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열강의 식민지 통치와 국민통합 동북아역사재단 기획연구 38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식민지 문제에 대한 관심 확장에서 열강들의 식민지 통치를 비교하는 책이 궁금했다.

이 책에서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지역과 인도차이나 식민 지배,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지역 식민 지배, 그리고 일제의 홋가이도와 사힐린 선주민 아이누인에 대한 식민 지배, 일제의 타이완에 대한 식민 지배 중 교육문제, 조선에 대한 식민지 교육 문제, 마지막으로 조선-만주 경계의 압록강 수력발전소를 둘러싼 일제의 만주지역 식민 지배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1. 2022.09.08.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이 죽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아직 (영국 여왕의) 장례식 참석 여부를 확정하지 않았다.

_BBC news 코리아, 2022.09.14. "여왕의 장례식엔 누가 참석하고 불참하나?" 


202p. 근대 일본은 '천황제 절대군주국가'였다.

... 어떠한 체제라도 민중의 지지와 충성이 없으면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으므로, 이러한 지배 체제를 창출한 메이지 공신들은 제정일치와 국민교화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적 조작 행위를 하여 작위적인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고 보급시켰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천황에게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서구적 근대화와 일본 국수의 보존 및 국민사상의 통일이라는 목표들을 동시에 이룩하기 위하여 창출된 정치 이데올로기임과 동시에 종교 이데올로기였다.


2. 프랑스 식민지 근대화 담론과 식민지 교육

75p. 게다가 '근대화'라는 생각은 매우 모호했다,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했던 근대화 활동은 '토착민'들이 계속해서 '야만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면 모든 토대를 상실했을 것이다. '근대화'에 대한 담론은 따라서 언제나 프랑스의 지배를 지지했고 피식민자들을 식민지 체제에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식민지주의가 문명(자연적 재앙의 감소, 땅에 대한 '가치부여' 등)을 확대할 것이라는, 그러나 결코 그 목표들을 달성하려고 하지 않는 생각이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77p. 사실 (식민지 치하에서) 현지의 유력자들은 계급의 논리에 따라 그들의 '동포들'을 착취하기 위해 식민지 시스템을 활용했다. 

식민지 교육정책의 세 가지 목표를 여기서 되돌아보면 그것은 교육되는 지식을 통제하기, 최소한의 근대성을 침투시키기,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기능에 적응하는 토착 엘리트를 형성하기였다. 


204p.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에 식민지 교육정책 수립의 실무자였던 일본인 구마모토 시게키치는 "주로 조선 민족을 과연 동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구하고 아울러 그것에 관련된 조선민족 교화의 방침에 대하여 사견을 진술한" 것이라는 "교화의견사"를 비밀문서로 제출하였다.

......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철저한 동화는 류큐나 타이완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우선 차선책으로 '조선민족의 순량화'를 주장하고 있다. 즉 "조선민족을 교화하여 제국의 순량한 신민으로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일본민족에 대하여 항상 종속적 지위"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범위도 초등교육과 직업교육에 한정할 것을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금후 일본제국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장애되는 것은 아마 (조선인의) 민족적 자각심 일 것이다. 그렇다면 금후 교육 시설에서는 이 점에 가장 유의하여 (조선인) 이들로 하여금 민족적 자각심을 각성시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극히 간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고찰하더라도 초등학교 이외에 할 교육상의 시설은 이들 생업에 직접 관계되는 것에 한하고 ......"

 

...... 이러한 그의 견해는 이듬해 발포된 조선교육령에 그대로 반영도어 있으며, 총독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순량화'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3. "역사가 밥먹여 줍니까? 역사를 알아 어디에 쓰나요?" 라는 이가 있었다.

"그래요? 돈벌이 잘하고 잘먹고 잘~사슈. " 라고 하고 말았다.


205p.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던 세키야는 조선학제안이 마련되자 이를 일본 본토에 있던 법학박사 호즈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였다. 호즈미는 이에 대해 사신 형식의 의견서에서 식민지 교육의 목적과 한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조선에서 교육은 우선 우리 황실을 숭경하는 정신을 부식(도와서 뿌리박게)하고, 특히 질서를 중시하고 규율에 복종하는 관념을 기르고, 그리하여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지식과 기술을 교수함으로써 일신일가를 다스릴 수 있으면 족하다"


...... 호즈미는 이어서 "교육은 국가 통치권의 행동에 속하고 다른 행정과 다를 바 없는 국가의 일이며 혹은 국가가 사인에게 명하여 행하는 일"이라 하여 교육을 학문과 구별하고 철저히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입, 도구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교육 내용, 교사, 학교 경영에 강력히 국가가 간섭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4. 새로운 역사의 창조 혹은 가공

122p. 새로운 과거들이 급격한 변화의 시기 동안 출현할 수 있으며, 이 과거들은 그룹들, 특히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기억되고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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