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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랩소디
정운영 지음 / 산처럼 / 2002년 11월
평점 :
1999년 후반기부터 2002년 후반기까지의 정운영 선생(1944~2005)의 글모음이다.
세상 돌보는 일에 몸 돌보는 일마저 더해진 처지에 IMF탁치와 새천년은 열렸지만 광기의 암울한 세상은 선생을 도대체 편하게 해주지 못했다.
"정운영 선생 같은 분 요새는 없습니다." 라는 말밖에...
정운영 선생의 그 투명한 천재성과 따뜻한 탁견이 요새 더더욱 그립습니다.
21p. 실로 그 이념이니 제도니 하는 화상들이 우리의 삶과 사랑에 제법 근사한 세계를 선물한 적이 별로 없다. 정의와 평화보다는 압제와 수탈이 본령이었다. ...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는 세계화, 금융자본, 신자유주의 암흑에 허덕이는 세기말(世紀末)의 절망적인 영혼들한테 구원의 르네상스는 과연 어디 있는가?
32p. 자유의 방종을 누르고 평등의 여지를 넓히지 않는다면, 그래서 정의를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한테 희망이 없다.
36p. ...‘늙은 피“라고 우리를 비웃으면 안 된다. 작은 목숨을 이어준 메마른 뿌리의 고투를 쉽게 잊겠다면, 당신들이 가꿀 목숨들과 그 뿌리의 정성도 뒷날 쉽게 잊힐 수 있기 때문이다.
93p. 개혁은 행사가 아닌 ’생존 방식‘이 되어야 한다.
95p. 준칙(rule)이냐 재량(discretion)이냐의 논쟁은 경제학계의 해묵은 숙제이다. 정부가 준칙만 정하되 재량은 당치 않다는 것이 고전파 경제학의 주장이라면, 준칙만으로는 경제가 멋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재량이 필요하다는 것이 케인즈 경제학의 반론이다.
100p. 정책의 실패를 처벌하면 누구도 국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반명 정책적 실수라는 이유로 항상 면죄부를 준다면 국정 운영에 견제 장치가 없어진다.
102p. 각국의 생산 조건이 상이한데도 이처럼 교환 기준만 세계적으로 통일하려는 ’폭력적‘ 시도가 세계화의 경제적 현실이다.
138p. “나는 젊어서 급진파가 될 엄두를 못 냈다. 왜냐하면 늙어서 보수파로 변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라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고백을 들어둘 가치가 있다. 늙어서도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정직한 분노를 간직할 자신이 없거든, 아예 젊어서 분노를 얘기하지 않는 편이 낫다.
193p. 자신의 득점보다 팀의 승패를 먼저 생각하고, 그래서 개인보다 조직을 앞세우라는 와스프(WASP)의 윤리는 누구라도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배 계층 내에서만 통용되고, 지배 국가 내에서만 유효한 규범이라면 피지배 계층이나 주변 국가들로서는 오히려 경계할 대상이다.
195p. 결국 있지도 않는 적을 만들어내고, 변변한 적이 아닌데도 자꾸 그 위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세기 전의 아이젠하워는 ’군산 복합체‘의 위협을 경고했고, 경제학자들은 ’항구적 전시 경제‘의 위험을 강조했다. 적이 없으면 가상적(假想敵)이라도 만들어서 무기를 팔아라, 그래야만 미구 경제가 수요 부족의 공황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시대의 모토로 등장한 오늘 군비 증강 주술에 묶인 세계 최강국 대통령(조지 W. 부시)의 취임사에서 풍기는 ’화약 냄새‘는 정말 유감이다. 미국(개인)의 홈런보다 세계(팀)의 승리를 함께 생각하자는 권고 따위는 아무래도 편치 않은 모양이다.
203p. (사무라이) 전국 시대의 원죄 외에 현대사의 오류도 있었다. 예의 그 반공 신드롬이 말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석권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돌발하자, 미국은 동북아 안보와 일본의 재무장을 서둘렀다. 반공의 맹우로 군국주의 세력과 제휴한 것은 사실상 예고된 수순이었다. 재벌이 부활하고, 전범은 석방되어 정계로 진출했다. 그들의 혈관에 도도히 흐르는 파시스트 광기는 재무장, 헌번 개정, 부전(不戰) 결의 반대를 필두로 식민지 정당화 망언, 신사 참배, 교과서 왜곡 등 아주 잡다하게 터져 나왔다. 반공의 보루로서 독일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 잔당은 반공의 우군이 아니라 역사 청산을 위한 사냥감이었을 뿐이다. 코뮤니즘과 함께 파시즘을 억누른 연합군의 독일 점령 정책은 무엇보다 스탈린과 유대인과 드골이 두려웠기 때문이고, 파시즘으로 코뮤니즘을 막으려던 일본의 경우는 미국을 필두로 이승만과 장제스 및 그 후계들의 ’레드 콤플렉스‘ 단견에도 일말의 원인이 있다. 정권이 아니라 나라가 문제였는데...... .
237p. 밥줄이 정의감보다 무거운 현실은 참으로 치사하지만, 그 치사한 현실이 우리네 삶의 집합이라면 참고 견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238p.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제도의 내실과 운영이다.
300p. 그래 ‘반민주’도 살고 ‘반민족’도 살지만 ‘반미국’은 살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역사였다.
323p. 그러나 국내의 언론과 식자층 일각에서는 미국인 보다 더 반미 감정을 걱정하고,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진상 규명에 앞서 미국과의 혈맹 관계 손상을 염려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 점 변함없이 되풀이된 민족 비하의 발로이고, 사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327p. 공급자의 양식이나 소비자의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을 경우, 자유 방임 설교는 이렇게 방종과 탈선만 선동할 뿐이다.
335p. 정치는 수시로 음모론 따위를 퍼뜨리며 유권자를 홀립니다. 설사 누구의 음모일지라도 그 음모에 속지 않는 일이 중요합니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 부산 시민은 특별히 그 정권을 반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투표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대문 앞에 떨어진 ‘삐라’ 한 장이, 그러니까 거기 적힌 “전라 도민이여 단결하라”는 선동 한마디가 편안한 시민의 마음을 마구 들쑤셔 놓았습니다. 전라 도민의 단결을 외치는 괴문서를 부산 시민의 집에 누가 어떤 의도로 뿌렸을지는 직접 보지 않고도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347p. 무역 수지에도 잡히지 않는 세계 최대의 교역 상품은 무기이고, 그 다음은 마약이 차지한다. 1995년 유엔사회개발연구소(UNRISI)의 한 보고서는 마약 거래가 연간5000억 달러 규모의 ‘지하 경제’를 형성하여 원유시장을 압도한다고 추산했다.
사람을 즉석에서 죽이는 무기와 서서히 죽이는 마약이 세계 교역의 수위를 차지하는 이 문명의 역설을 대체 어떻게 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