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공적으로 발생했을 때 분명히 현실적이었다.

여기에는 비밀이나 신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모두에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모두가 간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파국이 갑작스레 모든 사물과 사람을 덮쳤지만, 이전까지는 실체가 아니라

모든 공적인 대변자들의 매우 효과적인 빈말과 허튼 소리가 파국을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

···그런데 공공영역이 "신뢰성 상실"과 "보이지 않는 통치",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노출시키지 않고

은폐하는 언어, 오래된 진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진실을 무의미한 사소한 것으로

폄하하는 도덕적인 또는 다른 형태의 권고 때문에 그 빛을 잃게 될 때 어두움은 찾아왔다. 60-61p

한나 아렌트의 글은 (적어도 나에게) 어렵다. 정리해놓은 요약본이나 개념만 볼 때는 오히려 뚜렷하게 다가오는데 막상 그녀의 저술을 읽고 있으면 방대한 지식의 양과 영역, 그리고 수많은 부사에 침몰당하는 기분이 든다. 단순히 번역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가 남긴 수많은 표현들은 주술이 일치가 되나 싶을만큼 어렵고 길다. 그래서 이 책 자체도 한 번 읽은 자체만으로 오롯이 이해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녀의 책을 또 읽고 있을 나의 다음을 위해 남겨놓는 요약본 정도로 하겠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유럽국가의 어두운 시대(1차 세계대전 전후)를 살아낸 사람들이지만 한나 아렌트와 역자가 모두 언급하듯 어두운 시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들과의 우정, 그들의 정치적 사유, 그리고 휴마니타스(인간애)에 대해 전기에 가까운 평론, 에세이, 강연 등을 통해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가 의미하는 휴마니타스는 "자신의 삶과 인격을 공공영역으로의 모헝에 바치면서 획득할 수 있는 것(161p)"으로 정의되며 주관적인 생각이나 사적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닌, 책임을 증명해야 함을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의 책인만큼,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유대인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아렌트가 느끼기에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특히 발터 베냐민의 생의 마지막에 대한 묘사는 19c 유대계 지식인이 처한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어두운 시대를 살아낸 그들에게는 밝음과 어두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열다섯명의 인물을 소개하지만, 사실 전기를 가장한 그녀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 이를 고려해 공공영역에서의 정치적 사유, 예술과 문학, 그리고 우정과 휴마니타스라는 세가지 분류로 인물들의 설명을 구분해서 살펴봤다. 물론 겹치는 영역이 아주 많아서 뚜렷한 구분은 아니지만 읽는 나의 편의를 위해서 카테고리화가 필요했다.

그는 강제력이나 증거로 누군가 자신을 강요하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강요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추론이나 궤변 또는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사유를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폭정이

정통 학설의 고수보다 자유에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완전히 일관된 체계를 지닌 역사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은 채

자신을 알고 있는 바대로 인식의 효모(fermenta cognitionis)를 세상에 유포시켰습니다. 73p

공공영역에 대한 비판과 행위-사유의 정확한 연결을 언급했던 레싱에 관한 글로 책은 시작한다. 결론보다는 사유 자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히틀러 시대의 정신적 망명은 시대의식을 상실한 모습을 다소 띄고 있다는 점까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우정의 정치적 중요성은 뜻밖의 표현으로 그 특유의 인간성은 대화 안에서 발현되며 진리가 존재하는 것은 대화 가능성에 있어 그닥 필요한 점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런가 하면 친구는 될 수 있어도 형제는 아니라는 말로 그의 사유에서와 자신의 차이를 구분짓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의 수확은 2장에서 나온 로자 룩셈부르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었는데 네틀이 쓴 그녀의 전기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전기의 위험성으로 시작해 "네틀은 로자와 같은 능력과 기회를 가진 남성에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로자에게 그것을 부여하지 않았(123p)"다고 표현하면서 잘못된 표현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단순히 정의내리기에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현실을 가장 훌륭하게 해석'한 사람에 불과했던 그녀의 삶은 공적 자유의 절대성 필요성을 다시 한번 주의시킨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성인전은 온 세계가 왜 이분에게 눈을 돌리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성인전은 '비난받지' 않기 위하여 교회를 포함한 세계 일반의 기준이

예수의 설교에 포함된 판단이나 행동의 원칙과 대립되는 것을 어느정도 교묘하게 피하면서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이분에 관한 위대하고 대담한 이야기들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나는 이들 가운데 일부를 기억하여 명료하게 드러내고 싶다. 144-145p

그런가 하면 (글을 쓴 시점에서) 최근의 교황이던 요한 23세, 론칼리에 대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된 이가 선출되어 대담한 단순성을 선보였다고 표현한다. 그녀의 특수한 유대적 기질을 생각해보아도 이는 매우 거침없는 표현이다. 그의 덕목에 대한 존경은 표하되, 성서적 믿음의 천명과 공공영역에서 기독교적 삶이 출현했을 때 보이는 위험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한다. 그의 신앙에 대해서도 겸손보다는 자기확신이라고 꿰뚫어보는 그녀라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도 써내지 않았나 싶다.

전 지구의 파멸이라는 공포에 기초를 둔 소극적 연대는 명료하지 않지만

적잖이 중요한 이해에 그 대응 방안을 지니고 있다.

즉 인류의 연대는 정치적 책임을 동반할 경우에만 그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관념에 따라 개인적 '죄책'과 관계없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공적인 문제에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행하여 우리를 감당하기 어려운

전 지구적 책임상황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시민으로서 책임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연대는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일 수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부담에 대한 공통된 반발은 정치적 무감각과 고립주의적 민족주의,

즉 인간주의의 회복에 대한 열정이나 욕구라기보다 현존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다. 176p

친구이자 스승인 카를 야스퍼스가 평화상을 수여받은 뒤의 연설문에서는 공공영역에서 찬사의 의미를 밝히며 대놓고 마음껏 찬사를 전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정치문제란 너무 중요해서 정치가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일 속의 '휴마니타스'를 지키기 위해 지켜야 할 자세를 언급한다. '세계시민'에 대해서, 단일주권을 보유한 세계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오히려 이건 위험하다) 획일성과는 다른, 전세계 인류의 동일함을 통한 인류의 세계역사 참여를 강조한다. 그리고, 전쟁에서는 어떤 것도 불가하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잊고 있거나, 모르는체 하는게 분명한데, 그런 자세는 결국 무지에 불과하므로 늘 생각해야 할 정의라고 본다.

확실히 그는 이 마지막 것(자기 품성의 근본적 요구조건)에 대해서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이는 아마도 그가 명백하게 개인적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독특하면서도 지극히 특징적으로 유보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자체는 우리 시대의 문제다. 그러나 개개인의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있고,

심지어 거의 허용되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허용되지도 않는다.

개인의 사적인 관심사는 신들에게 웃음거리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신들은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226p

1940년대 자신들의 오랜 신념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신념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알았던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들은 역사적 성공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채 대상(열차)만을 바꾸었을 뿐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열차는 잘못되었으며, 그들은 자본주의나 프로이트주의

또는 약간 세련된 마르크스주의의 열차, 아니면 정제된 세 가지 혼합물의 열차로 바꾸었다.

오든은 대신 기독교인이 되었다.

즉 그는 역사라는 열차를 완전히 떠났다. 494p

헤르만 보르흐, 발터 베냐민, 브레톨트 브레히트 등 이후 이어지는 소설가, 수필가, 시인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개인의 사적인 관심사보다 미적인 것을 윤리와 지식으로 다룬 태도에는 긍정적이지만 왜 문학은 불충분한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언급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이미 저속한 것이다. 생애에 있어 분명히 지적할 점은 하되, 그들의 저작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순수하게 바라본다는게 조금 놀랍기도 하다.

랜달 쟈넬에 대해서는, 세계를 정면으로 맞은 시인으로 표현하며 시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들을 비난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분석하는 것에 가깝다. 반소설anti-novel을 들고 나온 나탈리 사로트는 시대와 친밀한 인물을 등장시킨 신소설의 선두주자로보면서 그동안의 잘못된 평가를 지적한다.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위스턴 휴 오든의 경우 허영심이 너무 없던 말년의 빈곤을 묘사하면서 어느정도의 애정과 함께 그의 시가 가지는 번역불가능성에서 발견하는 위대성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다.

이렇듯 관습적인 규범을 멸시하면서 냉정하게 대처하는, "지극히 탈정치적인 시인들(492p)"에 대해 그녀는 찬사와 지적을 아끼지 않는다. 여기서 그녀에게 찬사란 '좋은 것'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가장 불만족 스러운 모든 것에 맞서 이야기하고 상처를 빨아들이려는' 것이다. 이는 첫번째 남편의 사촌으로 만나 두번재 남편과도 친구를 먹었던(...) 발터 베냐민을 이야기할 때도 적용되는 태도다. 그가 받고 있는 '사후의 명성'을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에 대한 쓰라린 보상(273p)"으로 표현하며 그를 주시했던 불행, '작은 곱사등이'를 설명한다. 결국 책에 등장하는 모두가 받아들였건 몰랐건 느껴야만 했던 시대의 무게가 아니었을가. 프랑스 정부에서 환영받지 못했음에도 파리의 경험을 소중히 했던 그의 삶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따라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례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극작가와 병행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시인들과 세계를 공유하려는 모든 시민에 중요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문학 분야에만 맡길 수 없다.

이 문제는 정치학자들의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첫째, 괴테는 일반적으로 옳았으며 평범한 사람들보다 시인들로부터 더 많이 인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시인들도 중대한 죄를 범할 수 있으므로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짊어져야 한다.

둘째,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좋은 시행을 쓰는 능력은 시인들의 의지에 달려 있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을 부여받았어도 그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363p

자만과 명성이 아닌, 재능의 객관적 표출을 원했다고 평가하는 브레톨트 브레히트는 그녀의 짐작대로 만년에 동베를린에 정착해 눈앞의 공산주의를 보고나서야 상실감을 깨달았을까. 시인과 예술가도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짊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망명 시절 나치 독일에 관한 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를 대부분 유지한다. 그의 가장 근원적인 정념은 '동정'이었으나 로베스피에르나 레닌처럼 단지 동정심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선해질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진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덧붙여진 모욕과 고통'을 어느정도 실천적으로 본 사람이라고 본다. 민중의 시인이길 바랐던 그에게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용서는 사람에 대한 것이고 어떤 소행에 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사유는 단독으로 임무를 설정할 수 있으며 '문제'를 취급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실제로 항상 자신이 특별히 점유한 특별한 무엇,

더 정확히 표현하여 자신을 특별하게 분리시킨 무엇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유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유는 부단히 활동적이고, 심지어 오솔길 자체를 놓는 것도 이전에 드러났으며,

그것으로 인도된 목표에 도달하기보다 오히려 사유의 새로운 차원을 개방하는 데 기여한다.441p

러시아 출신 유대인이라는 '혈통' 자체가 정치적인 문제가 되던 곳에서 발데마르 구리안이 보여준 묵직한 태도와 용감함에 그녀는 찬사를 보낸다. 정치를 일종의 '구체화'로 인식하고 사람들의 드라마를 듣고자 했던 그의 태도에도.하에데거 또한 탄생 80주년 기념 원고를 통해 철학자 자체의 모습보다 교수로서의 '공적인 삶'에 충실했음을 언급한다. '대학에서 따분함의 대양(438p);으로 익사하고 있었던 철학의 영역을 끌어올린 그가 발휘한 사유의 영향력과 형이상학의 종말, '학문의 대상과 사유의 대상'을 구별하는 태도가 그녀에게는 인상깊었던 것 같다. 사유는 경이에서 발전해 직접 자각되는 동안 멀리 있는 것으로 의지의 본질은 사유와 대립한다는 개념 정도로 한나 아렌트의 설명을 이해했다.

본인은 평론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각 인물들의 생애와 작품을 바라보는 한나 아렌트의 자세는 누구보다도 치밀하다. 굉장히 철학적이여서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으며 기본적으로 한 문장이 굉장히 긴 편이다. 사실 그녀가 쓴 글이 대부분 그렇다(...)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문장 구조 자체에 이상이 없어서 찬찬히 뜯어봐도 복잡하다. 부사가 많은게 문장 구조의 특징이기도 한데 표현 자체는 새로워서 재밌는 것들이 많다. '동시성의 초시간성' 같은. 특히 '단지', '오히려' 같은 부사도 굉장히 많이 등장하며 "가장 폐해가 적었던 과오", "마지못한 시인", "거짓말을 파는 시장"으로 묘사된 할리우드처럼 독특한 표현들이 기억에 남는다.

다른 책들에 비하면 챕터 하나하나의 길이가 짧은 편이라 흐름이 끊겨도 넘길 수 있고 때때로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로 숨쉴틈(...)이 있다는 점, 한나 아렌트가 동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읽기 수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그녀의 분명한 애정 또는 존중에도 불구하고 이게 긍정적인 평가인지 부정적인 평가인지 헷갈리는 문단들을 펼쳐질 때도 많다. 그녀의 유대인성과 '공적인 영역'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철학적 개념과 문학 평론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느껴도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이 힘이 될 때 - 깊고 단단한 나를 위한 인생 강의
천궈 지음, 고상희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모든 삶의 무게는 '불안'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불안만큼 인간에게 공포와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또 있을까?

불안은 틈만 있으면 우리 안으로 파고들어 '꽃들이 만발한 아릅다운 경치 뒤의 황량함과

빛나는 순간의 이면에 자리한 영원한 암흑'을 보게 한다.

불안은 이토록 독재적이어서 우리의 다른 모든 감각을 앗아가 버릴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꿈을 침몰시켜 노예를 자처하게 만든다.

'불안'이라는 폭군은 우리 내면에서 무형의 가죽 채찍을 휘둘러,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뿌리며 경쟁에 뛰어들고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34p

이 책은 저자 천궈가 푸단대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했던 강의 내용에 관련된 것이거나, 강의 중 생각했던 것들에 관한 것이다. 책의 제목인 고독 뿐만 아니라, 성공, 자유, 이타심, 도덕, 품격, 자신감과 같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느끼는 감정들이나 필요/불필요한 자세들을 이야기한다. 전반적으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때 어조가 분명한 편이며 철학, 동양 고전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 다소 공자왈 맹자왈스러운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의 내면에 있으면서

우리의 마음, 정신, 영혼, 인격을 결정한다.

그것은 진정 우리에게 속한 것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와 함께한다.

그것은 우리의 혈관 속으로 흐르고 우리의 전신을 휘감으며

우리의 시야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다.

또한 '마음에는 영원히 주름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시간도 그것을 앗아가지 못한다. 78-79p

최근에 읽은 키르케고르 책도 그랬지만,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의 강도가 더 극심해지면서 이 주제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인간은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존재고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그 점은 거의 불변에 가까운 사실이었기에 잘 살펴보면 그 이전의 문학작품들 중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것들이 많다. 정말이지 골치 아픈, 인간 본연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를 규정짓는 초반부에서 저자는 외로움을 '천한 것'으로 단정짓는다. '외로움'을 저자의 방식으로 정의내린다면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고독과 비교당하면서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외로움을 책에서 만날 때마다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또 내면이 고요하고 여유로운 사람을 저자는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는데, 이런 사람은 일상이 소중하고 새로워 여행이 필요없다는 맥락도 등장해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살짝 당황스러운 지점을 만들어주었다. 낯선 일상의 풍경을 겪는 것 또한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인생의 여정에서 만난 어느 낯선 사람이 내 막역한 벗이 되었다.

그는 나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열쇠 하나를 주었는데,

이 열쇠로 언제든지 그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나는 이 관계를 특별히 소중히 여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존재하는데,

이 믿음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115p

친구는 쓸모없는 존재다.

우리가 친구를 사귀고, 친구를 필요로 하고,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쓸모 있기 때문이 아니다.

친구는 이용하기 위해서, 감정의 배설구가 필요해서, 위로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잘난 점을 돋보이게 한 들러리가 필요해서,

조력자나 공모자가 필요해서 사귀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배려를 주기 위해서, 마음의 풍요와 삶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마음을 통하는 순간을 맞기 위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공기처럼 늘 함께 있다는 느낌과

신뢰감을 느끼기 위해서 친구를 사귄다.126p

삶과 영혼이 모두 빛나기 위한 성공의 두 조건으로 필요한 외공과 내공을 꼽는데 주로 영혼의 충만을 위한 '내공'에 초점을 맞추지만 '외공'의 문제를 터부시하지는 않는다. 부와 재물을 속되게 하는 교화의 위험성이나 이타심을 도덕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는 오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장 공감이 갔던 챕터는 '지기'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었는데 지기와의 소박한 교제방식이나 '둘만의 세상'이 필요하다는 점이랄지, 섣불리 지기로 단정짓지 말고 시간에 따라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한다는 내용은 누구나 공감가능한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기 양심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정신적 통제력을 확립해 세상 사람들이 좇는 화려한 세계를 포기했다면,

그는 결코 자유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동경하는 자유를 선택하고 지킨 것이다.

그가 선택한 자기 통제는 도덕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내면의 청명함과 안온함에 도달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길이다.

그의 즐거움은 남들 눈에 도덕적 본보기나 착한 사람으로 비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그가 가는 곳이 그가 가기 전보다 아름다워지는 것,

즉, 자아 완성의 과정에 있다. 157-158p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성숙을 처세술에 능하고 닳아빠졌다거나 저속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의 대명사로 여기고 멀리할 필요도 없다.

성숙은 혼탁함이 아니라 진흙 속에서 났지만

더럽지 않고 맑은 물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은 맑음이고,

경박함이 아니라 수많은 유혹에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함을 지키는 차분함이며,

쾌감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 아니라 마음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명랑한 달관이다.

성숙은 눈에 뻔히 보이는 처세술이 아니라 한결같은 내면의 천진함과 순수함을 가리키고,

인격에 잡히는 주름이 아니라 영원히 주름지지 않는 영혼이다.225p

그렇기에 남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하나하나의 관심, 도움,

심지어 미소 한 자락조차 그가 나를 위해 들이는 애정이자 시간, 정력 및 내면의 선의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날 때부터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인 예우 또는 긴요한 순간에 베푸는 은혜다.

우리는 이런 예우에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우리가 받은 행운에 마음 가득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255-256p

자유의 다른 말은 통제인 것처럼 무절제한 자유에 대한 지양은 여러 번 철학 수업에서 들어 조금은 진부하지만, 논리적이다. '인간이기에' 자유를 말할 수 있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그 가치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품격과 자신감에 대한 단락에서 등장한 맥아더의 자만감 사례는 흥미로웠다. 그의 전성기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새로운 느낌. 이외에도 사랑, 참회, 호기심 같은 주제들도 뒤따라 온다.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와 문화가 비슷한 점들이 있어서인지 번역이 굉장히 잘 된 덕인지 모르겠지만 중간중간에 한국어 관용표현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서 집중력이 좋았다.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과 관계가 가져오는 피로감이 무겁게 다가오는 순간에 읽으면 좋을 책인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앙마이에서는 천천히 걸을 것 - 율리와 타쿠의 89일 그림일기
배율.진유탁 지음 / 김영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게 저렇게 살다보면 한 번이라도 이토록 걱정 없는 시간을 가지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휙 떠나와서, 제법 온전히 마음을 쏟아 쉬어가는 89일이라니.210p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태국에서 한달살기', '치앙마이에서 세달 살기 꿀팁' 같은 정보를 기대했다면 더더욱. 사실 한국에서 놀러온 여러 지인들의 아마추어 가이드를 했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며칠만 여행을 가도 할 말이 많은데 얼마나 구구절절 담을 정보가 많았겠는가. 그러나 이는 요즘 세상에 인터넷만 뒤져도 나올 정도고 그것보다 율리와 타쿠의 꼼꼼한 일상기록이 더욱 흥미로웠다. 돈므앙 공항에 내리는 순간 택시운전사 에피소드부터 집주변의 시장, 마트 구경까지 말그대로 '일상'인.

그 결정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현실에서 누군가 그녀와 같은 결정을 했다면 주변 사람들이 나무랐을지도 모를 결정.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잘못한 결정이 올바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본다면 잘못한 결정은 더 이상 잘못한 결정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바라왔듯, 이번 겨울은 따뜻한 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가봤자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느니 '갔다 와선 어쩔 거야'라는 말들로 마음속 어딘가에 우겨넣어 버렸던 마음을 꺼낼 날이 왔다. 이직이 아닌 다른 기차를 타는 것은 우연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인 거라고.

그 기차에 올라탄 내가 끝끝내 어떤 목적지에 내리게 될지는 물론,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말이다. 16p

진짜 일상이라는게 확 느껴졌던게 첫주부터 외주로 일을 하면서 '디지털 노마드'에 대해 두 사람이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둘 모두가 프리랜서라 가능한 지점이기는 하지만. '느슨하고도 알찬 날들'이라는 표현이 두 작가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해외 어드벤티지'라는 말도 약간 '아, 이거지' 싶었다. 이래서 여행을 떠나면 자유로워진다고 느끼는게 아닐까.

서울에서는 찾지 못했던 작은 원더랜드였다.

동시에 치앙마이에 스며들기 위해 필요한 베이스캠프였다.

맛있는 음식, 시원한 마사지, 멋진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값질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는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에게 치앙마이의 여유로움이란 내가 살던 234/790호실에서 시작된 셈이다.

딱 맞는 껍데기를 찾은 소라게는 다른 소라게보다 성장이 빠르다. 나는 딱 맞는 껍데기를 찾은 소라게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82p

사실 가슴이 울리지 않아도 좋았다.

마음속 울림과 살아가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일상이란 건 잔잔한 파도인 편이 낫다. 날마다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것도 조금은 피곤할 테지.

요컨대 일상에는 시시한 구석이 필요한 것이다. 치앙마이에서는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무리해서 마음을 크게 쓸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일들이 "이런 게 뭐 별일이야?" 정도로 넘길 만 했다.

조금 시시한 구석이 있긴 해도 나는 그런 생활에 더할나위 없이 만족했다. 147p

여행지 선택 기준과 선택지를 선택하는 기준은 누구나 조금씩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타쿠에게 동의. 매일이 가슴 뛰면 그건 심장병(...)이라고 누군가 말한 기억이 나네. 시시한 일상의 순간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일상이 참 마음에 들었다. 조곤조곤 길을 걸어다니는 잔잔한 파도같은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자주 느끼게 되는 요즘이기도 하고.

성공적인 도망이었다.

싫어하던 것에서 제대로 도망을 쳤다.

한편으론,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버킷리스트 '겨울을 여름 나라에서 나기' 항목에 시원한 마음으로 줄을 쫙 그었다. 정말 해보고 싶던 일을 한 가지 한 거라고 생각하니 스스로 칭찬해주고픈 마음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언제든 피하려면 피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가지는 것만으로, 신기하게도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몇 달이 아니더라도. 몇 일, 어쩌면 단 몇 분만이라도. 가끔은 싫어하는 걸 피해가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 따뜻한 여름 나라에서 나는,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로 흐리고 추운 다음 겨울을 맞이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207p

그런가 하면 태국에 대한 묘사도 물론 등장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어느 도시의 풍경은 언제나 신기하고 재밌다. 태국에는 역시나 사원이 정말 많구나. 약간 교토의 절들을 보는 느낌이려나. 율리 작가가 가장 추천했던 '왓 체디루앙'이라던지 몇몇 건축물들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태국식 요일점도 재밌고. 그러고보면 우리는 날짜는 엄청 따지는데 요일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다 괜찮을 것 같지만 길가에 늘어져 있는 강아지들과 방에 불쑥 출연하시는 도마뱀은 적응하기 좀 어려울 것 같아서 겁도 한웅큼 먹었다.

선택할 필요가 없으니 고민할 일도 없었다.

나는 그 패턴이 만족스러웠다. 생활에 생기는 이런 패턴은 어쩌면 뻔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뻔한 건 편한 것이 아닐까?

서울에 돌아온 뒤로 무얼 먹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 그 때의 기억이 난다. 247p

잊지말자... 센트럴 페스티벌 4층 푸드코트 치킨 난반 덮밥... saint etoil의 초코도넛.... 이외에도 힘세고 강한 밥ㅋㅋㅋ이라고 묘사된 스티키라이스라던가 무려 '벌크업 오렌지'라는 별칭을 선사받은 포멜로도 먹어보고 싶다. 역시 여행은 먹는거지(!) 진짜 나한테는 타지에서 장기거주를 하게 된다면 이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포인트일 것 같다. 아등바등 찾아먹는 '현지음식'이 아닌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음식들과 여유로움이.

마지막 에피소드의 마지막 컷 아래에 작게 'fin'을 쓰고 나서야 겨우 마음도 몸이 있는 곳으로 돌아옴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니 봄은 지난 지 오래, 이미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그야말로 긴 꿈을 꾸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동굴 속에서 추위를 잊고선 여름날의 꿈을 꾸고 일어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려나.295p

적당한 길이와 무게의 단상들. 힘들이지 않은 사진. 가끔 두페이지에 꽉찬 일러스트. 웹툰/인스타툰 같은 컨텐츠를 종이로 인쇄할 때 사실 아쉬움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텅빈 공간이 생긴다거나 굳이 돈들여서 책을 사야할 이유를 못 느끼겠는 나이브한 구성일 때. 하지만 인스타에서 그렸던 10컷이 꽉 들어찬 페이지 구성이나 두 사람의 생각이 짧게나마 들어간 에세이가 책의 소장가치를 높여준다. 아기자기하고도 담담하게 캐릭터이자 작가인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여행에세이.

+) 여행지도?도 부록이랑 함께 있는데

무엇보다 음식에 시선이 간다ㅜㅜ

너무 맛있어 보이잖아요....ㅠ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래하는 페미니즘 My Little Library 8
박준우 지음 / 한길사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기 녹음한 작품으로는 1997년에 발표된 앨범 <A Story>도 있는데,

이 앨범에는 당시 비틀스 팬들에게 들었던 야유와 비난을 언급하는

<Yes, I'm a Witch>도 수록되어 있다.

작품은 "너희들이 이야기하듯 나는 죽여야 하는 마녀가 맞다.

난 당신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안 쓴다.

내 목소리는 진실이며 당신들을 위해 죽지 않는다"라는 가사로 채워져 있다.

43p

나는 참, 팝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다. 저자가 이쯤이면 알겠지, 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조차도 사실 잘 모른다. 등장하는 인물이나 노래 중에 아는게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전해졌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팝의 메시지는 페미니즘, 다양성, 상상력, 관용에 대한 것이다. 재즈부터 자넷 잭슨, 힙합과 마돈나, 비욘세까지. 팝의 가사와 역사에 그들이 늘 전달하고자 했던 페미니즘, 그들의 삶이 보여주는 페미니즘에 대해 애야기한다. 샤니아 트웨인이 20c 부터 미러링이라는 방법을 통해 맨스플레인을 비판했다는 점을 비롯해서 꽤 오래전부터 남성중심의 아름다움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가수들이 있었다는 점이 나는 무척이나 새롭고 흥미롭게 여겨졌다.

이 작품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연 여성의 재력이 현실적인지,

또는 애인을 바꾸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지를 묻는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충분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위의 작품은 이성애 관계에 한정된 가사다.

따라서 이성애를 중심으로 관계를 상정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할 주제는 이성애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구조적 문제다.

98p

이 부분을 읽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마치 '여경'이 어떻게 저렇게 범인을 때려잡냐며 액션/오락 영화를 깎아내리던 최근의 일부 평가가 떠올라서이다.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당최 작품을 왜 작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느냔 말이다. 온갖 판타지부터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윤리적인 문제까지 등장하는 판국에 가당키나 한 비난인가. 흠집을 찾아내려고, '페미니즘' 안에서 뭐뭐의 한계에 부딪힌다는 말이 참 많다.

유독 여성이 말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가능성보다 한계를 찾으려는 시도가 많다. 팝도 마찬가지. 정체성에 대한 지적부터 이성에 스테레오 타입에 갇혀있다는 지적까지. 그러나, 이는 그 강도가 어찌됐든 필요한 논의다. 한계를 제기하려는 움직임은, 아직 너무 이르고 편협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야기해야할 뿐. 이외에도 인종차별과 공권력이 자행하는 폭력까지 고발하는 다양한 범주의 팝들을 저자는 소개한다.

물론 팝 음악시장은 굉장히 상업적이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고 시스템화되어 있으며 작품 하나를 만들 때도 각종 요소를 배치한다.

하지만 성숙한 팝 음악시장은 인간을 그러한 산업구조의 일부로만 취급하지 않는다.

가수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리고 대중에게 선보이는 모습을 많이 고민하는 것이

팝 음악시장의 매력이다.

퍼포머performer의 역할도 단순히 누군가 만들어준 것을 프론트맨으로서 선보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책임의식을 지닌 채 대중 앞에 서서 스스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팝 음악가다.

69p

'화두'를 던지는 마돈나. 우리가 필요한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역할이란 이런 것이다. 소말리아 출신 난민인 케이난의 소개도 나에게는 그 자체로 강렬했고 감수성의 부족으로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했던 아티스트(비욘세)가 새로운 아이콘으로 페미니즘을 알아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여진다는 점이 단지 그것만으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Beychella(코첼라 페스티벌-비욘세)를 보러 가야겠다.

주얼의 데뷔 앨범은 대부분 자작곡으로 채워져 있다.

기타 연주가 바탕이 된 푸크 록 작품들은 그 의미와 분위기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특히 현실적인 가사를 섬세하게 풀어내는 것은 포크만이 지닐 수 있는 정서다.

좋은 작품이 미디어의 기획이 아닌 대중의 힘으로 성공했기에

지금도 <Pieces of You>는 큰 의미를 지닌다.

앨범 수록곡 전체의 가사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들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앨범 커버에 적혀 있는 '우리가 인간의 자연이라고부르는 것은 실제로 인간의 습관이다'

what we call human nature in actually is human habit라는 문구가 다시금 눈에 들어올 것이다.

126p

최고의 반전은 저자의 전공이 민속학(!)이라는 점 아닐까. 대부분의 곡들은 미국 시장 안에서의 팝을 다루지만 후반부에 아시아권 곡들과 아티스드도 몇몇 등장한다. 타이완의 '채의림'이라던지. 저자가 어느정도 세심하게 신경을 기울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팝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함께 넓은 범위의 지식들을 잘 알고 필요한 부분에 적절히 언급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욘세는 성공한 팝 스타로서 페미니즘을 더욱 많은 이에게 알렸다.

혹자는 비욘세의 페미니즘이 힙하고 쿨하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페미니즘은 그렇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비욘세의 페미니즘이 힙하고 쿨하고, 심지어 '소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페미니즘은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며 더 많은 이에게 노출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또는 어떤 형태의 페미니즘만이 옳다고 볼 수 없다.

비욘세가 지금까지 보여준 페미니즘은 중요하고,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190p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욘세 파트에 등장했던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자넬 모네를 보고 간만에(...) 참 반가웠는데 무려 배우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다니 당신 커리어 대단...b 그의 소개에서도 저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이자 팝스타로서 자연스럽게 임파워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들의 이상적인 역할이라고 본다. 결국, '연대'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흐름들이 적극적으로,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인상깊었던 점은 저자가 '노래'나 '곡'이 아닌 "작품"으로 지칭한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모든 곡들의 역사를 그 자체로 바라보는 저자의 진지한 태도가 느껴지는 듯 했고. 그럼에도 팝에 대한 문외한이다 보니 아무래도 단편적인 정보가 대부분인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많이 아쉬웠다. 노래 리스트가 부록으로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쭉 들으면서 다시한번 책을 정독할 수 있도록. 그리고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옆면에서 종이가 일어난다는 제본 자체의 거친 느낌이 있어 아쉬웠다. 전체적으로 담백한 팝 페미니즘의 입론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 아워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제는 댈러웨이의 이름이 클러리서라는 것이다.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 뚜렷한 암호라고나 할까.

아니, 운명이야말로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클러리서는 분명 비참한 결혼생활을 하거나 기차 바퀴 밑으로 굴러 떨어질 운명은 타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매력과 성공이 운명적으로 따를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댈러웨이 부인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이었다.

25-26p

지금 이 순간에는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이 선사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 혼미함을 극복했다.

막힌 파이프를 뚫고 황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내면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제2의 자아가, 또는 좀더 순수한 자아가 느껴진다.

신앙심이 깊다면 이를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지성과 모든 감정 그 이상이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60-61p

한 페이지만, 딱 한 페이지만 더, 그녀는 결정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옷을 갖춰 입고, 머리를 손질하고, 부엌으로 내려가는 일 따위는

여전히 너무 비천해 보이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새로운 하루로 뛰어들기 전 침대에 있는 자신에게 몇 분을 더 허락할 것이다.

그녀 자신에게 약간의 여유를 허락할 것이다.

그녀는 젖가슴 밑에서 시작되어 전신을 부풀렸다가

부드럽게 붕 띄우는 감정의 물결에 흽싸인다.

67p

아무런 연관성 없이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것 처럼 보이는 버지니아 울퍼, 로라 지엘스키, 그리고 클러리서 본. 세 여자의 평범한 하루가 눈부시게 펼쳐진다. 그들의 하루는 아주 평범하게 시작한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하지만 조금은 새로운 기분의 하루. 그들은 하루에도 여러번 어떤 끔찍한 우울감에 잠시 사로잡히기도 하며 충만한 영혼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물론 그들에게만 찾아오는 순간은 아니고 루이스와 리처드에게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일련의 순간들이다.

오롯이 세명의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또 한명의 주인공이 있다면 리처드일 것이다. 클러리서와 젊은 시절 사랑에 빠질 뻔 했지만 동성애자이자 에이즈 환자이자 시인으로 남은 한 남자. 리처드의 묘사는 흥미롭다. 자기 자신과 주변인들이 꾸려가는 삶만이 가장 가치 있고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한껏 넓어지는 마음을 선사하는 사람. 동시에 "그에게 당신이란 존재는 그 자신의 비극과 희극을 엮어내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으로 창조해낸, 본질적으로 허구인 인물(97p)"에 가깝다는 사실. 물론 클러리서를 포함한 주변인들은 그 느낌에 의지하며 살지만.

지금 그녀는 진짜 자기 모습으로 행복하게 사는 요령을 터득한다.

아이가 때가 되면 두발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듯이. 멋진 일이다.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놓쳐버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탐험하지 못한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재능이 없다는 걸 알게 된들 무슨 상관인가).

그녀는 아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충실할 것이다.

자신의 가정과 의무에, 자신의 모든 재능에 충실할 것이다.

그녀는 이 두 번째 아기를 원할 것이다.

125p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장면은 로라와 키티의 뜻밖의 연민과 연대. 늘 친애의 감정과 어떠한 열등감을 느껴왔던 그녀가 자궁에 병이 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남편 레이를 걱정하는 모습에 로라는 그녀를 안아준다.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당당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사랑과 슬픔을 표현하며 마침내 그들의 입술이 닿는 장면에 숨죽일 수 밖에 없었다. 잠깐이지만, "서가에는 책들이 졸고 있는(167p)" 그 순간의 열기.

이토록 침침하고 거대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들어갈 곳은 놀랍게도 거의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은밀하고 조용한 장소)

당장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상점이나 식당에 들어간다면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의 관심 밖인 물건이 필요한 척해야 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하며, 상품들을 살펴봐야 하고,

도와주겠다는 종업원의 친절을 요령껏 뿌리쳐야 할 것이다.

아니면 식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주문해서 먹은 뒤 그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자동차를 어딘가에 주차하고 혼자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범죄의 표적이 되거나

범죄자로부터 보호해주려는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다.

지나치게 노출된 그녀는 지나치게 이상해 보일 것이다.

217p

그녀들의 일상을 침범하는 것은 무신경하게 파고드는 우울과 더불어 아주 사소한 압박이다. 브라운 부인인 로라가 하루종일 느꼈던 케이크의 압박. 심지어 상에 올라가 먹히는 순간에도 케이크는 그녀를 압박한다. 버지니아가 느낀 하녀 넬리의 시선도 숨막히긴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들도 아주 사소하다. 로라가 하얀 노먼디 호텔에서 잠깐이나마 쉬었을 때 비록 "쉬지 않고 사용된 장소 특유의", "피곤에 지친 냄새(223p)"를 풍기는 공간이지만 얼마나 편안했는가. 그녀들의 평안을 방해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은 찬란한 눈밭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두려우면서도 신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슬픔이 평범한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분노가 지나간다.

괜찮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괜찮아. 냉정을 되찾자. 제발.

302-303p

삶의 순간순간에 스며드는 불안들. 책의 시선은 그녀들 자신의 것이 되었다가 주변인물들이 그녀들을 보는 시선이 되었다가 독자의 것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녀들이 느끼는 타인의 시선을 묘사하는 것이며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종잡을 수 없는 부유지만 산만하지 않고 새롭다. 그리고 각자가 느끼는 삶의 불완전성을 한층 더 증폭시킨다. 그 어떤 고독과 광기에 가까운 분노가 지나가면 하루는 끝이 난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 책은 '가차없는 일상(333p)'을 마주하고 있지만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한없이 예민해지는 이들이지만 어쨌든 살아내려 한 시간이기도 하다. 칠십년이라는 시간의 차이, 런던-LA-뉴욕이라는 다른 공간이지만 찬란한 햇살 아래 죽음과 삶을 고스란히 느끼는 삶이라는 점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는 독자를 몰입시킨다. 저자가 묘사하는 섬세하게 감정의 결들과 함께. 책을 읽다도면, 영화의 이미지도 당연하게 궁금해진다(캐스팅도 미쳤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