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를 위한 비망록
정운영 / 한겨레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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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죄의 기억을 지운다는 "레테를 위한 비망록"이 책이름인데 그 안 머리글 제목은 선행의 기록을 알린다는 "에우노에를 향하여" 이다.

고 정운영 교수가 잊지말자 하는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진행부터 1997년 IMF 발발 직전까지의 기록이다. 개혁과 과거사 단죄의 후퇴를 포함해 시작만 호기로웠던 용두사미 문민정부의 한계와 OECD 가입 후 어려워져만 가는 나라안팍 경제를 걱정하고 있다.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 따른 이념적 돌파구 모색과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67. 1980년대 후반 단군 이래 초유의 국제수지 흑자가 투기 광풍을 몰고 왔다면, 90년 초반의 호황은 투자와 소비의 급격한 '초과수요' 열기를 불렀다. 확실히 우리 경제는 흑자에 약하다. 가계든 정부든 항상 적자에 시달리다 보니 적자에는 제법 단련이 되었는데, 어쩌다 흑자를 대하면 어떻게 주체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딱한 체질이 되어버린 탓인지 모른다.


69. 투기와 독점은 시장의 실패 가운데 그 천민적 속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요소이다. 투기가 집과 땅을 휩쓸어 사회가 온통 망국명을 앓고, 분신 자살과 신도시 건설이 뒤를 이은 것이 불과 수년전이었다. 


136. 저의 전망으로는 '당분간' 한국 사회에 혁명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가 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진보적 대안 탐색이 반드시 어떤 성과가 기대될 때만 의미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폐기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 예수의 말씀이 당장 실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복음전파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220. 색깔 유령은 계급적 적대를 부추기며 미구에 '급진' 유령으로 변신한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는다는 자신감의 반영인지 사회의 보수화 추세는 도처에 역력하며, 누구도 그런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개혁이 보수의 목을 비틀어 주머니라도 터는 듯이 비뚜로 선전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여권이 내놓는 개혁은 개량이고 개선이지만, 재야가 부르짖는 개혁은 불온으로 덧칠되곤 했다. 지난날 얼마나 많은 독재자가 민주주의 '형식'의 요구조차 불온으로 단죄하며 권력 유지의 명문으로 악용했던가?


284. 대학의 지식은 "대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역설이 그것입니다. 생태학자 배리 코머너가 분명하게 지적했듯이 "올바로 제기된 질문은 잘못 제시된 답변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질문이 바르면 언제라도 해답을 찾을 가능성이 있지만, 질문 자체가 잘못되면 해답에 이를 기회가 영영 없기 때문입니다.


290. 지식인이란 거부하고 저항하는 사람이다.


307. 일찍이 마르크 블로흐가 갈파했듯이 허위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증거가 되는 법이어서, 허위를 방관하면 그것이 곧 역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 재산을 기증하고 작고한 김철호 선생은 "뼈에 무슨 색깔이 있겠느냐"면서 분단 희생자의 진혼과 위령을 당부했다.


317. 정신이 왜소하면 사람과 사회의 관계가 한층 피폐해진다. 계급과 민족의 절박한 현안은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소멸될 대상이 아니기에 우리는 실종된 담론의 복원에 열중해야 한다. 사회 정의의 실현과 분단 해소가 결코 포기할수 없는 과제라면, 거대 담론에 집착하고 그 열망을 간직할 의무가 우리한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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