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여자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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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노년 여성 알리야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거부할 수도 없이 떠밀려 온 초년의 인생이 다행히도?? 4년 만에 이혼을 해준 남편 덕에... 
그녀만의 삶이 되는 아이러니.

삶에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위엄'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비단 여성의 삶 뿐 아니라 베이루트의 남성 역시 끔찍한 선택의 길 뿐이었다는 비극이 담담하게 그려져 더 깊이 있게 다가왔다.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전시의 베이루트에서 늙음이라는 결코 우아하지 않은 삶의 과정을 되뇌이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던 사람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열리는 과정을 보는 일도 작은 행복을 준다.

삶은 그렇게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알려주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적당히 참견쟁이에 적당히 다정한 사람들이 둘러보면 늘 주변에 한 둘은 있는 것이다.

세 마녀 만세!

노년 여성의 내면,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문화권에 대한 깊은 이해, 여성들 간의 연대를 그려내는 시선이 너무나도 여성적이라서 작가 라비 알라메딘이 59년생 남성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느껴졌고, 다른 책들이 더 없는지,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검색을 해보다 그림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활동, 성적 지향이 이런 깊이 있는 이해가 아마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2009년 출간된 적 있는 하카와티는 이미 절판된 것 같고, 다른 책은 더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진짜로!! 아쉬워!!


- 책을 읽고 쓰는 일은 아마도 인간의 존엄성에 남은 마지막 무기일 것이다.
신마저 증발하고 없는 이 끝없는 굴욕의 시대 이전에
신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던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면 말고. -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 정신이 팔린 이유에 대해 가벼운 변명을 해보자면 이렇다. 연말이 되면, 나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해 완성한 번역본을 읽어본다. 최종적으로 소소한 수정작업을 하고 페이지를 순서대로 놓은 뒤 상자에 넣는다. 레드 와인 두 잔을 마시며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다. 고백하자면, 마지막으로 다시 읽어보면서 비로소 나 자신을 격려하고 작업을 잘 끝낸 것을 자축한다. 올해에는 소설 <아우스터리츠>를 번역했다. W.G.제발트의 작품은 두 번째다. 오늘 원고를 읽으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마도 주인공의 고독한 절망 때문이었겠지만 한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 14

- 성인이 된 후 거의 매해, 정확히는 스물두 살 이후로 거의 매년 1월 1일 번역을 시작했다. 이날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공휴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 첫날 일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나도 물론 알고 있다. 하루는 베토벤 소나타 필사본을 뒤적이는데, 끝에서 두 번째 작품인 작품 번호 110, 가장 훌륭한 내림 가장조 소나타에만 우측 상단에 날짜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작곡가가 1821년 성탄절에 일을 하느라 바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한 것 같았다. 나 또한 공휴일에도 일을 하는 편을 택한다. - 15

- 책을, 묶이지 않은 상태의 번역본을, 상자에 넣는 일. 그것이 내 삶이다. -16

- 나는 이미 오래전에 글에 대한 맹목적인 갈망에 나를 맡겼다. 문학은 내 모래 놀이터이다. 나는 그 안에서 놀고, 요새와 성을 쌓고, 황홀한 시간을 보낸다. 날 힘들게 하는 것은 놀이터 바깥의 세상이다. 나는 눈앞의 세상에 온순하게, 그러나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적응해왔다. 내 안의 책 세계에 큰 불편 없이 은거하기 위해서였다. 모래의 비유를 변형해 보자면 문학은 내 모래 놀이터, 현실 세상은 나의 모래시계이다. 모래는 한 톨 한 톨 빠져나간다. 문학은 내게 삶을 주고, 삶은 나를 죽인다. 하긴 삶은 누구든 죽인다. - 16

- 나는 혼자다.
이것은 내가 내린 선택이지만, 다른 선택지도 거의 없었다. 당시 베이루트 사회는 아이가 없는 이혼녀에게 그다지ㅣ 다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누울 자리를 보았고 다리를 뻗었다. 소박하고 편안하고 적당한 자리였다. - 20

- 쿠란의 내용이 유치하고 고압적이라고 조롱할 수는 있지만, 쿠란의 문체는 다르다.
내 눈을 뜨게 한 것은 결국 시였다. 쿠란이 아닌 시가, 보옥을 다듬는 그 기술이 나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사랑의 발견이 꼭 시의 발견보다 더 아름다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더 관능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 불을 붙인 시인을 기억한다. 새카만 전사 시인 안타라였다. 죽을 위기의 언어가 소생되던 순간의 충격을 기억한다.
너를 기억했다 창끝이 내 안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흰 칼이 내 피를 뚝뚝 떨어뜨릴 때
나는 간절히 칼날에 입 맞추고자 했다
네 미소처럼 번득이던 그 칼날에 - 23

- 아버지는 나에게 줄 가르침이 없었다. 가족 누구도 나에게 건넬 말이 없었다.
나는 우리 집안의 맹장이다. 불필요한 부속 기관이다.
이 집안은 나를 열여섯에 시집보냈다. 학교를 유일한 보금자리로 삼았던 나를 설익은 상태로 따다 몸도 마음도 작은 사람에게 주었다. 청소년에게 결혼만큼 불쾌한 제도는 없다. 신혼집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였는데, 남편은 4년도 채 지나기 전에 내 앞에 서서, 법의 요구에 따라, 그 무엇보다 짜릿한 선언을 했다.
"당신과 이혼한다."
이혼은 남편이 결혼 생활을 통틀어 보여준 가장 자기다운 결정이었다.
그 불능충은 문지방을 넘어 나갔고, 그 이후로 이 집 바닥에는 한 번도 그 자의 발이 닿은 적이 없다. 나는 어렸지만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 천성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밀고 닦고 치우고 살균해서 그 어떤 흔적도, 그 어떤 냄새도, 머리카락 한 올도, 손자국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가 중후해 보이려고 피우던 냄새 지독한 파이프와 더러운 모자를 걸어두던 못들도 벽에서 뽑았다. 파이프 재에 그을려 여기저기 구멍이 난 장식용 깔개들은 바늘과 실타래로 빠짐없이 손질했다. 모기장은 표백제에 푹 담갔다.
나는 그의 냄새가ㅏ 저절로 빠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싹 없애버렸다. - 27

- 수년 뒤인 1982년, 그 모든 것이, 문을 두드리고 욕을 하며 집을 내놓으라던 동생들의 외침이,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포위 공격과 함께 멈추었다. - 36

- 마침 주인이 짙은 색이 칠해진 거대한 참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부싯돌이 되어 내 안에 불길을 지폈다.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스무 살 이혼녀에게 그런 책상 뒤에 앉는 것은 정말 위엄 있고 호화로운 일, 꿈꿀만 한 일로 여겨졌다. 내 삶에는 위엄이 필요했다. - 41

- 한나는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나타났는데, 나는 한나의 겉모습을 걱정하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난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코앞에서 꽃 피는 기적도 놓치곤 한다. 흐릿한 별에 집중하느라 별자리를 놓친다. 빨래를 널어두었는지 걱정하느라 휘황한 폭풍우를 못 보고 지나간다. - 76

- 나는 읽는 사람이다. 그렇다, 성가신 허리 통증을 견디며 읽는 사람이다.
뼈가 쑤시거나 허리가 반항하면 수년 동안 몸을 소외시킨 데 대한, 심지어 멸시한 데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나는 나의 육체를 개탄했고 이제 나의 육체는 나를 개탄한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나로부터 정당한 관심을 요구한다. 권리를 주장한다.
한때는 몸보다 정신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높은 데 있는 알리야. 딸로 있는 알리야.
알리야, 만물의 위에 있는 알리야.
슬프도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 80

- 파디아를 향한 나의 감정의 매듭을 푸는 일은 프쉬케의 그 어떤 과업보다 힘들지만, 나를 향한 파디아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더 어렵다. 이 아이는 어린 신부였던 나를 우러러보았지만 이혼녀가 된 나를 혐오했다. 그러나 함께 나이가 드는 동안, 저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혐오하지도 않는다는 듯 예의를 갖추어 나를 대했다. 그리고 가끔은 매우 깊은 친절과 관용을 베풀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타인으로 살 수가 없었다.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서로 돕고 지지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익숙한 우정 같은 것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예의를 차려 무의미한 말을 나누는 것 이외에는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한 마디씩 섞을 뿐이었다. - 120

- "전쟁 중에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내셨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아, 그렇구나. 레바논 사람들이 피에 굶주렸을 때 책에 굶주리셨군요." 파디아의 웃음소리가 냇물처럼 졸졸 흐른다. 내가 웃어주지 않자 덧붙인다.
"인정하세요. 재치 있었잖아요."
"그래." 나는 인내심을 갖고 고개를 끄덕인다. - 133

- 살을 대고 있는 두 청소년은 더할 나위 없이 살아 있고 더할 나위 없이 밝다. 그 앞으로, 유리창에 창백한 은백색으로 반사된 나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는 움찔한다. 불멸의 청춘 곁에 선 불멸의 노년.
그러나 당신께서 보낸 강력하고 성난 세월은 뜻대로 했고,
나를 쓰러뜨리고 망치고 야위게 했습니다. : 알프레든 테니슨, <티토노스> - 139\

- 나는 출간이 아닌 번역에 목숨을 건다.
이제, 작업이 끝나면 별 관심을 두지도 않으면서 왜 그토록 열심히 번역을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뭐랄까, 나는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헌신한다. 난해하게 들릴 수 있고 그렇게 들리는 것도 싫지만, 어쨌든 내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그 행위, 작업 그 자체이다. 일단 책 한 권을 끝내면, 경이로움이 사라지고 수수께끼는 풀린다. 그러면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불안의 서>에서 페소아는 이렇게 말한다. "탁월한 인간에게 어울리는 태도는 오로지 이것, 스스로 쓸모없다고 여기는 활동을 지속하는 것, 무익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지극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의 규범을 적용하는 것."- 165

- 갓 태어난 희망찬 조국이 독립 첫해를 맞은 1944년도 후반에 이르자, 한나는 계속 집에만 있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대의 젊은 중산층 여성이 뭘 할 수 있었을까? 학교를 나왔고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영어로도 "하우 두 유 두?"라고 인사할 줄 아는 여성이? 고등학교 때에는 철학을 사랑하고 또 잘했던 여성이 뭘 할 수 있었을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
학교를 나왔고 두 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세 번째 언어도 기본 정도로는 할 수 있는, 고교 시절 철학을 사랑하고 잘했던 젊은 중산층 여성은 병원은 어디에 배치했을까?
당연히 식당에서 배식을 하게 했다. - 203

- 아침은 지나갈 것이다. 슬프고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겠지만 지나갈 것이다. 내일과 내일, 또 내일도 이같이 하찮은 걸음으로 다가온다. - 241

- 내 무덤의 비석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 너무나 많은 가능성, 선택지가 있다.
"여기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이제는 죽고 없는, 여전히 홀로이고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알리야가 잠들어 있다."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지어다. 그대가 정복한 것은 작은 점 하나." - 259

- 가령 결혼하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알았다면 수업 시간에 질문을 훨씬 더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강제로 번데기에서 분리되어 세상의 모진 빛과 위협적인 폭풍우와 마주해야 했던 나방이었다.
나에게 어떤 선택지가 주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더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그 얼간이에게 좀 더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놈이 거들먹거리며 피우던 그 담뱃대를 목구멍으로 쑤셔 넣어 버렸을 것이다. - 303

- 나는 무해함의 화신이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이나 애정을 바라지 않고 어떤 감정도 기대하지 않는다. 적이 생길 만큼 눈에 띄는 존재가 되길 바란 적도 없다. 태생적으로 수줍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늘 외톨이 신세지만 언젠가 참나리로 꽃 피어 요란하고 화려한 향기를 뿜고 싶다는 깊은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단지 타인이 내 삶을 방해하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 또한 타인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살고자 한다. - 319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바랄 수조차 없다.
그와 별개로, 내 안에는 온 세상의 꿈이 다 있다. - 409



2026. may.

#불필요한여자 #라비알라메딘 #강력추천도서
#anunnecessarywoman #rabihalameddine #뮤진트리 #이다희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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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6-08-19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좋았던! 하카와티 중고책 사놓긴 했어요.

hellas 2026-08-19 14:36   좋아요 1 | URL
다른 책도 읽고싶어요 :) 올해의 책 중 하나
 
당신의 독자가 될게요 - 혼란을 끌어안는 쓰기에 대하여
정세랑 지음 / 마음산책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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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조언.

예상보다도 훨씬 더 글쓰기 독려의 글이다.
망설이고 있다면, 한 글자를 써 내려가기 어렵다면 그러지 말아요 라는 친절한 권유.

정세랑 작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보다는 이런 류의 일을 더 하고 있는 시기인가 싶다.
작가도 외부 활동 같은 것이 더 필요한 시기가 있을 수 있으니까.

말했듯 꽤 강연류의 산문이라 후루룩 (조금 설렁설렁) 읽었다.

- 존재하는 책들이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초대해 오기를 바랍니다. - 들어가는 말

- 뇌과학에 관련된 책들을 즐겨 읽는 편인데, 글쓰기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도 한다. 불안과 우울에 특히 효과가 있다고 읽었다. 돌이켜보니 나도 정신 건강에 상당한 도움을 받은 것 같다. 글을 쓰기 전보다 밝아졌다는 평을 자주 듣고는 한다. - 31

- 책에서 책으로 점프하다가 며칠이 사라져 버렸다? 시간 낭비를 한 것이 아니다. 당신 안에 다른 사람에게 없는 정보의 사슬이 생겼을 테다. 딴 생각으로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심한 게 아니라 창작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흥미를 끄는 분야가 계속 나타난다? 산만하다는 비난을 튕겨내야 한다. 머릿속 기동력이 좋은 것이다. - 36

- 때때로 장르문학이나 대중문학을 대놓고 멸시하는, 여성서사나 소수자서사에 덮어놓고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도 마주쳐야 했는데 지나고 보니 무언가를 덩어리로 뭉쳐 사고하는 사람에게 굳이 모멸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구나 싶다. 성긴 평에서 드러나는 것은 저쪽의 바닥이며, 다행히 정교한 쪽이 비교할 수 없이 다수다. - 70

- 읽고 쓰는 사람들 사이는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 한 번 만난 적 없이도 매일 만나는 이들보다 가깝다. 온기도 떨림도 전해지는 그 가까움 속에서, 독자라는 상대를 궁금해하며 쓴다. - 150

- 쓰는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주섬주섬'인 듯하다. 기대만큼 멋들어진 모습은 아니겠으나 헤매고 주워 모으며 우리 발걸음이 그리는 점선이 종종 겹치면 좋겠다. 서로의 채집통을 들여다보고 환히 놀랄 수 있도록. - 202

2026. jul.

#당신의독자가될게요 #정세랑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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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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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다. 재미 보단 의미를 읽으면 좋다.

그러나 지나치게 묵직하니 조금은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또 그러나 공감, 공유할 수 있는 주제들로만 모여있어 후루룩 읽게 된다.

- 어려서부터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솔직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내 존재가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돌아보니 그 소망은 정확하게 내 결여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이 결여한 부분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일까.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그게 용기인 줄도 모른다.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인생이니 삶이니 같은 말에 관심이 없다. 내가 용기나 자유 같은 가치에 끌렸던 건 내가 비겁하고 부자유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 16

- 나를 추동하고 나아가게 하는 내 안의 이야기,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의 방식, 쓰지 않으면 어째서인지 약해지고 마는 나의 존재.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백지 앞에 서게 한다. - 49

- 나는 아픔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픔은 개개인의 가장 깊은 욕망보다도 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어떤 말이나 표정 때문에 누군가는 삶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처럼. - 54

-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았지만 그뿐이었다. 이번 일을 지나면서야 나는 삶이 그저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나에게는 바로 지금, 현재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로, 미래에 대한 기대나 불안으로 나는 나의 현재를 무가치하게 대했다. 내 진짜 삶은 언젠가 도래할 것이며, 내가 나로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는 건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이라고 나를 속이고 길들였다. 하지만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에 지레 겁먹으면서 현재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내 진짜 삶은 언젠가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불완전해 보이는 여기에 있다. - 96

- 과거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이야기 속에 담아 말하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의 경험을 듣는 것. 그런 일들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감지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경멸하고 조롱하는 정서가 어느 때보다도 만연한 요즘인 것 같다. 프리모 레비는 어떤 사회라도 대화를 포기하고 파시즘으로 흐를 때 언제든 수용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더 대화해야 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우리가 겪어온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들을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과거를 바로 세울 때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책임한 비관주의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 225

- 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사회의 인간성에 대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애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자 동시에 인간의 권리이기도 하다. - 237

2026. jun.

#백지앞에서 #최은영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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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정지돈 지음 / 스위밍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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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세상.
2 강의 국가가 무너지고 총기가 난무하는 디스토피아.

첩보물스러운데 반이 넘어가도록 무엇을 원하는 이야긴지 모르겠다.

'불필요한 여자'와 같이 읽고 있었어서 전시상황의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는다.

결말 없는 결말이랄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예감이 드는 결말.

디스토피아 소재의 이야기는 늘 막막함으로 끝맺지만 계속 읽는 이유는
그럼에도 나아가야, 해나가야 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늘 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 서울을 떠나는 순간 벌집이 될지도 모른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가 차량을 탈취당하고 무릎이 꿇린 채 뒤통수에 총알이 박힐지도 모르고 도로에 설치된 지뢰나 크레모아에 의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 볼일이 급해 국도에 차를 세우고 벌판으로 달려가다 저격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겠지. 아픈지도 모르고 슬픈지도 모르고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의 유일한 장점은 남들은 알지만 자신은 모른다는 거다. 그것도 영원히. - 18

- 안드레아는 짐에게 무하마드의 삶을 글로 써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짐은 좋다고 했지만 쓰지 않았다. 무하마드의 삶에 이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하마드의 삶은 그가 좋아하는 것과 정반대였다. 학문에 대한 열의, 민족에 대한 애정, 가족에 대한 사랑, 미래에 대한 확신, 과거에 대한 그리움. 짐은 어느 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 27

- 총은 감정을 가진 것처럼 스스로 발사되었다. 사람이 총을 쏘는 게 아니라 총이 사람을 쏘는 거야. - 36

- 재앙은 지진이나 홍수처럼 갑자기 도래하는 게 아니오. 무하마드가 말했다. 우리가 눈을 감았기 때문이오. - 91

- 보리는 성격이 그렇다는 말로 둘러대곤 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에요. 하지만 보리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걸 포기한 지 오래다. 남들이 뭐라고 지껄이면 그냥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다 망해버렸으면. 다 죽어버렸으면. - 100

- 그녀도 바람이 필요했다. 바람은 먼지와 죽음을 실어 날랐고 그 안에는 소량의 활력과 생명도 있었다. 바람이 맨살에 닿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살아 있다는 자각이 함께 찾아왔다. 그건 이상한 청량감이었다. - 111

-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할수록 슬픔이 찾아왔다. 그는 터무니없이 무책임하고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 우리는 생각한다. - 118

- 내가 제일 보고 싶은 건 그림자야. 길고 선명한 그림자. 그런데 마음이라니. 그런 게 왜 있는 거지? - 138

-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한다. - 154

- 다른 사람이 뭐가 중요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다른 사람 중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사는 거니까, 다른 사람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작가의 말 중


2026. may.

#작은겁쟁이겁쟁이새로운파티 #정지돈
#스위밍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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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9
피천득 지음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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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작가들은 읽기 전 부터 핀트 나간 윤리관, 성인지 감수성 등의 지점에서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감정적 불쾌함과 불편함이 있기 마련이지만 
피천득이라는 사람은 참 서정적이고 잔잔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싶은 산문들이다.
그 서정과 애정이 구닥다리이긴 하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친일로 변절한 춘원 이광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글이 포함되어 있는데 흥미로웠다.

민음북샵에서 구입해서 편집자 레터가 있었는데 이런 레터 참 좋다.
롯데월드에 있는 피천득 문학관에 전시된 소박한 작가의 책장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나.
몇 권 되지 않는 책들과 볼품없는 책장에 대한 묘사는 직접 본 것은 아니라도 그 분위기가 느껴졌다. 

- 처음 제가 생각했던 제목은 '편지'였어요.
편지란, 그리고 편지를 둘러싼 감성이란,
피천득의 문학 그 자체라고 생각했거든요.
누군가 저에게 피천득 문학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제 상각은 '편지'.
누군가에게 당장 편지하고 싶어지는 두근거림,
그 연약하고 적극적인 박동이야말로 편지의,
그리고 피천득 글의 실체가 아닐까요. - 한국문학팀 박혜진 편집자 레터 중

- 산호와 진주는 나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산호와 진주는 바닷속 깊이깊이 거기에 있다. 파도는 언제나 거세고 바다 밑은 무섭다. 나는 수평선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잠수복을 입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는 고작 양복바지를 말아 올리고 거닐면서 젖은 모래 위에 있는 조가비와 조약돌 들을 줍는다. 주웠다가도 헤뜨려 버릴 것들이기에, 때로는 가엾은 생각이 나고 때로는 고운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산호와 진주가 나의 소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리 예쁘지 않은 아기에게 엄마가 예쁜 이름을 지어 주듯이, 나는 나의 이 조약돌과 조가비 들을 '산호와 진주'라고 부르련다. - 서문 중, 13

-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 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깃빛이거나 진줏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 17

-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물론 마음의 자유를 천만금에는 아니 팔 것이다. 그러나 용돈과 얼마의 책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마음의 자유를 잃을까 불안할 때가 있다. - 86

- 큰일을 하는 분은 대범하다는 말은 둔한 머리의 소유자가 뱃심으로 해 나간다는 말이다. 지도자일수록 과학적 정확성과 예술적 정서를 가져야 한다. - 145

- 누구나 큰 것만을 위하여 살 수는 없다. 인생은 오히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 190

-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하게 하여 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 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 준다. - 227

-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세월이 빨라서가 아니라 인생이 유한하여 이런 말을 하게 된다. - 266

- 빈한이 아니라 한빈 속에서 봄을 기다립니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라던 피천득 선생의 파릇한 문장을 가슴에 안고 또 한 번의 봄을 기다립니다. - 작품 해설 중

2026. may.

#악수도없이헤어졌다 #피천득 #민음세계문학 #수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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