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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사람들 - 문래동 야간 택시 운행 일지
이송우 지음 / 빨간소금 / 2025년 4월
평점 :
병원 몇 번 다녀왔더니 한 달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진료받고 예약하고, 다시 진료받고 예약하고.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니 그냥 하루 중 일부 시간을 병원에 쓰는 것뿐인데, 뭔가 마감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감 치고 나니 다시 또 마감을 치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주일의 반복 같은 느낌 말이다. 병원 가는 날과 다음에 병원 가는 날, 그 사이의 시간이 오롯이 편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일상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불안을 내려놓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새벽에 굵은 빗방울들이 사나웠다. 폭우가 내리면 와이퍼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견디기 어렵다. 와이퍼의 움직임 사이로 빗발 내리는 풍경이 날카로웠고, 풍경의 ‘칼날’에 베이지 않으려면 집중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전면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안개처럼 사위를 채우는 빗줄기 속에서 물기가 번들거리는 얼굴의 숱한 ‘나’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나였다가, 당신이었다가, 아이들이었다가, 부모님이 됐다. 나의 모든 ‘나’들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니다. 그들은 사랑을 유예하고, 사랑을 전하고 싶고, 사랑에 울부짖는 청년들에게 손을 흔들었을 것이다. (62페이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살아가는지 궁금해지던 차에 만난 이 책은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개인적인 상황으로 반년 정도 택시를 운전하던 저자는, 택시에 오른 우리 시대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특히 야간 택시를 운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 사는 모습 그대로였다. 시대가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변화했기에 미처 알지 못했던 방식도 있었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청년들이 땀내를 풍기면서 택시에 탔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 자체에 괜히 뿌듯했다. 밤늦은 시간 대학교 안으로 콜을 부른 연구원은 나아갈 길이 멀지만 멈추지 않고 연구가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콜을 부르는 방법을 몰라서 한참을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노인의 모습은 우리 엄마였다. 구치소로 면회하러 가던 젊은 여성을 보고 저자는 오래전 교도소로 아버지를 만나러 가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택시를 모는 운전사와 각자의 목적지로 가는 승객의 만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둘 사이의 묘한 분위기와 대화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병원 갈 때마다 한 달에 한두 번쯤 택시를 타는 나에게 저자가 승객과 나눈 대화의 모습은 좀 낯설다. 그냥 조용히 가고 싶어서 시트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가는 나는, 택시 기사님의 이런저런 대화 시도가 좀 버겁다. 이쪽 길은 공사 중이라 다른 길로 돌아서 가겠다는 등의 안내를 하려는 말 말고, 정치나 경제 얘기를 당연하게 해야 한다는 자세로 말을 꺼낼 때마다 속이 답답해진다. 그러니 저자가 택시에 오른 승객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잠깐이지만 대화에 참여하는 모습이 편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런 참견(?)이 싫은 나도 저자의 사색을 듣고 있노라면, 가끔은 택시 기사님과 승객과의 대화가 필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다.
저자는 인혁당재건위 피해 생존자의 아들이다. 택시에 오른 승객들의 이야기 속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느낄 때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전도유망한 아버지의 삶은 오랜 시간 계속된 수감생활과 보호관찰로 무너졌다.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저자에게 연좌제가 적용되어 소박한 꿈마저 접게 했다. 미래의 어느 날 자신이 완성하고 싶었던 삶, 그 자유마저 빼앗기고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은 친구조차 제대로 사귀지 못하게 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이 어떻게 자랄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궁금증만으로 내가 이들의 시간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이 다시 언급된 건 몇 년 전 일이다. ‘인혁당재건위 피해자 대상 국가 배상금 반환 소송’은 피해자들을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피해자들이 오랫동안 싸워서 받게 된 배상금, 그 배상금이 과하다면서 다시 시작된 소송, 결국 피해자들이 ‘부당이익금’이라는 명목으로 반환하면서 끝나게 된다. 이게 정말 끝난 걸까? 과거의 사건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 지난한 삶이 앞으로 없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의 세월을 보면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성장하면서 배우지 못한 사회화를 저자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배운 것 같다고 말한다. 혼자 조용히, 많은 것을 숨기듯 살아왔던 그의 환경이 타인과 함께해야 하는 필요성을 갖지 못하게 한 듯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협업의 구조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제는 야간에 택시를 운전하면서 승객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가의 어깨에 무겁게 얹어있는 짐, 대리운전을 마치고 다시 택시에 올라타는 승객, 좋은 일로 회식하고 만취해서 귀가하는 가장의 모습, 자식이 걱정할까 봐서 몰래 직접 택시를 잡고 병원으로 향하는 중년 여성 등 저자의 택시에 오르는 많은 사람이 제각각 살아가는 모습은 친근했다. 내가 아직 다 겪지 못한 사연마저 익숙했다. 아마도 우리가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가는 모양새가 비슷해서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아픔마저 닮아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미술을 전공하고 그것을 생업으로 삼았던 이도, 대기업 임원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도 밤과 새벽의 차량 속에서 모두 똑같았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 가로등 아래 펼쳐진 검은 도로 위를 달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그 고속의 질주 속에서 시간을 거스르기도 하고 시간을 앞당겨 쓰기도 하면서 말이다. 홀로 맞는 죽음처럼 우리는 적막 속에서 우리는 적막 속에서 홀로 삶을 맞고 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 지극한 외로움이 주는 위안에 빠진 서로를 알아챘다. 누군가의 외로움을 채워주기 위해서 우리는 오랫동안 외로움을 쌓아 두었던 것이 아닐까. (149페이지)
참 잘 견뎠다. 무너지는 고통, 치열한 경쟁, 스스로 물러나야 했던 순간까지, 잘 견뎌왔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게, 잘 될 거라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에도 마냥 좋기만 한 것도 아니게, 이상하게도 문장 속에 감정이 다 실리지 않은 건가 싶을 정도로 담백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견디는 중’이라는 게 맞는 듯하다. 오늘도 밤의 택시에 오르는 많은 승객처럼, 괜찮아질 거라는 마음으로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는 나도, 제각각의 사연으로 오늘을 견디는 사람들도 힘을 모으는 중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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