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질주 - 정운영 교수가 천년대의 전환기에 던지는 화두
정운영 지음 / 해냄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5p. 자유에 대한 모독은 시대 해체의 징후이다. 봉건 사회가 해체되면서 지배 계급은 생계와 생산의 수단인 토지로부터 농민을 추방한 뒤,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자유'를 하사했다. 경쟁력과 유연성이라는 이름의 현대판 주문(呪文) 역시 일터에서 내쫓은 자유와 눈치껏, 재주껏, 요령껏 살아남을 자유에 대한 훈시이다. 시대의 유행인 사회 안전망이란 결국 재주와 요령에서 낙오한 사람들을 위한 나라의 적선 수단일텐데, 실로 그것은 걸인과 부랑민 수용으로 책임을 다한(?) 자본주의 역사의 구빈법 시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과 삶에 대한 불안의 극대화, 기껏 그것이 세기말 인류의 지혜가 안출한 경쟁력 향상의 첨단 비기(祕器)란 말인가?

 

23p. 오해가 없도록 못박는 말이거니와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원흉은 단연 재벌의 방만한 차입 경영과 문어발 확장의 탐욕이며, 거기 뒷돈 대며 함께 놀아난 금융의 탈선이다. 그것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실책 역시 공범이다.

 

26p. 하느님의 섭리였는지 결국 로마가 굴복하고 회개했지만, 나는 그 탄압을 자초한 기독교의 배타성에 주목하려고 한다. 나만이 구원의 길이고 너는 가짜라는 그 배타성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이 지구를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계로 만들기 위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서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는 대신, 두 체제가 서로 나든 너든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피터지게 싸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 지구에는 자본주의의 유일 체제가 형성되었다. 사회주의라는 견제 세력이 소멸되자, 자본주의는 온갖 독선과 횡포를 자행했다. 이윤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잘라도 무방하고, 자본이 뻗어나가는 데에 이웃 나라의 희생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여기 걸려든 것이다.

 

38p. 세계화는 주변부의 무장을 원천적으로 해제하려는 강대국의 국가 이기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1p. 대포를 녹여 밥을 만드는 것은 정치의 일이다.

 

78p. 국제통화기금은 달러를 중심으로 세계의 경제 질서를 편성하려고 만든 기구이며, 그 창설 의도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86p. 2차 대전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치부책을 다시 꺼내는 영국인의 기질도 눈여겨볼 만하지만, 이들 선거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과거에 대한 집요한 책임 추궁과 장래에 대한 철저한 경계이다. 선거는 현재 치르지만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묶는 노끈이기도 하고, 그 관계를 자르는 가위이기도 하다.

 

136p. 미국의 모라토리움을 막아주는 힘은 미국 경제의 실력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이고 군사력이다.

 

143p. 1976년 대자보로 가득한 천안문 광장(1976년 저우 사후 천안문 광장에서 2,600명이 사살됨)에 대고 민주 벽은 좋은 것이다. 인민이 자유로워야 하니까라고 칭찬했던 덩이 1989년 천안문 시위대를 향해서는 적에게 일말의 동정도, 먼지만큼의 관용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외치면서 피를 흘리고라도사태를 진압하라고 정치국에 독촉했다. (이후 3,700명이 천안문에서 죽었다.)

 

185p. 박정희가 아니면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가 아니었다면 더 잘 이루었을 것이란 반론만큼 무력하기 때문이다.

 

207p.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 아저씨는 정식 근로자이나, 염색 공장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청년은 연수생에 불과하다. 그런 낯간지러운 궁리를 마련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한다.

 

223p. 매국노의 재산권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일제 35년의 강점이 그대로 합법적이고, 해방 이후 52년 동안의 일제 청산 노력이 말짱 헛것이었다는 증명이다. 법관이야 법률에 따라 고지식하게 판결했을 터이다. 그렇다면 그런 법을 방치한 역사가 잘못이다. 일제와 싸운 보답으로 조선족 자치주를 만들어준 중국에 낯이 뜨거웠다. 저들은 잊어도 그만인(?) 은혜를 잊지 않는데,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매국조차(!) 잊은 것이다

서노불이(恕怒不異) 용서와 분노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분노해야 한다. 분노 없는 용서는 분별 잃는 비굴일 뿐이다.

 

260p. 요즘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언론의 자유를 의심합니다. 지난날 우리를 괴롭혔던 공안 기구의 검열이나 정보기관의 압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전시대적 유물이 크게 줄었는데도 불안은 가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역설적이지만 언론 자유의 과잉 때문입니다어떤 인물이나 행위에 대한 평가만 해도 그렇습니다. 권력의 눈치를 읽으며 특정인을 듣기조차 간지러울 만큼 추켜세우거나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저질 선동성 활자 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검열 불가의 인터넷을 비롯한 최첨단 전자 매체가 누리는 언론의 자유는 가히 언론 공해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사람 잡을 얘기를 함부로 써대고도 언론의 자유라고 뻗대는 한, 쉽사리 손대지 못한다는 세상의 약점을 파고든 영약한 언론 장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듣기 민망한 아첨과 근거 없는 독설로 독자를 홀리며, 그렇게 세를 불리고 돈을 버는 언론 간상배(奸商 輩)가 너무 많습니다. 그것도 언론이라고 우기니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301p. 4410개월 만에 석방되어 세계 최장기 복역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김선명은 내가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폭력에 굴복하면 그 폭력을 휘두른 자들과 공범이 됩니다. 이데올로기 그 자체는 잣대가 아닙니다.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견뎠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쁨이었습니다라고 전향 거부의 사연을 토로하면서,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거기도 내 조국이고 여기도 내 조국이라고 대답했다. 이 시대의 치부를 도려내고 분단의 상처를 쓰다듬을 지혜와 용단을 새 정치에 바랄 수는 없을까?

 

304p. 나의 관심은 오히려 전체 이익을 위한 강대국의 책임 따위가 과연 존재하느냐는 질문과 그 대답에 있다. 역사와 현실이 가리키는 대로 이것은 한낱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

 

305p. 실제로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구별은 강대국 편의의 레토릭일 뿐이고, 세계 경제에 대한 공헌과 자국 이익의 추구 역시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동의어에 불과하다.

 

337p. 저항에는 역설이 따릅니다.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구호로 내건 프랑스혁명은 인류 역사에 가장 치열한 저항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저항으로 혁명에 성공한 뒤 지배 계층은 즉시 더 이상의 저항을 불법으로 단죄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곧 저항과 저항 거절의 반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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