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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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의 행태는 소름끼치게 놀랍다.

내로남불, 자가당착, 견강부회는 누구를 막론하고 공분의 대상이다.

제발 우리는 똑같이 그러지 말자. 적어도 욕하는 그들과는 다르게 해보자.


40p. 당시 도쿄재판에서 연합군이 식민지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영국이나 미국이 전후에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려고 했기때문이다.


43p. (1951.9.8.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때 일본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청구권협상은 양국간의 재산권협정이며 개인의 피해 및 재산권에 대해서는 미국에 직접 청구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1955년 일본이 소련과 국교 정상화를 하며 평화협정을 맺을 때에는 소련의 수용소에 억류된 일본군인들의 사망, 강제동원, 임금 미지급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소련과 맺는 평화조약은 전쟁피해에 대한 국가간 협의이며 개인의 재산 및 피해에 대해서는 개별 청구가 가능하다고, 개인청구권까지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49p. 일본 극우세력은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그리고 한반도 식민화 등을 겪으며 한반도가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어야 일본의 안전이 보장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만약에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한반도 분단 유지 정책이 실패한다면, 일본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극우 보수세력들은 38선이 쓰시마까지 내려왔다고 하면서 제2의 한국전쟁을 기획할 수 있는 정치 토양을 만들어 갈 것이다.


56p. 야스쿠니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국가가 아닌 천황을 위해서 죽은 이들만이 합사될 수 있었습니다.


58p. 1989년에 죽은 히로히토(쇼와) 천황과 생전 퇴임을 한 현재의 상황 아키히토 천황은 (A급 전범의 합사 사실이 알려진) 1978년 이후 한번도 야스쿠니에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66p. 정치를 견제하는 (법원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일본 보수정치의 특성입니다.


72p. 국가가 개인의 죽음을 미화하고 영웅화하면서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추도 방식이 우리에게도 있었는데, 우리 역시 그 방식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면 야스쿠니 문제는 다른 방향에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76p. 일본군 '위안부'나 한국인 노동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본에 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걸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군인이 와서 총칼로 끌고 갔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강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전 세계 학계에서는 '인신매매 특히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 예방, 억제, 처벌을 위한 의정서', 흔히들 말하는 팔레르모 의정서를 통해서 이미 강제성의 개념을 명확히 해두었습니다. 'trafficking'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불법 거래라는 말입니다. 착취를 목적으로 위협, 무력행사, 사기, 기만, 권력 남용 등을 동원해 사람을 보집하거나 운송, 인수하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반일 종족주의』를 쓴 사람들은 모집이었고 관알선이었으므로 '강제연행'이 아니다, 자기 발로 갔으니까 '강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갔다는 말은 국제법에 합의되어 있는 기초 상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79p.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좁은 민족적인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103p. 여러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은 점차 군국주의로 향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2.26쿠데타(1936)와 쇼와유신이 일어났습니다. 2.26쿠데타는 황도파라고 불리는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었던 군부가 천황 친정을 주장하며 중앙정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려고 했던 사건입니다. 2.26쿠데타의 정신적 지도자는 '기타 잇기'라는 독특한 사상가였습니다

...... 아무튼 기타는 단일하고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서 전체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쿠데타는 불가피하다는 그의 생각이 2.26쿠데타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돼 사형당했습니다. 2.26쿠데타는 도쿄를 장악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천황을 추종하는 황도파가 일으킨 쿠데타인데 바로 그 천황이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지요.

황도파의 정신세계와 박정희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06p.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 전후 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요시다가 일본은 이제 살았다며 실제로 만세 삼창을 했다고 하죠.


108p. 기시 노부스케는 사실상 만주국을 설계한 사람입니다. 이런 만주 경험은 만주군 장교로 근무한 박정희와 잘 맞아떨어졌어요. 사실 유신 시대의 국방국가 한국은 만주국 모델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생겨난 한일 간의 유착관계에는 기시와 박정희가 얽힌 만주국 인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155p. 이제 우리는 서구형 근대만을 표준으로 놓고 모든 사회를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시각에 대해 반박할 줄 압니다. 다른 발전의 길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발전을 통해 입증해서 콤플렉스가 없어진 편인데, 1960~70년대 우리가 아직 후진국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그런 반박을 쉽게 하지 못했습니다. 발전경로가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도 봉건이 있었고 스스로 자본주의를 반전시킬 가능성도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나온 게 자본주의 맹아론입니다.

   맹아는 싹이지요. 자본주의 맹아론의 핵심은 우리의 자본주의 맹아도 발전할 수 있었는데, 이 싹이 자라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었는데 일본이 와서 짓밟아서 실현할 수 없었고, 이식 자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물론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맹아론은 말하자면 죽은 자식 나이 세는 격이지 싶습니다.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요?


208p. 기가 막힌 것은 (일본에서 북한으로 재일조선인을 보내는) 북송저지사업의 책임자가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였다는 사실이지요. 


211p. 일본사회가 재일조선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지만, 한국사회가 재일조선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편견을 지닌 체 대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불합리합니다.


214p. 우리가 재일조선인에 대해 고려할 때 가장 먼저 전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일본이 그 어느 나라보다 외국인과 피가 섞이길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25p.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당시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가 격렬하게 반대운동을 벌였습니다. 일본의 야당과 진보세력이 반대운동을 주도했지요. 하지만 두 나라에서 일어난 반대운동의 맥락은 전혀 달랐습니다. 한국은 식민지배 역사를 어떻게 많지도 않은 돈과 바꿔 팔아버릴 수 있느냐며 굴욕적인 협정을 접고 제대로 된 식민지배 청산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에서 벌어진 반대운동은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에는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했던 투쟁, 이른바 '안보투쟁'이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일본이 재무장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요. 그래서 한미일의 군사동맹 강화로 이어질지 모르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한 것입니다. 반대운동의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투입되어 일본의 저임금 구조가 고착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등장한 구호가 바로 "박정의에게 줄 돈이 있으면 나에게 달라" 였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에 경제 지원을 하지 말라는 주장인데, 이 대목에서 당시 일본 진보세력이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의 한계가 엿보입니다. 바로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이나 한국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를 반대하는 것에도 분명 의미가 있었겠지만, 한일관계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고려가 보수세력뿐 아니라 진보세력에도 전혀 없었습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인권을 탄압하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고, 일본사회에서는 그런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보았습니다. 특히 전태일의 분신 항거와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지요. 일본인 중에는 전태일을 접하고 비로소 인권 문제에 눈을 떴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이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의 진보세력은 한국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납치사건을 대했지만, 그러지 못한 일본의 일반 대중에게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국도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을 주었습니다. 한국이 강제징용 등을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데 알고 보니 한국도 일본의 주권을 침해하며 납치를 한 것입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탓에 한국은 정당성을 잃었고 일본은 자신들을 합리화했습니다.


270p. '일본은 한국의 통일을 이루어주지 못하지만, 우리의 통일을 방해할 힘이 있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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