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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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사연을 안고 패키지여행에 모여든다. 단돈 8만 원에 대마도행 배를 탄다. 가이드의 여자친구는 그런 여행을 누가 가느냐고 비웃었지만, 그 여행에 스무 명이나 참가했다니 놀랍기도 하다. 쉬운 여정은 아닐 터, 그러기에 저마다의 사연에 의미가 있다. 암 환자, 늦은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 거기에 김석일 부자가 있다.


아무리 싸구려 여행이라지만 그래도 여행인데, 조금은 설레지 않을까? 어떤 이유로 이 여행을 선택했더라도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 특유의 설렘이 있었다. 약간의 들뜸, 가이드가 상술로 내려놓은 특산물 시장에서도 의심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겼다. 그러다가 버스의 짐칸에서 발견된 토막 난 시체로 이들의 여행은 멈춘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경찰이 출동하면서 그들의 관광버스는 범죄의 장소가 된다. 사람들은 형사와 마주하며 진술을 한다. 도대체 이 살인은 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처음부터 범인과 피해자를 드러내고 시작한다. 토막 난 시체는 김석일과 함께 버스에 올랐던, 김석일의 아들 김도현이었다. 당연히 유력한 용의자는 김석일이다. 그는 휴게소에서 아들과 내린 후 사라졌다. 휴게소에 남은 가이드는 김석일의 행방을 찾지만 실패했고, 그다음 장소인 특산물 시장에서 사건이 터진 거였다. 김석일의 행방을 찾던 경찰은 곧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르는 김석일을 찾았고 체포했다. 자백은 없었지만, 김석일이 범인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도대체 아들이 얼마나 미웠으면 죽이고 토막을 내기까지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조사해도 김석일은 자백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정에서 불리하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중 나타난 김석일의 전 아내 정지원의 등장에 그는 흥분한다. 차분하게 보이는 피해자 정지원, 그녀는 김석일에게 무슨 할 말이 있기에 그와 만남을 요청한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거로 믿고 형사는 김석일과 정지원의 대면을 허락하고, 사건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기를 바란다.


형사 박상하는 정지원을 보면서 죽은 아내와 병원에 있는 아이를 떠올린다. 이유가 다를지라도 비슷한 환경에 처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정지원에게 더 눈길이 가고 그녀의 행보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건. 자기가 봤던 불행을 정지원이 똑같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박상하는 사건에 다가갈수록 이 불행의 시작과 과정, 끝을 생각한다. 어쩌면 조금만 관심을 보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사건. 죽은 김도현은 평소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던 아이였다. 아버지의 분노가 아이를 향했고, 아이는 이유도 모른 채로 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동학대 사건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왜 어른의 분노를 아이에게 푸는 걸까 싶어서.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행동으로 아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아이는 모르는 어른들의 문제를 왜 아이에게 풀려고 하느냔 말이다.


죽은 아이 김도현의 불행은 아버지 김석일과 어머니 정지원에게서 시작됐다. 아내에게 집착했던 남편, 분명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편을 선택한 아내, 그 집착을 이기지 못해서 술과 폭력으로 아내를 다스리려 했던 남편, 참으면 괜찮아질까 싶었지만 결국 가해지는 폭력의 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떠난 아내. 그리고 남편은 남은 아이들을 맡았다. 아이들보다 자신의 불행이 더 컸던 엄마는 아이들을 두고 떠났다. 아빠는 남은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었을까? 아니다. 평소 강한 집착과 폭력, 술에 의존하던 아빠가 하루아침에 변할 리는 없으니까. 그 폭력의 한가운데에 놓인 아이는 결국 아빠의 손에 살해되었다. 이 사건의 개요는 그러하다. 하지만...


아쉬운 장면들이 많다. 아동학대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볼 수 있는데, 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 살릴 수 있는 아이가 죽는 경우를 떠올리게 된다. 어른들이 선택하는 자기 안위, 자기가 감당하기 어렵다며 이 관심의 당사자에서 발을 빼는 경우, 다가오는 분노의 분풀이로 아이를 향하는 시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는 일은 자연스럽고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면서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자식을 향한 사랑은 본능이라고 믿었지만, 그 역시 당연하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불행을 감당하다 보면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감싸고 나를 보듬는 일이 먼저였다. 작가는 소설 속 두 가정에서 비롯한 아동학대를 보여주면서, 부모의 자식 사랑이 당연한 것도 아니고 본능도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육아 우울증이 만든 아동학대,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며 시작된 아동학대. 두 가정의 끝은 참혹했다.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였다. 아이를 낳으면 당연하게 주어지는 모성애, 부성애는 없다. 사랑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만들어지지 못할, 부모의 자세였다.


"우리 가족 말이에요. 남의 눈에는 가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싸구려 패키지 같은 그런 가족이었다고요." (304페이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가정 안의 일. 가정 폭력이나 아동학대는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관심 두지 않으면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체면과 두려움, 그거 한 대 맞았다고 뭐 별일이냐는 시어머니의 시선 같은 것을 감당하기가 어렵기도 해서다. 무엇보다 흔히 말하는 남의 가정사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고민에 빠지는 일도 생긴다.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하고만 있어야 할까? 정지원이 싸구려 패키지 같은 가족이었다고 말하는 의미를 알 것 같다. 남들 눈에 그럴싸해 보이는 가족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있으면 화목해 보이는 가정.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보이는 가정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전히 어렵다. 아마도 작가는 이 상황을 마주하면서 겪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만드는 이 고통의 순간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감춰지고 어떻게 마무리되어가는지를. 어떻게 그 불안과 고통을 막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을 독자와 나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가면서 정지원이 구치소에 있는 김석일을 만난다. 줄곧 차분하게 있던 정지원이 김석일에게 한마디 하는데, 그때 눈치챘다. 이 사건의 진상을, 누가 웃게 되는지를. 반전이라면 반전인 그 부분에서 추리소설의 묘미를 느낀다. 정해연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동안 만나왔던 작품에 비하면 긴장감이나 재미는 좀 덜하다.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준 건 좋았지만, 푹 빠져 읽고 싶었던 기대를 생각하면 김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가독성은 좋아서 금방 읽힌다. 등장인물의 사연 하나하나 듣는 것도 괜찮았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형사 박상하의 다짐이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담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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