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의 세계 - 저울과 자를 든 인류의 숨겨진 역사
제임스 빈센트 지음, 장혜인 옮김 / 까치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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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101-24-01 : 측정의 세계, James vincent 저, 2023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이 그림의 미소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한 미소이다..." (Giorgio Vasari)

위 문구는 인류 문명사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칭송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대한 유명한 평가이다.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유명세로 인해 매년 엄청난 인파를 불러모으는 찬란한 문화 유산이다. 수없이 많은 학자들과 비평가들이 끊임없는 담론과 평가를 해왔으며, 지금도 다양하게 그것들을 접할 수 있다. 특히 위에 르네상스 미술사가, 바사리가 언급한 "신비의 미소"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추측과 담론들이 난무했다.

그런데 이런 담론의 흐름에 변화가 감지된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다. 1956년에 한 관객의 작품 훼손으로 인해 그 밑그림이 노출되며 다빈치의 작업이 고유한 층상 구조를 기반으로한 '덧칠작업'에 의해 이루어짐이 드러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작품의 복원을 위해 조사가 다시 이루어지고 그동안 우리가 추측했었던 작품에 대한 사실들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이때부터 또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그동안의 평가를 뒤로 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 비교적 객관적인 과학 분석 기법을 도입하여 - 모나리자를 접근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X-ray 사진' 기법으로 인해 (위 사진 참조) 그동안의 미소에 대한 해석에 '비수'를 꽂는 평가가 나오며 기존의 해석을 수정하는 동시에 다빈치의 작업 방식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게된 에피소드이다. - 그리고 많은 추측(억측)을 낳은 비평가들이나 학자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ㅎㅎ-

위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인식 체계는 경험적인 습득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아무리 명성이 드높은 그림이라도, 객관적인 사실이라 인정되는 것들이 발견되면 주저없이 그 해석이 뒤집히게 되지 않는가? 이처럼 인간은 "직접 보고 들은바대로" 우리를 둘러싼 주변을 인식하며 지식을 체계화한다. 이는 유사 이래로 큰 변함없이 이루어져 온 관습이며, 다만 문명의 지적 기술 수준에 따라 그 양상이 바뀔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론, 즉 관찰의 방법은 매우 핵심적인 근간이며, 이를 어떻게 추상화하는지는 그 당대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좋은 기준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외부 세계를 '측정'하고 '기호화'하는 방식은 문명의 근간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이를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 한, 직관적으로 인지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이미 한 시대의 사회 속 일원이며, 기존의 합의된 기준으로 이미 구축되어 있는 시스템을 '학습'으로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기준은 의문을 잘 허용하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

그러나 독보적인 권위를 가지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 법...누군가는 이 강요된 권위에 의문을 제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하며, 반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연원을 궁금해하는 독자도 꽤 존재하리라 사료된다. 이 저자 또한 마찬가지 문제의식으로 출발하여 이 책 "측정의 세계"를 쓰기에 이른듯 하다. 

2. 저자의 의도...

이 책의 저자인 제임스 빈센트 James vincent는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사람이다. 다양한 매체에서 기고를 하고 있고, 이번이 그의 첫번째 저서이자 베스트셀러이다. 출간되자마자 다양한 매체에서 호평을 받으며,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찬사를 받은 바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측정"이란 단어의 뉘앙스로 인해 딱딱한 과학책을 연상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과학책은 아니다. 책에서도 밝히듯이 저자는 작가이고, 전문적으로 과학 지식을 훈련받은 이력도 없다. 다만 '측정(측량)'의 역사를 인류의 문명사와 함께 추적하고, 그 변곡점들을 지적하며 이것들이 우리 인류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충실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분류와 각 장에 할애된 분량도 대단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다뤄주고 있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교양과학 내지는 역사서의 역활에 충실한 책을 지향한듯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데로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이는그 결과물로서 우리 앞에 이 책을 내놓았다. 

3. 인상적인 부분...

먼저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인류 문명사 초기에서 나타나는 의문점 중 하나인 "측정이 먼저인가? 척도가 먼저인가?"데 대한 의문점으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매우 단순해보이는 질문이지만 실상 자세한 면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시말해 "인식이 먼저인가? 실재가 먼저인가?"라는 철학의 근본 문제와도 맞닿는 부분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게된다. 우리가 흔히 인식 체계론에서 여전히 논쟁 중인 부분이고, 이 물음에 대해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 개인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 보지만...- 

우리가 주위를 둘러싼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 경험적 사실에 의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사실은 그 자체로 불완전함을 이내 깨닫는다. 개인의 경험들은 고유하며, 유사하지만 일치한다는 보장을 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세금'이라던지, '상거래'와 같은 개인의 이익을 기반으로 한 행위양식에서는 이 불완전성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소위 말해 '공정성'의 문제, 즉 '신뢰'의 문제를 반드시 동반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신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모두가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성"에 근거하게 되며 이는 곧바로 측정의 문제와 연결된다. 따라서 인류의 문명은 당연히 척도와 그 궤를 같이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저자 또한 이 척도의 발생사를 따라가며 이와 같은 맥락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달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즉 우리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지적 산물의 하나라는 점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켜준다.

또한 이 책은 측정의 발달적 측면에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점을 부각하고 싶다. 첫째, 17세기 과학혁명 이전의 측정에 대해 자연 발생적인 근원부터 출발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거쳐 중세 기독교 문명까지를 아울러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측정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성서에 나온 구절이나 신화의 전승에서 언급되는 특정 요소들을 강조하고 설파하기 위해 "천문학"의 발달과 그로 인한 "시간" 단위의 변화같이 말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시간개념이나 달력은 어찌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맞도록 우리가 고안해놓은 체계를 구축했으며, 이제는 거꾸로 그 체계에 종송되어 살아가는 측면 또한 존재함을 역설한다. 둘째로 소위 "탈주술화"로 대변되는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부터 측정이 어떻게 급변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가 측정이라고 흔히들 믿는 것들의 상당수는 이때 폭발적으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존의 관념론적인 세계관을 버리기 시작해, 실증적인 지적 체계를 추구하고 새롭게 자연을 '정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려내며 그 도중에 얼마나 많은 과학적 발전이 그 역활을 담당했는지를 다양한 사례로 보여준다. 세번째로는 이런 혁명적인 발견들을 통해 기술의 진보를 이끌어내고, 문영의 이기를 경험한 우리 인류가 어떻게 우리 스스로를 "측정으로 지배"하기 시작하는지를 역설한다. - 저자는 이 시점에서 "통계"의 등장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 다시말해 외부 세계를 성공적으로 정복하는 그 경이로움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들어감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측정은 도구일 뿐,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는 인간이며, 그 목적과 대상을 선정하는것 또한 인간이다. 따라서 무엇을 위해, 어떤 것을 측정하고, 그로 인해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는 더 이상 과학의 영역이 아닌, "정치"의 영역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우생학" 같은 과거의 오점과도 같이...-

더군다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어마어마한 정보의 혁명이 "디지털"로 가능해진 오늘의 시점에서 이 지점은 더욱 유의미하다. 소위 "빅 데이터"를 둘러싼 찬반양론의 측면에서 모두가 동의되는 각자의 논리는 분명 존재한다. 기존에는 어쩔 수 없이 통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도구와 데이터의 발달로 인해 해석이 가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마져 가능하다는 그 희망을 인식했을 때, 과연 이를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여야하는 것인가로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시대의 논쟁을 의식하듯이 끝에 가서, 언급한 점들을 개인 경험에 비추어서 언급하며 우리에게 화두를 살며시 던지고 있다.

4. 아쉬운 부분...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의 저자는 전문적인 과학 지식을 습득한 학자가 아니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 엄밀해진 측정의 다양한 기술적 경이나 원리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미터법"의 재정의나 "킬로그램 원기"의 폐기와 재정의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도 엄밀성을 들이밀지 않는다. 또한 그 안에 담겨진 다양한 과학사적 배경 또한 간단하게 설명한다. 이는 대중적인 독자를 지향하려는 저자의 의도 및 출판 기획에 기인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인듯 하다. 그러므로 보다 더 세밀하고 엄밀한 정보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리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책의 뉘앙스도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을 뿐, '역사'서에 가까운 서술을 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좀더 전문적인 지식을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과는 그리 맞지 않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또한 정치적 또는 인문학적으로 측정 - 혹은 계량화 - 에 대한 논쟁은 최근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바가 있다. 본 책에서 드는 "미터법 반대론자"의 에페소드는 빙산의 일각일 뿐,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담론들이 이미 다수의 학자들에게서 논의된 바 있다. 근래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명 비판 이론이라든가, 현대 실존주의와 관련된 논쟁에서 계량화에 대한 우려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주제이다.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 쪽에서도 현대 문명 비판의 한 근거로 "과도한 계량화" 내지는 "폭력적 지배에 대한 열망"에서, 이 계량화적 시도의 폐해를 누차 지적한 바가 있다. 따라서 본 저서의 맨 끝에 잠시 나오는 챕터 정도보다 훨씬 다양한 지적 담론들이 존재하였던것을 이 책은 소개하지 않는다. - 물론 대중서적이라는 그 목적하에서라면 이해가 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 따라서 보다 더 심도있는 논의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은 그다지 흥미를 끌 요소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그저 중립에 가까운 정치적, 인문학적 스탠스를 취하고 될 수 있으면 가치 판단의 부분은 배제한 것이 명백히 내게는 읽혀지니 말이다. 달리 말해 이 책의 같은 사실들을 놓고, 누군가는 훨씬 대담한 논의를 펼칠 수도 있고, 보다 더 높은 강도의 비판도 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 서적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아쉬움은 존재한다. 

5. 나오며...

다시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시간을 보며 움직이고,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며, 수없이 많은 척도로 어떤 것들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구조주의 철학의 입장에서 말하면 마치 "백기를 이미 들고 투항한 어린 양"에 가까운 위험한 양에 지나지 않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누군가 우리가 굳건히 믿는 척도의 기준을 정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인간의 인지 체계를 규정할 수 있는 불순한 목적을 가진다면, 이처럼 과도한 '권력'은 너무나도 많은 폐해를 양상할 수 있다. 마치 푸코가 지적했듯이, 판옵티콘의 현현화가 다름아닌 이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인간에게 세상을 바라볼 기준을 내면화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일테니 말이다. 

요 몇년간 이 땅에서는 통섭의 유행 만큼이나 뜨거운 이슈가 생물학적 사실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중에 "종의 다양성"에 대한 많은 담론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핵심에는 애초에 처음부처 우월한 특정 종이 진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양성으로 인한 개체군 가운데 그 당시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종만이 살아남아 그 유전자를 후대에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자연은 다양성에 그 가능성을 배포한다. 그중에 어떤 것이 살아남을지는 누구도 인위적으로 정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에게는 사실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가 그 가능성에 해당하지 않는 종임이 판명되는 순간, 도태의 숙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류는 끊임없이 항상 자연의 흐름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온 전례가 있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수단으로서 '측정'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인정의 순간에 우리는 또다른 국면을 맞을수도 있음을 인정해야한 한다. 그것은 그러한 목적의식을 가진 행위야말로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말이다. -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을 통한 보다 나은 인류의 가능성을 꿈꾸는 다수의 욕망들 - 

우리는 신이 아님을 또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함을 나는 말하고 싶다. 이제까지의 문명사를 통해 축적된 지식으로도 이 자연의 모든 원리와 의문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행위이겠지만, 그것을 넘어서 지배하려는 행위는 어떤 결과를 다시 우리에게 초래할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최근의 기후위기도 그러하지 않은가? 도구로서의 이성은 그 절제를 반드시 알아야만 미덕이 있으리라. 이 소중한 교훈 또한 이 책으로부터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훌륭한 독자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흔하게들 잊고 살기 쉬운 이 "측정"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저자의 노고를 치하하며 오늘도 밤하늘을 바라본다. 우리의 존재가 이 세계에 더이상 폐가 아니길 바라며 말이다....

#측정 #측정의세계 #까치 #제임스빈센트 #과학 #측량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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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63 : 대의 민주주의와 한국 정치제도, 문우진 저, 2023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모피어스 : "세상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나?...(중략),,, 네(네오)가 회사에 출근을 하러 나가던, 쓰레기를 비우러 나가던, 심지어 세금을 내러가든 말이야. 어디를 가더라도  너를 짓누르는 그 느낌....너를 미치게 만들고는 하지...(중략)...나에게 매트릭스(Matrix)가 무언지 물었나? 답은 하나야.

통제(Control)이지.

위 대사는 1999년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Matrix)에서 주인공 네오와 선지자 격인 모피어스와의 첫만남에서 가져왔다. 극중에서 네오는 현실에서의 불안감과 기시감에 억눌려 자꾸 겉돌게 되고 그 답을 찾으러 모피어스와의 첫만남에서 매트릭스가 무어냐고 물었을때, 모피어스는 위의 대사를 날린다. 잠깐 영화의 설정을 언급하자면 기계에게 종속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이 동력원으로써 부품 취급을 당할 때 - 인간은 그 상황을 알지 못한다. - , 보다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연결하여 가상 세계를 제공하고 그것을 매트릭스라고 부른다.

자,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저 대사가 문득 기시감(Deja-vu)이 느껴지지 않는가? 왜 당신은 아침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오전 9시까지 출근해야 하고, 아무데나 버려도 될 거 같은 쓰레기를 정해진 장소에 정해진 방식대로 버리고 있으며, 심지어 당신의 노동의 댓가 중 일부를 기꺼이 국가에 납부하고 있는가 말이다. 이 모든 일상의 행위 양식 안에는 정치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우리가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정해진 룰이라 모두 받아들이고 있고 이를 어길 시 발생하는 불이익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때론 폭력적으로 우리를 굴복시키며 답답하게 조차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묵묵히 - 때론 격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 이를 사회구성원으로써 감내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것들이 있는 법. 어떤 이들은 이를 바꾸기 위해 소리쳐 외치며, 여론을 규합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생하기도 한다. 이처럼 생활의 룰을 정하는 것을 나는 "정치"라고 말하고 싶다. 

2. 저자의 의도...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 작동원리와 구성 요소들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 역활을 하고 있다. 작가는 정치학 교수로써 이미 일련의 정치 시스템에 대한 여러 저서들을 내놓은 바 있고, 또다시 우리 앞에 한 권의 해설서를 내놓았다. 나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인가?'라는 의문 말이다. 지금이 아니어도 작가는 업으로써 한국의 정치 시스템을 꾸준히 연구하는 학자이고,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강의로도 그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데 말이다. 잠시 현 시점을 떠올려보면 곧 다가올 22대 총선(2024.04.10.)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게다가 지금은 극으로 치닫고 있는 국내 정치의 분열 상황과 전쟁으로 얼룩진 국제 정치의 상황이 겹쳐 다시금 선거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현 집권 세력의 지난 행태를 보면 '혐오의 정서'에 기반한 매우 분열된 정치를 구사하고 있다고 평들을 하고 있다. 따라서 다가올 총선은 혼돈의 양상이 예측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몇 년간의 중요한 기로에 있다고 보인다. 저자의 문제 의식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우리의 일상의 "한 표"가 이 중차대한 시점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고찰 또한 대중들에게 알림으로써 신중히 투표할 것을 독려하고자 함이 느껴진다.

3. 인상적인 부분...

세상 모든 것에는 발생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정치 또한 예외없이 그 법칙을 따른다. 최초 사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국가"라는 큰 단위를 형성하기 까지 무수히 많은 사건과 합의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고는 했다. 그 모든 디테일을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현재의 정치 시스템 - 여기서는 적어도 헌법에서 '민주주의'를 표방한 나라에 한정한다. - 에 있어, 중요한 근간을 이루는 이론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세부적 절차가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는 현재 시점에서 대중들에게 매우 필요해 보인다. 비록 교육시스템에서 기본적으로 배우고, 언론에서도 다루지만 아주 근간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이유에 의하든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선거에 대해 귀찮은 '의무' 쯤으로 여기지, 이를 주권자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권리'임을 상기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굴 뽑아야만 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향후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면 지금처럼 '미인대회'의 선발처럼 선거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정책과 나의 삶의 목표와의 교집합을 고려하고, 미래를 위해 설계를 누구에게 맡기는 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작지만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좋은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인상적인 부분은 정치 시스템에 따라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을 비교적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선건구의 획정이라던지, 비례대표제의 룰에 따라 실제 투표결과의 차이를 비교하는 대목은 눈여겨 볼만하다. 현실 정치에서 우리들의 대표가 과연 진짜로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논의하지 않으면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또한 각 선거구의 획정에 따라 어느 정당이 유리한지도 언론에서는 잘 말해주지 않는다. - 이는 언론의 책임을 망각한 행위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 따라서 유권자로서의 알권리는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며, 단순히 그 당시의 감정이나 제한된 상태에서만 투표를 해야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쉽상이다. 따라서 저자와 같이 누군가는 이를 냉정하게 비교 분석하여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는것이 반드시 필요하며, 때에 따라서는 제시한 가이드 라인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면 더 좋겠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나마 쉽게 느끼는 '행정부'의 권력관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대목은 좋은 지점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민주국가에서는 헌법상에 '3권분립'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유권자를 대표하는 입법부와 집행권한의 상당수를 위임받는 행정부와의 관계, 그리고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사법부와의 관계는 민주주의 사회를 대표하는데 필수적인 사항으로 알고있다. 그러나 현대 국가의 탄생이 상당히 흐른 지금 시점에서 보면 각 부의 관계를 그 나라 현실이나 상황에 따라 왜곡되기도 하고, 특징적인 요소를 포함하게 되어 처음의 취지와 어긋나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한다. 따라서 향후의 지속적인 민주정치를 위해서 지금 시점에서 다시 이 제도의 모순이나 그 해결방안을 고민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최근의 대한민국 정치 지형에서도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 모든 요소들간의 상관관계를 간략히나마 정리하는 본 저서의 챕터들은 상당히 유용하다고 보인다.

4. 아쉬운 부분...

본 저서는 기획의도가 다가올 총선을 대비한 유권자들의 의식을 고양하기 위함이라는 데에는 저자도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자 출신의 작가이고 어느정도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의도에서인지 현 시스템의 문제점이나 비판 요소는 극히 적게 거론된다. - 또는 존재한다 하더라도 미미한 정도라 보인다. - 사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제도는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하고 있다. 굳이 지난번 총선을 들지 않더라도, 거대 두 정단의 양당체제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선거 제도의 맹점과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는 인구수 - 특히 도농지역간 격차 - 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선거구 획정으로 인한 과대표 문제, 그리고 대안 정당의 가능성이나 사표 심리에 의한 왜곡된 선거 결과를 어떻게 보정할 것인가는 첨예한 문제들 중 몇몇일 것이다. 심지어 지난번 대선에는 '위성정당'의 편법마져 동원된 현실에서 개헌의 대두성까지 거론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현실적 딜레마들과 해결책의 모색에 대해 좀더 분명한 입장 표명과 의견 제시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또한 '대의 민주주의'의 또 다른 키를 쥐고 있는 '언론. 즉 여론 형성 집단에 대해 지적한 부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최근의 SNS를 동원한 여론전의 성격이라던가, 현재 미디어에서 다루고 있는 정치 현안에 대해 개인적으로 큰 우려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싶다. 심지어 여론 조사 마져도 특정 정당이나 이익 집단을 위해 신뢰도가 의심되는 부분도 상당수 존재함이 확인되고 있고, 급기야 지난 총선에서도 여론 조사와 다른 선거 결과마져도 드러나 심각성이 드러나고 있다. 보수 언론들의 편향적 보도나 공영 방송의 편향성 시비, 그리고 종편의 극단적 성향은 각종 시민단체에서 끊임없이 위험성을 경고하지만 대안 마련이나 제도적 장치의 변화는 요원한 상황이다. 이는 학자로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떠나 심각한 문제로 지적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첨언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대의 민주주의의 새로운 진화가 감지되는 부분도 언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전자 투표 내지는 디지털 설문 조사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그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실험해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도 불거졌던 각종 SNS의 공정성 시비와 여론 조작 가능성, 그리고 날로 진화하고 있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여론 수렴의 가능성이나 방법론은 현재 매우 첨예한 관심사를 보이며 논의되고 있는 분야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대의'라는 단어에 새로운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보다 면밀한 언급이나 대안으로써의 논의가 없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저자의 기존 저서들을 볼 때, 추후 이 부분만을 따로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생각이 들기는 한다.

5. 나오며...

 굳이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 현실을 거론하지 않아도, 현재의 민주주의는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지 경제적인 이유를 그 근본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 국가의 역할이 바뀌고, 지금은 또 다시 그 역할의 경계와 재설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인다. 각국의 정치 지형에서 이미 극우적이고 편협한 정당들의 득세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발맞추는 듯 전쟁내지는 분쟁의 기운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인류 역사 이래로 분쟁의 역사는 단 한번도 멈춘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전 지구적 분쟁은 아마도 2차대전을 기점으로 종전이후 80년 가까이 외형적 분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내지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말하는 학자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이를 반증이라도 하는 듯 최근의 전쟁에 대한 우려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늘 말하지만 정치는 결코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룰로써의 역활에서부터 국가 간의 관계 설정까지 모든 행위 양식에는 정치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이 저서와 같은 고찰은 언제든 필요하고, 저자의 문제의식도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필요성은 꾸준히 일깨워 줘야 하며, 사실 이는 공교육이나 언론이 행해야 할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기능을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이 저서와 같은 작은 시도들이 모여 언젠가 우리의 현실에 변화를 다시 한번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이 글을 마친다.

#대의민주주의와 한국정치제도 #대의민주주의 #정치 #버니온더문 #문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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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 20세기 가장 혁명적인 인간, 그리고 그가 만든 21세기
아난요 바타차리야 지음, 박병철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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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에 이어 나올만한 인물이 나왔군요. 이 양반의 업적은 훌륭합니다. 다만 걱정하는게 지나친 찬양이나 신격화는 지양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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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인 현대지성 클래식 52
알베르 카뮈 지음, 유기환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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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62 : 반항인,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저, 2023(1951)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O Fortuna, Velut luna               오, 운명의 여신이여, 그대 마치 달과 같아
statu variabils                        변덕스럽기 그지없구나.

Semper crescis, aut decrescis      늘 차오르다가도, 다시 이지러지니,
vita detestabilis                      저주받은 삶이여...!
nunc obdurat et tunc curat    억지로 버티게 해주면서도 또 한편 다정하게 달래나니

ludo mentis aciem                   얄미운 인생, 나를 희롱하는가?
Egestatem ptestatem                엄청난 재산이며 강력한 권력도
dissolvit ut glaciem                  운명앞에 얼음 녹듯 사라지네

Sors immanis et inanis,             운명, 그대여 모는 이도 없이
rota tu volubilis,                     멋대로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여!
status malus, vana salus           언제나 악의에 가득 차, 호의는 찾아볼 수 없으니
semper dissolubilis                   나 평안히 지낼 도리가 없구나!

obumbrata et velata                 그늘에 숨은 채 베일에 가리운 채
michi quoque niteris                  그대 나를 괴롭히네
nunc per ludum dorsum nudum      승부에서 진 나는 이제 헐벗은 등판을
fero tui sceleris                       그대 모진 손아귀에 넘기도다

Sors salutis et virtutis              내 마음의 평안에서나 내 육신의 건강에서나
michi nunc contraria               운명, 그대는 나의 적!
est affectus et deffectus           넘치는 호의도, 부족한 결함도
semper in angaria                   언제나 그대 뜻에 묶여있나니...

Hac in hora sine mora              바로 지금 주저하지 말고
cordum pulsum tangite              악기를 쥐고 떨리는 현을 뜯어 노래하라
Quod per sortem sterit fortem      운명, 그대는 강한 자를 무너뜨리나니
MECUM OMNES PLANGITE!       세상 사람들이여 나와 함께 울어다오!

위 가사는 칼 오르프 Carl Orff의 "카르미나 부라나 Carmina Burana"에서 나오는 유명한 <오, 운명의 여신이여 O fortuna>의 가사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얄궂은 운명의 굴레에 떨어져 비탄을 맞이하는 그리스 비극의 심정을 매우 잘 표현한 곡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에게 자신의 비통한 운명에 대해 울부짖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여기서 문득 질문 하나가 나올지도 모른다. 인간의 기술은 원자를 쪼개고, 없던 것을 전자적 매체에 만들어내며, 자신을 모방하는 기계를 창조해내는 이 즈음에 이게 웬 고리타분한 운명 타령인가? 하고 말이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의 또다른 질문으로 대체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과연 당신은 얼마만큼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사는가?

마치 영화 매트릭스 Matrix에서도 잠깐 건드렸던, 자유의지의 환영에 관한 담론을 꺼내려는건 아니다. 다만 내가 제기하는 것은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은 모순 투성이라는 사실을 종종 느끼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무한한 의지와 이성으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거나 그저 단지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초라한 민낯을 간직하는 폭로의 순간 말이다. 그렇다... 생각외로 우리의 삶은 신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믿을건 우리 밖에 없다고 느끼는 최후의 보루마져 저버리고, 때로는 비극의 순간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음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무겁고도 근원적인 질문 앞에 나는 이 책, 카뮤의 <반항인 L'Homme Revolte>을 펼쳐들었다.

2. 저자의 의도...


20세기 초반부터 등장한 숱한 문장가와 사상가들 중, 이 까뮈만큼 독보적인 사랑을 받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정말 잡초같이 커온 인생의 역정에서, 프랑스 문학계에 <이방인>이라는 거대한 - 그러나 정작 글은 소품과도 같다 -  작품 하나로 혜성처럼 등장하여 프랑스 문학의 정점에 서게된다. 그리고 그 이후 잘 알려져있다시피 노벨상 수상과 뜬근없는 사고사까지... 격랑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당시 유럽 사회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그 흐름과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 한 순간에 사라진 그 강렬한 기억때문일까...지금까지도 이처럼 회자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아직도 그의 작품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상은 분명 남다른 지점이 존재할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적어도 그런 표면적인 자국에 불과한 그의 일대기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작가는 작품으로 후대에 말하고 평가받는 것...그의 작품들은 그 철학적 사유와 까뮈의 감정이 지금 시점에서도 유효하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평생을 이방인(경계인)으로 살아온 개인적인 한恨의 정서가 우리에게는 그나마 익숙한 그에 대한 느낌일 것이다. 거기다 그 한의 정서를 끝내 저항하는 숭고로 승화시킨다는 지점은, 어찌 보면 서구권의 감성보다 동양권의 감성에 더 와닿는 지점이 많아서일지 우리 한국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작가이다.

이 책 <반항인>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이방인>과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이다. 실제로도 <이방인>으로 얻은 그의 명성을 이 작품 <반항인>으로 깎아먹은게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작품으로서의 침체기로 들어갔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정작 까뮈 본인은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의 역작"으로 공공연히 밝혔으며, 그의 사상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일면 타당하다. 나는 <이방인>이 프랑스 부조리 문학 그 특유의 문체가 살아있었다면, 이 책 <반항인>은 매우 지적이고 끊임없이 되내이는 문체의 에세이여서 - 만일 까뮈가 고등학위가 있었다면 필시 학술서적으로 내고 싶었다고 보이는 - 받은 평가로 생각한다. 게다가 이 책의 출판을 전후하여 사르트르 J. P. Sartre와의 격론과 결별로 이어지는 기존 지성계와의 불화속에서 진정으로 이 책은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방인>-<반항인>의 수미쌍관적 관계라고 보인다. 즉, 이 책 <반항인>은 이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며, 반드시 <이방인>과의 연작선 상에서 평가해야 비로소 까뮈의 원 의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그대로 따라가는 <이방인>의 논리적 구조를, <반항인>에서 "모범"으로 삼는 시지프스 신화의 긍정적 부조리로 뒷받침하는 구조처럼 말이다. 다행이도 과거에 <이방인>을 읽은 그 느낌으로 보다 더 선명히 까뮈에 다가간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필히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이방인>을 읽어야함을 추천한다.

3. 인상적인 부분...

일단 이 책의 대부분은 "반항"의 명제에서 출발해서, 그 당위성으로 끝맺는 구조이다. 1장의 "반항인"이라는 일종의 선언으로 출발하여, 철학적(형이상학적), 역사적 반항을 기술하고, 예술에서의 반항 사상과 마지막 장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정오의 사상"이라는 장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찬찬히 내용들을 읽어보면 매우 건조한 문체에 가까우며, 일종의 학술서에 가까운 느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방인>을 기대했던 당대의 독자들이나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외면받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글을 읽어 내려가면, 까뮈의 생각에 좀더 다가갈 수 있는 문장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반항이란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 자이다."나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와 같은 문장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반항의 철학을 명시하는 것들임에 분명하다.

까뮈는 이러한 일종의 선언적 명제들로 출발하여 인류 보편적인 의지로 자신의 철학(반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사례들과 철학적 인물들을 끄집어 내어 우리를 현혹시킨다. 사드, 도스토예프스키, 랭보와 같은 문학가들과 니체, 스티르너, 리베르탱 등의 사상가들까지 정말 다양하게 사례를 들며 그가 결코 지적으로 주류들에 비해 뒤쳐짐이 아님을 과시하듯 장황한 문장들이 반복된다.(이는 사르트르로 대변되는 프랑스 실존 주의자들과의 불화와 대립을 의식해서라고 짐작된다.) 다소 분량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일반 독자들에게는 부담이 가는 대목이지만, 찬찬히 시간을 들여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착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지속적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적으로 까뮈의 입장보다 사상가로서의 까뮈의 주장들을 검토해보려면 이 책을 봐야한다고 나는 단연코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까뮈가 가장 비판을 받았던 지점인, 마르크스 주의와의 관계를 이 책의 묘미로 소개하고 싶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이 부분으로 인해 이후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주류 사상가들과의 결별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의 분위기는 매우 미묘한 상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2차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기존 체제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급격히 세를 불리는 "마르크스 주의"는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매우 큰 화두였다. 게다가 그 정점에 서있는 신생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이 전승국의 위치에 오르고, 코뮌을 중심으로 소위 "제 2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분위기가 전세계를 휩쓸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정작 소비에트 연방내에서의 "스탈린 독재 체제" 또한 확고해지기 시작하며, 이 흐름을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희비가 엇갈린다. 마르크스 주의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또다른 독재 체제의 등장으로 격하하며, 그 양상에서 드러난 폭력성에 대해 강렬히 비판을 가하기 바빴다. 반대로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 이념적 정당성을 논증하고 그 과정속에서 발생한 폭력을 "혁명 과정의 불가피함"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념 자체의 순수성을 폄하하는 비판을 되려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혼란의 시기에 까뮈는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고 양쪽에 반항하는 신념을 그대로 밀고 나가며, 양측으로부터의 비난을 모두 받게 된다. 얼핏보면 요즘의 "극증주의"나 극단적 중도파로 오인될 여지도 있지만, 실제 당시의 까뮈의 주장이나 이 책에서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까뮈의 생각은 좀 다른듯 하다. 양쪽 다 서로의 이념 논쟁에서 잊고 있던, 바로 "인민"들에 대한 애정과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함을 일깨우기 위해 양측을 동시에 부정했던 것 아닐까.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 와중에 어느 극단으로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중도"를 항상 염두에 두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 이 대목에서 동양 철학적인 부분이 매우 의심된다. - 따라서 이후의 모든 과정들은 마치 자기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묵묵히 그 부조리를 견디어가며 나아가듯이, 까뮈 또한 스스로 그 인내의 시간을 받아들이며 나아간다. 이정도의 신념이면 문학가가 아닌 사상가로 보아야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4. 아쉬운 부분...

까뮈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사상적 배경은 바로 "죽음을 직시"하고 나서 다른 것들을 부차적으로 판단한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인>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작품들에서도 죽음의 그림자는 반드시 등장하며, 이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작품 속에서 반응하는 가가 그의 주된 서사 중 하나이다. 이는 달리 말해, 철학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실존을 이끌어내는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의 자장 안에 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말이다. - 물론 20세기 들어서 철학자치고 일정 부분 하이데거에게 빚을 지지 않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니 말이다. -

그러나 이는 하이데거의 방법론의 한계가 오면, 까뮈 또한 그 파국 아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다는 단점 또한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하이데거의 사상과 별개로 그의 적극적인 "나치"주의 행각들에 대한 전후의 맹렬한 비판,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사상적 기반마져 "나치의 영혼"이라는 불명예로 거론되던 당시에는 이는 큰 오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까뮈는 방법론은 택하되, 그와는 결을 달리하는 영리함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다름아닌 그 "죽음의 직시"라는 방법론이 큰 공격을 받는 가운데, 자칫 까뮈도 매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잘 알듯이, 까뮈는 문학에서의 작품으로서 이 오류를 극복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말해, 사상서로서 무언가를 위와 같이 주장했다면, 그 비난의 쓰나미를 그대로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과 같이 문학 작품으로서 "메타포"적인 글을 통해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반항인>은 상대적으로 그 결점이 크게 드러나는 불운의 작품이다. 게다가 주류로부터도 지적으로 완성도를 인정받지 못하였으니, 그의 사상의 유니크함이 오로지 담긴 이 책은 현재까지 애매한 상태로 남았으리라. 그렇지만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많은 독자들이라면 다른 작품들을 보고 난 이후에 반드시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5. 나오며...

다시 우리, 까뮈라는 인물에 관해 돌아가보자. 프랑스 문학의 대작가로 칭송받지만, 정작 그의 사상적 측면이나 인물적 숭배는 오늘날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그의 태생이나 활동배경, 그리고 사망 직전의 행적에서 끊임없이 주류와 타협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허나 흥미로운 것은 그 무수한 "반항" 속에서도 그리스적 "중용"을 내세웠다는 아이러니함마져 부조리가 아닌가! 일생을 신념대로 살다간 풍운아답게 그의 작품도 덩그러니 우리에게 남아있다. 누군가 말한다. 고전이란 "시간의 끊임없는 공격을 견뎌낸 생존자"라고...

오늘도 전 세계 어디에선가는 까뮈의 작품이 읽혀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철학에 동조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가 작품에서 불태운 서사들은 우리에게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삶의 부조리때문일 것이다. 비극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매순간 우리의 삶에서도 숱하게 일어나며, 다만 이를 어떻게 조명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서사는 책이 될수도 있고,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사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인 까뮈의 본연을 드러낸 이 작품은 그럼으로써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신념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반항인 #까뮈 #현대지성 #철학 #프랑스문학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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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지음,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기획 / 원더박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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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61 : 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저, 2023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사람이 언제 죽는지 아나? 총알이 그의 심장을 뚫고 지나갈 때?...(중략)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이지..."

이 구절은 흔히들 잘 알려진 "기억"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할 때 회자되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유한하다. 누구도 죽음의 그림자 앞에 똑같이 놓여 있다. 다만 누군가는 그 죽은 이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회자됨으로써 비록 그의 "실체"는 죽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살아서 숨쉬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다른 생명력을 부여받고, 때로는 "불멸"의 지위를 얻기조차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위대한 인간들은 이러한 과정으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기억되어야 할 이들도 존재한다.


지금도 폴란드 땅에 위치한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하면, 지금은 전시관으로 바뀐 한 켠에 빼곡히 자리잡은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다름아닌 이 반인륜적 범죄행위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이름들이다. 벌써 전후 80년이 흘러가는 시점이지만 누구도 이들에게서 강제로 더이상 "생명력"을 빼앗지 못한다. 비록 폭력으로 그때는 죽어갔을지라도, 다시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여 영원한 삶의 기회를 다시 부여하고 있다. 또한 그럼으로써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첫째는 죽어가야만 했던 그들의 비극을 이렇게라도 위로하고 피해자들의 한과 증오를 심리적으로 승화시킨다. 다시말해, 사회적 애도를 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의식을 다시 한번 보듬어 주는 것이다. 둘째로, 가해자인 "독일"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과거의 과오를 잊지않게 함으로써 언제든 다시 발현할수도 있는 극단의 정서를 비판하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행위들이 오롯이 독일 국민이 원한 것인가는 논외로 치자.)

2차 대전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인 우리 한국으로써는 위의 선례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가해자 "일본"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 때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도 거듭 강조한다. "관동대지진 학살 - 원명칭은 '간토대학살'이지만 우리에게 더 익숙한 용어로 이후 대신함 - "의 진실은 지금 "사망 직전"이라는 위기 의식의 발로에서이다. 구체적 진술과 기억을 가진 피해자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바스라져만 가고, "한일협정"으로 대표되는 정치 행위에 의해 이들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라는 암묵의 강요에 더이상 침묵해서는 안된다. 

이 무거운 주제로 나는 이 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점은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이 거대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지나친 "감상주의"는 배격하기로 말이다. 한 장, 한 장 그날의 처참한 기억을 읽을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자칫 일시적인 흥분에만 침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이다. 이 중요한 역사의 화두를 매듭짓기 위해서는, 그럼으로써 이 범죄의 "가해자"들에게 정의를 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반박 불가한" 인정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나의 작은 바램때문이다.  

2. 저자의 의도...

이 책의 저자는 현재 시민단체 <푸른>의 이사이며, 매체 <오마이뉴스?에 관련 글을 기고하는 시민 운동가이다. 또한 민주시민 단체의 일련의 운동들에 관여하고, 여기서 느끼는 소감이나 생각들을 꾸준히 저서로 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저자가 내게 쓴 빼곡한 "편지"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듯이, 이 책은 "관동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기획한 저서이다. 소수의 뜻깊은 운동가들과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들이 줄기차게 주장해 왔지만, 가해자인 일본 정부의 복지부동인 모습과 피해자인 우리 한국의 무대응에 분노하며 일반 대중들에게 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임을 숨기지 않는다. 이미 꽤 많은 폭로 기자 회견과 학술 활동, 심지어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한 각종 고발들이 이어져 왔고, 이에 대한 기록은 모두 이 책에 담겨있다. 

다만, 이번 기획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 활동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다. 마치 영화를 찍는 사람들을 영화로 남기듯이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미약하나마 소중한 의지를 재확인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이 투쟁을 후대의 누군가가 이어주길 바래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우슈비츠의 사례처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되묻는 행위 자체인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범죄들을 인정하고 "정의"가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는 이와 같은 인류의 오점이 그들 역사 앞에 등장하지 않도록 그들 스스로 "도구화된 이성"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바램이라고 하겠다.

3. 인상적인 부분...

이 책은 관동대학살의 기억을 최초로 주도한 재일사학자 강덕상 姜德相, 1932~2021 을 책의 첫 부분으로 시작한다. 우리 뿐만 아니라 일본에게도 현대사는 온통 질곡의 시기였으며, 더욱이 "식민지"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서 살아온 경계인의 현실을 조명한다. 뿌리깊은 차별에 항거하고, 그 근원인 역사의 오점을 인식하고 이를 고발한 그의 한평생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후의 일본 역사에서 팽배한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의 폭력의 기원을 바로 이 "관동대학살"로 최초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마치 독일 나치 정권의 유태인 박해를 독일 국민들이 용인하면서부터, 모든 정치적 탄압 및 전체주의로 인한 사회의 획일화, 그리고 이어지는 세계 대전으로까지.... 이 모든 과정과 유사하게 그 "최초의 폭력"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그들의 과오를 깊게 지적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현재 접하는 <산케이 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극우 매체들, 그리고 체제에 순응적인 다른 일본 매체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과격 극우들의 의도적 강조"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서 지적하는 소수이지만 양심을 가진 일본 시민들의 운동 또한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일본 극우 세력들이 이마져도 그들의 과오를 감추기 위한 반증으로 이용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보다 더 전체주의적 분위기 - 천황 중심의 일극 체제 - 하에서 타인으로부터 비난내지는 테러의 위협마져 감수하면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념"에 의한 그 행위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며, 우리도 그들을 지지해줌으로써 더욱 그들 내부로부터의 반성을 이끌어내야 그 의미가 크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문화 예술적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들에 대한 소개는 내게 싶은 여운을 남겼다. 일찍이 니체가 밝혔듯이 진정한 예술은 삶과 동떨어지지 않는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을 반영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들의 작은 작품들로 인하여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초월적 질문마져도 가능케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결과물들을 보다 많은 일반 대중들에게 알리고, 같이 공유하며 기억하는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더욱이 그 역사적 사실과 근거들이 세월의 폭력앞에 굴하지 않도록, 현대적인 방법(예를 들면 "구글 맵"과 같이)을 차용하는 모습들도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를 위해 책 말미에 특별히 이 "제노사이드"의 흔적은 담은 "다크 투어"의 소개도 하며 우리에게 참여를 희망하고 있다. 이제 아우슈비츠만을 기억하지 말고, 관동대학살의 기억도 당당히 그 목록에 올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일본)의 미래를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4. 아쉬운 부분...

먼저 이 책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부끄러움"이었다. 이 부끄러움은 내가 이 운동에 그동안 가졌던 무관심이 아니라, 이 중요한 역사적 범죄에 대한 우리만의 "인문학적 고찰"에 관한 그 어떤 저서도 못 접해봤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나치가 저지른 모든 반인륜적 범죄의 기록과 더불어 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의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귀결된다. 단지 그들의 과오를 비판함을 넘어 인류 보편의 철학적 화두까지 던지는 위대한 시도를 함으로써, 이후 숱한 담론과 추종 연구를 낳은 이런 저작을 왜 우리는 가지지 못했는가라는 절망감때문이었다.(한국 인문학자들의 소심함과 무지함에 동탄한다.) 이 사건을 반추해보면, 단지 천재지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살육이 아니다. 이후 일본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폭력의 근원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를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베"로 대표되는 현 일본의 극우주의의 재림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라고 느껴진다. 따라서 이 책이 아니라, 우리, 그리고 양심에 근거하여 행동할 책임이 있는 학자들에게 아쉬움이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책에 있어 지적할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처음 이 책의 제목과 표지에서 저자의 의도와 달리 일종의 "피로"를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100주년을 바라보건만, 이 학살의 폭로는 계속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이 폭로가 향하는 대상 또한 세월에 따라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받은 과장된 감정의 폭로만으로는 그 한계가 드러나지 않나하는 우려가 든다. 가령 현재 대한민국에서 판치는 MZ세대들의 노조에 대한 반감을 예로 들어보자. 현 정치세력의 의도된 망언들과 보수 언론들의 합작으로 노조에 대한 공격적인 반발감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분명 헌법으로 보장하는 권리를 주장하고, 더욱이 그동안의 군사 정권에서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으로 인해 강성이미지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역사는 무시하고, 지금의 폭력적 모습 - 그마져도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 이나 "빨갱이"라는 극단적 표현마져 서슴치 않는 그들의 인식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바 있다. 나는 이 근본적인 이유를 현 세대와의 "동조성"을 잃어버린 그들의 모습을 이유로 들고 싶다. 지금의 세대는 "공감"을 우선시하는 세대이다. 그들에게 공감할만한 의제와 표현방법을 찾지 않는 한, 이런 오명을 벗어나긴 힘들 것이라고 본다. 이는 이 책에서도 느껴진다. 좀더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이후 세대들에게 이 진실을 전하려는 정당성을 납득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시간의 힘앞에 굴복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5. 나오며...

다시 돌아와 지금의 우리를 바라본다. 정치적인 논쟁을 떠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자. 작금의 집권 세력에서 느껴지는 "우리 안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분명히 "한일협정"과 별개로, 개인의 전쟁범죄에 대한 "청구권"의 시효는 국제법상으로 무의미함을 보장받고 있고, 그 국제법에 의거하여 대한민국 최고 사법기관에서 내린 배상판결에 대해서, 행정부에서 독단적으로 이 판결을 부정하는 것은 3원 분립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게다가 그 의도가 국민들에게 도저히 공감을 얻어낼 수 없는 이 불법이 버젓히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무어라 설명할지 모르겠다. 한발 더 나아가, 이 "불의"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마져 존재함이 확인되는 사실이 더더욱 우려되는 바이다. 아무리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의해 백번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정의 복구를 져버리는 행위에 동조한다면 과연 앞으로 이런 불의가 우리를 대상으로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위안부 배상 및 사과문제, 강제 징용에 대한 배상 및 국가 차원의 사과, 그리고 이 "관동대학살"의 진실규명까지, 모든 사안들은 하나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들을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깨닫지 못할 지언정, 우리가 이를 묵인한다면 이는 우리 안의 폭력과 반민주주의적 역행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 소중한 것들을 남겨준 세대에게 빚진 우리는, 다음 세대들에게도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물려주어야할 의무가 있다. 여전히 미안한 마음으로 이 의미있는 작업을 묵묵히 이어가는 저자와 시민운동가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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