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진아 옮김 / ㈜소미미디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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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애틋한 노래. 신의 구원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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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진아 옮김 / ㈜소미미디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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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습니다. 그 상실의 모성은 어떻게든 치유받고 보상받아야 합니다. 어머니의 그런 상처가 특별한 누군가의 접근, 특이한 요법, 나아가 비정상적인 신앙에 의해 어루만져진다면, 이 역시도 권장되고 양해되고 격려받아야 하는 걸까요? 이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꼭 상처받은 어머니뿐 아니라, 어떤 개인에게도 종교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 부양하기 위해, 최소한의 정신적 건강은 스스로 유지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요?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단노 교코는 용모가 아름답고 마음씀도 착한 여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 가나타와의 부당한 이별, 어느 정신이상자의 만행에 의한 희생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어서, 잘못된 믿음에 빠져들어 환각 상태에서 엉뜽한 자를 성장한 아들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편 단노 미치오는 어떻게든 아내를 예전의 그 착하고 정상적이었던 여인으로 돌려놓으려 하지만 그 노력들은 모두 무위로 돌아갑니다. 아내의 믿음은 그만큼 완강했으며, "영원"을 숭배하는 교코는 남편의 성의와 노력을 왜곡하여 3자적 입장에서 냉소하기까지 합니다. 독자를 섬뜩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상처를 입은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장에서 어쩌면 조금만 더 성의를 보였으면 범죄 희생을 막았을지도 몰랐을 텐데... 너무 나간 생각이지만 교코 입장에서라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태도도 아닙니다. 미치오가 용기가 없어 범인을 현장에서 제압 못한 건 아니고 불가항력이었지만 이 죄책감은 부부를 도무지 떠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미치오는 사형 폐지 반대 모임에서 만난 마코토와 바람까지 피웁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분노했던 독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미노리카와 류토는 아마도 약사 자격을 갖춘 임상심리사이겠습니다. 그의 진단은 타당하고, 사교 집단에서 하필이면 좌절한 보컬로서 상처가 있던 교코의 약한 부위를 절묘하게 건드려 세뇌 상태에 빠지게 했다며 원인과 과정을 정확히 짚습니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자못 통쾌한 맛을 느꼈겠지만, 교코가 다시 상처의 고치 속으로 파고들어감에 따라 이내 좌절하게 되죠. 이제 남편이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가온은 영원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난 엄마를 믿어"라고 대답합니다. 친모와 달리 외모도 수려하고 노래도 잘하는, 나와는 달리 뭔가 우월한 존재 같은 교코에게 의존하고 매달리려는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나는 답변입니다. p153에 보면 꽃잎의 수가 3, 5, 8, 13... 으로 전개되는 피보나치 수열이 나오는데, 우연인지 어떤 숨은 섭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주식의 상승 파동에서도 이 수열이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사이비종교에서 슬쩍 원용하지 못할 까닭도 없을 듯합니다.

p92에서 미노리카와가 주장하는 바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성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낫게 만드는 데 큰 힘을 쓰지 못하니 이런 사이비가 그 틈을 타 발호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읽히며,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약물의 치료를 통해 마비된 뇌신경을 풀어 준다는 특유의 방식도 타당합니다. 에비사와 사토시 변호사가 사린 살포사건 이후 일본의 사교가 어떤 형식으로 변형되어 사람들 사이에 침투했는지 설명하는 대목(p74)도 그럴싸합니다.

p247을 보면 신이 진화의 순서를 통해 모든 생물을 창조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집안에서 대대로 운영해 온 조류원을 각별히 아끼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낙원을 찾아온 교코. 슌타로가 가온에게 "공룡이 진화하여 새가 되었대"라고 들려 주는 대목에서는 묘한 기시감도 느껴집니다. 제목은 아마도 단테의 Divine Comedy를 염두에 둔 어구겠지만 신성한 곡조(holy melody)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재물을 사취하고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사회악인 사이비 종교의 속삭임도, 절망에 빠진 영혼에게는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독자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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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수호지
시내암 지음, 이상인 엮음, 최정주 그림 / 평단(평단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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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기서 중 하나로 꼽히는 수호지의 한 권짜리 에디션입니다. 저도 그렇고 제 또래들은 시내암 원저 <수호전(水滸傳)>을 한국의 난다긴다 하는 문필가들이 옮긴, 길디긴 장편을 밤새워 읽고 성장한 세대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는 재미있게 읽었으나, 지금 보면 잔혹한 서술이나 묘사가 간혹 있어, 아무래도 이걸 어린 세대에게 읽히려면 다소의 윤색이나 설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요즘 청소년들은 공부해야 할 내용이 많은데, 그 긴 장편을 읽어낼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읽고 고전의 압축된 향기, 가치를 맛볼 수 있다면 좋겠지요.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복마전이라든가 108호걸 등 수호지를 전혀 안 읽어 본 사람들도 익숙한 말들이 많은데 이게 다 수호전이라는 고전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면 놀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p18을 보면드디어 구문룡 사진(史進)이 왕진(王進)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왕진을 보면 노모에게 지극히 효도하는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데, 이처럼 호걸들은 전통적인 미덕에도 매우 충실합니다.

p176을 보면 급시우송공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자관용어구 같은 건 아니고, 송강(宋江)의 별명이고 자(字)입니다. 꼭 필요할 때를 만나서 마침 오는 비가 급시우(及時雨)입니다. 이 기나긴 수호전에서 사실상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 송강인데,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송강은 키도 작고 모습이 보잘것없습니다(모 연예인 이미지와는 정반대).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신망, 존경 받는 걸로는 최고입니다. 남자들에게 절로, 저 형님을 위해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인물이며 우리 독자들도 절로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듭니다. 자가 공명인데 9백 년 전 제갈량과 한자까지 같고, 자로 흔히 쓰이는 이름이므로 딱히 어떤 의미는 없습니다.

대종(戴宗)은 그 별명이 신행태보(神行太保)인데, 편지를 들고 먼 거리를 떠납니다. 주점에서 지쳐 잠든 통에 하필이면 양산박의 주귀가 그를 보게 됩니다(p264). 자칫하면 오해를 사서 큰일날 뻔했으나 다행히도 양산박에서 자초지종을 알고 대종과 함께 좋은 계책을 논의합니다. 어느 조직에건 머리 좋은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며 오용이 내어놓은 작전이 가장 낫긴 했습니다. 그러나 황문병도 보통이 넘는 인물이라서 조작된 문서를 보고 대뜸 수상한 기색을 느끼고 정황을 참작하여 기어이 양산박 쪽의 책략을 꿰뚫어봅니다. 이제 송강과 대종 모두 죽게 생겼습니다.

이 <수호전>에는 개성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여 남탕이나 마탄가지인 <삼국연의>와는 또다른 재미를 줍니다. p368을 보면 호가장 쪽에서 호성(扈成)이 송강을 찾아와 누이 일장청(一丈靑) 호삼랑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합니다. 용모도 예쁜데다 무술도 출중하여 더 관심이 생기는데 마치 KBS 드라마 <태조왕건>에 나오는 견훤의 이복여동생 대주도금 캐릭터와 비슷합니다. 대주도금은 정사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실존인물이지만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영국영화 <엑스칼리버(1981)>을 보면 기사 어리엔스가 농민 출신 사생아 아서(Arthur)한테 그 권위를 인정 못 하겠다며 끝까지 반항하다가, 아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관대한 태도를 보이자 감격하여 바로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p404를 보면 항충(項充), 이곤(李袞)이 송강 앞에 잡혀오는데 꼼짝없이 죽은 줄로 알았던 양인은 뜻밖에 송강이 너그럽게 대하자 엎드려 절을 하며 방탕산의 번서 무리를 모두 귀순시키기까지 합니다. 수호지는 본래 이런 맛에 읽는 것입니다. 물론 송강도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건 아니며 항충 무리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도둑떼가 되었음을 꿰뚫어보고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인간 못된 것한테 잘해줘봐야 나중에 뒤통수맞기나 좋죠.

그림도 많고 평이한 문장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러잖아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술술 잘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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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노동자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6
클레르 갈루아 지음, 오명숙 옮김 / 열림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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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신 클레르 갈루아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1989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한국에도 열림원에서 1999년에 번역되었었습니다. 생전에 저희 모친도 꽤 좋아하셨던 작가라서 이렇게 리커버판으로 보니 마음이 새롭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넌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로 위장한 범죄자야." 빅토르가 크리스틴에게 하는 말(p74)입니다. 크리스틴이 관리하는 어장(ㅋ) 속의 물고기 중 하나가 아쉴인데 빅토르는 아쉴이 크리스탄이 펴 놓은 사랑, 아주 이기적이고 파괴적이며 침투적인 사랑의 덫에 걸려들어 죽기 직전이라며, 비올라 다 감바의 현이 아쉴의 목을 조르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목에 줄이 걸려 이제 매듭만 당기면 사람 목숨이 끝날 판인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걸 모릅니다. 중세에는 지금처럼 팔에 받혀 놓고 연주하는 비올라는 다 브라치오, 다리로 받치는 건 다 감바라고 해서 구별했는데, 다 감바 연주를 보면 마치 뒤에서 악기(여자)를 끌어안는 듯한 자세라서 저런 비유가 나온 듯합니다.

p109를 보면 목줄을 한 개를 끌고 다니는 노인 이야가가 나옵니다. "지팡이를 들었으니, 모든 계산은 끝났다!" 호탕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물건의 거래나 사람 사이의 소통에 있어서 뭔가 내가 손해를 본 듯한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기보다,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따져 보면 상대에게도 일정 배려를 해야 하기에 그 선에서 물러나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이런 이치가 전혀 통하지를 않고 빽빽 소리만 질러대는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있어서 거의 공포감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빅토르는 원래도 그런 타입이었는지 아니면 몸이 아프고부터 어떤 특별한 통찰이 생겼는지, 냉소적이면서도 상대방의 폐부를 찌르는 말을 곧잘 내뱉곤 합니다. 아직도 아첨꾼, 사면발니, 위선자와 동침하고 있냐는 질문, 크리스틴을 비롯해서 저 비방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아무도 못하나 봅니다. 이 질문이 가능한 건 빅토르의 성적 성향이 헤테로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한데, "상대방의 반목을 조장하는 건 모욕과 혜택"이라는 크리스틴의 상황 요약도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한평생을 속고만 살아온 여자(p143). 세상이라는 게 원래 남자한테만 유리하게 판이 짜인 곳이라서 이 할머니뿐 아니라 누구라도 저런 규정에서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크리스틴은 저 사람한테서 패배주의나 비굴함이 아니라 일종의 오만함을 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세상에 사기 친 게 없기 때문에, 누굴 향해서도 눈 똑바로 쳐들고 나 이런 사람이었다고 일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할머니가 바라보는 빅토르는 품행방정(p167)의 대명사이지만 과연 그럴지. 빅토르의 본업은 문학 평론인데 할머니는 그에게 호된 평이 나온 신간은 특히 구입하지 않습니다. 평을 곧이곧대로 믿어서가 아니라(그럴 지적 능력이 없습니다), 빅토르에게 당한(?) 책들과 저자한테 미안해서입니다.

빅토르는 현재 병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몸이 아프고, 세상과 화해를 못하는 사람이라서 정신적으로도 피곤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게 숙명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겠는데, 저는 이 책의 원제 L'homme de peine가 바로 빅토르의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크리스틴은 장례차 운전수(p199)가 그럴싸하게 생겼다고 여겼는지(본래 남자를 좀 많이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구태여 말을 건네고 이 과정에서 빅토르를 소재로 삼습니다. 난감한 게, 막상 얘기를 하려고 보니 빅토르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살을 붙이고 붙여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이게 소설가의 숙명입니다. 언젠가 그녀가 되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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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 암실 ANGST
박민정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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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것도 누구한테 배워야 하는가. 대체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많은 감정을 갖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표촐합니다. 지나치게 내 감정을 강하게 표현하면 주위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하는데, 그런 제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런 행동이 윤리적이지 못하고 미성숙하며 남한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고서도 매번 공공장소에서조차 큰 소리를 지르고 이렇게 해야만 본인이 무대 위 주인공이 되는 양 행복해지는 인생이라면 정말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로사는 주인공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기층민중이라든가 편모슬하라든가... 저는 기층민중이라는 단어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물론 이 개념이 동반 환기하는 그 이론체계가 설파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아무 관계 없는 소설이므로 오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어려서부터 되바라졌다 해도 아직 앤데 기층민중이 뭔지 얘가 알아봐야 뭘 얼마나 알겠으며, 읽어 보니 쥐뿔도 모르는 게 역시 맞더군요(ㅋㅋ). 그런데 얘, 즉 로사가 하려는 말 중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아저씨들 생각보다 별거아냐."

보통의 남자애들은 원래 아주 어렸을때부터 아저씨들이 찌질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모르는 멍청이들도 물론 많죠). 진짜 무서운 건 돈이고 권력이며 이걸 가진 아저씨는 별로 많지도 않으며, 혹 아저씨 아니라 아줌마라도 이걸 가진 자가 무섭다는 걸 알죠. 나아가 돈이라는 게 원래 있다가도 없어진다는 사실까지 알면 세상에 그리 무서워할 건 많지 않다는 인식에도 도달합니다(조심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로사는 제법 세상 물정에 밝은 것처럼 말은 해도, 출발점이 저렇게 아저씨들에 대한 공포였으니 설령 그후에 인식이 발전했다 해도 고작 이 정도인 것입니다. 아마 어른이 되어도 멀리 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로사는 무서운 어떤 진실을 날카롭게 캐치합니다. 한때 사장님, 대표님이었던 아저씨들이 외환위기 후에 저렇게 거지가 되어 서울역 앞에 주저앉았다는 게 중요하다고 짚은 것입니다. 뭐 이 역시, 아저씨들한테 막연한 공포감을 갖다가 제딴에는 장족의 발전, 각성을 이룬 것이지만 말입니다. 이것도 뭐 특별한 깨달음은 아니고, 아 저렇게 거지가 되었으니 별거 아니지 않느냐 이 정도죠. 진짜 똑똑한 애라면 애초에 길바닥에 나자빠지기 전부터 별게 아니라는 걸 알아봤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작고 떼를 지어다니는 스캐빈저가 평소에는 무서울 게 없어도, 일단 상대가 무력화되었다는 점만 눈치채면 무섭게 달려드는 것처럼, 거지가 된 대표님들은 이제 이런 불량청소년을 정말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ㅋㅋ

영화 <브레이브하트>를 보면 로버트 더 브루스가 자신의 부친에게 배신당하고 격노하면서 대체 왜 윌리엄 월러스를 적 진영인 잉글랜드에게 팔아넘겼냐고 항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부친은 "니가 이제서야 분노할 줄을 아는구나."라며 대견하다는 듯 아들을 바라봅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귀하게 자란 인생은 아마 특정 감정이 미발달하기도 하나 봅니다. 농담이고, 어떤 격렬한 원한 같은 게 있어야 마오쩌둥처럼 위기에서 근성으로 밀어붙일 줄도 안다는 소리죠. 제가 좀 특이하게 본 게, 이미 주인공은 결손가정 비슷한 환경에서 고생깨나 했는데도(물론 애를 연예인으로 키우기 위한 엄마의 일차 보호막이 있긴 했지만), 로사한테서 처음으로 특정 감정을 배워가는 대목이었습니다. 로사한테 그 감정은 매우 그 깊이가 깊은 것인데, 환경의 영향보다는 타고난 어떤 게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제 나이 사십을 바라다보는 주인공은 물론 그 모친로부터, 너무나도 출제지향적이고 물질을 밝혔던 그분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겠지만, 또 그 모친이 너무나갔던 부분이 굉장히 크긴 했습니다만, 나이가 들어서까지 재이한테 저렇게나 감정을 이입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재이가 미처 모르는 그 자신의 일부까지 주인공은 샅샅이 스캔하면서 인생의 등불로 삼습니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빠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없었고, 엄마도 자신을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아 큰 배신감을 새삼 느꼈던 주인공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거기까지 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안다고!"(p158)는 좀 그렇죠.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지만 자신에게 너무도 많은 걸 가르쳐 준 로사한테 주인공은 많은 것을 부러워합니다. 말이 술술 나오는 전달력도 그 중 하나인데, 교수 임용을 앞두고 주인공이 어려움을 겪는 대목도 여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깊은 상처는 단순 정보 전달 이슈에서도 당사자의 발목을 잡는 것인지. 로사가 특유의 그 유창한 달변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공은 고전< 서스페리아>의 몇 장면과 현실을 혼동합니다. 어디까지가 가상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모를 만큼 우리는 타인들과 지나치게 밀접하게 엮이며 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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