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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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박완서 선생님이 계시는 듯했다. 세상을 뜨고 나서도 그렇게 생생한, 계속 읽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좋은 가늠이 되었다. (229페이지, 「아라의 소설」 정세랑)

 

한 작가를 위해 29명의 작가가 모였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기리기 위한 그 대상이 박완서였기에 당연한 듯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읽을수록 더 놀랐던 건,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온 박완서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거다. 같이 출간된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먼저 읽어서일까. 앞선 세대의 속마음을 들추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요즘 우리 삶의 속마음을 마주한 것처럼, 너무도 닮은 이야기에 피식 웃음이 나더라는. 이 스물아홉 편의 이야기가 세월을 담아 다시 우리 앞에 섰을 때 어떤 분위기일지 시험이라도 하듯 평범하게 사는 우리 모습 그대로를 담았다.

 

특히 기억나는 작품이 이기호의 「다시 봄」이었는데, 술김에 아들을 위한 고가 장난감을 사서 들어갔다가 아내한테 혼나고 환불하러 가는 장면이었다. 아들의 눈길을 보면 애정이 묻어는 그 장난감을 환불할 수가 없다. 하지만 형편이라는 건 가끔 아들의 그런 눈길을 무시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조카 아이가 생각났다. 미술을 배우고 싶다는 녀석에게 여동생은 그럼 다른 학원을 하나 끊어야 한다고 하면서 선택하라고 했다. 녀석은 수학 학원을 그만 다니겠다고 하면서 미술 학원으로 향했다. 그 아이의 미래가 미술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를 선택하면서 하나를 버려야 할 때 고민하게 되는 일을 일찍 배우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시간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우리의 모든 바람을 다 채워주지 못하는 게 된다. 레고 박스 위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모른 척해야 하는 아빠의 마음에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 눈물은 포근해지는 봄밤의 바람에 금방 마를 것 같다. 그들 가족에게 언제나 겨울만 있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똑뚝, 눈물방울이 레고 박스 위로 떨어졌다. 아들은 레고박스 위에 떨어진 눈물방울을 계속 훔쳐내며, 그러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그러면서도 또 한편, 어쩐지 이 풍경 자체가 낯익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 또한 그렇게 울었던 봄밤이 있었다. (183페이지, 「다시 봄」 이기호)

 

현실을 그대로 담은 이야기들에 웃다 보면, 참 씁쓸해지기도 한다. 조남주의 「어떤 전형」은 대학 입시의 뒷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이의 대학 입학 문제는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엄마가 써주는 자기소개서, 잠깐 몸담았던 종교라는 근거로 종교 전형을 찾아다니는 딸의 간절한 발버둥에 웃음이 나더라. 대학 입시와 동떨어진 생활이다 보니 잘 모르겠는데, 실제로 종교 전형이라는 게 있나? 이야기 속 모녀는 그 종교 전형에 대학 입시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정도로 필사적이다. 한때 세례를 받았던 목사를 찾아다니고, 엄마가 다니는 절의 구원을 바라야 하는 몸짓이라니. 대한민국에서 대학에 가려는 일이 이렇게 코미디 같은 준비를 거쳐야 하는 게 되어버린 건지 하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휴전을 청하고 그도 응한다. 오페라적이고 바로크적인 오전에 비하면 너무 간단한 화해. 싸우는 데는 만 가지 언어가 동원되지만 화해하는 데는 '미안해', '나도'라는 다섯 글자만 사용될 뿐이다. 그들은 피곤하다. 싸움의 긴장감을 유지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조용하고 건조한 오후와 밤을 원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물러서는' 외교 감각이 작동하는 것이다. (51페이지, 「등신, 안심」 김성중)

 

민주는 스무 살 이후 자신이 살았던 삶이란 꿈꾸어왔던 것들을 조금씩 하향 조절하는 날들의 연속인 것처럼 느꼈다. 그러니까 상하이의 전도유망한 글로벌 기업에 다니는 커리어우먼에서, 국내 대기업의 정규직 사원으로, 그러다 결국엔 사립대학의 비정규직 행정 직원으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을 떼어 길가에 버리며 걸었다는 동화 속의 남매처럼, 민주는 자신의 꿈의 디테일들을 하나씩 버리며 걸어왔지만, 자신이 삶의 어디쯤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끝으로 향하는지는 더욱 알지 못했다. (115~116페이지, 「언제나 해피엔딩」 백수린)

 

백수린의 「언제나 해피엔딩」은 감당해야 하는 현실과 바라는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의 모습도 담아낸다. 마음은 저기 멀리 바라는 이상향에 머물러 있고 눈앞의 현실은 지켜내야 하고, 그러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이 또 멀어질까 봐 불안해하는 상황. 영화가 끝나고 엔딩이 어떻듯 다시 영화가 시작한다는 말에 어느 순간 안도가 되기도 하는 위로가 힘이 되어 다시 미래를 바라보는 오늘을 살아가는 일. 우리 살아가는 순간 대부분은 이런 위로 한마디 때문에 힘이 되는 것 같다. 괜찮다고 그대로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런 시기를 이렇게 지나왔어'라는, 흘러가는 듯한 한마디에 우리의 오늘도 그렇게 소박한 힘을 얻고 흘러가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위안이 되곤 했다. 김성중의 「등신, 안심」처럼 돈가스 일곱 장은 부부싸움의 화해 수단이 되기도 하는 일상에 미소가 떠오르는, 우리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싶은 공감의 상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살아가는 게 그렇지. 그렇게 또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면서 말이지. 당신이 살아왔던 그 순간처럼 우리 인생의 순간들도 그렇게 흘러가겠지...

 

사람들이 왜 '펑예' 글을 쓰는지 알게 됐다. 모르는 300만 명을 대상으로 상황 요약을 한 후 조언을 구하는 심리를. 원하는 답을 그 300만 명 중의 누군가 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154페이지, 「첫눈 마중」 윤고은)

 

그런가 하면 상상력으로 이뤄낸 소설도 있고, 박완서 작가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일화나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한 작가와의 인연이 그냥 한 번으로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게 정겹다. 그런 대상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작가의 말 한마디에 공감하면서 세상을 봤던 여러 작가의 사색이 읽는 내내 그려진다.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어떤 글이든 문학 안에서 피어오를 수 있다며 편견을 지우게 하는 일들이 작가가 후배들에게 전한 메시지 같기도 하다. 동료 작가이기도 하지만, 먼저 많은 것을 열어준 존재이기도 한 고 박완서 작가의 흔적을 29명의 작가에게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살아가는 일의 맛이기도 하고, 문학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기도 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들추면서, 인간과 삶의 의미를 되새김하는 이야기들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게 된다. 마침표 안에 내장한 물음표를 찾아가게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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