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 월드
이치호 미치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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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바와 비슷한 슴슴한 따스함이 있는 단편집.

잘 읽히는 위로를 건네는 이야기들이고
출판사 피니스아프리카에 다운 느낌이 든다는 감상.
그 느낌이라는 건.. 단순한 힐링물에 그치는 게 아닌 약간의 감정적 묘오오오함 이랄까 ㅋㅋ

네온테트라.에서는 재해가 일상인 나라의 감각이랄지. 아니면 그저 일본 특유의 사고방식이랄지가 느껴졌다.

하나우타, 꽃노래 콧노래라는 단어를 알게 됨.

- 원치도 않는 이따위 행운은 왜 이다지도 쉽게 찾아오는 걸까. - 9, 네온테트라

- 밤의 편의점은 수조를 닮았다. 인공조명 아래 유리 상자. 그 속에서 회유ㅏ고 스쳐 지나가는 동족의 생명체들. 무리도 있고 연인도 있고 가족도 있다. 그리고 고독하게 홀로인 사람도 있다. 나는 편의점 밖에서 안을 엿보다가 무료한 표정의 쇼이치를 발견하면 늘 안도감과 함께 가슴이 저렸다.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곳에 있기를 바라면서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갈 곳 없는 모성 본능과 여성 호르몬의 폭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와 드문드문 나누는 대화와 차량의 헤드라이트에 끊임없이 추월당하며 밤길을 걷는 짧은 시간이 지금은 필수 불가결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햇빛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별빛도 달빛도 원하지 않았다. - 29, 네온테트라

- "왜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귀갓길에 쇼이치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친절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기 때문 아닐까?" - 38, 네온테트라

- '작은 조각 하나 없다고 안 되는 거라면 시시하다.'라고 당신이 편지에 썼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을까요. 다른 걸로 메꾼다고 해도 원래의 모습은 될 수 없습니다. 퍼즐이 빈자리에 두꺼운 종이를 끼워서 맞춘 후 색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퍼즐 조각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없지만 조각을 맞추다 보면 커다란 그림이 나타납니다. 시시하다고 던져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잃어버리면 원래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면 사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 177, 하나우타

- 이유나 원인을 다른 사람과 연관 지으면 인생이 점점 부자연스럽게 돼. - 232, 사랑의 적량

- 그랬다. 적량이 아니어도 좋은 때가 있다. 이룰 수 없는 소망이나 기도는 넘쳐도 괜찮은 것이다.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소망이 꼭 무력한 것은 아니다. - 252, 사랑의 적량

- 불학실성은 자유롭고 또 쓸쓸하다. 하지만 그 다리는 다시 한번 건너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293, 장례식


2026. jul.

#스몰월드 #이치호미치 #피니스아프리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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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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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구성된 기이한 이야기들.

기담의 소재가 돼도 일말의 연민도 안 느껴지는 대상인 친일파가 소재인 이야기들이 특히 재밌다.

뒷담이 서늘하게 되고 흘려버리는 게 아니고 곱씹게 되는 이야기들.

요즘 성해나 작가를 보면 드는 생각.
어떤 작가가 마음에 들어와 좋아하게 되면
기세라는 게 독자에게도 생기는 것 같다. 

읽을수록 좋아진다.

그리고 7월에 이 책을 읽고 8월에 터진 어느 배우의 가족사 이슈에 다시 한번 이 책이 생각났다.
끝나지 않은 역사의 자국들.
제발 좀 청산할 일은 청산하고 살게 되면 좋겠으나,
그게 쉬웠다면 뭐....

-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 22,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을 쓸 무렵, 우연히 '미카라데타사비'라는 일본어 속담을 접했다. 검에 밴 녹이 검을 전부 삭게 한다는 뜻으로, 우리말로 풀면 자업자득일 것이다. 저지른 악행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이 말을 나는 온전히 믿지 않는다. 세상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은 듯싶다.
이 소설 속 김아홍, 황보, 그리고 화자 역시 대를 이어가며 크고 작은 악행을 벌이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 형벌도, 비난도, 멸시도.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
역사는 대패질하듯 말끔히 깎아내거나, 모두가 함구한다고 해서 소거되지 않는다. 죄를 덮은 자리에는 꺼슬꺼슬한 흔적이 남는 법이다. 자업자득을 온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죄의식이나 수치라는 방식으로나마 돌아오길 바라는 바이다. - 작가 해설 중, 24

- 인간 아닌 인간.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괴수나 AI일 수도 있고 귀신 혹은 신일 수도 있지만, 인간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작가 해설 중, 51

- 지금도 나는 조부가 그 말을 한 이유에 대해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차를 타고 적선동을 지날 때, 천막 농성을 벌이는 사람들을 무심코 지나칠 때,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암묵할 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삶은 안락할 때.
부끄럽다는 조부의 고백을 이해하려 애쓰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여전히 잘할 수 없다. -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87

- '찬란한 이면, 죽음을 통해 보여주는 생의 덧없음.'
작품 해설을 되풀이해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다이아몬드를 박은 해골을 사람들은 예술이라 부르고 작품이라 일컬었다.
사람들은 왜 무의미에 의미를 덕지덕지 덧붙이는 걸까. 단순한 사물에 복잡한 상징을 더하는 걸까. - 매일, 99

- 그렇게 모이면 재미있냐?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죠.
이상한 사람도 많을 거 아냐.
많죠.
근데 왜 하냐?
큐가 뜸을 들이다 묻는다.
감독님, 감독님은 소속이 어디예요?
어리둥절해진다. 소속. 내게 소속이 있던가. 한참 고민하는데 큐가 말을 잇는다.
모르겠죠? 근데 사람들은 매번 물어보잖아요. 소속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 나왔냐? 직장은 다니냐? 소속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근데 속해보니까 그래요. 찐따들이어도요, 모이면 단단해져요. 그리고 되게 웃긴 게 그 안에 있으면요. 나도 조금 쓸모 있어지는 것 같아요.
큐가 돌아가고 혼자 남는다. 겨우 둘이었다 홀로 된건데 사람 소리가 사라지니 헛헛해진다. - 윤회(당한) 자들, 186

- 왜 다시 넣어?
이익의 물음에 도윤이 답했다.
허기 지지 않은 것 같아서.
도윤이 사육장 속 뱀을 빤히 바라보았다.
쟤는 날 물려고도 않잖아. 뭐든 먹이로 보고 덤벼드는 놈을 고르는 게 좋아. 그래야 좀 쓸 만하지.
그럴 때 도윤은 정말 사람 같았다. 순수할 만큼 악하고, 우열에 민감하며, 약한 지점만 기막히게 포착하는 사람. - 고, 294

- 안팎의 구분 없이 빙글빙글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는 빠져나가려 해도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는 구조나 자기모순에 붙들린 인간과 닮아 있다. 형상은 다르지만, 제 꼬리를 집어삼키며 영원히 순환하는 우로보로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끊어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는 질긴 고리. 인간의 욕망, 권력 세습, 사회적 재연이 이에 해당하지 않는가.
(...)
지금은 입력을 받아 출력을 내놓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답만 내리던 기계가 언젠가는 우리에게 되묻고, 나아가 삶의 방향까지 쥐고 흔드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욕망이 빚은 가장 큰 저주란 그런 것 아닐까. - 작가 해설, 308


2026. jul.

#인비인 #성해나 #기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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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큐레이션 리커버) ㅣ 박경리 탄생 100주년 기념 큐레이션 리커버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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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한 권으로 축약해 여성 서사로 만든다면 이 책이구나 싶은 이야기.

당시의 관점으로나 현재의 관점으로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될 법한, 장녀와 3녀의 행실이 혐오스럽거나 꺼려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생존을 절실하게 갈구하는 생명력의 현신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건,
그 당시의 불합리한 견고한 신분제와 남녀의 위계, 차별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와 한실댁의 서사는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여성의 삶의 파노라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족의 역사를 팔자와 딸 들 탓을 하는데
이게 다 아비가 시킨 결혼 때문 아닌가 싶은 게.... 한숨 포인트랄까.

재밌고 속도감 있는 독서였다.

사실 김약국의 딸들은 이미 읽었다고 생각해서 오랫동안 미처 못 읽은 책이었는데
좋은 기회에 제대로 읽게 되어 다행이다.

-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 9

- 실로 바다는 그곳 사람들의 미지의 보고이며, 흥망성쇠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타관의 영락한 양반들이 이 고장을 찾을 때 통영 어구에 있는 죽림고개에서 갓을 벗어 나무에다 걸어놓고 들어온다고 한다. 그것은 통영에 와서 양반 행세를 해봤자 별 실속이 없다는 비유에서 온 말일 게다. 어쨌든 다른 산골지방보다 봉건제도가 일찍 무너지고 활동의 자유, 배금사상이 보급된 것만은 사실이다. - 10

- 한실댁은 그 많은 딸들을 하늘만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딸을 기를 때 큰딸 용숙은 샘이 많고 만사가 칠칠하여 대갓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고 했다. 둘째 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하여 뉘 집 아들자식과 바꿀까 보냐 싶었다. 셋째 딸 용란은 옷고름 한 짝 달아 입지 못하는 말괄량이지만 달나라 항아같이 어여쁘니 으레 남들이 다 시중들 것이요, 남편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생각하였다. 넷째 딸 용옥은 딸 중에서 제일 인물이 떨어지지만 손끝이 야물고, 말이 적고 심정이 고와서 없는 살림이라도 알뜰히 꾸며나갈 것이니 걱정 없다고 했다. 막내둥이 용혜는 어리광꾼이요, 엄마 옆이 아니면 잠을 못 잔다. 그러나 연한 배같이 상냥하고 귀염성스러워 어느 집 막내 며느리가 되어 호강을 할 거라는 것이다. - 97

- 이 세상에 의심스럽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면 저렇고, 저러면 이렇고, 그럼 진실은 없군요.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현실은 신보다 우리에게 가깝고 진실에 가까운 거야.
오빠야말로 공식적이군요. 말로나 생활로 표현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 186

- 외롭다는 말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냐고 되묻는 말은 상반된 대화다. 그러나 용빈은 김약국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외로움이 있다.' - 415

- 통영 항구에 장막은 천천히 내려진다.
갑판 난간에 달맞이꽃처럼 하얀 용혜의 얼굴이 있고, 물기 찬 공기 속에 용빈의 소리 없는 통곡이 있었다.
봄이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 - 481

2026. jul.

#박경리 #김약국의딸들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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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ㅣ 레이디가가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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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츄얼 소설.

이야기 전개를 두 개의 시작점에서 각기 시작하면 색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건데, 딱히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 건 
또 내가 너무 건성으로 읽었나 싶기도 하다.
혹은.
먼저 읽은 이야기에 대한 심리적 확신이 강해져서 후에 읽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전의 이야기에 대입해 생각하다 보면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 아닌지.
사실... 건성으로 집중을 크게 하지 않고 읽어서겠지만...


같은 아픔을 겪었다는 동지의식으로 서로의 복수를 제안하는 피해자들.

결국 악한 인간 하나로 인한 점점 커진 불행이랄까.

게다가 출생등록이 되지 않은 사람이 애초에 있으리란 생각 자체를 잘 안 해오다 보니
법률상의 허점, 불합리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1만 명의 호적 없는 사람들이라니... 실상이 어떤지는 확실한 수치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선, 후 읽기 선택에 따라 결말이 달라진다는 건 그저 텍스트 자체로 그렇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선후관계 전체 흐름을 생각하면 딱히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신선한 시도지만,
즐기는 컨셉의 책은 아니었고, 다만 북스피어의 시리즈를 다 읽고 있기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로운 면이 없지 않다.
적당히 즐겼다는 이야기.

- 지금 여기 있는 나는 그때의 내가 아냐. 지금의 나는 1년 전에 태어났어. 나는 하나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 - 148, 페트리코

- 이 집에서 리쓰코 씨와 살면서 점차 평범한 열여섯 살 아이가 되어가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이런 날들을 동경했다. 하지만 진짜배기 나는 강한 위화감을 느끼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항상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종종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인다. 너는 그럴 자격 따위 없어. 너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어. 너는. - 110, 페트리코

- 그렇게, 모든 일이, 간단명료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가 잘못했는가.
무엇이 잘못이었는가.
그의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내 가슴을 순식간에 채워간 것은 연민도 동정도 아니고, 압도적인 공감이었다. - 195, 지오스민

- 우리 함께, 괴물이 되지 않을래요? - 249, 지오스민


2026. jul.

#I #미치오슈스케 #이규원옮김
#북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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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22
봉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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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안 읽히는 시집이 오랜만인데...

시 들이 전하려고 한 말이 많아서인지
날이 무더워서 인지 모르겠다.

- 거기에 돌부리가 있다는 말을 다섯 번쯤 듣고도
같은 곳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당신은 내가 넘어질 곳에 습기 머금은 흙을 덮어주기 시작했다. - 시인의 말

- 나선계단을 오르면 어느 날에는 레코드 가게가 되었다가 어느 날엔 거실이 되고, 어느 날엔 헌책방이 됩니다. 사고 싶은 책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꽂아 넣고 다음 날 다시 찾으러 오는 마음. 그러고도 사지 못하고 다시 더 깊은 구석에 꽂아 넣는 것. 그림자는 내 옆으로도, 앞으로도 생겨날 수 있는데 항상 뒤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곡해하며 자라났습니다. - 계단참 중

- 벌써 벚꽃이 피었다니, 감탄하는 3월의 사람들. 얼굴을 모른 채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겠다. - 식물 식별 능력 중

- 전등이 떨린다. 식탁에 모여 앉은 어제와 내일과 당신. 대화를 나누는 너희 사이에서 잠자코 있는 것만으로 나는 거짓을 쌓아가는 거예요. 둥그런 식사는 너의 배려와 무심함의 형상이었다. 우리가 그저 서로의 평범한 저녁이었더라면, 시간이 흐르더라도, 이렇게 변했구나, 손등을 쓸어내리는 손끝을 피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손을 잡아끌어 거머쥐었더라면. - 내밀의 빛 중

-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천에서, 유연함 속에서.
(...)
타향이 고향이 되는 거야. 어지럽게 짐이 펼쳐진 거실 마루에 앉았다. 반나절 만에 다른 곳으로 왔구나. 달라지기보다 달라지기를 결심하는 시간이 길고. 본가가 어디냐고 물으면 태어난 곳을 말해야 할지, 자라온 곳을 말해야 할지, 부모님이 계신 곳을 말해야 할 지 고민했다. - 주소력 중

- 결말을 걱정하진 않습니다. 잘 되든 못되든 모두 별일이 아닙니다. - 해로운 장난 중

- 그 한낮, 창고에서 불탄 사람은 서른여덟 명이다. 그 숫자를 확인하기까지 물류 창고 현장에 나간 기자와 취재부 사이에 수많은 통화가 오갔고, 취재부와 편집부 사이에 수많은 뜀박질이 있었다. 사망자의 숫자가 표시되는 전광판 앞에서 그는 차오르는 숫자를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서른입니다, 서른하납니다, 서른셋입니다, 넷입니다, 다섯, 여섯, 일곱입니다. 사회부장과 했을 가장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서른여덟인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서른여덟입니다'가 아니라 '여덟인 것 같습니다'라는 불확실한 단정. 수회기 너머로 보고를 들은 사회부장은 불길이 화를 냈다. 그런 말끝 처리가 촌각을 다투는 마감 시간에는 아무 쓸모 없는 예의차림이어서였을까. 1면 톱기사 제목에 실릴 사망자 숫자가 틀려선 안 되기 때문이었을까. 확실한 건, 서른여덟 명이나 죽었단 사실에, 그 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우리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한낮, 불탄 창고에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속보를 날랐던 그는 "너무 공감하면 안 돼"라는 말을 했다. 서른여덟 번의 죽음에 한결같이 슬퍼한다면 속보를 쓸 수 없을 테니. 그렇지만 가끔 생각한다. 서른여섯번 째 사람과 서른여덟번째 사람의 죽음, 그 사이에 숫자가 무슨 상관일까. 오탈자가 무슨 잘못일까. 오히려 서른여덟이란 결말로 가는 한 단계로써 그 근처의 숫자들엔 개연성이 생겨난다. 서른여덟이란 결말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한 번이라도 그 비극에 망설여본 사람이라면 '사망자가 모두 서른여덟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끝을 흐릴 것이다. 서른여섯이든 여덟이든 모두 비극이지만 그래도 조금 덜 슬픈 결말에 발이 묶일 것이다. - [1보] [9보] [12보] 중

- 아름다움의 곁을 지나면 모든 것과 멀어졌다. 정강이 높이만큼 솟은 등불들이 지키는 길은 그래서 어떤 계절에도 슬프지 않은 때가 없었다. - 여우의 귓바퀴 중

- 생활의 70퍼센트는 대기하고 참는 일이야.
정박으로 떨어지는 노래를 느리게 허밍하다가
왼발에 맞춰 구령을 넣는 거야. - 인터로킹 중

- 나는 당신의 어린 모습이 닳는 게 아까워서
아무것도 짐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모과 중

- 수평선에서 파도가 생기는 순간을 지켜보기.
사람도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었다.
(...)
우리는 끊임없이 각자의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 해발 중

- 우연은 경이로움으로 오역되곤 한다. - 대체 가능한 사람 중

- 눈을 감고 걸어 다닌 길은
눈을 감아야지만 찾아갈 수 있다. - 윤곽 중

-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당신은 내 손목을 잡아 바닥에 눕혀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꾹꾹 빈틈없이 눌렀다.
"달라진 거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새 이불이에요, 햇볕에 종일 말렸어요."
그러고 보니 정말 이불을 들썩일 때마다 얼굴 위로 햇볕을 머금은 냄새가 났다. 맨다리에 닿는 감촉도 습기 없이 빳빳했다.
그해 당신은 나에게 새봄의 첫 이불을, 그 고실고실한 햇볕을 선사한 것이다. - 뒷 표지 문구

2026. jul.

#우리는모두이불에서태어난걸요 #봉주연 #문학과지성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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