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이 함께 읽는 근현대사
아사히신문 취재반 지음, 백영서.김항 옮김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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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을 두고 바라보는 나라 또는 정권의 입장과 거기에 이해관계를 둔 개개인의 입장에 따라 많은 견해와 해석이 있다. 그러나 항간의 얘기 같은 "서로 다를뿐 틀린 것은 아니다." 정도로 이런 입장과 해석들을 간단히 덮으며 역사 문제를 마무리 할 수 있을까? 

생사존망을 다투고 막대한 자원과 시간과 노력을 걸고 한둘이 아닌 다자가 서로 덤비는 역사 문제에 적용하기에는 간단히 어렵고,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한계가 있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은 일본, 중국 한국, 대만 동아시아 4국의 아편전쟁부터 현지까지의 역사 인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특히 각국의 역사 교과서를 가지고 내용과 비중을 보여주는 부분이 특이하다. 더하여 비교 대상으로 삼은 각국 역사교과서 선택에서 다소 논란은 있을 수 있으나 다음 세대를 위한 협력과 하나의 노력으로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된다. 

장래 세대를 위한 역사 인식 판단 기준으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을 이 책 안에서 뽑아본다면 아래와 같다.

339p. (역사인식의 공유를 위한 토대의 중심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생존방식을 기반으로 한 기본적 인권존중(의식과 가치관)', 다음으로 '인권을 서로 존중하도록하는 보장으로서의 민주주의(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확보하는 근간으로서의 '인간의 안전보장(정치와 의지 그리고 실행력)'입니다. 

_야마무로 신이찌, 쿄오또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14p. (아편전쟁 패배 후) “청의 황제는 영토를 잃었지만 위신은 지켰다고 생각해 연회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사치스런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아편전쟁 후 20년이 지나도 반성하지 않은 채 허송세월했습니다.”


26p. 인기가 없는 정권이 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손쉽게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일은 내정보다 외정이다.


51p. 서울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청일전쟁 이후에 일본이 걸어간 길을 돌아보며, “주변국의 위협을 강조하여 국내를 튼튼히 하는 것이 바로 일본이라고 말했다.

 

86p. 오오에 시노부 이바라끼대학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 직후,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아시아 사람들의 희망은 실망으로 변했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희망도 주었지만 즉시 실망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06p. 거기에 존재하고, 또 알고 있는데도 보지 않는다는 시각이 한일의 역사관 안에 가로놓여 있다. 명성황후는 그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122p. (1차 대전 이후 파리평화 회의에서) 일본의 식민지 조선이나 칭따오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중국에게 기대감이 높았지만, 이 원칙은 비유럽권에는 적용되지 않아 조선, 이집트, 인도 등에서 민중운동이 시작되는 결과를 낳았다.

 

132p. (1911년 우창봉기와 중국 신해혁명) 이렇게 시작한 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임시 대총통 쑨원으로) 건국되었으나 (청조의 진압군 대장이였던)위안스카이(원세개, 이후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이 됨)의 독재정치를 거쳐 군벌이 할거하게 된 과정을 요약했다.


137p. 루신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걸으면 그곳이 길이 되는 것이다.“

 

141p. 거기서 루신은 어리석고 나약한 국민은 아무리 체격이 건장하고, 아무리 오래 산다 하더라도 결국 무의미한 구경거리의 재상이 되거나 그 구경꾼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우선 정신개조가 먼저 이루어져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문예가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146p. (1931년 만주사변에 대한 조사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탄생한 국제연맹에 최초로 맡겨진 중대한 국제분쟁이었던 셈이다.


212p.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발상의 전환이 어려운 것은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이다.


237p. 어느 나라나 미술관으로서의 박물관에서 벗어나 어떻게 역사와 마주할 것인가를 열심히 탐색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미래의 전시에 관해 야스다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석의 유동성을 중시하고 싶다. 해답이 아니라 물음을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244p. 냉전하의 전쟁은 이데올로기 대립을 배경으로 수많은 참극을 초래했다.


245p. 진실화해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집단학살의 해명에 힘써온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민중에게는 학살이야말로 전쟁이었다고 지적했다.

학살에 가담한 경찰이나 우익단체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협력한 자들이 많았다.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그은 것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서였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은 식민지배의 유산이기도 한 것이다.”


248p. (주변 강)대국의 전략을 빼고 생각할 수 없는 반도의 운명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249p. 한국전쟁이 일본에 끼친 영향

전쟁 특수에 따른 전후 부흥

경찰예비대(자위대) 창설 및 강화

미일안보조약 체결(일본이 공산권에 대한 방파제 역할 강조한 미국의 전략)

오끼나와 미군 기지 증강


253p. “박정희 대통령 등 정부의 수뇌부는 일본이 한국전쟁의 특수로 전후 부흥에 성공한 것을 잘 알고 잇었다. 한국도 베트남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특수에 의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자 햇던 것이라고 시즈오까 대학 박근호 교수는 설명했다.


259p. 1972년까지 미국 점령하에 있던 오끼나와 기지에서 미군이 베트남으로 출격했다.


278p. (한일 국교정상화의 세 얼굴)

동아일보 동경특파원으로 국교정상화를 취재한 권오기 식민지시대의 관계를 청산하려는 이웃나라의 새로운 관계맺기, 냉전을 둘러싼 미국의 의도, 그리고 경제발전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박정희의 속마음이다. 어느 하나를 강조하여 한일 관계는 이런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279p. (한일교섭연구 일인자 이원덕 국민대 교수가 말한 교섭 타결 원동력 두가지)

  “미국이 냉전체제하에서 공산권 봉쇄를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해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과 일본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연결시키려 했다.” 1961년에는 북한이 중국,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었다. “베트남전쟁 개입의 본격화와 중국의 핵실험 성공(196410)으로 미국의 압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또 하나는 경제논리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점차 줄여나가 일본에 그 짐을 떠넘기려고 했다. 경제발전을 최우선하는 박정권은 돈도 기술도 없었다. 교섭을 타결해 일본에서 돈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교섭은 급진전했다

  “원래 주제였던 식민지지배의 책임 문제는 뒷전이였다. 그것이 훗날 반복될 역사인식을 둘러싼 마찰의 원점이 되었다. 당시 한국측이 역사에 관해 정의를 끝까지 주장했더라면 지금의 번영은 실현되었을까? 역사를 여러 개의 눈으로 봐야 한다.”


282p. 중일전쟁, 아시아 태평양전쟁의 종결 27년 후인 1972, 일본과 중국은 국교를 맺었다.


284p. (1971년 4월 미중 핑퐁이교, 1971년 7월 키신저-저우언라이 비밀협상, 72년 2월 닉슨의 중국방문 닉슨-마오 회담, 미중 수교에 대한 두 나라의 속내) 

기대 이상의 결과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손을 떼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우리와 그 점에서 일치했다. 대만 문제도 즉시 해결할 수는 없지만 더 심각해지지 않으리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도 소련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협력하여 (국경분쟁 중인) 소련에 대항한다는 마오쩌뚱 주석의 생각이 궂어졌다.”

(이후 한국에서는 1972.10.17. 박정희 10월유신으로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헌법의 효력의 정지가 있었음) 


338p. 1840년 아편전쟁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권국가라는 국제체제의 기준이 전지구로 확산된 첫 번째 세계화 속에서 동아시아는 국민통합의 주요한 방식으로서 국어의 통합과 자국사의 보급을 택했습니다.


346p.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목적은 자국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 즉 자국역사를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동적인 국민으로 교육하는 일입니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된 독일, 프랑스 공통교과서 제2권은 학생들에게 서로 상이한 역사적 변명의 신빙성을 검토하게 하고, 그 합리성을 논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차이점이야말로 의문과 사고를 촉진하고 타자에 대한 공감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351p. 근대국가가 생기기전에 세계의 모든 땅이나 섬이 하나의 나라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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