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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ㅣ 위픽 클래식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박정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평점 :

그때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고, 내 안에서 들끓던 그 많은 감정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아니, 만약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불러야 했다면, 그것은 오직 ‘지나이다’였을 것이다. (74페이지)
열여섯 살 블라디미르는 이웃집에 이사 온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 스물한 살의 지나이다는 가난한 집안 배경 따위 무시할 만큼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뭐 다섯 살 연상쯤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순진한 열여섯 살 청년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였다. 그녀를 둘러싼 여러 명의 남자가 그녀를 우러러본다. 그녀가 이 남성들을 갖고 노는 것이 눈에 훤해 보이는데도, 이 자리에 있는 남성들은 오직 그녀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 한번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배경이 탄탄해서 누구라도 탐낼만한 남성들이 여성 한 명을 둘러싸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봤는데, 아 그냥 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녀의 매력은 뭘까. 도대체 그녀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이기에, 이 남성들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저녁마다 그녀의 집에 모여서, 그녀의 눈길 한번 받아보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거냔 말이지. 누구보다 블라디미르의 대혼란은 그녀의 인성 따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그녀 자체로 모든 게 허락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불타올랐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처럼, 블라디미르의 마음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게 첫사랑이라는 걸까. ‘내 안에서 들끓던 그 많은 감정’에 이름 붙일 수 없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이유도 모른 채로, 오직 이 모든 혼란은 ‘지나이다’라는 이름 하나로 정의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 감정의 흐름을 멈출 수 없는 건, 처음 경험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거다. 이거 뭐지? 미칠 것 같은데, 보고 싶어서 그 집 담벼락을 기웃거리고, 그녀의 방 창문 불빛이 언제 켜지나 확인하고, 그녀가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치는 일에 가슴이 무너지고. 다른 조건 없이 오직 그녀 하나만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 곧아서 그 순수함에 나도 함께 취하고 싶기도 했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공작 집안이면서도 돈이 없어서 생계에 부담이 될 정도이고, 손님들에게 대접할 변변한 음식이 없는데도 매일 찾아오는 손님에게 문을 활짝 열어두고, 아무 자리에서나 소리 지르는 어머니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돈이 없다고 징징대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의 체면은 어디쯤 머물러 있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기에, 이런 현실 속에서도 좀 더 교양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품위 있는 거로 생각했는데, 그녀가 이 남자들을 모아두고 자기가 어느 남자의 배경에 손을 뻗어야 하는지 재고 있는 게 그대로 보였다. 남자들 역시 오직 그녀를 향한 사랑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여자와 연애 한번 하고 싶었을 뿐인지, 이 여자의 배경 중에 돈 빼고 모든 게 만족스러웠을지 알 수는 없으나, 그녀나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이나 서로 비슷한 마음으로 머릿속 계산기를 막 두드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들 가운데 어색하게 섞인 블라디미르의 순수한 마음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싸움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설상가상 그가 마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상대는 그녀의 집 거실에 모인 남자들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누군가 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깔끔하게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어야지.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접어진다면 그건 또 사랑이 아니겠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미칠 즈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 후 그 충격은 엄청났다. 어느 정도 의심스럽고 긴가민가했던 나도, 그 의심이 사실이 되었을 때 놀라긴 했다. 아, 열여섯 청년의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줘야 그의 인생에서 이 충격을 지울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첫사랑을 겪으면서 소년이 남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그대로 보인 것은 좋았으나, 그 시대에도 인간은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구나 싶어서 씁쓸했던 건 어쩔 수 없더라. 가난에서 구원해줄 남성을 찾아 헤매는 듯하면서도 그 와중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찾는 지나이다의 모습도, 블라디미르가 겪었던 불가항력적인 사랑의 민낯도, 그렇게 겪은 사랑이 지독하게 흔적을 남기는 것도, 고통이나 상처보다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질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랑인 걸까.
오랫동안 보관함에 있던 책을 이제야 꺼내주었다. 너무 유명한 고전이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은 예감에 펼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책은 왜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언급됐을까. ‘첫사랑’이라는 말랑말랑한 단어에 무게감 있는 의미가 담겨 있기라도 했을까. 정말 오랜만에 얼마나 순수한 마음을 마주할 수 있을지 기대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책은 집 나간 지 오래된 나의 연애 세포를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읽고 보니 나에게 이 책은 쉽지 않았다. 주인공이 하는 사랑이, 아니 내가 아는 첫사랑이 이 정도의 혼란한 감정이었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첫사랑’을 떠올리면 저절로 수줍어지는 마음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 알 턱이 있나.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설렘 폭발일 줄 알았는데, 유감이지만 이 소설의 결말까지 보고 나니 사랑과 전쟁 고전판 같았다. 와장창, 폭풍처럼 몰아치던 사랑이 깨지고 나니 인생의 커다란 산 하나를 넘은 기분으로 블라디미르를 보게 된다. 다 끝나버린 사랑에 마치 ‘제 사랑이 왜 당신에게 필요했던 건가요?’라고 묻는 듯한 이 녀석, 다음 사랑은 또 어떤 모습이려나. 안타깝게도 집 나간 나의 연애 세포는 돌아오지 않았으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좋았다. 그저 이 소설의 끝에 함께한 이장욱 작가의 고급진 해설에 전혀 닿지 못한 나의 후기가 부끄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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