꽁 숨는 것처럼,

 

좋은 죽음, 잘 된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며,

 

삶을 잘 완성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궁금해 하며 펼쳐보았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객관적이고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

 

시종일관 동의하며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를 펼치고 마침내 완독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앞으로 바로잡아야 할 제도에 대한

 

저자의 주장과 분석들을 꼼꼼히 필사하면서 읽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각각 존엄하다고 배웠으면서

 

실상은 곳곳에 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인간이 만든 제도가 과연 인간에게 이롭게 작용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삶은 이렇듯 부조리함 투성이지만,

 

인간의 탁월함과 고결함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우리는 또한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과 규범들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자

 

문제의식을 갖고 개선하고자 노력하지만

 

여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돌리기가 참 녹록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부자의 고발과 좋은 세상을 위한 제언이

 

끊임없이 나오고 그것을 독자들이 읽어 곳곳에 퍼지게 한다면

 

또 모르죠..... 희망을 놓고 싶진 않습니다!

 

 

"황폐한 죽음의 문화를 고발하면서

 

삶만큼 죽음도 존중되는 세상을 제안하는 책" 이라고 설명하는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의 저자 박중철은

 

가정의학과 의사이면서 동시에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의사생활을 하다가 겪었던 어떤 결정적인 일로 인해

 

의사라는 직업과 현대 의학기술, 의료계의 모든 민낯들을 다시 보기에 이릅니다.

 

미덕과 관행을 바탕으로 하는 그 옛날의 마을 공동체가 아니라

 

이제는 법과 규범이 지배하는 이 개별화된 한국 사회에서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사자의 의사는 존중받지 못한 채

 

초라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이 사회의 불친절한 죽음의 문화를 고발하고 있어요.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던져진 채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지만,

 

모두에게 죽음이 놓여져 있다고 해서

 

그저 단순한 요식행위로 끝맺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새삼 갖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지 뭐' 체념하는 일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할 권리' 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진지한 고민도 없었을 뿐더러

 

인간이 점점 도구로 전락해 가는 사회이다 보니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일이 너무나 당연해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나는 지금 이 둔감함에 얼마나 젖어들어 있는지

 

경각심을 심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물론 경각심을 갖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죠.

 

좋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을 위해서

 

죽음 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와

 

법 제도의 변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임종실 설치의 필요성, 연명의료의 민낯,

 

안락사 논쟁의 신호탄이었던 김득구 선수 사건,

 

병원 임종을 일반화시킨 보라매병원 사건,

 

인공 영양과 같은 수명 연장의 의미, 마약성 진통제 처방,

 

현대 의학기술의 집착적 모순,

 

원칙만 고수하려는 한국 의료계의 도그마와 자기기만,

 

연명의료결정법, 호스피스 완화의료.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시스템이 인간의 존엄함에 반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들을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요목조목 접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웠고, 어이가 없었고, 과연 변할 수 있을까 거대한 관행 앞에 무력감도 생깁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각자의 좋은 죽음을 위해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사회적인 공감대를 갖고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진지한 관심을 갖고 실질적인 대안을 조직화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잠시 관성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을 멈추고

 

되돌아보는 시간부터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타인과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 시나리오를 좇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나의 죽음의 주인이 될 것인지.

 

 

주택임종보다 병원임종의 수치가 높은 것은

 

이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말해 줍니다.

 

분명히 대다수의 바램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도시화로 인해 마을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기 어려워지면서

 

죽음의 순간에 어떠한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사회적 약자들도 너무나 많아지고 있죠.

 

하지만 이 책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한정되지 않는 게 문제라는 점입니다.

 

이 사회 전체가 모두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불친절하다는 거예요.

 

개개인의 죽음에 대해서 이 사회가 친절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에게는 '비인간적인 태도' 라고 들렸습니다.

 

저자는 최전선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의사들까지도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필요성을 상당부분 느끼고 있으면서도

 

한국 의학계의 인식은 환자에게 끝까지 의학 기술을 펼치는 것이

 

최선이라는 기술주의 도그마에 빠져 있다는 것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 존중이라는 명분에 숨어서 치료를 놓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그것을 마치 의사로서의 실패라고 생각하는

 

의료진들의 집착과 자기기만, 위선적인 행위들을 꼬집고 있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 가족들의 인식이 더 뼈아프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연명의료는 당연히 환자를 위한 최선이 되어야 하고

 

자기결정권에 의해 행해져야 하는 것인데

 

생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명분, 가족의 사랑이라는 가면에 숨어서

 

죄책감을 피하려는 자기만족과 자기위로를 위한 변명이라는 것이었어요.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의료진들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비뚤어진 소명의식과 집단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일부 의료진들과 다르게

 

소신 발언,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의료진들도 분명 있습니다.

 

가족들이 환자를 향해 애도할 시간조차

 

넉넉히 주어지지 않는 이 불친절한 죽음의 문화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볼 수 있는 임종실의 설치를 아무리 제안해도

 

돈이 되는 장례식장만 여전히 확충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종실과 장례식장, 과연 무엇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죽음은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절대주의, 생명지상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물음에 의구심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는 와중에는 그래도 오래 사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생명을 연장하게 도와주는 일이 이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하지만 당신이 죽음 앞에 놓인 당사자라면..... ?

 

연명의료의 끝에 그 환자의 몸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죽음을 원하고

 

좋은 죽음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고통 없이죽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의료계에 몸 담고 있는 내부자로서 의료진들의 위험하고도 안일한 인식이 어떠한지,

 

현대 의학기술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고 있는지,

 

이 사회는 인간의 죽음을 삶만큼이나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폭넓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통계 자료와 앞으로 어떤 개선방안들이 필요한지,

 

무엇보다도 법과 제도로 단순히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어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과정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마주하기 불편하고 씁쓸한 현실 앞에서도

 

오히려 더더욱 냉철하고 분석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이고 진지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느꼈습니다.

 

결국 이 사회를 둘러싼 모든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의 물건을 타인에게 아무 생각없이 맡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왜 자신의 죽음인데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결정에 맡겨 버리나요?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나 자신에게 있음을 모두가 인식한다면

 

현재 이 사회의 죽음에 대한 문화에 대해 다같이

 

심도있게 관찰하고 숙고해봐야 합니다.

 

'소멸하는 주체'는 결국 나 홀로이고 고통 또한 오롯이 나의 몫이니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불안의 근원인 고통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인간적인 연민을 놓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현대 의학기술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간의 존엄함을 짓밟는 것이

 

또한 기술주의라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존과 실존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였습니다.

 

인간에게 생존은 실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

 

생존이라는 말은 그 뒤에 '본능'이 자주 따라 붙는 것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저절로 일어나는 본성이지만

 

실존이라는 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맞서야 하고 도전해야 하는 것.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주체적으로

 

삶을 완성하고자 마지막 실존에 맞섰던

 

어느 의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숨결이 바람 될 때> 라는 책에서도 만났었구요.

 

살아가면서 실존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서야

 

비로소 실존을 인지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도전은 그래서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지도.

 

도전을 멈추지 않으면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게 되는 것이니까요.

 

(마음 한 켠이 웅장해 집니다 ㅠㅠ)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실존보다 생존에 더 몰입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한국의 보건의료 수준은 높지만

 

평화로운 임종을 위한 체계는 너무나 미흡한 게 현실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 수도 생각보다 적더라구요.

 

2010년 기준이지만 OECD 40개국 중 '죽음의 질 지수' 가 32위,

 

2015년에는 80개국 중에서 18위에 한국이 자리합니다.

 

 

 

 

 

연명의료는 필요하다 vs. 연명의료는 의미없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시겠어요?

 

저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연명치료는 본질적으로 환자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늦추는 것일 뿐이고

 

현대 의학기술을 만든 것도 인간,

 

그것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도 인간이라는 관점.

 

저자의 시선으로 본 현대 의학기술에는 인간성과 연민은 없다고 말합니다.

 

병원 임종의 가장 큰 문제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 역시

 

죽음이 인간적인 마무리가 아니라 하나의 의학적 사건으로 처리된다는 것이니까요.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환자를 잡아끌고 버티는 연명치료를

 

지금까지는 당연한 관행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환자는 원치 않는 연명치료에, 가족들은 경제적 부담을 줌으로써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예요.

 

고통경감에 주력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을

 

국가 차원에서 늘리는 일이 나와 가족,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의학계도 연명의료를 사명으로 여기며 기계적으로 행하는 그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개개인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어느 누구도 박탈할 자격은 없으니까요.

 

그런 특권이 의사에게는 없습니다 결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윤리적 최선이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왔던 의료진들부터 각성하고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주길.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의료인의 판단보다 우선시되야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니까요.

 

대한의학회가 연명의료의 무익함을 처음 제기한지 17년 만인 2018년에 드디어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되었다고 하는군요....;;

 

인간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담론과 공감대 형성 노력은 건너뛴 채

 

바로 입법 작업에 착숙했다는 것을 저자는 많이 아쉬워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순서가 좀 바뀌긴 했어도 법과 제도부터 바꾸는 일이 의미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근차근 바로잡는 그 시작이 되길 바래요!

 

 

 

 

 

저자가 하이데거라는 실존주의 철학자를 언급한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삶이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아야 하는 고통의 여정이라고 했다지요.

 

인간에게 늙어감과 죽음은 필연이라고 한다면

 

무의미하게 연명의료로 목숨을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운명을 마주할 용기로 삶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실존을 되찾을 것인가.

 

죽기 전까지 선택의 연속이지만 ..... ^^;;

 

선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은 알면서도 행동하기는 참으로 어렵죠.

 

늘 우리는 살면서 이렇듯 실존의 문제에 부딪히나 봅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과 현실을 균형있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아가 미래에 좋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삶에 실존의 문제를 붙잡을 수 있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삶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데 있어서 인생 도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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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3
메리 셸리 지음, 김나연 옮김 / 앤의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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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고 싶었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앤의서재 출판사 책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제대로 읽기 전에 대략 들어본 바로는


앤젤라 카터의 <피로 물든 방>이나 셜리 잭슨의 <제비 뽑기> 같은 고딕 소설,


그리고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서 마사가 나오는 장면이 풍기는 


그런 비슷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경험해 보고 스스로 판단할 일이었어요, 역시!


호러, 서스펜스 , 공포 느낌보다는 연민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소설이더라구요.


세상에 없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의 행위를 보면


과학의 위험성을 알리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그 피조물인 괴물에게 


자꾸만 연민의 감정이 생기더라구요.


소중한 가족들과 친구,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괴물에 대한 복수심으로 치닫는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괴물은 오히려 이성적으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이야기하거든요.


인간의 언어와 감정, 사회에 적응하기까지 빠른 속도로 습득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던 괴물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 세상을 힘과 그만의 능력으로 정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중에 하나인 그것,


외로움을 나눌 친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괴물에게 주어진 삶의 시작은 하나의 생명체로 이 세상에 빅터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인간들에게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그저 평범한 인간의 본질을 점점 보여주었던 부분이 


제가 가장 몰입했던 지점이었어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고 


빅터가 괴물의 친구를 만들어 주지 않는 한,


괴물 또한 빅터의 가족과 친구처럼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마치 신과 같은 능력을 보여줬지만 그도 결국은


영원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듯!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 을 쓰기 전에


남편이었던 퍼시의 삶에서 소설의 영감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신비학자이자 연금술사인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책을 접하며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빅터의 이야기가 소설에서도 나오는데


메리 셸리의 남편 퍼시 역시 그러했다고 해요.


당시 과학이 지금만큼 발달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 오히려 과학을 사실로 접근하기 보다는 


마술과 같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봤다고 하니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이라는 생명체가 온전하게 창조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갈수록 인간을 알아가는 습득 능력이 정말 신의 경지 같기도 하고.^^;







악마의 존재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몰입도 최고조를 찍었던 순간!


<프랑켄슈타인> 같은 소설은 정말 영화나 뮤지컬처럼


다른 형태의 예술작품으로 만나도 너무 흥미롭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을 보지 못했는데


소설을 접했으니 조만간 뮤지컬로 만날 날도 당겨질 듯 하네요.^^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나의 창조주를 혐오한다. "




사랑받고 싶은 대상이었던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보려 하지 않고


흉측한 겉모습만 보고 괴물이라고 치를 떠는 모습에


 자기혐오까지 더해져서 마지막 희망으로


외로움을 나눌 친구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데요.


부단한 노력과 설득으로 프랑켄슈타인의 약속을 받아내지만


결국 괴물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프랑켄슈타인의 의도를 알고


처절하게 그의 소중한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이게 됩니다.


빅터와 괴물 모두 복수심에 불타는 전개로 결말까지 나아가는데요.


슬픈 둘의 엔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 소설을 처음으로 열었던 화자는 로버트 월턴.


북극을 항해하던 선장이었고 


그가 북극에서 만난 이방인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신비롭고도 희한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록해 두었던 것을


로버터의 누이 마거릿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전하게 되죠.


월턴으로 시작되었던 소설의 화자가 프랑켄슈타인도 되었다가,


중간에 악마가 프랑켄슈타인과 대화를 하기도 하죠.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이어지고


끝까지 흡입력있게 전개되는 소설이었어요.


근래에 이렇게 재밌게 읽은 소설이 있었나 싶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주워들은(?)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는 양 호기심으로 세상에 없던 생명체를 만들었었죠.


막상 흉측한 악마의 모습을 보더니 도망갔으면서


버려진 악마가 복수심으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니까


그 때가 되서는 복수하기 위해 괴물을 쫓는 모습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 그 자체였습니다.


어떤 인간보다도 공감할 줄 알고, 사랑을 베풀었던 악마였지만


인간으로 인해 상처받고, 철저히 버려진 괴물에게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괴물이 느끼는 상처와 상실감은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것에 


결코 지지 않을 만큼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세상에 이렇게 위험한 존재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과학의 위험성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지만 


좀 더 면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괴물을 통해 저는 인간의 본성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시 사회 문제에 대한 작가의 인식도 눈여겨봐야 할 소설인 것 같아요.


소설 <프랑켄슈타인> 의 작가 메리 셸리는 당시 


노예 해방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해서


그 지점을 염두에 두고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인간의 삶과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고 소설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서 참 읽어내기가 녹록치 않은 장르이긴 하죠.


어렵지만 읽어냈을 때의 그 희열을 이겨내는 것이 또 없어서 


제가 문학덕후가 된 것이기도 하구요.^^


여러모로 오독하기 쉬운 소설 중에 하나가 바로 


<프랑켄슈타인> 이 아닌가 싶기는 한데 


소설의 매력은 또 재미 아니겠어요?


우선 작가가 의도하는 것을 찾아내려고 소설을 읽으려고 들면 


머리만 아파지니까 다른 건 다 접고 그냥 이야기에 몸을 맡겨 보세요.


재미 보장합니다.^^


이렇게 재밌는 소설이라고 왜 주변에서 얘기를 안 해줬나 싶을 정도였어요.


19살에 쓰기 시작한 소설이라니 한 번 더 놀라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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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3
메리 셸리 지음, 김나연 옮김 / 앤의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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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에 쓰기 시작한 소설이라니 믿기 어렵도록 재밌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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