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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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루페니언. 나는 지금 처음 접한 이름이지만, 이미 2017년 인터넷을 통해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출간 계약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는 후문.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사람들의 시선에 머물자마자 이슈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이 책의 소문은 총 12편이 실린 이 단편집의 표제작 때문인 듯하다. 물론 다른 작품들 역시 특이하면서도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로 시선을 끌고 있다. 여성이 중심에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는 많은 불안한 감정을 꺼내놓기도 했다. 매체에서 접하는 여러 가지 내용이 겹쳐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종종 마주하는 어떤 일들, 감정을 그대로 소설에 옮겨놓은 것만 같다. 어쩌면 읽고 나면 왜 이렇게 비슷한가 싶어 절망에 빠질 수도 있지만, 같은 마음과 경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던 우리와 그 환경, 익숙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확인함으로써 이 시간 이후로는 달라져야 한다는 의지 같은 힘을 실어준다.

 

표제작 「캣퍼슨」의 주인공 마고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대학생이다.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매점에서 일한다. 어느 날 매점에 손님으로 온 로버트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곧 두 사람은 데이트하고 영화를 본다. 잠깐 술을 마시고, 마고는 로버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간다. 그와 함께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좀 더 진한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에 그와 함께 간 것이지만, 막상 옷을 벗고 있는 로버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식는다. 더는 그와 닿고 싶지 않다. 내키지 않은 그 마음을 로버트에게 설명하고 싶지만, 막상 설명도 잘되지 않을뿐더러 단순한 한 마디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 상황에서 긴 이야기로 다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마고는 자신의 지금 마음을 설명하고 그와의 관계를 그만두는 대신 그와의 섹스에 응한다. 그 후로 그와의 연락을 차단한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일이 잘못된 건 아니다. 상대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깊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것도 나쁜 게 아니다. 다만, 흔하게 말하는 그 ‘썸’ 이후 변화하는 감정에 대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좀 다른 것 같다. 마고가 로버트에게 보인 호감이 처음 마음 그대로 머물지 못했을 경우, 솔직하게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여성으로 살면서 그런 표현을 얼마나 자유롭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어렵다. 상대와 마음을 나누면서 시작하는 관계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깊은 관계가 더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을 때 우리가 하는 선택은 뭐든 가능하다. 싫다고 거절하거나, 다른 마음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금 더 만나보거나. 그런데 그 마음을 말하지 못해서 지금 상황을 잘 모면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무섭다. 아마도 그 후의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몰라서 생기는 두려움일 것이다. 상대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돌변해버리는 순간을 상상한다. 물론 그런 상상은 종종 현실에서 그대로 마주하기도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거절과 솔직함을 잘 드러낼 수 없었던 순간의 두려움은.

 

마고가 왜 로버트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지 하는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첫 번째로는 로버트가 마고의 태도를 오해한 상태라면 화를 낼 수 있다는 것. ‘네가 내 집까지 같이 온 것은 섹스를 하겠다는 거였잖아? 너도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인제 와서 그냥 가겠다고?’ 마고의 마음은 그저 단순하게 로버트와 섹스를 하는 것뿐이었을까? 아니었을 거다. 그와 '마음을 나누면서' 섹스를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막상 그의 모습을 보고 점점 사라지는 욕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자기 의사 표현을 포기한다. 두 번째로는 공포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마고가 그와의 섹스를 목적으로 그의 집을 방문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순간 로버트가 취할 행동의 공포를 미리 그려봤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든다. 사람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는 게 현실이기에, 친절하고 다정한 로버트가 마고의 변한 마음을 말하는 순간 폭력적으로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이런 마음이 단순히 추측으로 머문 게 아니라는 건 이 이야기의 결말에 드러난다. 마치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듯이, 마고에게 원하는 게 없다고 말하면서 욕을 하는 그의 마지막 말은 끔찍했다. 우연히 술집에서 로버트를 본 마고가 왜 그렇게 숨으려고 했는지, 친구들 사이에서 없는 사람처럼 가려져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상상으로만 머물렀으면 하는 일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데이트. 설레고 즐거워야 할 단어인데, 어느 순간 우리는 데이트의 좋은 의미보다는 두려움을 같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일이 생기는 게 비극이다.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던 작품이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이다.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공주는 많은 구혼자를 만난다. 하지만 그 많은 구혼자 중에서도 공주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번번이 구혼자를 거절할 때마다 공주는 비난받았다. 최후의 통첩을 받은 공주는 그다음에 만난 사람과 결혼한다. 그럭저럭 결혼생활을 유지하지만, 상대를 사랑할 수 없었던 공주는 그 마음에 병이 들어 그녀만이 볼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깨진 거울로 비치는 자기 얼굴 사랑하는 사람의 다리라고 믿는 넓적다리 뼈. 현실의 강압을 견디지 못한 선택으로 평생 자기 삶의 행복을 모르고 살아온 여성의 세월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준다. 마지막에 보이는 공주의 모습은 반전처럼 보인다. 가장 악하고 독한 사람이 되어 결국 자기 삶을 찾고야 말았으니. 왜 여성은 악녀라고 불려야만 한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걸까?

 

사람을 무는 여자가 주인공인 「무는 여자」는 얼핏 무서우면서도 시원시원하고, 「정어리」는 딸이 생일에 비는 소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어쩌면 말로 감정을 다 표현하지 못한 엄마의 갈증을 대신 풀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바라본 세상의 못된 모습을 만드는 인간들을 벌주는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읽으면서 은근히 통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세 사람의 묘한 관계를 그리는 「나쁜 아이」는 종속관계로 물들어가는 인간관계가 또 다른 모습으로 흐트러지는 과정을 그린다.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좀 어려운데, 뭔가 자기가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다른 이를 대하는 자세가 바뀌는 건 아닐까 하는, 세상의 나쁜 습성을 보는 것만 같았다

 

「룩 앳 유어 게임, 걸」은 표제작 「캣퍼슨」의 분위기를 이어가는 듯하다. 열두 살 소녀 제시카는 공원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제시카에게 희대의 범죄자 찰스 맨슨의 노래를 들려주고 밤에 자기를 만나러 공원으로 오라고 한다. 제시카는 거절하지만, 계속 그 남자의 제안을 생각한다. 그러다 끝내 그 남자에게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음 날, 이웃집의 제시카 또래의 소녀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만난 사람과 관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웃집의 소녀가 당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혹시 자신에게 닥치지 않았을까? 그날 공원에서 본 남자의 얼굴이 잊히지 않아서 제시카는 경찰에 제보하고 몽타주까지 확인한다. 나중에서야 범인이 잡힌다. 제시카가 공원에서 만난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공원에서 만난 남자와 이웃집 소녀의 납치 사건은 제시카의 인생에 평생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결혼을 하고 그때 그녀 나이인 자녀들까지 두었으며 캘리포니아를 떠나 멀리 옮겨 온 이후로도 제시카는 오랫동안 자정이 지나기 전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쌍둥이 딸들이 그녀의 침실 옆방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는 창가에 서서 점점이 빛나는 무섭고 광활한 밤을 바라보면서, 문득문득 찰리가 아직도 그곳 공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79페이지 「룩 앳 유어 게임, 걸」)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아주 작은 순간이기도 하다. 한 남자를 만났거나, 어떤 약속을 지키지 않았거나,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선택을 했을 때나... 이 책에 실린 단편 모두가 개성 있고 의미 있지만, 여성이 주인공으로 자기 뜻과는 다르게 약자의 삶이 되어버린 순간이 인상적이다. 데이트 상대에게 겁을 먹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우연히 만난 남자의 한 마디에 편안한 보행 한번 어려워졌으며,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악녀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불편하면서 기억에 남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강요되는 사회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게 절망스럽기도 하고, 그렇기에 조금씩 변해가는 세상이 반갑기도 하다.

 

 

제각각 자기 매력을 과시하는 12편의 이야기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현실에서 자주 보던 상황들부터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들, 인간 세계가 아닌 이야기들, 어떻게 가능할까 싶은 소재나 설정이 끝까지 그 분위기를 이끌어가고야 마는 작품들이다. 입소문을 타고 그 진가를 발휘한 표제작부터 길고 짧은 다른 작품들까지 한꺼번에 만나는 재미가 있다. 어떤 작품은 너무 잘 이해가 돼서 계속 공감했고 어떤 작품은 좀 난해해서 제대로 소화를 못하기도 했지만, 다음에 어떤 작품으로 만날지 기대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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