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만큼 성실하게 - 교유서가 소설
이소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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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돈을 안 쓰는데 매달 카드사에 내는 돈은 늘 비슷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자가 늘어 있었다. 이제 보니 대출 이자까지 얹어 카드 할부 이자. 이자의 이자가 새끼를 갔다. 그리고 고정비, 병원비는 계속 나갔다. 통신비도 나갔다. 교통비도 나갔다. 연애는 해야 하니까 가끔 마시던 커피값도 나갔다. 구라 안 치고 그것 말고는 진짜로 쓰는 게 없었다. 어디서 돈이 새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나는 빨간 펜을 들고 명세서를 꼼꼼히 살펴봤다. 소름 돋게도 다 내가 쓴 돈이 맞았다. 할부로만 240만 원이 고정비로 나가니 당연했다. (124페이지)


아무런 소득이 증명되지 않아도 카드를 발급해 주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대학 새내기에게도 활짝 열린 문으로 다가와, 신청서 한 장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지금 이 물건을 사고 싶은데 현금이 없어도 살 수 있고, 다음 달 결제일까지 시간도 있고, 그 시간까지 이 물건값을 충분히 만들 수 있잖아? 노프라블럼. 그러니까 이 물건을 지금 사도 돼. 사고 싶은 물건이 너무 큰 금액이어도 괜찮았다. 우리에게는 그 돈을 나누어 갚아도 된다는 할부가 있으니까. 엄마가 집에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고, 매달 2만 원씩 내던 거 생각해봐. 별거 아니었잖아. 조금씩 내면서 결제 완료했잖아. 그렇게 될 거야. 순서가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물건 먼저 받고 돈을 내도 되는 일이었다.


족한 거 없이 자랐던 수진의 인생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한다. 머슴처럼 일해도 인정받지 못하고,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일해도 받는 월급의 액수는 같았다. 더 나은 곳으로 옮기고 싶어도 이 바닥이 다 그런 건가 싶어서 망설일 즈음, 문제가 뭔지 알았다. , 일을 잘 할 수 있는 노트북이 나에게 없던 거구나. 노트북을 사야만 했다. 하지만 값은 비쌌고 지금 받는 월급으로는 노트북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그때, 회사 로비에서 마주친 젊잖은 언니들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조건 없이 카드 발급, 비싼 값의 물건도 24개월 할부로 구매 가능하다는 말에 수진이 카드 발급 신청서를 쓰는 게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수진이 빚더미에 앉아서 내려올 줄 모르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


할부, 좋지. 지금 100만 원이 없어도 100만 원짜리 물건을 살 수 있고, 부담도 적게 나눠서 내도 된다는데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나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눠서 낼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에 고민하던 물건을 결제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걸 사도 괜찮은 걸까? 너무 비싼데.’ 하던 고민의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다행히도, 그게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눈앞에 다가온다는 것을 제법 빨리 알게 되어 카드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습관을 들였지만, 솔직히 카드 할부의 매력은 큰 것 같다. 지금은 무이자 할부만 가끔 사용하곤 한다. 수진이 마치 기막힌 발견을 한 것처럼 할부의 매력에 빠져들 무렵,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분명 산 게 없는데, 내가 내야 할 돈은 지난번에 구매할 노트북의 할부 금액뿐이었는데, 왜 매달 내야 할 돈은 이렇게 많은 거지. 적어도, 왜 줄어들지 않는 거지? 계속 돈 내고 있었잖아. 그때 수진은 몰랐다. 할부의 매력에 빠져서, 노트북뿐만 아니라 나눠서 내면 된다라는 믿음으로 계속 사고 있었던 것을. 게다가 할부로 갚아도 된다는 신용은 공짜가 아니었다. 할부 이자가 있었다. 원금을 아무리 나눠서 내도 거기에 얹어지는 이자 수수료를 더하니 원금보다 비싸지는 건 당연했다. 그때부터는 매달 결제일에 연체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싸움이 시작됐다.


돈도 안 벌면서 왜 돈을 자꾸 쓰는 거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수진도 나름 일하는 어른이다. 시로 등단했고, 시를 써서 먹고살았다. 처음 등단했을 때는 기뻤다. 시인이 되다니. 상금까지 준다네. 시상식에 갈 옷을 고르면서 카드를 긁었다. 상금 받으면 낼 거니까.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하려고 카드를 긁었다. 낭독회에 입고갈 옷이 지난번에 입은 옷과 같을 수는 없으니 또 카드를 긁었다. 옷에 맞는 가방과 신발까지, 겨울에는 또 명품 외투까지 장착하느라 수진의 카드는 쉴 시간이 없었다. 수상도 했으니 작가들 모임에도 참석해서 한턱 거나하게 내기도 했다. 시를 쓴다는,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어른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는 게 없어 보였다. 다만, 순수문학을 한다는 것이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수진은 몰랐을 뿐이다.


수진의 일상에서 돈을 안 쓸 수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는 이유는 넘쳐났다.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쇼핑이 필요했다. 좌절감에 무너지는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밝은색 립스틱을 샀다. ‘예술적 영감이 필요하다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 수시로 긁어댔던 카드의 위험은 자존감이 바닥날수록 보상받아야 하는 마음으로 둔갑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마음 치료가 점점 이유도 모를 쇼핑으로 이어졌다. 왜 샀는지도 모를 빨간색 구두가 6개월째 상자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수진의 방은 온갖 택배 상자가 쌓여있고, 겨우 몸 하나 뉠 자리만 만들어졌다. 뜯지도 않은 상자들 속에 있는 물건은 상자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그 물건들의 가치는 매달 달려오는 카드 결제일의 긴장감 속에 있었다.


카드를 긁는 순간 우울은 증발하지만, 영수증이 날아오는 순간 불안은 복리로 증폭된다. 그러면 다시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또 다른 결제를 실행한다. 2,900만 원은 내 뇌가 저지른 오류의 합산이자, 내가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던 시간들의 물리적 부피였다. (74페이지)


이상하다. 수진이 빚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빚을 갚기 위해 미친 듯이 자기 시간을 쏟아내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왜 쌓이는 게 없을까. 그렇게까지 했는데 빚은 줄어야 하고 시간은 여유가 생겨야 할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 빚을 갚겠다고 편의점 알바에 시간 쪼개 큰돈 되지도 않는 강의를 뛰고, 영혼 없는 글까지 써가면서 돈을 채우고 있는데도, 남은 빚이 줄어드는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수진이 애인에게 보고하듯 빚 갚아가는 과정을 얘기하는데, 이상하게 화가 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유가 어찌 됐든 수진이 그 빚을 책임지겠다고 노력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수진이 갚은 액수나 남은 빚의 금액에만 방점을 찍은 그의 말이 너무 잔인하게 들렸다. 최소 연봉 7천에 모아둔 돈이 4억이나 된다는 그의 입장에서,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여자의 빚과 소득이 부담된다는 사실을 이해 못할 것도 없는데, 어떤 상황에서의 노력보다 눈앞에 남은 문제의 현실만이 계산된다는 게 슬펐다. 물론 처음 소비 습관을 잘못 들인 수진의 책임이 가장 커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만 따진다면 인간은 누구나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보기 좋게 포장되거나 돌려 말하는 부드러움이 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이렇게 촌철살인 하듯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말이 차라리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이런 소재, 이런 과정을 담은 이야기가 따뜻하게 들리면 안 될 것 같다. 혹시나, 다시 잘 될 거니까 또 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반복될까 봐. 그런 안심에, 남들의 시선 먼저 생각하며 치장하고 괜찮은 척하느라 자기 인생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까 봐. 동시에 순수문학의 세계를 엿보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작가의 길이 쉽지 않다는 마음에, 그런데도 그 길을 가고 있는 누군가의 고단한 일상을 추측해보기도 한다. 언젠가 봤던 어느 작가의 칼럼도 생각난다. 집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작가는 천운이라고, 많은 작가가 생계를 꾸리려고 글쓰기 외의 직종에서 온갖 일을 한다고. 운이 좋아 등단하고 책을 내도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한 인세, 책이 증쇄를 찍는 경우도 드물고, 몇십 년 전과 똑같은 원고료는 최소한의 물가상승률조차 반영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도 신인 작가 공모가 계속 열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 쓰고 싶은 글로 인정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먹고사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가 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많은 순간에 이상과 현실에서 미친 듯이 싸우다가, 결국 현실에 타협하고 마는 결과를 선택하게 되는 자연스러움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일상이 느슨해져 채찍질이 필요하거나, 뼈 때리는 말로 현실을 직시하고 싶거나, 막연하고 여유롭게 보낸 이상적인 오늘에 정신이 번쩍 나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펼쳐보기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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