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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힘이 될 때 - 깊고 단단한 나를 위한 인생 강의
천궈 지음, 고상희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모든 삶의 무게는 '불안'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불안만큼 인간에게 공포와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또 있을까?

불안은 틈만 있으면 우리 안으로 파고들어 '꽃들이 만발한 아릅다운 경치 뒤의 황량함과

빛나는 순간의 이면에 자리한 영원한 암흑'을 보게 한다.

불안은 이토록 독재적이어서 우리의 다른 모든 감각을 앗아가 버릴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꿈을 침몰시켜 노예를 자처하게 만든다.

'불안'이라는 폭군은 우리 내면에서 무형의 가죽 채찍을 휘둘러,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뿌리며 경쟁에 뛰어들고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34p

이 책은 저자 천궈가 푸단대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했던 강의 내용에 관련된 것이거나, 강의 중 생각했던 것들에 관한 것이다. 책의 제목인 고독 뿐만 아니라, 성공, 자유, 이타심, 도덕, 품격, 자신감과 같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느끼는 감정들이나 필요/불필요한 자세들을 이야기한다. 전반적으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때 어조가 분명한 편이며 철학, 동양 고전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 다소 공자왈 맹자왈스러운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의 내면에 있으면서

우리의 마음, 정신, 영혼, 인격을 결정한다.

그것은 진정 우리에게 속한 것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와 함께한다.

그것은 우리의 혈관 속으로 흐르고 우리의 전신을 휘감으며

우리의 시야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다.

또한 '마음에는 영원히 주름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시간도 그것을 앗아가지 못한다. 78-79p

최근에 읽은 키르케고르 책도 그랬지만,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의 강도가 더 극심해지면서 이 주제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인간은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존재고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그 점은 거의 불변에 가까운 사실이었기에 잘 살펴보면 그 이전의 문학작품들 중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것들이 많다. 정말이지 골치 아픈, 인간 본연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를 규정짓는 초반부에서 저자는 외로움을 '천한 것'으로 단정짓는다. '외로움'을 저자의 방식으로 정의내린다면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고독과 비교당하면서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외로움을 책에서 만날 때마다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또 내면이 고요하고 여유로운 사람을 저자는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는데, 이런 사람은 일상이 소중하고 새로워 여행이 필요없다는 맥락도 등장해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살짝 당황스러운 지점을 만들어주었다. 낯선 일상의 풍경을 겪는 것 또한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인생의 여정에서 만난 어느 낯선 사람이 내 막역한 벗이 되었다.

그는 나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열쇠 하나를 주었는데,

이 열쇠로 언제든지 그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나는 이 관계를 특별히 소중히 여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존재하는데,

이 믿음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115p

친구는 쓸모없는 존재다.

우리가 친구를 사귀고, 친구를 필요로 하고,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쓸모 있기 때문이 아니다.

친구는 이용하기 위해서, 감정의 배설구가 필요해서, 위로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잘난 점을 돋보이게 한 들러리가 필요해서,

조력자나 공모자가 필요해서 사귀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배려를 주기 위해서, 마음의 풍요와 삶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마음을 통하는 순간을 맞기 위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공기처럼 늘 함께 있다는 느낌과

신뢰감을 느끼기 위해서 친구를 사귄다.126p

삶과 영혼이 모두 빛나기 위한 성공의 두 조건으로 필요한 외공과 내공을 꼽는데 주로 영혼의 충만을 위한 '내공'에 초점을 맞추지만 '외공'의 문제를 터부시하지는 않는다. 부와 재물을 속되게 하는 교화의 위험성이나 이타심을 도덕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는 오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장 공감이 갔던 챕터는 '지기'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었는데 지기와의 소박한 교제방식이나 '둘만의 세상'이 필요하다는 점이랄지, 섣불리 지기로 단정짓지 말고 시간에 따라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한다는 내용은 누구나 공감가능한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기 양심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정신적 통제력을 확립해 세상 사람들이 좇는 화려한 세계를 포기했다면,

그는 결코 자유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동경하는 자유를 선택하고 지킨 것이다.

그가 선택한 자기 통제는 도덕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내면의 청명함과 안온함에 도달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길이다.

그의 즐거움은 남들 눈에 도덕적 본보기나 착한 사람으로 비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그가 가는 곳이 그가 가기 전보다 아름다워지는 것,

즉, 자아 완성의 과정에 있다. 157-158p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성숙을 처세술에 능하고 닳아빠졌다거나 저속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의 대명사로 여기고 멀리할 필요도 없다.

성숙은 혼탁함이 아니라 진흙 속에서 났지만

더럽지 않고 맑은 물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은 맑음이고,

경박함이 아니라 수많은 유혹에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함을 지키는 차분함이며,

쾌감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 아니라 마음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명랑한 달관이다.

성숙은 눈에 뻔히 보이는 처세술이 아니라 한결같은 내면의 천진함과 순수함을 가리키고,

인격에 잡히는 주름이 아니라 영원히 주름지지 않는 영혼이다.225p

그렇기에 남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하나하나의 관심, 도움,

심지어 미소 한 자락조차 그가 나를 위해 들이는 애정이자 시간, 정력 및 내면의 선의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날 때부터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인 예우 또는 긴요한 순간에 베푸는 은혜다.

우리는 이런 예우에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우리가 받은 행운에 마음 가득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255-256p

자유의 다른 말은 통제인 것처럼 무절제한 자유에 대한 지양은 여러 번 철학 수업에서 들어 조금은 진부하지만, 논리적이다. '인간이기에' 자유를 말할 수 있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그 가치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품격과 자신감에 대한 단락에서 등장한 맥아더의 자만감 사례는 흥미로웠다. 그의 전성기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새로운 느낌. 이외에도 사랑, 참회, 호기심 같은 주제들도 뒤따라 온다.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와 문화가 비슷한 점들이 있어서인지 번역이 굉장히 잘 된 덕인지 모르겠지만 중간중간에 한국어 관용표현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서 집중력이 좋았다.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과 관계가 가져오는 피로감이 무겁게 다가오는 순간에 읽으면 좋을 책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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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에서는 천천히 걸을 것 - 율리와 타쿠의 89일 그림일기
배율.진유탁 지음 / 김영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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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저렇게 살다보면 한 번이라도 이토록 걱정 없는 시간을 가지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휙 떠나와서, 제법 온전히 마음을 쏟아 쉬어가는 89일이라니.210p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태국에서 한달살기', '치앙마이에서 세달 살기 꿀팁' 같은 정보를 기대했다면 더더욱. 사실 한국에서 놀러온 여러 지인들의 아마추어 가이드를 했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며칠만 여행을 가도 할 말이 많은데 얼마나 구구절절 담을 정보가 많았겠는가. 그러나 이는 요즘 세상에 인터넷만 뒤져도 나올 정도고 그것보다 율리와 타쿠의 꼼꼼한 일상기록이 더욱 흥미로웠다. 돈므앙 공항에 내리는 순간 택시운전사 에피소드부터 집주변의 시장, 마트 구경까지 말그대로 '일상'인.

그 결정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현실에서 누군가 그녀와 같은 결정을 했다면 주변 사람들이 나무랐을지도 모를 결정.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잘못한 결정이 올바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본다면 잘못한 결정은 더 이상 잘못한 결정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바라왔듯, 이번 겨울은 따뜻한 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가봤자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느니 '갔다 와선 어쩔 거야'라는 말들로 마음속 어딘가에 우겨넣어 버렸던 마음을 꺼낼 날이 왔다. 이직이 아닌 다른 기차를 타는 것은 우연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인 거라고.

그 기차에 올라탄 내가 끝끝내 어떤 목적지에 내리게 될지는 물론,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말이다. 16p

진짜 일상이라는게 확 느껴졌던게 첫주부터 외주로 일을 하면서 '디지털 노마드'에 대해 두 사람이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둘 모두가 프리랜서라 가능한 지점이기는 하지만. '느슨하고도 알찬 날들'이라는 표현이 두 작가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해외 어드벤티지'라는 말도 약간 '아, 이거지' 싶었다. 이래서 여행을 떠나면 자유로워진다고 느끼는게 아닐까.

서울에서는 찾지 못했던 작은 원더랜드였다.

동시에 치앙마이에 스며들기 위해 필요한 베이스캠프였다.

맛있는 음식, 시원한 마사지, 멋진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값질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는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에게 치앙마이의 여유로움이란 내가 살던 234/790호실에서 시작된 셈이다.

딱 맞는 껍데기를 찾은 소라게는 다른 소라게보다 성장이 빠르다. 나는 딱 맞는 껍데기를 찾은 소라게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82p

사실 가슴이 울리지 않아도 좋았다.

마음속 울림과 살아가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일상이란 건 잔잔한 파도인 편이 낫다. 날마다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것도 조금은 피곤할 테지.

요컨대 일상에는 시시한 구석이 필요한 것이다. 치앙마이에서는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무리해서 마음을 크게 쓸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일들이 "이런 게 뭐 별일이야?" 정도로 넘길 만 했다.

조금 시시한 구석이 있긴 해도 나는 그런 생활에 더할나위 없이 만족했다. 147p

여행지 선택 기준과 선택지를 선택하는 기준은 누구나 조금씩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타쿠에게 동의. 매일이 가슴 뛰면 그건 심장병(...)이라고 누군가 말한 기억이 나네. 시시한 일상의 순간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일상이 참 마음에 들었다. 조곤조곤 길을 걸어다니는 잔잔한 파도같은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자주 느끼게 되는 요즘이기도 하고.

성공적인 도망이었다.

싫어하던 것에서 제대로 도망을 쳤다.

한편으론,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버킷리스트 '겨울을 여름 나라에서 나기' 항목에 시원한 마음으로 줄을 쫙 그었다. 정말 해보고 싶던 일을 한 가지 한 거라고 생각하니 스스로 칭찬해주고픈 마음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언제든 피하려면 피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가지는 것만으로, 신기하게도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몇 달이 아니더라도. 몇 일, 어쩌면 단 몇 분만이라도. 가끔은 싫어하는 걸 피해가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 따뜻한 여름 나라에서 나는,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로 흐리고 추운 다음 겨울을 맞이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207p

그런가 하면 태국에 대한 묘사도 물론 등장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어느 도시의 풍경은 언제나 신기하고 재밌다. 태국에는 역시나 사원이 정말 많구나. 약간 교토의 절들을 보는 느낌이려나. 율리 작가가 가장 추천했던 '왓 체디루앙'이라던지 몇몇 건축물들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태국식 요일점도 재밌고. 그러고보면 우리는 날짜는 엄청 따지는데 요일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다 괜찮을 것 같지만 길가에 늘어져 있는 강아지들과 방에 불쑥 출연하시는 도마뱀은 적응하기 좀 어려울 것 같아서 겁도 한웅큼 먹었다.

선택할 필요가 없으니 고민할 일도 없었다.

나는 그 패턴이 만족스러웠다. 생활에 생기는 이런 패턴은 어쩌면 뻔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뻔한 건 편한 것이 아닐까?

서울에 돌아온 뒤로 무얼 먹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 그 때의 기억이 난다. 247p

잊지말자... 센트럴 페스티벌 4층 푸드코트 치킨 난반 덮밥... saint etoil의 초코도넛.... 이외에도 힘세고 강한 밥ㅋㅋㅋ이라고 묘사된 스티키라이스라던가 무려 '벌크업 오렌지'라는 별칭을 선사받은 포멜로도 먹어보고 싶다. 역시 여행은 먹는거지(!) 진짜 나한테는 타지에서 장기거주를 하게 된다면 이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포인트일 것 같다. 아등바등 찾아먹는 '현지음식'이 아닌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음식들과 여유로움이.

마지막 에피소드의 마지막 컷 아래에 작게 'fin'을 쓰고 나서야 겨우 마음도 몸이 있는 곳으로 돌아옴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니 봄은 지난 지 오래, 이미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그야말로 긴 꿈을 꾸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동굴 속에서 추위를 잊고선 여름날의 꿈을 꾸고 일어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려나.295p

적당한 길이와 무게의 단상들. 힘들이지 않은 사진. 가끔 두페이지에 꽉찬 일러스트. 웹툰/인스타툰 같은 컨텐츠를 종이로 인쇄할 때 사실 아쉬움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텅빈 공간이 생긴다거나 굳이 돈들여서 책을 사야할 이유를 못 느끼겠는 나이브한 구성일 때. 하지만 인스타에서 그렸던 10컷이 꽉 들어찬 페이지 구성이나 두 사람의 생각이 짧게나마 들어간 에세이가 책의 소장가치를 높여준다. 아기자기하고도 담담하게 캐릭터이자 작가인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여행에세이.

+) 여행지도?도 부록이랑 함께 있는데

무엇보다 음식에 시선이 간다ㅜㅜ

너무 맛있어 보이잖아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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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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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댈러웨이의 이름이 클러리서라는 것이다.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 뚜렷한 암호라고나 할까.

아니, 운명이야말로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클러리서는 분명 비참한 결혼생활을 하거나 기차 바퀴 밑으로 굴러 떨어질 운명은 타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매력과 성공이 운명적으로 따를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댈러웨이 부인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이었다.

25-26p

지금 이 순간에는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이 선사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 혼미함을 극복했다.

막힌 파이프를 뚫고 황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내면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제2의 자아가, 또는 좀더 순수한 자아가 느껴진다.

신앙심이 깊다면 이를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지성과 모든 감정 그 이상이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60-61p

한 페이지만, 딱 한 페이지만 더, 그녀는 결정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옷을 갖춰 입고, 머리를 손질하고, 부엌으로 내려가는 일 따위는

여전히 너무 비천해 보이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새로운 하루로 뛰어들기 전 침대에 있는 자신에게 몇 분을 더 허락할 것이다.

그녀 자신에게 약간의 여유를 허락할 것이다.

그녀는 젖가슴 밑에서 시작되어 전신을 부풀렸다가

부드럽게 붕 띄우는 감정의 물결에 흽싸인다.

67p

아무런 연관성 없이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것 처럼 보이는 버지니아 울퍼, 로라 지엘스키, 그리고 클러리서 본. 세 여자의 평범한 하루가 눈부시게 펼쳐진다. 그들의 하루는 아주 평범하게 시작한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하지만 조금은 새로운 기분의 하루. 그들은 하루에도 여러번 어떤 끔찍한 우울감에 잠시 사로잡히기도 하며 충만한 영혼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물론 그들에게만 찾아오는 순간은 아니고 루이스와 리처드에게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일련의 순간들이다.

오롯이 세명의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또 한명의 주인공이 있다면 리처드일 것이다. 클러리서와 젊은 시절 사랑에 빠질 뻔 했지만 동성애자이자 에이즈 환자이자 시인으로 남은 한 남자. 리처드의 묘사는 흥미롭다. 자기 자신과 주변인들이 꾸려가는 삶만이 가장 가치 있고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한껏 넓어지는 마음을 선사하는 사람. 동시에 "그에게 당신이란 존재는 그 자신의 비극과 희극을 엮어내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으로 창조해낸, 본질적으로 허구인 인물(97p)"에 가깝다는 사실. 물론 클러리서를 포함한 주변인들은 그 느낌에 의지하며 살지만.

지금 그녀는 진짜 자기 모습으로 행복하게 사는 요령을 터득한다.

아이가 때가 되면 두발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듯이. 멋진 일이다.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놓쳐버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탐험하지 못한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재능이 없다는 걸 알게 된들 무슨 상관인가).

그녀는 아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충실할 것이다.

자신의 가정과 의무에, 자신의 모든 재능에 충실할 것이다.

그녀는 이 두 번째 아기를 원할 것이다.

125p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장면은 로라와 키티의 뜻밖의 연민과 연대. 늘 친애의 감정과 어떠한 열등감을 느껴왔던 그녀가 자궁에 병이 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남편 레이를 걱정하는 모습에 로라는 그녀를 안아준다.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당당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사랑과 슬픔을 표현하며 마침내 그들의 입술이 닿는 장면에 숨죽일 수 밖에 없었다. 잠깐이지만, "서가에는 책들이 졸고 있는(167p)" 그 순간의 열기.

이토록 침침하고 거대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들어갈 곳은 놀랍게도 거의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은밀하고 조용한 장소)

당장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상점이나 식당에 들어간다면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의 관심 밖인 물건이 필요한 척해야 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하며, 상품들을 살펴봐야 하고,

도와주겠다는 종업원의 친절을 요령껏 뿌리쳐야 할 것이다.

아니면 식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주문해서 먹은 뒤 그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자동차를 어딘가에 주차하고 혼자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범죄의 표적이 되거나

범죄자로부터 보호해주려는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다.

지나치게 노출된 그녀는 지나치게 이상해 보일 것이다.

217p

그녀들의 일상을 침범하는 것은 무신경하게 파고드는 우울과 더불어 아주 사소한 압박이다. 브라운 부인인 로라가 하루종일 느꼈던 케이크의 압박. 심지어 상에 올라가 먹히는 순간에도 케이크는 그녀를 압박한다. 버지니아가 느낀 하녀 넬리의 시선도 숨막히긴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들도 아주 사소하다. 로라가 하얀 노먼디 호텔에서 잠깐이나마 쉬었을 때 비록 "쉬지 않고 사용된 장소 특유의", "피곤에 지친 냄새(223p)"를 풍기는 공간이지만 얼마나 편안했는가. 그녀들의 평안을 방해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은 찬란한 눈밭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두려우면서도 신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슬픔이 평범한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분노가 지나간다.

괜찮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괜찮아. 냉정을 되찾자. 제발.

302-303p

삶의 순간순간에 스며드는 불안들. 책의 시선은 그녀들 자신의 것이 되었다가 주변인물들이 그녀들을 보는 시선이 되었다가 독자의 것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녀들이 느끼는 타인의 시선을 묘사하는 것이며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종잡을 수 없는 부유지만 산만하지 않고 새롭다. 그리고 각자가 느끼는 삶의 불완전성을 한층 더 증폭시킨다. 그 어떤 고독과 광기에 가까운 분노가 지나가면 하루는 끝이 난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 책은 '가차없는 일상(333p)'을 마주하고 있지만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한없이 예민해지는 이들이지만 어쨌든 살아내려 한 시간이기도 하다. 칠십년이라는 시간의 차이, 런던-LA-뉴욕이라는 다른 공간이지만 찬란한 햇살 아래 죽음과 삶을 고스란히 느끼는 삶이라는 점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는 독자를 몰입시킨다. 저자가 묘사하는 섬세하게 감정의 결들과 함께. 책을 읽다도면, 영화의 이미지도 당연하게 궁금해진다(캐스팅도 미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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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세계 5
모랑지 글.그림 / 온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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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랑 다음에서 수많은 웹툰을 챙겨보는(...) 이 시대의 잉여. 네이버는 사실 웹툰퀄리티 면에서 다음보다 감당하지 못할 작품을 점점 늘린다는게 마음에 안드는데; 그 중에서도 학원물 비율이 압도적이며 대부분은 일진/폭력/연애물이다. 이 분야의 흐름은 참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언제적 포맷이 계속되는건지. 이런 상황 속에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작품은 바로 월요일 웸툰 <소녀의 세계>


작가가 실제 고등학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자 고등학생들의 심리와 일상을 섬세하면서도 몽글몽글하게 표현한다. 그림체나 애들 노는것도 너무 귀엽고ㅠㅠ 이런 친구관계가 좀 부럽기도 하고 얘네들 아기자기 우정 쌓는 모습 보기 좋아서 매번 엄마미소로 보는 중이다ㅠㅠ나리는 부모님이 어떻게 교육시켰는지 마음도 예쁘고 하는말이나 행동도 예쁘고ㅠㅠㅠㅠ

한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은 또 현실적이라서 같은 상황에 있거나 그 순간을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는 장면들도 많다.



책을 잘 사는 편이 아닌데다가(둘데가 없음...) 만화책은 더더욱 웹툰/굿즈정도만 소비하는데 감사하게도 이 작품을 만화책으로 받게 되서 기분좋다.

책도 웹툰만큼 몽글몽글하고 귀여운 느낌이다. 컷 배치도 종이책으로 읽기 편하고 이렇게 구분하니까 선지-미래-유나 순으로 과거가 해결되는 느낌이 딱 들어서 좋았다. 나리야 너가 최고다.



그나저나 오늘 회차 보니까 벌써 겨울인데다가ㅠㅠㅠ 약간 완결각인데 아니 작가님 최소한 얘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지금 템포로 연재해주십셔ㅠㅠ 애들 1년동안 이렇게 힘들었는데(물론 그러면서 끈끈해졌지만) 깨발랄하게 노는거 좀만 더 보여주십셔ㅠㅠㅠㅠㅠㅠㅠ



앞뒤 표지도 애들 성격 보이는 듯이 아기자기하고 딱 보기 좋은 정도로 편집된 책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으로 나온만큼 다른 에피소드가 더 실렸으면 좋겠다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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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
고든 마리노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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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축복을 받은 존재이지만, 상대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삶의 스팩트럼에서 나는 불행한 쪽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임상적으로 말하면, 나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이다.

나 자신을 두둔하자면, 나는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거의 범죄자가 될 뻔했던 날들 이후로는 학생들과 지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 애썼지만,

나는 현명한 도덕군자도 아니고, 밤에는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나

그날의 약속들을 원활하게 처리하는 유능한 사람도 아니다.

15p

인간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모순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말들을 빌려 인간의 실존을 고찰한다. 철학책이라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고풍스러운 책 디자인에 넘어가서 선택한 책이다.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이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때때로 우리를 잠식해오는 불안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자유, 즉 끊임없이 어떤 가능성을 선택해서 실현하려 애쓰며

다른 가능성을 포기해야 하는 필연성은 불안의 근원이다.

사르트르는 낭떠러지 끝에 선 사람을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했다.

천길만길의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머리가 아찔하고 뱃속이 뒤틀리며 불안감이 몰려온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언제라도 뛰어내릴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61p

세속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에서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어들의 개념 자체가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어렵다. 등장하는 철학자들마다 각자의 정의를 내리니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우리의 불안은 질병이 될 수도, 마음의 상태가 될 수도 있고 질병이라 해도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는 키르케고르 뿐만 아니라 니체, 사르트르, 헤겔, 아리스토텔레스, 카뮈, 루터, 토마스 아퀴나스 등 몇백년에 거쳐 있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뛰어넘으며 우리의 감정들에 대해 설명한다.

반대로 암울하고 우울한 고투의 시간이 반드시 절망적인 시간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인정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건강한 편이라고 판단했다.

1846년의 일기에서 키르케고르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진실로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광기에 가까운 이런저런 고통에 사로잡혔다.

그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 마음과 육신 사이의 잘못된 관계에 있다.

그 고통은 내 정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은 무척 놀라운 사실이며, 여기에서 나는 무한한 용기를 얻는다.

96p

당신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힘든 훈련이다.

키르케고르도 이런 상상에 익숙해지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 생각은 현재의 심리 상태를 투영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생각은 지나치게 무겁거나 지나치게 경박할 수 있고,

지나치게 명랑하거나 지나치게 음울할 수 있다.

엽기적인 환상이든 기막히게 멋진 공상이든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모든 것이 끝나고 더는 시간이 없는 때가 온다는 사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관점에 대해 깊이 감추어둔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일종의 심리 테스트가 된다.

121p

"죽음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확실한 불확실성이다.(111p)"

"죽음이 명확해지면, 순간이 영원처럼 지속될 수 있다. (125p)"

3장에서 톨스토이는 진정성과 형제애가 없는 삶은 영적인 죽음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이 유행할 정도로 죽음은 인간 실존 그 끝에 놓인 가장 중요한 문제다. 구체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를 넘어선 나의 세번째 자아는 어떤 것이며 나는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그 죽음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같은 장에서 언급된 '죽음을 상상하는 훈련'이라는 말에서 나는 갑자기 영화 <어바웃 타임>을 떠올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만 하루를 새로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지내기 위해서만 그 능력(?)을 이용했던 엔딩이. 심지어 중간에 아버지도 죽었고(...). 사랑까지 제대로 쟁취한 이 사람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실존주의자 아닐까. 신앙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는 키르케고르의 설명을 저자는 약간은 세속적으로 이끌어낸다. 죽음이 두려움보다 슬픔이 되는 삶의 끝을 맞고 싶다.

따라서 친절에 대한 내 확신은 나 자신에 대해 나에게 말하는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달리 말하면, 내가 항상 친절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내가 상상하고 싶어하는 것만큼 내 진심에 가깝지 않다는 뜻이다.

실존주의에서 언급되는 미덕들은 자신에 대해 정직함을 요구한다.

따라서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진정성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생각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물음에 솔직하기를 바란다.

149p

몇몇 흥미로운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면, 두려움은 명확한 대상을 갖지만 불안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정의했다는 점과 우울과 절망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 개념들을 혼동한다. 이러한 혼란은 때로 아주 위험할 수 있다. 우울을 절망으로, 병리적인 것으로 착각해버리고 감정에 또다른 의미들을 부여하는 순간 겉잡을 수 없이 그것이 나를 압도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나를 찾는데 있어 나태와 소극적인 수용의 위험성을 2장에서 경고한다. 심지어 4장에서는 '타락'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상당히 뜨끔하다. 어딜내놔도 나태함으로 뒤지지 않는 나로써는 그것에서 오는 어떤 무력함과 우울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어떤 것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어떻게(150p)' 실행하는가가 핵심이다. 그러나 스스로 진정성이라고 믿는 것에는 자아도취적 위험성도 동반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것과 강력히 유대해야 하지만 이 또한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인간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동물이다(머리아픔)

누구도 애초부터 겁쟁이로 태어나지 않는다.

또 누구도 처음부터 영웅으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믿고 싶겠지만, 우리는 변할 수 있다.

도덕적인 전환은 가능하다.

사르트르가 성경 이야기에 감동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재로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라고 부인했을 때,

당신은 베드로가 가롯 유다의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용기를 되찾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197p

도덕적으로 말하면, 유혹은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택하는 동시에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의 주체감을 약화시키면, 우리의 도덕적 이해력도 조금씩 떨어진다.

키르케고르였다면 '변증법적'이라고 칭했을 이런 역학 관계 때문에,

우리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듯이 내려다보며

'너희가 지금은 이상적인 생각으로 가득하겠지만 머잖아 알게 될 거다'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일까? 이상적 생각들을 어떻게 끊어낸다는 것일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당신이 발성하면 냉대를 받거나 승진에서 탈락하게 될지도 모를 진실의 폭로를 늦춤으로써

당신의 도덕적 이해를 은근히 덮어버리게 된다는 말일까?

출세제일주의, 성공으로 보장되는 물리적 안락함과 소속감 등은 희생이 요구될 때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나는 알았어야 했다.

222p

물론 고든 마리노는 책 전반에 걸쳐 개인의 통제력과 감정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항우울제 복용 등도 우울의 감정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핵심은 스스로가 유약한 인간이라는 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통제하려는 욕심을 버리되, 스스로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수단으로 우울을 생각할 줄 아는 어떤 내공(?)을 살면서 좀 키워야 하지 않을까. 철학이 목표로 하는 지혜의 수단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 연민을 보내라는 말이 약간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이야기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 삶을 살아야하니.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진정성authenticity란 무엇일까. 4장에서 아주 명확한 해답을 뚜렷하게 내리지는 않지만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삶의 태도가 결국 그것이겠지. 5장에서 언급한 신의 존재조차 신앙의 상실은 우리의 의도에 의한 것이며 신뢰의 방식과 욕망 또한 우리의 선택이라고 하기 때문에. 6장이 다루는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산다는 것의 의미도 진정성의 수단이자 목표라고 생각한다. '지식을 끌어내는'과정.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지만 동시에 가짜후회가 아닌 '도덕적 후회'를 가슴 깊이 간직한다. "회한으로 현재의 나를 바꿀 수 있다(228p)."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능력이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한 의무도 사랑의 책무 중 하나이다.

달리 말하면, 사르트르와 카뮈와 니체와 달리 키르케고르는

누구나 사랑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우리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만이 아니라,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우리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244p

그럼에도 마지막 장은 결국 '사랑'이다. 키르케고르는 비록 레기네와의 사랑에서 찌질한(...) 모습과 씁쓸한 결말을 보여주지만 그 또한 인간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처럼 우리는 때로 온유함과 거리도 멀고 어색한 결과를 만드는 행동을 하지만 우리의 '사랑의 의무'는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논의하는 개념들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쉬울 수도 있겠다. 저자도 그들이 가지는 모순이나 허점을 지적하지만 여기서 어떤 교훈들을 끌어내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수많은 저서들과 말을 남긴 이들의 논리는 어느 지점에서는 부딪히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한 편이 된다는 점이다. 그 중 한가지, 삶은고통인 동시에 선물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책의 첫머리에서 그들의 생각조차 변덕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저자의 솔직하고 담백한 자기고백적 조언들은 분명 어떤 용기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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