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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지음,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기획 / 원더박스 / 2023년 9월
평점 :
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61 : 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저, 2023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사람이 언제 죽는지 아나? 총알이 그의 심장을 뚫고 지나갈 때?...(중략)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이지..."
이 구절은 흔히들 잘 알려진 "기억"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할 때 회자되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유한하다. 누구도 죽음의 그림자 앞에 똑같이 놓여 있다. 다만 누군가는 그 죽은 이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회자됨으로써 비록 그의 "실체"는 죽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살아서 숨쉬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다른 생명력을 부여받고, 때로는 "불멸"의 지위를 얻기조차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위대한 인간들은 이러한 과정으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기억되어야 할 이들도 존재한다.

지금도 폴란드 땅에 위치한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하면, 지금은 전시관으로 바뀐 한 켠에 빼곡히 자리잡은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다름아닌 이 반인륜적 범죄행위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이름들이다. 벌써 전후 80년이 흘러가는 시점이지만 누구도 이들에게서 강제로 더이상 "생명력"을 빼앗지 못한다. 비록 폭력으로 그때는 죽어갔을지라도, 다시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여 영원한 삶의 기회를 다시 부여하고 있다. 또한 그럼으로써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첫째는 죽어가야만 했던 그들의 비극을 이렇게라도 위로하고 피해자들의 한과 증오를 심리적으로 승화시킨다. 다시말해, 사회적 애도를 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의식을 다시 한번 보듬어 주는 것이다. 둘째로, 가해자인 "독일"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과거의 과오를 잊지않게 함으로써 언제든 다시 발현할수도 있는 극단의 정서를 비판하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행위들이 오롯이 독일 국민이 원한 것인가는 논외로 치자.)
2차 대전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인 우리 한국으로써는 위의 선례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가해자 "일본"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 때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도 거듭 강조한다. "관동대지진 학살 - 원명칭은 '간토대학살'이지만 우리에게 더 익숙한 용어로 이후 대신함 - "의 진실은 지금 "사망 직전"이라는 위기 의식의 발로에서이다. 구체적 진술과 기억을 가진 피해자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바스라져만 가고, "한일협정"으로 대표되는 정치 행위에 의해 이들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라는 암묵의 강요에 더이상 침묵해서는 안된다.
이 무거운 주제로 나는 이 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점은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이 거대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지나친 "감상주의"는 배격하기로 말이다. 한 장, 한 장 그날의 처참한 기억을 읽을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자칫 일시적인 흥분에만 침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이다. 이 중요한 역사의 화두를 매듭짓기 위해서는, 그럼으로써 이 범죄의 "가해자"들에게 정의를 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반박 불가한" 인정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나의 작은 바램때문이다.
2. 저자의 의도...



이 책의 저자는 현재 시민단체 <푸른>의 이사이며, 매체 <오마이뉴스?에 관련 글을 기고하는 시민 운동가이다. 또한 민주시민 단체의 일련의 운동들에 관여하고, 여기서 느끼는 소감이나 생각들을 꾸준히 저서로 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저자가 내게 쓴 빼곡한 "편지"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듯이, 이 책은 "관동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기획한 저서이다. 소수의 뜻깊은 운동가들과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들이 줄기차게 주장해 왔지만, 가해자인 일본 정부의 복지부동인 모습과 피해자인 우리 한국의 무대응에 분노하며 일반 대중들에게 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임을 숨기지 않는다. 이미 꽤 많은 폭로 기자 회견과 학술 활동, 심지어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한 각종 고발들이 이어져 왔고, 이에 대한 기록은 모두 이 책에 담겨있다.
다만, 이번 기획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 활동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다. 마치 영화를 찍는 사람들을 영화로 남기듯이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미약하나마 소중한 의지를 재확인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이 투쟁을 후대의 누군가가 이어주길 바래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우슈비츠의 사례처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되묻는 행위 자체인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범죄들을 인정하고 "정의"가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는 이와 같은 인류의 오점이 그들 역사 앞에 등장하지 않도록 그들 스스로 "도구화된 이성"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바램이라고 하겠다.
3. 인상적인 부분...
이 책은 관동대학살의 기억을 최초로 주도한 재일사학자 강덕상 姜德相, 1932~2021 을 책의 첫 부분으로 시작한다. 우리 뿐만 아니라 일본에게도 현대사는 온통 질곡의 시기였으며, 더욱이 "식민지"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서 살아온 경계인의 현실을 조명한다. 뿌리깊은 차별에 항거하고, 그 근원인 역사의 오점을 인식하고 이를 고발한 그의 한평생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후의 일본 역사에서 팽배한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의 폭력의 기원을 바로 이 "관동대학살"로 최초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마치 독일 나치 정권의 유태인 박해를 독일 국민들이 용인하면서부터, 모든 정치적 탄압 및 전체주의로 인한 사회의 획일화, 그리고 이어지는 세계 대전으로까지.... 이 모든 과정과 유사하게 그 "최초의 폭력"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그들의 과오를 깊게 지적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현재 접하는 <산케이 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극우 매체들, 그리고 체제에 순응적인 다른 일본 매체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과격 극우들의 의도적 강조"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서 지적하는 소수이지만 양심을 가진 일본 시민들의 운동 또한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일본 극우 세력들이 이마져도 그들의 과오를 감추기 위한 반증으로 이용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보다 더 전체주의적 분위기 - 천황 중심의 일극 체제 - 하에서 타인으로부터 비난내지는 테러의 위협마져 감수하면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념"에 의한 그 행위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며, 우리도 그들을 지지해줌으로써 더욱 그들 내부로부터의 반성을 이끌어내야 그 의미가 크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문화 예술적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들에 대한 소개는 내게 싶은 여운을 남겼다. 일찍이 니체가 밝혔듯이 진정한 예술은 삶과 동떨어지지 않는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을 반영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들의 작은 작품들로 인하여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초월적 질문마져도 가능케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결과물들을 보다 많은 일반 대중들에게 알리고, 같이 공유하며 기억하는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더욱이 그 역사적 사실과 근거들이 세월의 폭력앞에 굴하지 않도록, 현대적인 방법(예를 들면 "구글 맵"과 같이)을 차용하는 모습들도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를 위해 책 말미에 특별히 이 "제노사이드"의 흔적은 담은 "다크 투어"의 소개도 하며 우리에게 참여를 희망하고 있다. 이제 아우슈비츠만을 기억하지 말고, 관동대학살의 기억도 당당히 그 목록에 올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일본)의 미래를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4. 아쉬운 부분...
먼저 이 책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부끄러움"이었다. 이 부끄러움은 내가 이 운동에 그동안 가졌던 무관심이 아니라, 이 중요한 역사적 범죄에 대한 우리만의 "인문학적 고찰"에 관한 그 어떤 저서도 못 접해봤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나치가 저지른 모든 반인륜적 범죄의 기록과 더불어 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의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귀결된다. 단지 그들의 과오를 비판함을 넘어 인류 보편의 철학적 화두까지 던지는 위대한 시도를 함으로써, 이후 숱한 담론과 추종 연구를 낳은 이런 저작을 왜 우리는 가지지 못했는가라는 절망감때문이었다.(한국 인문학자들의 소심함과 무지함에 동탄한다.) 이 사건을 반추해보면, 단지 천재지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살육이 아니다. 이후 일본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폭력의 근원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를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베"로 대표되는 현 일본의 극우주의의 재림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라고 느껴진다. 따라서 이 책이 아니라, 우리, 그리고 양심에 근거하여 행동할 책임이 있는 학자들에게 아쉬움이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책에 있어 지적할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처음 이 책의 제목과 표지에서 저자의 의도와 달리 일종의 "피로"를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100주년을 바라보건만, 이 학살의 폭로는 계속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이 폭로가 향하는 대상 또한 세월에 따라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받은 과장된 감정의 폭로만으로는 그 한계가 드러나지 않나하는 우려가 든다. 가령 현재 대한민국에서 판치는 MZ세대들의 노조에 대한 반감을 예로 들어보자. 현 정치세력의 의도된 망언들과 보수 언론들의 합작으로 노조에 대한 공격적인 반발감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분명 헌법으로 보장하는 권리를 주장하고, 더욱이 그동안의 군사 정권에서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으로 인해 강성이미지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역사는 무시하고, 지금의 폭력적 모습 - 그마져도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 이나 "빨갱이"라는 극단적 표현마져 서슴치 않는 그들의 인식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바 있다. 나는 이 근본적인 이유를 현 세대와의 "동조성"을 잃어버린 그들의 모습을 이유로 들고 싶다. 지금의 세대는 "공감"을 우선시하는 세대이다. 그들에게 공감할만한 의제와 표현방법을 찾지 않는 한, 이런 오명을 벗어나긴 힘들 것이라고 본다. 이는 이 책에서도 느껴진다. 좀더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이후 세대들에게 이 진실을 전하려는 정당성을 납득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시간의 힘앞에 굴복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5. 나오며...

다시 돌아와 지금의 우리를 바라본다. 정치적인 논쟁을 떠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자. 작금의 집권 세력에서 느껴지는 "우리 안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분명히 "한일협정"과 별개로, 개인의 전쟁범죄에 대한 "청구권"의 시효는 국제법상으로 무의미함을 보장받고 있고, 그 국제법에 의거하여 대한민국 최고 사법기관에서 내린 배상판결에 대해서, 행정부에서 독단적으로 이 판결을 부정하는 것은 3원 분립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게다가 그 의도가 국민들에게 도저히 공감을 얻어낼 수 없는 이 불법이 버젓히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무어라 설명할지 모르겠다. 한발 더 나아가, 이 "불의"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마져 존재함이 확인되는 사실이 더더욱 우려되는 바이다. 아무리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의해 백번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정의 복구를 져버리는 행위에 동조한다면 과연 앞으로 이런 불의가 우리를 대상으로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위안부 배상 및 사과문제, 강제 징용에 대한 배상 및 국가 차원의 사과, 그리고 이 "관동대학살"의 진실규명까지, 모든 사안들은 하나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들을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깨닫지 못할 지언정, 우리가 이를 묵인한다면 이는 우리 안의 폭력과 반민주주의적 역행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 소중한 것들을 남겨준 세대에게 빚진 우리는, 다음 세대들에게도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물려주어야할 의무가 있다. 여전히 미안한 마음으로 이 의미있는 작업을 묵묵히 이어가는 저자와 시민운동가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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