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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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살면서도 시골의 삶을 잘 모른다. 아마도 그건, 우리 집의 직접적인 생계 수단이 농사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집주변으로 몇 발자국만 가면 누구네 밭, 누구네 논, 누구네 과실수 등.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흙을 밟고 돌보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도 내가 직접 그 흙을 손에 묻히지 않고 살아왔기에, 그저 노인네들의 습관적인 넓은 오지랖이 부담스럽다고 여기는 정도였다. 아마도, 앞으로도 여기에 계속 살게 되더라도 나는 영원히 ‘시골의 삶’이라는 것을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마음이 남았다. 이 소설, 김종광의 『놀러 가자고요』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동안 느꼈던 게 겉으로만 보았던 어떤 어르신의 표정에서 다 읽지 못한 마음이었다면, 누군가의 푸념 같은 진심을 듣고 나니 조금 더 알게 되는 마음이 여기 있었다. 아마도 많은 부모의 생활이 그러하리라, 시골에서 사는 많은 이들의 진짜 속내였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주변의 작은 모습에서 유추하는 분위기 정도로만 봤던 것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피부에 와 닿는 듯하다. 모두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단편은 하나의 단편소설이자 서로 연결된 장편소설이 된다. 작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 연작소설 느낌이 난다. 구석구석 시골의 삶이 묻어난다. 범골의 역사로 마을의 시간을 유추할 수 있는 「『범골사』해설」, 「범골 달인 열전」은 구수함이 풍기는 시골의 모습이었다. 어느 시간에 누가 어떤 행적으로 그 마을의 이름을 오르게 했는지, 글로 전해지는 범골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산후조리」는 농촌의 생활 그대로를 전하는 강한 메시지처럼 들린다. 자녀의 산후조리를 끝으로 더는 산후조리를 할 일이 없을 거로 여겼던 어머니는, 송아지를 출산한 소의 산후조리를 맡게 된다. 장기까지 쏟아내며 자식을 내놓았던 소의 모습에서 인간의 탄생이 동시에 보인다. 어머니는 마치 딸을 돌보듯 소의 산후조리를 하는데, 그 모습이 애틋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밤을 새워가며, 젖병에 우유를 물려가며 돌보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막상 어머니들이 우리를 그렇게 키웠다고 생각하니, 세상 모든 일에 그런 최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뜬금없는 다짐까지 생기려고 한다. 농작물을 키워내는 일, 가축을 돌보는 일,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 모든 일이 생계와 연결되어 있다면 더더욱.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들어왔던, 누군가의 입에서 우스갯소리로 들었던 그 말이 생각났다. ‘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지 뭐.’ 농촌의 삶을 만만하게 봐서 나온 말일 테다. 지금은 농촌의 모습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모든 것을 바쳐 농사를 짓고,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남은 것들을 다 쏟아붓고 남은 것은 늙은 몸과 농사일이 버거운 현실이었다. 소문처럼 누구네 자식 일이 입에 오르내리고, 마을회관에서나 어울려 점심 한 끼를 때우는 일, 명절날 누구네 집 마당에 늘어선 승용차들로 그 집 자식들의 생활 정도를 점치고... 정작 그곳에 남아 생을 이어가는 노인들의 마음을 듣는 이들은 없다. 그저 같은 처지의 노인들이 서로의 입장을 나누며, 같은 삶을 이어가려 애쓰는 정도다. 4백만 원이라는 욕조기를 사드릴 수 없는 아들의 마음을 그대로 읊은 「만병통치 욕조기」로 그 모습을 확인한다. 다리가 아픈 어머니에게 찾아온 만병통치 욕조기를 파는 외판원의 온갖 꼬임에도 넘어가지 않는 며느리의 태도는, 시어머니의 아픈 다리보다 자기가 새로이 일군 가정의 안위가 먼저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아들은 손에 카드를 쥐고 있으면서도 선뜻 내놓지 못한다. 아내가 또박또박 쏟아내는 불매의 이유를 반박할 수 없어서다. 바쁜 농사철이 지나고 잠시 쉬어가는 시간에 시골 마을에 찾아드는, 흔히 행사장이라고 부르며 호객을 하는 집단에 찾아간 노인들이 두 손에 화장지며 달걀이며 바리바리 싸 들고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출입문을 통해 슬쩍 엿봤는데, 어르신들이 신나게 한 판 놀고 배를 채울 것들을 안고 가는 듯한 표정은 웃음꽃이 만발했다. ‘어르신, 어르신’,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며 안마를 해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제품 홍보를 한다. 흡사 문화센터의 노래교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그들이 결국 마지막에 내놓는 건 고가의 제품들이었다. 처음에는 몇천 원짜리 생필품, 시간이 흐를수록 고가의 제품을 권한다. 무릎 통증에 좋다는 약, 가스 마시지 않아도 된다며 인덕션을, 누워있으면 허리가 저절로 찜질이 된다는 전기 매트,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준다는 약탕기. 필요가 없어서 돈이 없어서 안 산다고 하면 자식들이 그거 하나 사주지 못하냐고 자존심을 건드린다. 「만병통치 욕조기」의 외판원은 현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았다.

 

구수한 입담을 쏟아내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욕을 퍼부으며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는 가발댁, 손만 댔다 하면 완벽하게 해내는 부업의 일인자 마늘댁, 돈벌이도 안 되는 노인회장으로 선출되어 아내를 더 바쁘게 만드는 김사또, 놀러 가자면서 2박 3일 일일이 전화를 하면서 남편의 일을 덜어주는 아내 오지랖, 진실을 왜곡하며 부풀리는 거짓말 제조기 소설가 소판돈, 견인차를 부를 필요도 없이 마을의 도랑에 빠지는 모든 차를 꺼내주는 김견인 등.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각각의 개성이 넘쳐흐른다. 어디 개성뿐이랴. 그들이 한데 모여 만드는 범골은 눈물 나게 웃기고, 웃음 나게 슬프다. 그곳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상에, 거를 것 없는 푸짐한 말들, 정말 들어야 할 말을 듣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게 하는 노인들의 ‘썰’들이 웃기다. 일할 젊은이가 없고, 5대의 거주민들을 청년이라 부르고, 농촌 노총각의 인생이 의미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며 음식을 준비하고, 좀 괜찮아졌나 싶으며 어김없이 터져버리는 구제역이 모든 것을 잃게 하는 삶. 어릴 적 경험하고 피부로 접했던 농촌의 푸근함은, 현실의 팍팍함과 힘듦으로 푸근함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어떡하나. 그들 삶의 터전에서 그 삶을 이뤄주는 것들을 보듬어 안으면서 또 살아가야 할 것을...

 

 

 

농사철에 일정 잡았다고 걱정하셨는데요, 노인분들이 농사철 아니면 움직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잖아요. 추우면 추워서 안 되고 더우면 더워서 안 되고 먼지 많아도 안 되고 바람 많이 불어도 안 되고 비 맞아도 안 되고 딱 이맘때밖에 없어요. 괜히 옛날부터 사오월에 놀러 가는 게 아니라고요. 석가모니 부처님도 하필이면 사월 초파일에 딱 맞춰 태어나신 것도 다 까닭이 있다고요. 농사철 중에도 논갈이 끝나고 못자리하기 전에 좀 한가하잖아요. 그래서 딱 그때로 정한 거라고요. 그것도 회장님 혼자 정한 게 아니고 회의에서 여러분이 정한 거라고요. (113페이지)

 

표제작 「놀러 가자고요」는 이곳의 삶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일 년에 한번 놀러 가자고 하는 마을 사람들의 약속. 오지랖 여사는 놀러 간다는 사람의 확답을 듣기 위해 마을 주민 모두에게 전화를 건다. 저마다의 사정과 핑계로 인원을 추리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자식이 온다고 해서, 다리가 아파서, 그날은 국민안전의 날이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확답을 안 한다. 대신 전화를 건 오지랖 여사를 붙잡고 시시콜콜한 자기들의 이야기를 한다. 손녀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는, 치매 부모를 모시기가 힘이 든다는, 무릎 수술을 할까 말까 고민된다는, 생일이라고 자식들이 와서 생일 밥 먹자는 이야기 같은.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좀 들어주었으면,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싶은데 대상이 없었다는 듯이, 지금 전화를 건 당신이 아니면 누구에게 말할까 싶은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 마음은 비단 시골 생활이어서 생기는 게 아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따로 사회생활을 꾸준히 이어가는 게 아닌 이상, 노인의 삶은 말이 줄어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아니, 말할 대상이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누구 하나 내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덜 외로운 노년의 인생을 지낼 것만 같다는 듯이.

 

작가가 풀어내는 『놀러 가자고요』 속 범골의 이야기는 범골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00 마을에서 지내는 우리 모두의, 우리 부모의 이야기이자 삶이었다. 혹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눈에 담았던 풍경들을 확인하는 듯해서 소설 속 이야기가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농사와 상관없는 삶을 이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9편의 단편이 전하는 것은 농사를 생계로 하는 시골의 삶뿐만이 아니라, 노인의 삶도 같이 비추고 있었다. 우리네 부모의 삶이자, 어쩌면 우리가 곧 만날 시간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 좋게 발전하고 변한다고 해도, 노인으로 가는 인생의 이치는 바뀔 수 없으니까 말이다.

 

웃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고이는 웃픈 이야기다. 익살스럽게 풀어낸 이야기마저 마지막에는 씁쓸한 속내를 들킨 기분으로 읽게 된다. 몇 문장만 읽어도, 나른한 오후의 풍경처럼 여겼던 농촌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확인하게 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또 살아갈 그곳 사람들의 풍경이 가슴에 깊게 남는다. 작가가 풍성한 입담으로 쏟아낸 이야기가 인생의 고충을 그대로 담아내서일 테다. 아직은 내가 다 겪지 못한 그 삶의 고뇌 같은 것을 미리 맛본 기분이다. 어른의 삶은 이런 것인가 싶어 서글퍼지다가도, 아직 남아 있는 어린애 같은 마음에 또 웃음이 나는 일의 반복. 그러다 보니 인생이 뭐 별건가 싶기도 하고, 걱정 앞에서는 한숨도 쉬고, 즐거운 일에는 실컷 웃기도 하는, 이런저런 눈치나 사정 같은 거 잠시 접어두고 잠시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 가보자는 게 뭐 어때서.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서른 명쯤은 채워야 버스 움직이는 게 좀 신날 텐데, 오지랖 여사가 돌린 전화가 의미 있을 텐데, 범골 노인들 미적미적 뒤로 빼는 분들 많던데 확답을 줬는지 모르겠다. ‘그날 봐서’가 아니라, 그날은 그냥 다 같이 놀러 가는 날로 도장 쾅~! 찍었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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