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워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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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댈러웨이의 이름이 클러리서라는 것이다.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 뚜렷한 암호라고나 할까.

아니, 운명이야말로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클러리서는 분명 비참한 결혼생활을 하거나 기차 바퀴 밑으로 굴러 떨어질 운명은 타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매력과 성공이 운명적으로 따를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댈러웨이 부인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이었다.

25-26p

지금 이 순간에는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이 선사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 혼미함을 극복했다.

막힌 파이프를 뚫고 황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내면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제2의 자아가, 또는 좀더 순수한 자아가 느껴진다.

신앙심이 깊다면 이를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지성과 모든 감정 그 이상이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60-61p

한 페이지만, 딱 한 페이지만 더, 그녀는 결정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옷을 갖춰 입고, 머리를 손질하고, 부엌으로 내려가는 일 따위는

여전히 너무 비천해 보이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새로운 하루로 뛰어들기 전 침대에 있는 자신에게 몇 분을 더 허락할 것이다.

그녀 자신에게 약간의 여유를 허락할 것이다.

그녀는 젖가슴 밑에서 시작되어 전신을 부풀렸다가

부드럽게 붕 띄우는 감정의 물결에 흽싸인다.

67p

아무런 연관성 없이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것 처럼 보이는 버지니아 울퍼, 로라 지엘스키, 그리고 클러리서 본. 세 여자의 평범한 하루가 눈부시게 펼쳐진다. 그들의 하루는 아주 평범하게 시작한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하지만 조금은 새로운 기분의 하루. 그들은 하루에도 여러번 어떤 끔찍한 우울감에 잠시 사로잡히기도 하며 충만한 영혼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물론 그들에게만 찾아오는 순간은 아니고 루이스와 리처드에게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일련의 순간들이다.

오롯이 세명의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또 한명의 주인공이 있다면 리처드일 것이다. 클러리서와 젊은 시절 사랑에 빠질 뻔 했지만 동성애자이자 에이즈 환자이자 시인으로 남은 한 남자. 리처드의 묘사는 흥미롭다. 자기 자신과 주변인들이 꾸려가는 삶만이 가장 가치 있고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한껏 넓어지는 마음을 선사하는 사람. 동시에 "그에게 당신이란 존재는 그 자신의 비극과 희극을 엮어내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으로 창조해낸, 본질적으로 허구인 인물(97p)"에 가깝다는 사실. 물론 클러리서를 포함한 주변인들은 그 느낌에 의지하며 살지만.

지금 그녀는 진짜 자기 모습으로 행복하게 사는 요령을 터득한다.

아이가 때가 되면 두발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듯이. 멋진 일이다.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놓쳐버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탐험하지 못한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재능이 없다는 걸 알게 된들 무슨 상관인가).

그녀는 아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충실할 것이다.

자신의 가정과 의무에, 자신의 모든 재능에 충실할 것이다.

그녀는 이 두 번째 아기를 원할 것이다.

125p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장면은 로라와 키티의 뜻밖의 연민과 연대. 늘 친애의 감정과 어떠한 열등감을 느껴왔던 그녀가 자궁에 병이 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남편 레이를 걱정하는 모습에 로라는 그녀를 안아준다.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당당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사랑과 슬픔을 표현하며 마침내 그들의 입술이 닿는 장면에 숨죽일 수 밖에 없었다. 잠깐이지만, "서가에는 책들이 졸고 있는(167p)" 그 순간의 열기.

이토록 침침하고 거대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들어갈 곳은 놀랍게도 거의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은밀하고 조용한 장소)

당장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상점이나 식당에 들어간다면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의 관심 밖인 물건이 필요한 척해야 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하며, 상품들을 살펴봐야 하고,

도와주겠다는 종업원의 친절을 요령껏 뿌리쳐야 할 것이다.

아니면 식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주문해서 먹은 뒤 그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자동차를 어딘가에 주차하고 혼자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범죄의 표적이 되거나

범죄자로부터 보호해주려는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다.

지나치게 노출된 그녀는 지나치게 이상해 보일 것이다.

217p

그녀들의 일상을 침범하는 것은 무신경하게 파고드는 우울과 더불어 아주 사소한 압박이다. 브라운 부인인 로라가 하루종일 느꼈던 케이크의 압박. 심지어 상에 올라가 먹히는 순간에도 케이크는 그녀를 압박한다. 버지니아가 느낀 하녀 넬리의 시선도 숨막히긴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들도 아주 사소하다. 로라가 하얀 노먼디 호텔에서 잠깐이나마 쉬었을 때 비록 "쉬지 않고 사용된 장소 특유의", "피곤에 지친 냄새(223p)"를 풍기는 공간이지만 얼마나 편안했는가. 그녀들의 평안을 방해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은 찬란한 눈밭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두려우면서도 신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슬픔이 평범한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분노가 지나간다.

괜찮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괜찮아. 냉정을 되찾자. 제발.

302-303p

삶의 순간순간에 스며드는 불안들. 책의 시선은 그녀들 자신의 것이 되었다가 주변인물들이 그녀들을 보는 시선이 되었다가 독자의 것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녀들이 느끼는 타인의 시선을 묘사하는 것이며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종잡을 수 없는 부유지만 산만하지 않고 새롭다. 그리고 각자가 느끼는 삶의 불완전성을 한층 더 증폭시킨다. 그 어떤 고독과 광기에 가까운 분노가 지나가면 하루는 끝이 난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 책은 '가차없는 일상(333p)'을 마주하고 있지만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한없이 예민해지는 이들이지만 어쨌든 살아내려 한 시간이기도 하다. 칠십년이라는 시간의 차이, 런던-LA-뉴욕이라는 다른 공간이지만 찬란한 햇살 아래 죽음과 삶을 고스란히 느끼는 삶이라는 점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는 독자를 몰입시킨다. 저자가 묘사하는 섬세하게 감정의 결들과 함께. 책을 읽다도면, 영화의 이미지도 당연하게 궁금해진다(캐스팅도 미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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