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여행 에세이는 타이밍이 필요하다.

세계 각지, 국내 곳곳을 돌아다닌 저자의 이야기가 즐거울 때 읽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한 곳에 묶여 있으나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되지 않고, 어중간하게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슬쩍 비출때 아마 좋을지도.

김연수 작가가 여행지에서 문구점을 좋아하는 성향은 매우 반갑게 다가온다. 객지의 물건 중 별거 아니면서 매우 별것인 무언가를 나도 무척 좋아하기 때문.
모든 삶을 다 살 수 없으니 나는 연필을 사겠다. 라는 문장이 이심전심이었달까.


국경 쪽으로 세차게 부는 바람 속으로 날아가던 모자처럼 여행지에 내가 남겨 두고 온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갖가지 잃어버린 물건부터 보지 못하고 온 것과 사지 못하고 온 것에 이르기까지. 그럴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차를 돌릴 수 없으니 마음을 달랠 수밖에, 라고. 밤의 알람브라가 내게 가르쳐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여행이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여행을 통해 나는 비정함을 익혔다.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토록 찬탄하던 곳과 작별하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 이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 31

대개의 경우 내게 독서는 12시간 동안의 비행과 같은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좋은 취미 생활이지만, 때로는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 75

조직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는 것, 고독은 우리의 성장판이라는 것,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을 할 때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것. 비록 나는 안중근의 손가락은 찾지 못했지만, 그의 여정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141

작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여행과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사진보다는 기억에 의존하는 게 더 좋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좋은 시절, 나쁜 시절이 있엇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시절이 이제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도. 그래서 누군가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우선 나빴던 시절을 떠올리고 그 시절이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그다음에는 좋았던 시절에 대해 말하리라. - 235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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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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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하드보일드.

불친절한듯 툭툭 던져지듯 알려주는 조각의 인생이 어찌나 스산하고 건조한지.

흔치않은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읽기 시작했고, 캐릭터의 힘 못지않은 쫀쫀한 서사가 끝까지 재미를 끌어내는 이야기다.

방역의 부정적 결과로 생이 망가진 투우가 집요한 복수를 하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조각의 삶에 대한 경의를 보내는 듯도 하고, 결과에 따라서는 자신의 마지막을 완성해줄 동류의 인간에 대한 인정이 담겨있다. 또 그녀가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장치하는 무용의 존재가 오히려 조각의 쓸쓸하고 비정한 생을 부각시킨다.
그런 지점들이 무척 마초적인데 그 중심에 노년의 여성이 자연스럽게 안착한 것을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통쾌한 일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조각의 자리에 위치한 남성 캐릭터들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그 통념에 지루해지고 있었기 때문이겠다.

어디선가 파과를 영상화한다면 조각의 역할에 배우 예수정님이면 어떨까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이어서인지 내내 그 배우의 얼굴을 한 조각을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무척 어울리면서도 상상력엔 제약이 따르는 과정이었으나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과 그 변용이었다. - 128

자신이 류를 바로 따라가는 것과 가능한 한 늦게 따라가는 것 가운데 어느쪽이 류가 바라는 일일까를 한동안 고민하다가, 둘 중 그 무엇도 류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없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류의 유지를 받들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 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264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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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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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모두 악의는 없고, 그나마의 악의라면 모두 과거의 일에 묻혀 있는 나름의 평온한 상태의 사람들이 등장해서 뭔가 다시 시작하는 움직임이 보이는 이야기다.

오랫만이라 그래 요시모토 바나나가 있었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들었고,
아 이런 점은 역시 요시모토 바나나였지 하는 마음이 들다가,
풋... 이런 나이브함도 요시모토 바나나였어. 하는 감상으로 끝난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팔에 힘이 없어 더는 안을 수 없을 때까지 미치루를 안아 주고 미치루의 조그만 볼에 뽀뽀를 했다. 그 우람하던 몸은 야위었지만, 미치루의 조그만 손을 그 큰 손으로 언제나 꼭 쥐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사람의 손을 그렇게 꼭 감싸 쥐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을 소중하게 옮기는 듯한 그런 몸짓을 그는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미치루에게 해 주었다. - 28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은 역시 마음 한 구석이 갑자기 찌르르하는 울림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런 울림은 개인적 체험과 연계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미용실에서 머리에 뭔가를 잔뜩 덕지덕지 발라놓은 상태에서 이런 문장에 가닿게 되어 괜히 눈을 깜빡거리게 된다던지... 뭐 그런 울림.

그러나 비정형이지만 행복한 가족을 구성하고 사는 주인공과, 애초에 그 가족구성이 죽어가는 지인의 소원이었다는 점과, 알고보니 살고 있는 집이 전 남친의 집이라던가. 재회를 하고나니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진다던가....

나열하고 보니, ‘인생은 아름답구나, 삶은 소중해요’ 같은 느낌의 순진무구함은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오는 작가 특유의 지문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읽지 않았었지... 라는 생각이 문득 들고.

그런데 제목인 서커스 나이트는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 내가 놓친 거겠지?

별거 아닌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일상이야말로 멋진 것, 평범함이야말로 존엄한 것,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특별한 하루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확고하게 쌓아 올린 토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 273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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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ㅣ 범우문고 109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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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요즘의 산문들과는 정조가 다른 글이다.

차분한 마음을 끌어오는 고즈넉함이 있는.

딱히 어떤 주제 없이 신변을 돌아보기도하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작가의 발길대로 소소하고 깊이있는 사색들이 담겨있다.

고유명사와 그외 여러 단어들의 옛적의 표현을 읽으면 심장도 그만큼 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주 기행 중 언급되는 동선당이라는 곳이 궁금해서 여기저기 찾아보았는데, 구휼기구였다 정도 외의 어떤 정보도 쉽지 않았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라지만, 사각지대랄까 다양성이랄까, 정보에도 그런 것이 분명 있다는 생각을 또 한번 한다.

어디든 일상을 벗어나 자연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챙겨 들고 가 찬찬히 읽어도 좋을 글이다.

노인더러 바다를 보았느냐 물으니 못 보고 늙었노라 하였다. 자기만 아니라 그 동리 사람들은 거의 다 못보았고 못 본 채 죽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한 소년이 바다가 뭐냐고 물었다. 바다는 물이 많이 고여서, 아주 한없이 많이 고여서 하늘과 물이 맞닾은데라고 하였더니 그 소년은 눈이 뚱그래지며 “바다? 바다!”하고 그윽이 눈을 감았다. 그 소년의 감은 눈은 세상에서 넓고 크기로 제일 가는 것을 상상해보는 듯하였다. - 32, 바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 69, 책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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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을 채워라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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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온다!

라고 해서 좀비물인가... 했는데, 그보다는 좀 삶에 천착하는 이야기였다.

스릴이나 서스펜스 이런거 영에 가까운 평범한 가장의 자기 반성이라고 해야하나.

여러 얼굴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한 ‘분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이미 전작에서 많이 나온 이야기인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작가가 그 개념에 너무 심취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데쓰오는 자신을 살해했다고 믿는(죽음의 순간들이 기억이 안나기 때문에) 사에키라는 직장동료의 흔적을 추적하지만 질문에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흐려진다. 사에키라는 악마적 캐릭터가 가교역할을 하지만, 결국 끊임없이 나에게 되묻는 사색의 과정.

술술 읽히고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많은 이야기지만, 심심하다 라는 느낌이 남았다.

누구도 인간의 고뇌할 권리를 부정할 순 없어요. 그건 잔혹한 일입니다. 우리는 늘 치유를 너무 서두르고, 자기가 사는 세계를 증오에서 지켜내는 데 필사적이라, 타자의 고뇌에 대한 존중을 잊기 쉽습니다. - 353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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