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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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어쨌든 글쓰기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우리는 쓰기위해 ‘읽어야’하며, 글을 쓴 후에 그에 맞게 ‘실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의 ‘괴로움’을 성토하는 일은, 존재의 변증법을 빗겨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이라는 존재가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는 일은, 글쓰기 자체의 괴로움을 분석해내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른바 그의 ‘정치적 글쓰기’란, 결국 글쓰기라는 수행-노동이 내재하는 근원적인 ‘흔들림’을 감지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일상 속에서 우리들이 흔히 지나치는 사물의 원자적 굴곡들을, 탁본하여 대중들에게 ‘제시’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우리 시대 같은 때에 그런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엔 난센스다.”(p.297)  
   

 

그리고 이것은 결국 우리세대(20대)가 가진 ‘탈정치성’과도 연루되는 문제다. 20대라는 ‘주체’가 가지는 정치와의 누빔점이 사라지고, 그들의 글쓰기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선언이 침묵하는 지금, 우리는 오웰의 글쓰기에서 다름 아닌 ‘우리의 글쓰기’를 발견해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른바 ‘저자’로서의 글쓰기는 사라지고, 우리에겐 엘리트주의와 ‘2차 저자’로서의 삶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상황은 우리들로 하여금 ‘기표들’의 재구성을 통한 1차 저자로서의 ‘주체성’을 도입하자는 논의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레닌이 말한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s)'가 되거나, 아니면 오웰의 말처럼 “자기 임무를 수행할 뿐”(<영국, 당신의 영국>)인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의 의미로서도 충분히 유효하다. 또한 이에 말미암아, 우리들은 자신이 가진 ‘당파성’에도 대항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정치적 색깔을 선택하는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자신의 내부에 잠식한 ‘탈정치적 정치성’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우리의 당파성이란, 결국 ‘비당파적 당파성’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비미학적 사유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감성의 분할’과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다.

단순히 ‘파시즘’이나 ‘제국주의’의 대항마로서 오웰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이 결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시대가 내포한 ‘내셔널리즘(민족주의)’적 요소에 대한 분석(<민족주의 비망록>)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심리”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그것이 가진 특징을 나열하는데, 내집단의 우월성을 ‘강박적’으로 강조하는 모습들, 민족주의적충심의 불안정성, 행위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주체에 따라 판가름되는 사실-무시의 태도들을 통해 “어떤 민족주의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말로 일단락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바라본 우리사회의 ‘분열적 주체’의 모습들은, 그가 말하는 ‘반복강박’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확연하게 정치적 행위자로서 분열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만큼이나 정치적 언어들과도 분절되어 있다. 예컨대 ‘진보적 지식인’들이 가지는 자폐적인 모습이나 보수정당이 가지는 사실-무시의 태도들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는 정치적 언어의 메스꺼움을 감지할 수 있다.(<정치와 영어>)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니체적 사유(선악의 저편)를 떠올리게 만들며, “생각을 숨기거나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언어에 대해서”분석한 그의 수행은 라캉의 ‘언표된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의 관계망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우리에겐,(그리고 오웰에겐) 글쓰기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주체적 양태에 있어서도 “정치적 목적”(<나는 왜 쓰는가>)이 향유되어야 하는 것(했던 것)이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이른바 세대론의 탈정치성을 다룰 때만큼이나, 그 탈정치성에 대한 ‘사유’가 이미 정치적이라는 지점을 간파해내야만 한다. 그래서 사실, ‘정치적 글쓰기’라는 말은 사실 동어반복이다. 그것은 (정치적) 글쓰기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글쓰기라는 수행-노동이, 그의 말처럼 이미 충분한 ‘정치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글쓰기의 괴로움으로 돌아와 보자. 어쨌든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며,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이 자신을 ‘지우는’(작가의 죽음, 글쓰기의 영도?)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고독하고 힘겨운 ‘중간자적’ 노동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와 관련한 20대라는 주체의 글쓰기와 ‘목소리’는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할 것인가? 다만 그것은, 오웰의 말처럼 “절반이지만 온전한 자신”(<작가와 리바이어던>)에게서 표출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즉, 작가(1차 저자)로서의 사회적 ‘요구’를, 우리는 나름의 ‘정치적 스탠스’의 정초를 통해서만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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