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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직언하고 가차 없이 탄핵하다 -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
이성무 지음 / 청아출판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 역사는 왕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단일 왕조가 4~500년을 지속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 이면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정복왕조가 없는 관계로 지배계층의 변화가 없었다는 이야기와 통한다. 고려의 지배계층으로 신라의 귀족 후손이 등장하고 조선의 양반층 역시 고려의 귀족층의 후손이 즐비하다. 다시 말하자면 피지배계층의 입장으로 보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란 생각을 잠시잠깐 하게 된다.
왕조가 500년동안 지속된 요인중의 하나로 부정부패의 고리를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구비를 근거로 드는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란 책의 주된 논지이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주청을 들이고, 암행어사 출도야라고 외치는 소리가 전국방방곡곡을 울려도 조선은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구비하여 500년간 유지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세력과 신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세력간의 끊임없는 대립과 상호 견제의 역사였다. 3번 이상 간했을때 짐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 주청하지 말라는 왕의 말을 끝까지 거부한 대간들이 있었다 하더라고 왕의 입장이 관철되었다 하지만 대간들은 그 이후에도 관리 임용이나 주요정책에 토를 달고 반대의견을 목숨걸고 내놓았다.
지금의 우리 정부에도 백성을 위해 관직을 걸고 진언을 할 참모나 관리들이 있는가? 전무하다고 보인다.신하는 왕권을 견제하고 왕은 신권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에 덧붙여 백성이 이 둘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면 아마도 조선왕조가 역사의 유물로 기억되지 않고 복원되지 않았을까?
관리들의 임명에 대한 심사,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왕의 정책에 대한 견제를 위한 사간원,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을 일러 언론 삼사라 하여 관직중 최고의 관직이라고 칭하고 대제학을 많이 배출한 집안을 명문가라고 했던 광산김문의 후손인 고교시절 은사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간은 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임무를 가진 대관(臺官)과 국왕을 간쟁(諫諍)하는 임무를 가진 간관(諫官)을 합쳐 부르는 말로 사헌부가 대관의 소임을 담당했다면 사간원이 간관의 소임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여기다 홍문관까지 합세하여 상호협조하기도 하였지만 상호 견제를 통해 적임자를 임명하고 그른 정책을 바로잡는데 자신의 목숨을 건 대쪽 같은 선비정신을 우리는 읽는다.
놀라운 사실은 부하관원이 사헌부나 사간원의 수장을 탄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명하복의 원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검사, 경찰, 군은 물론이고 공직사회 내부비리 고발자를 보호해주지 않는 우리 현실에 대비하면 가히 충격적이다.
또한 인구에 회자되는 풍문만으로도 고위관료를 탄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의 부정부패가 자심했었다는 방증이며 두 딸을 거푸 왕에게 바친 한명회에 대한 탄핵이 수도 없이 많았음에도 오랜 기간동안 만인지상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간제도의 한계도 분명하다.
대간은 천하제일의 인물,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 가문좋은 문과 급제자여만 오를 수 있는 관직이었으며 이들은 청요직으로 출세가 보장되는 자리기도 했기에 친가는 물론이고 처가의 조상중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임면이 취소되었을 정도였다. 이런 중요한 직책에 대한 인사권이 의정부에 있지 않고 이조전랑에게 있었다는 것을 고구하면 정권이 바뀌어 임기가 보장된 공공기관의 수장들이 대통령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모두 옷을 벗어야하는 지금과 크게 대비된다.
조선왕조의 대간제도가 순탄한 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태종, 세조, 폭군의 치세기엔 대간은 존재했으되 그 역할이나 위상이 크게 축소되었고 세종대왕 치세 초기에도 대간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간제도와 아울러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문과 급제자를 중심으로 암행어사를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다고 하지만 매관매직, 탐관오리를 근본적으로 막는데는 실패하였고 대간제도가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왕조는 망국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내인론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조선이 대간제도와 암행어사를 통해 부정부패를 척결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고구하기 보다는 조성왕조 500년 존립의 근거를 신권과 왕권의 상호견제를 통해 부정부패를 최소화시켰던 제도적 장치와 그 역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전직대통령의 비리 관련 신문기사를 서두와 종언에 거푸 인용한 것은 정치적인 색채가 은연중에 배여있다는 느낌도 든다.
조선시대에도 대간제도와 암행어사를 통해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자정을 하려했고 왕권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자 목숨을 걸고 진언을 거듭했던 조선 선비들의 대쪽같은 정신에다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려는 공직자 정신을 지닌 고위관료가 드문 현실이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