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지능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
최연호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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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와 EQ의 시대가 지났다는 선언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성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

이 책의 제목에 있는 '통찰지능' 에 있다는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

Insight Quotient.

IQ와 혼동이 생길 수 있어서 통찰지능은 InQ로 쓰기로 한다.

최재천 교수가 남긴 추천사에서 핵심적인 한 마디는 바로

"통찰지능하자!"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읽는다는 것은 <통찰지능> 을 읽고 얻은 팁으로 통찰훈련을 해서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키우자는 것이다.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을 보여줬던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처럼

최연호 저자는 이 책에서 의학적인 통찰을 보여주고자 했다.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의학 교양서가 될 수 있도록

저자가 일상에서 경험한 의학적인 통찰의 면면들을 다양하게 담았다.

관찰에서 시작되는 모든 지식들은 사실 '부분의 합' 보다

더 큰 '전체'를 추론해내는 것에서 통찰로 이어진다.

인간은 왜 보이지 않는 것에 취약한가? 에 대한 물음을

하나 둘 풀어가는 과정이 충분히 가독성 좋고 설득력 있는 책이었다.


보통 인문교양서를 읽다 보면 미처 몰랐던 좋은 참고도서들을 만나곤 하는데

그런 면에서 <통찰지능> 은 개인적으로 지뢰밭이었다 ㅋㅋㅋ

궁금한 책이 너무 많은데 일단 이것들부터.

문학덕후로서 소설을 읽다 보면 작중인물의 말과 행동,

또는 인물들을 둘러싼 사건들을 통해

행간과 맥락을 힌트삼아 숨겨져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늘 고팠던 것이 바로 통찰....!

통찰을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통찰을 통해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보이지만 외면하는 사람도 있으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적인 사람도 있고,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아는 사람도 있다.

그 능력의 시작점은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성공의 필요조건인 통찰지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솔깃해져서

집중과 필사를 거듭하면서 열독했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고

그 와중에 교묘하게 속이고 숨기는 술래잡기가 난무하기 때문에

피상적인 것만으로는 복잡한 세상을 살기가 만만치 않다.

관찰에서 시작되는 통찰지능은 감각기관 중에서 시각이 70%를 차지하더라도

우리가 알고자 하는 본질이나 진심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통찰지능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뇌에 있는 기억으로부터 정보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인물과 배경을 구분하고 애매함을 해소한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것 같아도

각자의 기억 정보를 참고하여 가려져 있는 부분을 연상하는 걸 접하게 되면

참으로 놀라운 인간의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능력에는 상황 맥락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된다.

통찰 능력은 경험이 많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누구나 그 필요성을 깨닫고 훈련하면


성공의 필요조건을 탑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보이는 것만 보고 사는 인간의 취약성을 수용하고

익숙함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래야 곳곳에 숨어 있는 맥락이 드러나면서 보이는 않는 것도

보이게 만드는 길이 열린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후견지명을 얻고,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놓인 현상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예측하고 상상하는 선견지명을 발휘하곤 한다.

후견지명에서 미래를 내다볼 선견지명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

바로 보이지 않는 걸 보게 하는 통찰이다.

통찰지능을 저자는 맥락지능(Context Intelligence Quotient) 이라 일컫기도 한다.

현재의 순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맥락을 짚어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명분과 실리를 따져보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대목도 인상깊었다.

어차피 이 책에서 최연호 저자가 통찰지능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유도

성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읽어내기 위함인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모든 일에는 명분이 우선이다.

사람들이 어떤 일에서

자신의 의지로 명분을 받아들였다면

실리가 부족해 보여도

그 일에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내가 속한 집단이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명분을 주지 못했을 때

이를 거절하지 못한 나는 맥없이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거슬릴 정도로

갑자기 실리만 되뇌며 태업을 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겉으로 실리만 따지는 것으로

보이는 주된 이유다.

나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면 좋을 텐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집단의 힘은 그래서 무섭다.

<통찰지능>





그 지점에서 명분과 실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잡는 일은

직관을 통해 올바른 선택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성공을 담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최고의 통찰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허버트 조지 웰스의 <투명인간>,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간이 버려야 할 우상 4가지,

월터 미셸의 마시멜로 테스트,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과 헤겔의 변증법이 보여준 새로운 전환,

집단사고의 폐해를 보여준 애빌린의 역설,

집단지성과 집단사고의 차이가 보여준 실리를 추구하는 과정,

이성주의와 경험주의, 황금률과 은율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통찰은 는다" 는 기분좋은 명제를 따라 가는 재미와 경험치가 있었다.

저자가 밝힌 '통찰학 개론' 의 성격에다가

인간과 자연을 오랜 시간 관심있게 탐구했던 그 결실을

<통찰지능> 에 모두 담아놓은 듯 하다.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패턴, 특히 무의식에서 나오는

사고의 흐름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미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늘 보고 만지고 느꼈던 주변의 모든 것들이

어느 날 새롭게 보이면 그 이후로는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통찰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통찰지능> 덕분에 천천히 InQ 통찰지능에 몰입해가는 경험을 했다.

나와 타인 둘 다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는 매우 높은 수준의 지능인

통찰지능을 키우는 것, 이제부터라도 가능하다.

모든 사물과 사건의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일은 곧 진실과 진심에 닿는 것.

현대사회에서 성공하는 이들의 공통점에는

타인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이 있다.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확률도 높다.

통찰지능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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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의 기술 - 느낌을 표현하는 법
마크 도티 지음, 정해영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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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도서상을 수상한 미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마크 도티의 글쓰기 책을 만났다.

서평단이 되어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하지만 인연이라는 것도 손짓 한 번 없이 이루어지기도 어려운 법.

다양한 글쓰기 중에서도 나를 가장 곤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시" 이기 때문에 알고 싶었다...격하게 알고 싶다!!!

상세하고 선명하게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익숙한 나이다.

그런 면에서 시는 상대적으로 나의 표현방식과 다르게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세상과 타자의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이어서

뭐든 이해해보고 들여다보고자 노력하겠다는 나의 의지를 매번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시인이 쓴 "시에 대한 안내 책자" 라는 추천사에도 기대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마크 도티가 쓴 <묘사의 기술> 을 통해서 이번에는 꼭

시를 어려워하는 나의 고충을 해소시켜줄까 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펼쳤다.

책마다 독자가 기대하는 지점이 다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감각적인 꽃으로 장식된 책표지 디자인이

마치 '시의 감각' '묘사의 힘'을 만날 준비가 됐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느낌^^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는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적 언어로 묘사된 세계와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세계도 있다.

이것은 비단 시라는 장르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사회 현상을 통해서도 갖게 되는 고민이다.

어떤 시 한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의미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묘사의 기술> 을 읽고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이유는

내포하는 그 의미에 근처라도 가보고 싶다...... 격하게 그러고 싶다.....ㅋㅋ

이해의 길이 정반대로 흐르는 것은 막고 싶은 간절함이랄까!

시에 대한 마크 도티식의 해석을 믿어보겠노라 다짐하며 들여다보니

이 세상을 언어로 설명하는 힘, 그 안에는 묘사의 기술이 있었다.

우리의 감각은 총체적인 경험을 수용하여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설명하는 모든 것들은 부분적인 한계를 갖고 있고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며 추측에 의지해야 할 때도 많다.

개개인의 관심의 본질이 닿아 있거나 생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느낌마저도 불완전하지만 언어로 표현하고 또 인식하기를 반복한다.

작중인물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사건의 인과관계를 총체적으로 해석해 가며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자의식이 만나 명쾌해지는 것에서 오는 희열이 그리워지면

어김없이 소설을 찾는다.

같은 문학 장르인데 시는 또 완전 다른 장르여서 늘 어렵지만

마크 도티가 알려준 하나의 팁이 들어온다.

"잘라-붙여-변형하기"

신체 부위들이 교환되어 서로 융합되는 것을 상상하듯이

한마디로 말하면 재구성.....!

결국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자의식과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시적 언어가 내미는 낯선 시선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나름의 재구성을 통해 불완전한 해석에 익숙해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면 방법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

시인은 자연 세계로 눈을 돌려 면밀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 보답으로 교훈을 얻는다.

.....

시인은 관찰의 정교함이 내재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활동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

관심이 외적인 세부 사항에서 내적인 연상 작용으로 옮겨가며,

정신이 관찰에서 몽상으로 재빠르게 이동한다.

마치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찾듯이.

<묘사의 기술>

한 번 읽고 넘기면 들어오지 않아서

뒤로 되돌아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역시 쉽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답을 찾아본다.

독자가 화자의 눈이 되어 시 속에 펼쳐놓은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거기에 독자 각자의 관심사와 기분,

주관적인 특성들이 더해져서 나름의 상상력으로 심상을 형성해 나가도록 한다는 것을.

유명한 소네트나 시를 직유와 은유 기법을 넣어서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며

시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들도 흥미로웠다.

(흥미롭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고.....^^;;)

​필연적으로 묘사는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어떤 것이 무엇과 비슷한지 말하는 것이 또한 묘사이기 때문에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기술이었다.

비유적 표현들이 모여 독자로 하여금 감각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게끔 만들고

서로 달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계에 내포된 숨겨진 은유를 탐구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가 아닌가 싶었다.

명쾌한 답은 찾지 못했다...... 시 안에 들어있는 의미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그래도 시적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은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묘사의 기술> 이 또 한 걸음 시를 이해하고 감각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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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 채식주의자 - 입맛과 신념 사이에서 써 내려간 비거니즘 지향기
정진아 지음 / 허밍버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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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채식주의 #비건 #비거니즘 #환경보호 #동물권

#허밍버드 #에세이추천 #불완전채식주의자 #정진아

얼마전에 읽은 책이, 아니 만화책이 있었다.

<나의 비거니즘 만화>.

비건이 직접 쓰고 그린 비거니즘 만화인데

다른 존재의 고통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닿아 도서관에서 빌려봤고

완독 후에는 책을 주문했었다.

인간과 종이 다를 뿐 그것이 동물을 당연히 차별해도 될 이유는 결코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동물권에 대한 생각이 비건, 비거니즘과 관련있는 신념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부끄럽게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더 비거니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이 책 저 책 찾아보다가

<불완전 채식주의자> 를 발견했고 운좋게 서평단으로 만나보았다.

제목부터 비건에 대한 장벽이 그리 높게 와닿지 않은 것도 한 몫 했을수도.^^

하지만..... 읽고 보니 완전 채식, 비건이 되는 길은 나로선 멀어 보였다....ㅠㅠ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저자처럼 욕구와 신념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비거니즘을 지향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일기 때문.

'처음부터 고기로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 는 저자의 한 줄 문장이 계속

뇌리에 맴돌며 죄책감과 왠지 모를 미안함은 여전하지만

비육식을 실천하는 걸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고기를 시도 때도 없이 먹는 건 아니지만

정말 먹고 싶을 때도 나의 욕구를 누르고 신념을 쫓는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맛있는 음식을 모르면 몰라도 한 번 맛을 봤다면

그 맛이 자꾸만 맴도는데 이 또한 사는 재미인 것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까?

고민이 더 깊어졌다.....ㅠㅠ

얼마전 비평의 의미에 대한 책에서 본 문장이 지금 떠오른다.

"가치를 전달함으로써 독자를 움직이게 하는 글"

정진아 작가의 <불완전 채식주의자> 가 지금 내게 그런 글을 심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정진아 작가도 완전 채식은 너무 어렵다며

입맛과 신념 사이에서 비거니즘을 지향하며 불완전하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천해 나가겠다고 했으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실천부터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게 된다.

실천의 정도는 각자 다 다르더라도

정육점에 포장되어진 붉은 고기덩어리를 보면 먹고 자고 싸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동물을 떠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걸로.

그리고 혹여 고기와 비고기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고기는 선택하지 않는 걸로.

너무나 사소한 것일지라도 시작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일이

단순히 채식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동물권과 환경보호, 빈곤 문제 등 이 세상과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에 서게 되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더라도, 천천히..... 이 과정이 쌓이면 분명한 변화도 볼 수 있으리라 믿으며.

"동물이 살기 좋은 사회에서는 사람 또한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모든 생명이 각자의 가치를 존중받는 세상을 꿈꾼다."

동물자유연대에서 반려동물과 길고양이 정책을 담당하고 현재 사회변화팀에서 일하는

정진아 작가의 이 소개 한 줄에서부터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피터 싱어의 책 제목이 떠오른다.

동물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물해방 운동에 전념했던

헨리 스피라의 삶을 피터 싱어의 시선과 통찰로 담아낸 평전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듯이,

그 이전에는 헨리 스피라 같은 운동가가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어서 지금까지 그 물줄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책을 통해 가치를 전달하는 사람들,

생각에 머물지 않고 실천을 통해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장 소극적일지라도 나처럼 같은 세상을 꿈꾸며 책을 통해

조금씩 실천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서 후대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가치를 전하고 그들도 이어갈 수 있도록

지금의 이 크고 작은 행동들은 모두 의미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생명을 해친 죄보다 재물을 망가뜨린 죄를

더 무겁게 여기고,

동물을 학대한 사람이라도

동물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게 동물의 생명이나 안전보다

소유자의 재산권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며,

그 재산권에는 물건으로서의 동물을

소유할 권리도 포함된다.

<불완전 채식주의자>

채식을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차별 없이 바라보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각하게 자본주의 체제로 매몰되어

돈이나 재산권이 지상 최대의 가치라고 믿는 사람들의 반인륜적인 행태를

뉴스에서 접하게 될 때면 이 문제의식은 왜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심어지지 않을까 답답함이 밀려온다.

모든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인식으로

나아감으로써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 방향이 지구인들에게도 이롭다.

인간은 이 지구에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이고

자연과 이 모든 만물은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움직이는 사람들로 인해서

교육에서는 학교에서 급식을 선택하고 또 의무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법제화하는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던졌던 저자의 질문이 개인적으로

<불완전 채식주의자> 에서 준 가장 큰 울림이었다.

만약에 자기가 지금 해결을 위한

어느 부분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문제의 한 부분이다.

<불완전 채식주의자>

 

저자가 경험한 다양한 사례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말로 대화할 수는 없어도

눈빛과 몸짓으로 소통하는 약한 생명을 돌보고자 먼저 손을 내민 사람들이

근거 없는 혐오에 맞서야 하는 현실을 대할 때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보란 듯이 더 미친 여자가 되어 주자는 저자의 말이 내게는

각자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는 일이 곧 자신의 삶을 지키는 것이고

더불어 동물의 소중한 생명과 안전까지도 지키는 일이라고 들려온다.

그러니까 흔들림없이 하자고!

 

2010년 말에 발생한 구제역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살처분되는 상황을

직접 목도하면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정진아 작가.

동물들도 삶의 기쁨을 자기 방식으로 느낄 줄 아는 존재라는 인식이

인간에게는 너무 부족했지만 그래도 점점

비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는 게 그나마 고무적이다.

윤리나 도덕 같은 민감한 주제를

대화에 올릴 자신이 없었다.

그냥 나 혼자 실천하면 되지 굳이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합리화했다.

나는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용기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불완전 채식주의자>

비거니즘이라는 신념의 방식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더라도

각자의 삶에 있어서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이니만큼

최소한 근거없이 조롱하거나 힐난하지는 말았으면!

 

동물권이나 환경보호, 빈곤 문제까지 얽혀 있는 비육식에 뜻이 있는 이들이라면

비거니즘 방식이 동물성 식품 일체 금지하는 "비건" 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다른 방식들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닭고기 같은 가금류는 허용하는 채식, 폴로 베지테리언.

모든 육류는 금지하고 해산물은 섭취가능한 페스코.

우유와 달걀만 먹는 채식, 락토오보.

"문제와 해결, 어디에 속할 것인가"

나 또한 고기를 계속 먹는 일이 문제의 한 부분에 속함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완전 채식은 못 해도,

비육식까지는 아니어도,

육식을 하는 횟수를 줄여가는 노력에서부터 차근차근.

급하게 하다 보면 그냥 포기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무해한 사람' 이고 싶다는 나의 바램이 사실은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생각이었는지

<불완전 채식주의자> 를 통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것을 포함해서

현대사회에서 누리는 지금의 풍요와 편리함은 전부

다른 생명을 착취해 얻어낸 산물임을 잊지 말자.

동물 학대, 기후 위기, 공장식 축산업의 실태 등등

전반적인 사회 문제에 관심을 놓지 않으며 나는 나대로 비거니즘을 지향하고자 한다.

나 또한 동물의 고통을 이미 착취하는 구조 안에서

문제의 한 부분안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불편한 감정도 감수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보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걸로.

저자의 내면도 가감없이 드러내며 솔직한 고백과 용기있는 실천에

나까지 자기고백의 글이 되어 부끄럽지만

이 에세이는 많은 이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결혼 대신 억압의 대상과의 연대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정진아 작가는

지금도 자신의 욕구보다 동물을 우선으로 두고 애쓰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진솔한 글이 술술 잘 읽힌다...... 필사해야 할 구절도 많아서 가끔씩 멈춰야 하긴 하지만.^^

<불완전 채식주의자> 에서 저자가 언급한 레퍼런스들을 빌려서

확장독서로 이어보려 한다.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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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 '아무 몸'으로 살아갈 권리
김소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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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잣대에 의해 이미 내면화 되어버린 '아름다운 몸'의 기준은

건강하지 못하게 한 곳으로만 향하고 있는데

그것이 개인의 개별성과 자율성을 침해하고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관점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한겨레출판 에세이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를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었다.

차별과 혐오가 극심한 이 시대에

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은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의 시야를 드러낸다.

자기 자신과도 친구가 되는 일이 너무나 어려워진 현 사회에 대해서

저항심과 분심에서 시작되었다 밝히고 있는 김소민 작가는

13년간 한겨레 기자로 일했고 국제구호 NGO '세이브더칠드런' 에서

1년 7개월간 일했으며 지금은 글쓰기 노동자로 반려견 몽덕이와 살고 있다.

또 한 명의 좋은 에세이스트를 만난 느낌!

하니포터 3기의 인연으로 만나게 된 운명 같은 책!

누구에게 추천해도 자신있는 책!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취향일테지만

한겨레출판이 내는 목소리에는 매번 한목소리를 내고 싶어진다.

그래서 하니포터 3기를 지원했고 기쁘게도 3기 타이틀을 얻게 되면서 만난 첫 책이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였다.

4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이 책을 고른 '나님' 아주 칭찬해.

탁월한 선택이었다! ㅎㅎㅎ

게다가 이번 책은 좋아하는 보라색과 레몬색의 조합이 꽤 감각적이기까지~

'아무 몸' 으로 살아갈 권리 라는 부제를 지닌 이 한겨레출판 에세이는

너무 자주 필사를 부르는 바람에 완독이 늦어지기도 했었다.

병렬 독서를 하다 보니 그렇기는 하지만

하니포터로서 신간 리뷰를 빨리 남겨야 하는 미션 수행을 생각하면

빵점인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자기변명을 해보자면 책리뷰를 남기는 행위는 내게 매 순간 진심이고

특히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에세이는

온전히 책리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렸던 듯도 싶다.

그만큼 이 책이 참 좋았다!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운 문장들은 이렇게 곳곳에 흔적을 남겨 두면서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소비했고 또 진지하게 수용했다.

취약함을 드러내도 되는 존재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취약한 데가 있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내가 마음깊이 사랑을 느꼈던 순간은

내 약함을 타인이 그대로 수용했다고 느꼈을 때였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김소민 작가의 에세이는

관리당하는 몸 / 추방당하는 몸 / 돌보는 몸 /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인기척

이라는 챕터로 구성되어 다양한 몸을 화두를 삼았다.

지금까지 발생했던 사회적 이슈들을 통해서 드러난

혐오와 차별의 문제들을 연민어린 시선을 견지하며

진중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접근했던 방식이 좋았다.

실제로 책 읽으면서 혼자 피식거렸던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여기 ㅋㅋㅋ

과자 부스러기가 배 위로 떨어질 가능성은

김민경이 운동하는 모습에 자극받았던 당시

누워서 과자를 먹었을 작가의 자세가 상상되었기 때문에~~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를 읽다 보면

현실적인 사회 구조적 모순들을 책 속에서 만나며 분노와 슬픔이 수시로 교차하곤 한다.

무겁고도 답답한 심경이었다가 김소민 작가의 삶에 스며든 이런 일상 유머를 접하게 되면

다시 긴장이 풀리면서 이완되는 느낌에 책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쯤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책 한권을 오래 끼고 읽게 된 것은

아마도 한 장 한 장 아껴두려는 마음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이라영 작가의 추천사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남의 약함을 차별하면 안된다면서

내 약함은 아무에게도 안 들키려고

오늘도 분투한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딱 지금 자본주의와 경쟁, 능력 지상주의로 치닿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득권들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이분법이라는 잣대로 간편하게 위계 질서를 만든다.

남성과 여성, 문명과 야만, 장애와 비장애, 젊음과 늙음으로 혐오의 대상을 차별한다.

월경 혐오 (생리충), 여자애는 소심하다는 폄하섞인 편견들, 나잇값, 아줌마라는 자격지심,

내 안의 분노를 타자에게 투사하기, 장애인과 소수자에 대한 일상 속 고찰,

권력이 있는 방향으로 알아서 엎드리는 현실,

사회적 합의에 대한 정치인들의 소명, 돌봄이라는 실존적 행위,

무연고 장례를 지원하는 사람과의 인터뷰, 고립보다 연대를 선택하는 인류애.

이렇게 기억에 남는 내용들 중에서도 특히 최근에 여러 논쟁을 불러왔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 부분이 가장 인상깊게 남는다.

종부세 깎아주는 데는 발 빠르면서

이동권 보장하는 것에는 너무 더딘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

요구하지 않아도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처절하게 투쟁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인식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여당이 된 당대표의 입에서 나온

'수백만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다' 는 말에서

장애인도 시민이라는 인식이 보이지 않음에 참담했다.

명백하게 차별하고 있으면서 본인은 소수자를 비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그 행태를

그대로 받아옮기는 언론이 차별을 부추기는 꼴이다.

이 사회는 권력에 따라 전달되는 목소리의 강도가 다르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죽어야 들린다.

부조리한 현실을 직면하는 일이 고통스럽고 기빨리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우아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 하나 없고,

우리는 누구나 '아무 몸'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으니까!

취약하거나 불완전하다는 것은 인간의 전제조건일 것인데

부와 아름다움이라는,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너무나 쉽게 타인을 공격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며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한다.

서로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희망사항을 내려놓고 싶지는 않다.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관계로 발전할 여지에 대해 다함께

잠시 멈춰서 타자를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다시 생각해 보기로.

'개별성' 을 봐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일 수가 없다.

개개인의 몸에 스며들어 있는 그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서로를 끌어안는 연민과 사랑이 시작된다.

개인의 삶에 대한 존엄성이 힘을 잃어가는 시대에

'있는 그대로' 의 몸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곱씹어 보고 싶은 에세이를 간만에 만났다!!!

올해 손꼽는 책 목록에 올릴만한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도서관에 갈 이유 하나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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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말하는 죽음학 수업
박중철 지음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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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being 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well-dying 은 왜 들리지조차 않을까?

 

우리 주변에 장애인이 없는 게 아니라

 

타인의 차별섞인 시선이 두려워 밖으로 나오지 않고 꽁꽁 숨는 것처럼,

 

좋은 죽음, 잘 된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며,

 

삶을 잘 완성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궁금해 하며 펼쳐보았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객관적이고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

 

시종일관 동의하며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를 펼치고 마침내 완독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앞으로 바로잡아야 할 제도에 대한

 

저자의 주장과 분석들을 꼼꼼히 필사하면서 읽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각각 존엄하다고 배웠으면서

 

실상은 곳곳에 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인간이 만든 제도가 과연 인간에게 이롭게 작용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삶은 이렇듯 부조리함 투성이지만,

 

인간의 탁월함과 고결함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우리는 또한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과 규범들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자

 

문제의식을 갖고 개선하고자 노력하지만

 

여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돌리기가 참 녹록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부자의 고발과 좋은 세상을 위한 제언이

 

끊임없이 나오고 그것을 독자들이 읽어 곳곳에 퍼지게 한다면

 

또 모르죠..... 희망을 놓고 싶진 않습니다!

 

 

"황폐한 죽음의 문화를 고발하면서

 

삶만큼 죽음도 존중되는 세상을 제안하는 책" 이라고 설명하는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의 저자 박중철은

 

가정의학과 의사이면서 동시에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의사생활을 하다가 겪었던 어떤 결정적인 일로 인해

 

의사라는 직업과 현대 의학기술, 의료계의 모든 민낯들을 다시 보기에 이릅니다.

 

미덕과 관행을 바탕으로 하는 그 옛날의 마을 공동체가 아니라

 

이제는 법과 규범이 지배하는 이 개별화된 한국 사회에서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사자의 의사는 존중받지 못한 채

 

초라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이 사회의 불친절한 죽음의 문화를 고발하고 있어요.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던져진 채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지만,

 

모두에게 죽음이 놓여져 있다고 해서

 

그저 단순한 요식행위로 끝맺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새삼 갖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지 뭐' 체념하는 일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할 권리' 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진지한 고민도 없었을 뿐더러

 

인간이 점점 도구로 전락해 가는 사회이다 보니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일이 너무나 당연해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나는 지금 이 둔감함에 얼마나 젖어들어 있는지

 

경각심을 심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물론 경각심을 갖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죠.

 

좋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을 위해서

 

죽음 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와

 

법 제도의 변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임종실 설치의 필요성, 연명의료의 민낯,

 

안락사 논쟁의 신호탄이었던 김득구 선수 사건,

 

병원 임종을 일반화시킨 보라매병원 사건,

 

인공 영양과 같은 수명 연장의 의미, 마약성 진통제 처방,

 

현대 의학기술의 집착적 모순,

 

원칙만 고수하려는 한국 의료계의 도그마와 자기기만,

 

연명의료결정법, 호스피스 완화의료.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시스템이 인간의 존엄함에 반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들을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요목조목 접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웠고, 어이가 없었고, 과연 변할 수 있을까 거대한 관행 앞에 무력감도 생깁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각자의 좋은 죽음을 위해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사회적인 공감대를 갖고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진지한 관심을 갖고 실질적인 대안을 조직화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잠시 관성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을 멈추고

 

되돌아보는 시간부터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타인과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 시나리오를 좇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나의 죽음의 주인이 될 것인지.

 

 

주택임종보다 병원임종의 수치가 높은 것은

 

이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말해 줍니다.

 

분명히 대다수의 바램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도시화로 인해 마을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기 어려워지면서

 

죽음의 순간에 어떠한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사회적 약자들도 너무나 많아지고 있죠.

 

하지만 이 책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한정되지 않는 게 문제라는 점입니다.

 

이 사회 전체가 모두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불친절하다는 거예요.

 

개개인의 죽음에 대해서 이 사회가 친절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에게는 '비인간적인 태도' 라고 들렸습니다.

 

저자는 최전선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의사들까지도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필요성을 상당부분 느끼고 있으면서도

 

한국 의학계의 인식은 환자에게 끝까지 의학 기술을 펼치는 것이

 

최선이라는 기술주의 도그마에 빠져 있다는 것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 존중이라는 명분에 숨어서 치료를 놓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그것을 마치 의사로서의 실패라고 생각하는

 

의료진들의 집착과 자기기만, 위선적인 행위들을 꼬집고 있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 가족들의 인식이 더 뼈아프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연명의료는 당연히 환자를 위한 최선이 되어야 하고

 

자기결정권에 의해 행해져야 하는 것인데

 

생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명분, 가족의 사랑이라는 가면에 숨어서

 

죄책감을 피하려는 자기만족과 자기위로를 위한 변명이라는 것이었어요.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의료진들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비뚤어진 소명의식과 집단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일부 의료진들과 다르게

 

소신 발언,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의료진들도 분명 있습니다.

 

가족들이 환자를 향해 애도할 시간조차

 

넉넉히 주어지지 않는 이 불친절한 죽음의 문화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볼 수 있는 임종실의 설치를 아무리 제안해도

 

돈이 되는 장례식장만 여전히 확충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종실과 장례식장, 과연 무엇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죽음은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절대주의, 생명지상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물음에 의구심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는 와중에는 그래도 오래 사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생명을 연장하게 도와주는 일이 이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하지만 당신이 죽음 앞에 놓인 당사자라면..... ?

 

연명의료의 끝에 그 환자의 몸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죽음을 원하고

 

좋은 죽음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고통 없이죽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의료계에 몸 담고 있는 내부자로서 의료진들의 위험하고도 안일한 인식이 어떠한지,

 

현대 의학기술이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고 있는지,

 

이 사회는 인간의 죽음을 삶만큼이나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폭넓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통계 자료와 앞으로 어떤 개선방안들이 필요한지,

 

무엇보다도 법과 제도로 단순히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어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과정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마주하기 불편하고 씁쓸한 현실 앞에서도

 

오히려 더더욱 냉철하고 분석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이고 진지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느꼈습니다.

 

결국 이 사회를 둘러싼 모든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의 물건을 타인에게 아무 생각없이 맡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왜 자신의 죽음인데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결정에 맡겨 버리나요?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나 자신에게 있음을 모두가 인식한다면

 

현재 이 사회의 죽음에 대한 문화에 대해 다같이

 

심도있게 관찰하고 숙고해봐야 합니다.

 

'소멸하는 주체'는 결국 나 홀로이고 고통 또한 오롯이 나의 몫이니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불안의 근원인 고통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인간적인 연민을 놓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현대 의학기술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간의 존엄함을 짓밟는 것이

 

또한 기술주의라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존과 실존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였습니다.

 

인간에게 생존은 실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

 

생존이라는 말은 그 뒤에 '본능'이 자주 따라 붙는 것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저절로 일어나는 본성이지만

 

실존이라는 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맞서야 하고 도전해야 하는 것.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주체적으로

 

삶을 완성하고자 마지막 실존에 맞섰던

 

어느 의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숨결이 바람 될 때> 라는 책에서도 만났었구요.

 

살아가면서 실존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서야

 

비로소 실존을 인지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도전은 그래서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지도.

 

도전을 멈추지 않으면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게 되는 것이니까요.

 

(마음 한 켠이 웅장해 집니다 ㅠㅠ)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실존보다 생존에 더 몰입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한국의 보건의료 수준은 높지만

 

평화로운 임종을 위한 체계는 너무나 미흡한 게 현실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 수도 생각보다 적더라구요.

 

2010년 기준이지만 OECD 40개국 중 '죽음의 질 지수' 가 32위,

 

2015년에는 80개국 중에서 18위에 한국이 자리합니다.

 

 

 

 

 

연명의료는 필요하다 vs. 연명의료는 의미없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시겠어요?

 

저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연명치료는 본질적으로 환자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늦추는 것일 뿐이고

 

현대 의학기술을 만든 것도 인간,

 

그것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도 인간이라는 관점.

 

저자의 시선으로 본 현대 의학기술에는 인간성과 연민은 없다고 말합니다.

 

병원 임종의 가장 큰 문제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 역시

 

죽음이 인간적인 마무리가 아니라 하나의 의학적 사건으로 처리된다는 것이니까요.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환자를 잡아끌고 버티는 연명치료를

 

지금까지는 당연한 관행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환자는 원치 않는 연명치료에, 가족들은 경제적 부담을 줌으로써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예요.

 

고통경감에 주력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을

 

국가 차원에서 늘리는 일이 나와 가족,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의학계도 연명의료를 사명으로 여기며 기계적으로 행하는 그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개개인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어느 누구도 박탈할 자격은 없으니까요.

 

그런 특권이 의사에게는 없습니다 결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윤리적 최선이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왔던 의료진들부터 각성하고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주길.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의료인의 판단보다 우선시되야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니까요.

 

대한의학회가 연명의료의 무익함을 처음 제기한지 17년 만인 2018년에 드디어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되었다고 하는군요....;;

 

인간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담론과 공감대 형성 노력은 건너뛴 채

 

바로 입법 작업에 착숙했다는 것을 저자는 많이 아쉬워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순서가 좀 바뀌긴 했어도 법과 제도부터 바꾸는 일이 의미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근차근 바로잡는 그 시작이 되길 바래요!

 

 

 

 

 

저자가 하이데거라는 실존주의 철학자를 언급한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삶이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아야 하는 고통의 여정이라고 했다지요.

 

인간에게 늙어감과 죽음은 필연이라고 한다면

 

무의미하게 연명의료로 목숨을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운명을 마주할 용기로 삶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실존을 되찾을 것인가.

 

죽기 전까지 선택의 연속이지만 ..... ^^;;

 

선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은 알면서도 행동하기는 참으로 어렵죠.

 

늘 우리는 살면서 이렇듯 실존의 문제에 부딪히나 봅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과 현실을 균형있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아가 미래에 좋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삶에 실존의 문제를 붙잡을 수 있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삶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데 있어서 인생 도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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