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는 천천히 걸을 것 - 율리와 타쿠의 89일 그림일기
배율.진유탁 지음 / 김영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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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저렇게 살다보면 한 번이라도 이토록 걱정 없는 시간을 가지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휙 떠나와서, 제법 온전히 마음을 쏟아 쉬어가는 89일이라니.210p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태국에서 한달살기', '치앙마이에서 세달 살기 꿀팁' 같은 정보를 기대했다면 더더욱. 사실 한국에서 놀러온 여러 지인들의 아마추어 가이드를 했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며칠만 여행을 가도 할 말이 많은데 얼마나 구구절절 담을 정보가 많았겠는가. 그러나 이는 요즘 세상에 인터넷만 뒤져도 나올 정도고 그것보다 율리와 타쿠의 꼼꼼한 일상기록이 더욱 흥미로웠다. 돈므앙 공항에 내리는 순간 택시운전사 에피소드부터 집주변의 시장, 마트 구경까지 말그대로 '일상'인.

그 결정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현실에서 누군가 그녀와 같은 결정을 했다면 주변 사람들이 나무랐을지도 모를 결정.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잘못한 결정이 올바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본다면 잘못한 결정은 더 이상 잘못한 결정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바라왔듯, 이번 겨울은 따뜻한 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가봤자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느니 '갔다 와선 어쩔 거야'라는 말들로 마음속 어딘가에 우겨넣어 버렸던 마음을 꺼낼 날이 왔다. 이직이 아닌 다른 기차를 타는 것은 우연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인 거라고.

그 기차에 올라탄 내가 끝끝내 어떤 목적지에 내리게 될지는 물론,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말이다. 16p

진짜 일상이라는게 확 느껴졌던게 첫주부터 외주로 일을 하면서 '디지털 노마드'에 대해 두 사람이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둘 모두가 프리랜서라 가능한 지점이기는 하지만. '느슨하고도 알찬 날들'이라는 표현이 두 작가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해외 어드벤티지'라는 말도 약간 '아, 이거지' 싶었다. 이래서 여행을 떠나면 자유로워진다고 느끼는게 아닐까.

서울에서는 찾지 못했던 작은 원더랜드였다.

동시에 치앙마이에 스며들기 위해 필요한 베이스캠프였다.

맛있는 음식, 시원한 마사지, 멋진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값질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는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에게 치앙마이의 여유로움이란 내가 살던 234/790호실에서 시작된 셈이다.

딱 맞는 껍데기를 찾은 소라게는 다른 소라게보다 성장이 빠르다. 나는 딱 맞는 껍데기를 찾은 소라게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82p

사실 가슴이 울리지 않아도 좋았다.

마음속 울림과 살아가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일상이란 건 잔잔한 파도인 편이 낫다. 날마다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것도 조금은 피곤할 테지.

요컨대 일상에는 시시한 구석이 필요한 것이다. 치앙마이에서는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무리해서 마음을 크게 쓸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일들이 "이런 게 뭐 별일이야?" 정도로 넘길 만 했다.

조금 시시한 구석이 있긴 해도 나는 그런 생활에 더할나위 없이 만족했다. 147p

여행지 선택 기준과 선택지를 선택하는 기준은 누구나 조금씩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타쿠에게 동의. 매일이 가슴 뛰면 그건 심장병(...)이라고 누군가 말한 기억이 나네. 시시한 일상의 순간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일상이 참 마음에 들었다. 조곤조곤 길을 걸어다니는 잔잔한 파도같은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자주 느끼게 되는 요즘이기도 하고.

성공적인 도망이었다.

싫어하던 것에서 제대로 도망을 쳤다.

한편으론,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버킷리스트 '겨울을 여름 나라에서 나기' 항목에 시원한 마음으로 줄을 쫙 그었다. 정말 해보고 싶던 일을 한 가지 한 거라고 생각하니 스스로 칭찬해주고픈 마음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언제든 피하려면 피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가지는 것만으로, 신기하게도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몇 달이 아니더라도. 몇 일, 어쩌면 단 몇 분만이라도. 가끔은 싫어하는 걸 피해가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 따뜻한 여름 나라에서 나는,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로 흐리고 추운 다음 겨울을 맞이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207p

그런가 하면 태국에 대한 묘사도 물론 등장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어느 도시의 풍경은 언제나 신기하고 재밌다. 태국에는 역시나 사원이 정말 많구나. 약간 교토의 절들을 보는 느낌이려나. 율리 작가가 가장 추천했던 '왓 체디루앙'이라던지 몇몇 건축물들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태국식 요일점도 재밌고. 그러고보면 우리는 날짜는 엄청 따지는데 요일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다 괜찮을 것 같지만 길가에 늘어져 있는 강아지들과 방에 불쑥 출연하시는 도마뱀은 적응하기 좀 어려울 것 같아서 겁도 한웅큼 먹었다.

선택할 필요가 없으니 고민할 일도 없었다.

나는 그 패턴이 만족스러웠다. 생활에 생기는 이런 패턴은 어쩌면 뻔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뻔한 건 편한 것이 아닐까?

서울에 돌아온 뒤로 무얼 먹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 그 때의 기억이 난다. 247p

잊지말자... 센트럴 페스티벌 4층 푸드코트 치킨 난반 덮밥... saint etoil의 초코도넛.... 이외에도 힘세고 강한 밥ㅋㅋㅋ이라고 묘사된 스티키라이스라던가 무려 '벌크업 오렌지'라는 별칭을 선사받은 포멜로도 먹어보고 싶다. 역시 여행은 먹는거지(!) 진짜 나한테는 타지에서 장기거주를 하게 된다면 이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포인트일 것 같다. 아등바등 찾아먹는 '현지음식'이 아닌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음식들과 여유로움이.

마지막 에피소드의 마지막 컷 아래에 작게 'fin'을 쓰고 나서야 겨우 마음도 몸이 있는 곳으로 돌아옴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니 봄은 지난 지 오래, 이미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그야말로 긴 꿈을 꾸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동굴 속에서 추위를 잊고선 여름날의 꿈을 꾸고 일어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려나.295p

적당한 길이와 무게의 단상들. 힘들이지 않은 사진. 가끔 두페이지에 꽉찬 일러스트. 웹툰/인스타툰 같은 컨텐츠를 종이로 인쇄할 때 사실 아쉬움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텅빈 공간이 생긴다거나 굳이 돈들여서 책을 사야할 이유를 못 느끼겠는 나이브한 구성일 때. 하지만 인스타에서 그렸던 10컷이 꽉 들어찬 페이지 구성이나 두 사람의 생각이 짧게나마 들어간 에세이가 책의 소장가치를 높여준다. 아기자기하고도 담담하게 캐릭터이자 작가인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여행에세이.

+) 여행지도?도 부록이랑 함께 있는데

무엇보다 음식에 시선이 간다ㅜㅜ

너무 맛있어 보이잖아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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