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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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들은 모두 공적으로 발생했을 때 분명히 현실적이었다.

여기에는 비밀이나 신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모두에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모두가 간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파국이 갑작스레 모든 사물과 사람을 덮쳤지만, 이전까지는 실체가 아니라

모든 공적인 대변자들의 매우 효과적인 빈말과 허튼 소리가 파국을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

···그런데 공공영역이 "신뢰성 상실"과 "보이지 않는 통치",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노출시키지 않고

은폐하는 언어, 오래된 진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진실을 무의미한 사소한 것으로

폄하하는 도덕적인 또는 다른 형태의 권고 때문에 그 빛을 잃게 될 때 어두움은 찾아왔다. 60-61p

한나 아렌트의 글은 (적어도 나에게) 어렵다. 정리해놓은 요약본이나 개념만 볼 때는 오히려 뚜렷하게 다가오는데 막상 그녀의 저술을 읽고 있으면 방대한 지식의 양과 영역, 그리고 수많은 부사에 침몰당하는 기분이 든다. 단순히 번역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가 남긴 수많은 표현들은 주술이 일치가 되나 싶을만큼 어렵고 길다. 그래서 이 책 자체도 한 번 읽은 자체만으로 오롯이 이해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녀의 책을 또 읽고 있을 나의 다음을 위해 남겨놓는 요약본 정도로 하겠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유럽국가의 어두운 시대(1차 세계대전 전후)를 살아낸 사람들이지만 한나 아렌트와 역자가 모두 언급하듯 어두운 시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들과의 우정, 그들의 정치적 사유, 그리고 휴마니타스(인간애)에 대해 전기에 가까운 평론, 에세이, 강연 등을 통해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가 의미하는 휴마니타스는 "자신의 삶과 인격을 공공영역으로의 모헝에 바치면서 획득할 수 있는 것(161p)"으로 정의되며 주관적인 생각이나 사적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닌, 책임을 증명해야 함을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의 책인만큼,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유대인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아렌트가 느끼기에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특히 발터 베냐민의 생의 마지막에 대한 묘사는 19c 유대계 지식인이 처한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어두운 시대를 살아낸 그들에게는 밝음과 어두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열다섯명의 인물을 소개하지만, 사실 전기를 가장한 그녀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 이를 고려해 공공영역에서의 정치적 사유, 예술과 문학, 그리고 우정과 휴마니타스라는 세가지 분류로 인물들의 설명을 구분해서 살펴봤다. 물론 겹치는 영역이 아주 많아서 뚜렷한 구분은 아니지만 읽는 나의 편의를 위해서 카테고리화가 필요했다.

그는 강제력이나 증거로 누군가 자신을 강요하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강요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추론이나 궤변 또는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사유를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폭정이

정통 학설의 고수보다 자유에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완전히 일관된 체계를 지닌 역사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은 채

자신을 알고 있는 바대로 인식의 효모(fermenta cognitionis)를 세상에 유포시켰습니다. 73p

공공영역에 대한 비판과 행위-사유의 정확한 연결을 언급했던 레싱에 관한 글로 책은 시작한다. 결론보다는 사유 자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히틀러 시대의 정신적 망명은 시대의식을 상실한 모습을 다소 띄고 있다는 점까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우정의 정치적 중요성은 뜻밖의 표현으로 그 특유의 인간성은 대화 안에서 발현되며 진리가 존재하는 것은 대화 가능성에 있어 그닥 필요한 점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런가 하면 친구는 될 수 있어도 형제는 아니라는 말로 그의 사유에서와 자신의 차이를 구분짓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의 수확은 2장에서 나온 로자 룩셈부르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었는데 네틀이 쓴 그녀의 전기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전기의 위험성으로 시작해 "네틀은 로자와 같은 능력과 기회를 가진 남성에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로자에게 그것을 부여하지 않았(123p)"다고 표현하면서 잘못된 표현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단순히 정의내리기에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현실을 가장 훌륭하게 해석'한 사람에 불과했던 그녀의 삶은 공적 자유의 절대성 필요성을 다시 한번 주의시킨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성인전은 온 세계가 왜 이분에게 눈을 돌리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성인전은 '비난받지' 않기 위하여 교회를 포함한 세계 일반의 기준이

예수의 설교에 포함된 판단이나 행동의 원칙과 대립되는 것을 어느정도 교묘하게 피하면서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이분에 관한 위대하고 대담한 이야기들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나는 이들 가운데 일부를 기억하여 명료하게 드러내고 싶다. 144-145p

그런가 하면 (글을 쓴 시점에서) 최근의 교황이던 요한 23세, 론칼리에 대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된 이가 선출되어 대담한 단순성을 선보였다고 표현한다. 그녀의 특수한 유대적 기질을 생각해보아도 이는 매우 거침없는 표현이다. 그의 덕목에 대한 존경은 표하되, 성서적 믿음의 천명과 공공영역에서 기독교적 삶이 출현했을 때 보이는 위험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한다. 그의 신앙에 대해서도 겸손보다는 자기확신이라고 꿰뚫어보는 그녀라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도 써내지 않았나 싶다.

전 지구의 파멸이라는 공포에 기초를 둔 소극적 연대는 명료하지 않지만

적잖이 중요한 이해에 그 대응 방안을 지니고 있다.

즉 인류의 연대는 정치적 책임을 동반할 경우에만 그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관념에 따라 개인적 '죄책'과 관계없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공적인 문제에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행하여 우리를 감당하기 어려운

전 지구적 책임상황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시민으로서 책임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연대는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일 수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부담에 대한 공통된 반발은 정치적 무감각과 고립주의적 민족주의,

즉 인간주의의 회복에 대한 열정이나 욕구라기보다 현존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다. 176p

친구이자 스승인 카를 야스퍼스가 평화상을 수여받은 뒤의 연설문에서는 공공영역에서 찬사의 의미를 밝히며 대놓고 마음껏 찬사를 전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정치문제란 너무 중요해서 정치가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일 속의 '휴마니타스'를 지키기 위해 지켜야 할 자세를 언급한다. '세계시민'에 대해서, 단일주권을 보유한 세계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오히려 이건 위험하다) 획일성과는 다른, 전세계 인류의 동일함을 통한 인류의 세계역사 참여를 강조한다. 그리고, 전쟁에서는 어떤 것도 불가하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잊고 있거나, 모르는체 하는게 분명한데, 그런 자세는 결국 무지에 불과하므로 늘 생각해야 할 정의라고 본다.

확실히 그는 이 마지막 것(자기 품성의 근본적 요구조건)에 대해서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이는 아마도 그가 명백하게 개인적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독특하면서도 지극히 특징적으로 유보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자체는 우리 시대의 문제다. 그러나 개개인의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있고,

심지어 거의 허용되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허용되지도 않는다.

개인의 사적인 관심사는 신들에게 웃음거리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신들은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226p

1940년대 자신들의 오랜 신념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신념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알았던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들은 역사적 성공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채 대상(열차)만을 바꾸었을 뿐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열차는 잘못되었으며, 그들은 자본주의나 프로이트주의

또는 약간 세련된 마르크스주의의 열차, 아니면 정제된 세 가지 혼합물의 열차로 바꾸었다.

오든은 대신 기독교인이 되었다.

즉 그는 역사라는 열차를 완전히 떠났다. 494p

헤르만 보르흐, 발터 베냐민, 브레톨트 브레히트 등 이후 이어지는 소설가, 수필가, 시인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개인의 사적인 관심사보다 미적인 것을 윤리와 지식으로 다룬 태도에는 긍정적이지만 왜 문학은 불충분한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언급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이미 저속한 것이다. 생애에 있어 분명히 지적할 점은 하되, 그들의 저작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순수하게 바라본다는게 조금 놀랍기도 하다.

랜달 쟈넬에 대해서는, 세계를 정면으로 맞은 시인으로 표현하며 시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들을 비난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분석하는 것에 가깝다. 반소설anti-novel을 들고 나온 나탈리 사로트는 시대와 친밀한 인물을 등장시킨 신소설의 선두주자로보면서 그동안의 잘못된 평가를 지적한다.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위스턴 휴 오든의 경우 허영심이 너무 없던 말년의 빈곤을 묘사하면서 어느정도의 애정과 함께 그의 시가 가지는 번역불가능성에서 발견하는 위대성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다.

이렇듯 관습적인 규범을 멸시하면서 냉정하게 대처하는, "지극히 탈정치적인 시인들(492p)"에 대해 그녀는 찬사와 지적을 아끼지 않는다. 여기서 그녀에게 찬사란 '좋은 것'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가장 불만족 스러운 모든 것에 맞서 이야기하고 상처를 빨아들이려는' 것이다. 이는 첫번째 남편의 사촌으로 만나 두번재 남편과도 친구를 먹었던(...) 발터 베냐민을 이야기할 때도 적용되는 태도다. 그가 받고 있는 '사후의 명성'을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에 대한 쓰라린 보상(273p)"으로 표현하며 그를 주시했던 불행, '작은 곱사등이'를 설명한다. 결국 책에 등장하는 모두가 받아들였건 몰랐건 느껴야만 했던 시대의 무게가 아니었을가. 프랑스 정부에서 환영받지 못했음에도 파리의 경험을 소중히 했던 그의 삶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따라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례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극작가와 병행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시인들과 세계를 공유하려는 모든 시민에 중요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문학 분야에만 맡길 수 없다.

이 문제는 정치학자들의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첫째, 괴테는 일반적으로 옳았으며 평범한 사람들보다 시인들로부터 더 많이 인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시인들도 중대한 죄를 범할 수 있으므로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짊어져야 한다.

둘째,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좋은 시행을 쓰는 능력은 시인들의 의지에 달려 있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을 부여받았어도 그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363p

자만과 명성이 아닌, 재능의 객관적 표출을 원했다고 평가하는 브레톨트 브레히트는 그녀의 짐작대로 만년에 동베를린에 정착해 눈앞의 공산주의를 보고나서야 상실감을 깨달았을까. 시인과 예술가도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짊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망명 시절 나치 독일에 관한 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를 대부분 유지한다. 그의 가장 근원적인 정념은 '동정'이었으나 로베스피에르나 레닌처럼 단지 동정심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선해질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진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덧붙여진 모욕과 고통'을 어느정도 실천적으로 본 사람이라고 본다. 민중의 시인이길 바랐던 그에게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용서는 사람에 대한 것이고 어떤 소행에 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사유는 단독으로 임무를 설정할 수 있으며 '문제'를 취급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실제로 항상 자신이 특별히 점유한 특별한 무엇,

더 정확히 표현하여 자신을 특별하게 분리시킨 무엇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유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유는 부단히 활동적이고, 심지어 오솔길 자체를 놓는 것도 이전에 드러났으며,

그것으로 인도된 목표에 도달하기보다 오히려 사유의 새로운 차원을 개방하는 데 기여한다.441p

러시아 출신 유대인이라는 '혈통' 자체가 정치적인 문제가 되던 곳에서 발데마르 구리안이 보여준 묵직한 태도와 용감함에 그녀는 찬사를 보낸다. 정치를 일종의 '구체화'로 인식하고 사람들의 드라마를 듣고자 했던 그의 태도에도.하에데거 또한 탄생 80주년 기념 원고를 통해 철학자 자체의 모습보다 교수로서의 '공적인 삶'에 충실했음을 언급한다. '대학에서 따분함의 대양(438p);으로 익사하고 있었던 철학의 영역을 끌어올린 그가 발휘한 사유의 영향력과 형이상학의 종말, '학문의 대상과 사유의 대상'을 구별하는 태도가 그녀에게는 인상깊었던 것 같다. 사유는 경이에서 발전해 직접 자각되는 동안 멀리 있는 것으로 의지의 본질은 사유와 대립한다는 개념 정도로 한나 아렌트의 설명을 이해했다.

본인은 평론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각 인물들의 생애와 작품을 바라보는 한나 아렌트의 자세는 누구보다도 치밀하다. 굉장히 철학적이여서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으며 기본적으로 한 문장이 굉장히 긴 편이다. 사실 그녀가 쓴 글이 대부분 그렇다(...)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문장 구조 자체에 이상이 없어서 찬찬히 뜯어봐도 복잡하다. 부사가 많은게 문장 구조의 특징이기도 한데 표현 자체는 새로워서 재밌는 것들이 많다. '동시성의 초시간성' 같은. 특히 '단지', '오히려' 같은 부사도 굉장히 많이 등장하며 "가장 폐해가 적었던 과오", "마지못한 시인", "거짓말을 파는 시장"으로 묘사된 할리우드처럼 독특한 표현들이 기억에 남는다.

다른 책들에 비하면 챕터 하나하나의 길이가 짧은 편이라 흐름이 끊겨도 넘길 수 있고 때때로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로 숨쉴틈(...)이 있다는 점, 한나 아렌트가 동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읽기 수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그녀의 분명한 애정 또는 존중에도 불구하고 이게 긍정적인 평가인지 부정적인 평가인지 헷갈리는 문단들을 펼쳐질 때도 많다. 그녀의 유대인성과 '공적인 영역'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철학적 개념과 문학 평론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느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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