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식당 4 : 구미호 카페 (특별판)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박현숙 지음 / 특별한서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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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초에 이 4편이 출간되었고 저도 당시에 리뷰를 올렸더랬습니다. 당시에도 재미있게 읽었고 제가 열정적으로 썼던 후기가 아직도 제 블로그에 있습니다. 이번에 이 특별판으로 다시 읽어 보니 지난 후기에다 그렇게 많은 말을 했었건만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았다는 점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워낙 재미있게 만들어져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북뉴스 카페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오성우에게뿐 아니라 이 재후라는 애는 누구한테도 재수가 없습니다. 이런 애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성우가 재후를 미워하는 자신에 대해 괜히 죄의식을 갖지 않기를 바랐는데, 여튼 성우는 애가 착하다 보니 누가 혹 충고를 해 줘도 자신의 착한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려 애쓸 듯합니다. 착한 사람은 자신이 착해지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애저녁에 인간 되기를 포기한 악질 사기꾼은 "나는 착하다"라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니 이만한 아이러니가 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뻔뻔스러운 녀석은 성우더러 되레 "있을때 잘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예전에 아주 유명했던 대중가요 가사에 나온다(p30)면서 말입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노래가 없어 뭘 가리키려는 건지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오승근이라는 분의 트롯 곡 하나가 나왔습니다(개인적으로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정말 소중한 사람은 곁에 있을 땐 당연하지 싶어도 막상 자리가 비면 아쉬움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재후는 누구한테도 그런 느낌을 주지 못할 테고, 없어지기라도 하면 아주 앓던 이가 빠진 양 시원할 것 같습니다. 

3권에 저승의 작은 질서를 주재하는 만호라는 캐릭터가 나왔었는데 이 4권에는 카페의 이름없는 직원의 말로, 자신은 애송이라서 아직 이름에 "호"를 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규칙이 있었는데, 다만 사람을 가리킬 때 함부로 턱짓을 하면 무례하게 보일 수 있으니 성우가 그 점만은 좀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애가 착한 게 티가 나서 남들이 그걸 보고 괜한 오해는 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직원의 이름은 "꼬리"였는데 여튼 직급이 좀 낮아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허튼 게 없었습니다. p86에서도 그게 확인되는데 입금이 된다고 하니 과연 되었기도 했고 말입니다. p128에서도 "손님은 이미 두 번 기회를 다 쓰셨습니다!"라고 따끔하게 일러 줍니다. 

강신도 외에 다른 채무자들 이름이 싹 사라진 건, 심호가 설명해 준 규칙이 과연 예외없이, 무섭도록 척척 작동한다는 걸 다시 증명합니다. 2년 전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독자 마음이 가장 설레는 대목은, 뜻하지 않던 거액이 내 손에 들어올 수 있다는 불건전한 사행심 유발 장면이 아니고, 성우가 짝사랑하던 지레가 전과 달리 성우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p89(이 특별판 기준)입니다. 전 사실 지레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뭔가 좀 생각이 없는 에 같았습니다만 기왕 이렇게 된 것 둘이 잘됐으면 하는 게 모든 독자가 같은 생각이겠습니다. 

재후는 성우에게 이종사촌이며 따라서 성우 엄마한테 재후는 조카입니다. 엄마는 조카한테 사기나 치는(이 특별판 기준 p100. 2년 전 초판에서는 p101이었나 봅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고 다만 형편이 빠듯하다 보니 간혹 이런 얌체짓을 합니다. 영조는 성우한테 아주 기분나쁜 의심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는데 이런 애들이 자존감이 강한 타입입니다. 사실 성우는 괜히 영조를 평소에 무시하는 습관이 있던데 그것도 영조가 모르지 않겠건만 의젓하게 대처해서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p112에서 쏴붙이는 정도는, 제가 보기엔 영조가 진짜 많이 참는 겁니다. 순대(p147, p177)가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데 말이죠. 잘못한 건 깔끔하게 사과하고 넘어가야 합니다(p129, p191). 

오성우라는 이름은 흔치 않은 편 아닐까요? 저는 2년 전에도 왜 영어선생 강신도가 전혀 눈치를 못 챌까(p176)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더랬습니다. 하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설마 했겠지만 말입니다. 여튼, 누구에게나 간절히 원하는 바는 있고, 그걸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만 해 내어도 해 내어야 하는 게 구미호 카페와 이 세상이 우리들에게 부과한 규칙입니다. 재후, 영조... 알고 보면 각자 나름대로 다 풀어야 할 숙제가 있고 짊어져야 할 부담이나 치유해야 할 상처가 있었죠. 여튼 머리 위로 달빛을 가득 받으며 나란히 언덕을 내려오는 지레-성우 커플이 보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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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공인 CCTV 영상관제 전문가를 위한 영상정보관리사 - (사)한국정보통신자격협회 공식 인증 교재
서재오.최상균.최윤미 지음 / 성안당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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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잘 보장되는 나라로 꼽히는데 이에는 21세기 초부터 급속하게 광역 보급된 CCTV의 덕도 있을 것입니다. 나라나 지자체에서 운용되는 설비 말고도, 건물 내 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개인들도 많이들 설치하는 게 이 폐쇄회로 시스템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이런 보안 체제도 빠른 속도로 혁신을 맞겠지만 당분간은 수동으로 관제하는 전문인력의 수요가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또 보안의 이슈는 언제나 중요하게 취급되기 마련입니다. 시험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필수 암기, 이해 사항은 모두 담고, 그러면서도 최신 출제 경향을 반영하여 공부 시간과 노력을 최소화했습니다.

(*문충 카페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교재를 공부하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제가 전에 성안당 기사(또는 산업기사) 교재를 공부했을 때도 느꼈는데, 여기서 낸 책들은 암기 사항을 그저 나열만 한 게 아니라, 분량은 최소화하면서도 수험생들이 읽어 나갈 때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게 구성했기 때문에 이해가 훨씬 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타, 탈자가 거의 없다는 점도 큰 메리트였는데 지금 이 책도 그렇습니다. 이래서 강사진뿐 아니라 출판사도 봐야 한다는 건데, 제가 노베이스 비전공자이면서도 이처럼 진도가 수월하게 나가는 게 교재가 워낙 짜임새있게 집필도 된 데다 편집도 참 깔끔합니다. 이래서 성안당 책들은 진심 저는 믿고 봅니다.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만약 성안당 책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 자격증 시험 교재를 신청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즘 인텔이 몰락하고 엔비디아가 뜨는 게 범용 CPU의 쓰임이 줄어들고 GPU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p115를 보면 GPU에 대한 설명이 따로 박스처리되어 제시됩니다. 교재에 설명이 나오는 대로 초기에는 2차원 비디오 렌더링 처리가 목적인 서브 유닛이었으나, 이제는 3차원 그래픽이 중요해짐에 따라 전용 하드웨어를 위한 처리장치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고 나옵니다. 과거에는 GPU의 출제 빈도가 아주 낮았지만 이제는 분위기가 달라졌죠. 이 파트에서는 HDD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며, CCTV 관제에 아직은 이 레거시 저장장치가 많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교착상태(deadlock)라는 게 있습니다(p124). 다중 프로그래밍, 혹은 멀티프로그래밍 환경에서 문제가 될 이벤트를 계속 기다리거나 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상호배제, 점유대기, 비선점(no preemption), 순환대기 등이 그 필요조건으로 제시됩니다. 필요조건이라는 건, 이 상황이 아니면 교착상태가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음 페이지에 그 해결 방안이 넷 나오는데 좀 추상적이고 원론 수준이긴 하지만, 실무에서도 이 원리를 좀 이해하고 있어야 다양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에는 스케줄링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스케줄링 사용의 4대 규칙도 잘 알아 둬야 하겠습니다.

p156 이하에 긴 표를 통해 해킹의 종류, 대비책이 정리되었습니다. 일단 해킹의 종류가 스니핑, 스푸핑, 파밍, APT, 터널링, 세션하이재킹, 티어드롭공격 등 다양합니다. 죽음의 핑(ping of death)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은 방화벽, IPS, 서비스별 대역폭 제한 등이 대처 방안인데, 근본적으로는 "안정적인 네트워크 설계와 시스템 패치 관리"가 해킹 시도를 맞는 효과적인 방침이겠습니다. 최근 자주 보이는 SYN 플러드 공격 유형도 잘 알아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p220을 보면 센서에서 얻은 정보를 연동하는 네트워크의 종류가 정리되었습니다. 먼저 기기 사이 연동 네트워크라면, 이더넷, RS-232, RS-485 등의 연결 장치가 이용된다고 나옵니다. 인터넷 기반이라면 IP 주소, 또 근거리 통신 네트워크라면 블루투스, 지그비 등이 전송에 쓰인다고 깔끔하게 서술되었습니다. 자주 출제되고 내용상으로도 중요한 포인트에는 교재에 "중요합니다"라는 마크가 옆에 찍혀 수험생들의 주의를 더 끌게 배려했습니다. p274에는 순환관제의 디테일이 8개 항목을 통해 비교적 자세히 적혔는데 실무상으로도 참조될 만한 내용이겠습니다.

본문은 1부 영상정보관리 일반, 2부 영상정보 관제시스템, 3부 관리실무로 통상의 교재와 비슷하며 마지막 4부가 기출문제와 그 해설입니다. 답과 해설은 문항 바로 밑에 적혔으며 성안당 교재들이 본래 그렇듯 사진도 선명히 잘 인쇄되었습니다. 해설도 본문 단순 반복을 지양하고 수험생의 이해를 최대한 배려한 터라 더욱 만족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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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식당 3 : 약속 식당 (특별판)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박현숙 지음 / 특별한서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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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인 2022년 2월 특서에서 나온, 이 시리즈 세번째 작품 <약속 식당>을 읽고 리뷰도 썼었습니다. 이제 시리즈 제3권의 특별판이 이렇게 나왔는데, 규격은 약간 위아래로 길어졌습니다. 손에 들고 읽기에는 더 편해진 것 같습니다. 간만에 이 시리즈 핵심 키워드인 "파감 로맨스(p19, p47 등)"를 다시 만나니 예전에 재미있게 읽던 느낌도 다시 살아나고, 연휴에 제가 재료를 직접 사서 이게 진짜 되는지 만들어 보고도 싶어졌습니다.

(*북뉴스 카페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나에게 만호는 교활한 여우가 아니라 소중한 기회를 내려줄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p59)." 그러게 말입니다. 기한이 고작 100일이고, 다른 더 멋진 생을 살 수 있는 기회까지 마다하면서 구태여 한설이를 다시 만나려는 유채우도 유채우이지만 만호는 왜 이렇게 채우에게 친절히 구는 걸까요. 어떤 아줌마가 들어와 다짜고짜 "이런 식당을 사(서 개업하)다니 사기를 당한 셈"이라며 단단히 오지랖(이게 뭔 소리인지는 저 뒤 p186 황 부장 이야기까지 들어 봐야 합니다)을 부리는데 채우는 (40대 여성으로 변한 건 물론) 이 상황에 대해 전혀 기억이 없고, 자신이 채우이며 설이를 만나야 한다는 마음만 가득할 뿐입니다. 이제 채우는 전혀 낯설 뿐인 이 잠시(길어야 백일이라고 하니)의 새 인생에 대해 적응해 가야 합니다.

채우는 이 생에서 식당 아줌마(김보영. 42세. p187)로서의 기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질문에 대해 "나는 하루치 재료만 준비하고, 다 쓰면 음식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고 (제대로) 대답합니다. 이상하죠. 방금 막 들어오게 된 인생인데도 이런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 대해 맞는 답이 척척 나오니 말입니다. 스스로도 신기하다고 합니다(p70). 이런 걸 보면 아줌마의 정신에는 원래의 다른 트랙이 깔려 있는데 잠시 쉬게 하고, 100일간만 잠시 이분의 몸을 빌린 후 기간이 되면 도로 내 주는 식인가 봅니다. 우리도 가끔 공황이 왔는지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게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지요.

왕 원장이라는 남자는 날 언제 봤다고 언니 언니 거리며 파마비는 십만 원만 받겠다고 합니다. 아줌마로 살아 본 적이 없으니(정확히 말하면, 기억에 없으니) 파마가 얼마나 비싼지도 모르고, 식당 주인 노릇도 처음이니 아이한테 돈을 도둑맞지 않게 잘 감수해야 한다는 점도 몰랐다가 낭패를 겪습니다. 그래도 이 삶이 편하기도 해서, 원장한테 나중에 십만 원 어치만 와서 밥을 사 먹으라고 하니(이런 융통성이 발휘되는 것도 신기) 또 그러겠다고 합니다. 누구의 생이건 일장일단이 다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고정된 자아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는 사두개인들이 묻기를 여러 번 결혼한 여인이 천국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하자 아버지의 나라에서 지상의 가족관계란 아무 의미 없다고 대답했다는 게 마태복음 22장에 나옵니다. p85를 보면 채우는, 아이 누나 이름이 고동미라면 아이 이름이 (구동찬 아니라) 고동찬이라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애쓰지만 곧 이게 다 무의미하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가족의 형태도 수없이 변화"하니 말입니다. 형제나 남매면 성이 같아야 한다는 발상이 촌스럽다고도 합니다. 이런 생각도 아마 그전의 유채우의 삶을 그대로 사는 중이었다면 쉽게 떠올리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음식 장사를 하다보면 별의별 진상이 다 있겠다는 건 직접 장사 경험이 없어도 알 수 있습니다. 왜 왕 원장이 시식하고 가라고 권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순순히 올까요? 장사에 달통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감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붙기도 하나 봅니다. "돈을 벌려 애쓰면 돈이 찾아오길 망설이고, 일을 하려 애쓰면 돈이 절로 찾아든다(p104)." 어디 장사뿐이겠습니까. 세상 이치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와중에도 구주미는 채우더러 재료가 나빠서 게 알레르기가 생겼다는 둥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갑니다(p177을 보면 이게 집안 내력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에휴). 여튼 이 구주미로부터 예쁘다미용실, 그리고 설이에 대한 정보(p133)를 알아 내야 하기 때문에 채우는 얘를 마구 대할 수는 없습니다. 동찬이는 비밀병기(메뉴 이름입니다)를 좋아하며 파감로맨스를 싫어합니다(p156).

사람 마음이 가는 길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채우는 어느새 고동미와 구주미가 황우찬을 동시에 좋아한다는 사실도 눈치챕니다(p167. 그러나 p208 이하를 보면...). 파감로맨스는 대체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지 황부장도 시큰둥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왕 원장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생에서 설이의 정체는 바로 ooo이었음이 소설 끝에 가서야 드러납니다.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그리 큰, 단단한 실체가 없음을 확인하면 많이 슬퍼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만호 같은 존재한테 이렇게 특별한 호의도 받고 그러는 게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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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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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말미, 호소야 마사미쓰[細谷正充]의 해설이 밝히듯이 이 작품집은 일본의 학습잡지에 실린 여러 단편들을, 수정 가필을 거쳐 한 권으로 묶은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도 5학년, 6학년 하는 식으로 특정 학년생에 특화한 (학습지 아닌) 잡지가 나오나 본데, 한국에도 이 비슷한 게 한때 있었습니다만 오래 발간되지는 않았습니다. 2003년에 출판되었던 책이며, 그래서 평론가 호소야 씨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해 "변화구가 다양하지만 결정구가 아쉽다"라는 평이 한때 있었다는 언급을 하는 건데, 만약 지금이라면 아예 이런 말 자체가 안 나올 것입니다. 

(*책좋사 카페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여섯 본편의 1인칭 화자,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며 다른 환경에 처해 다른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학교를 옮겨다니는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비상근"이란 설정을 넣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각기 다른 비상근 교사라고 해도 무방하며, 이 책은 장편이라기보다 단편집으로 보는 게 맞겠습니다. 20세기 초중반 영미의 추리 장르에서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시크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물이 유행하여 이걸 하드보일드라 불렀는데 이 책 제목에 든 "非情"은 그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스승의 바른 길이니 뭐니 하며 학생들에게 과하게 가까이 다가가진 않겠다는 건데, 해설에서 평론가 호소야 씨도 그런 취지로 말하지만 작품을 읽어 보면 막상 주인공은 다정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다정하기만 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못하는 교사라면 학생들에게 결과적으로 더 해로운 존재일 텐데, 비정규직치고는 지나치게(?) 예리한 두뇌의 주인공인지라 독자에게는 더 살갑고 고맙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어에서는 한자에 다양한 발음이 구현되지 않기에 동음이의어가 많습니다. 비상근(非常勤)이나 비정근(非情勤. 작가가 만들어낸 말입니다)이나 둘 다 일본어로는 독음이 [비죠-킨]이니 일종의 말장난입니다. p54:6을 보면 후지와라 선생의 발언 의도에 대해 주인공이 "비상근이라 정이 없다는 뜻인가요?"라고 짚는 대목이 있는데, 한국어로는 이 말의 재미가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정확히는, 임시직으로 일하는 이상 과한 소속감을 두지 않겠다는 거지 정말로 비정하게 굴겠다는 뜻이 아니며 천성적으로 고립감을 즐기는 주인공의 스타일도 한몫합니다. 

여섯 편의 미스테리를 해결하는 주인공의 실력을 보면 대체 이런 사람이 왜 고작 비정규직으로 박봉의 신세에 머무는지가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독자는 특히, 심각한 사건이 품은 미스테리의 대단히 빈약한 단서만 갖고도 마치 코난처럼 가뿐하고 우아하며 논리적으로 진상을 꿰뚫어보는 주인공의 안목과 통찰력에 경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고작 이걸 갖고..?"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도, 살인이나 중상(重傷)처럼 심각한 결과가 아니었다뿐이지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빚어졌는지 이해가 도통 안 되는 일은 자주 벌어집니다. 우리도 이 비상근 교사처럼, 과한 감정적 집착을 버리고 필요한 부분에만 집중하면, 그런 수수께끼들을 다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전 그 점이 새삼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해결을 기다리던 말썽이나 사고는 우리의 무능으로 인해 부당히 잊히거나 그냥 묻어간 게 그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정의(正義)는 그때마다 일일이 훼손되었겠고 말입니다. 

두번째 작품 <64분의 1>에서, 사실 중2(초5라기보다) 수준의 수학 확률만 제대로 배워도 64가 2의 6제곱이라는 사실로부터 대략 이게 무슨 성질의 숫자인지는 감이 옵니다. 그 여학생들(p49)이 수업 시간에 배우는 독립시행의 확률곱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도, 내가 돈을 걸고 재미를 보려는 도박이 관심사가 된다면 갑자기 까다로운 계산도 척척 해내게 되나 봅니다. 첫째 작품에서는 이른바 다잉 메시지가 등장하는데 사실 영미권에서는 이런 이상한 말을 쓰지 않습니다. 이 클리셰 자체는 영미의 장르에서 처음 만들어졌어도 말입니다. 호소야 평론가도 그런 취지로 말하지만 다잉 메시지란 장르문학에서나 등장할 뿐 대단히 비현실적입니다. 범인이야 그 뜻을 이해했건 못했건 현장에서 인멸해 버리는 게 절대우위전략이고, 만약 범인이 메시지의 존재를 모르겠다 싶으면 피해자는 (힘이 남은 한) 직설적으로 할 말을 남기면 그만이죠. 그래도 우리 장르팬들은 마술쇼를 찾은 관객들처럼 즐겁게 속고 디테일의 정성에 감동합니다. 

일본의 표음수단 가나는 한자의 변형, 간이화를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한자와 형태가 부분적으로 겹치는 게 많고, 가나 몇을 적당히 합치면 특정 한자가 나오거나, 반대로 한자를 적당히 파자(破字)하면 특정 가나 몇 개가 나오기도(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 단편들의 트릭은 대부분 글자 구성 유희의 묘미에 기대는데 이렇게 하는 게 아마 초등 고학년들에게 교육적으로도 유익하겠다고 작가가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코난에서도 브라운 박사(아가사 하카세)가 이런 트릭을 쓴 농담을 자주 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지만 아무리 비정(非情)의 컨셉을 써도 그 착한 마음, 주제의식이 절로 삐져나오는 걸 도무지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동정, 정의감은 그 내면에 상근(常勤) 중이라는 점, 이 작가는 언제나 강조하지 않고 못배긴다는 걸 우리 한국 팬들도 다 잘 알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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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 - 지친 나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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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애니메이션을 보면 의외로, 사람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 멋지고 울림 깊은 대사가 있습니다. 명대사뿐 아니라 대중가요 가사도, 마음이 센치해질 때 들으면 "이거 완전 내 얘기네" 싶은 게 있죠. 애니도 극에 몰입하면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이서희 작가님은 그런 개인적 순간들을 모아 이렇게 멋진 책을 만들어 내신 것 같습니다. 책에는 모두 12편의 작품들이 실렸는데 두 편만 미국 작품이고 다른 열 편은 모두 일본산입니다(웬만한 한국인들은 다 아는 유명한 작들).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원문장이 함께 제시되기 때문에 외국어 공부를 겸할 수 있다는 게 좋고, 건전한 자기계발 목적으로 독해가 가능하다는 점도 유익합니다. 명대사는 모두 147개가 뽑혔고, 챕터 말미에 독자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노트가 한 페이지 마련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46을 보면 029번 문장, 惱む時間に一つでも多くしてみて。가 있습니다(일본식 한자는 예스 같은 인터넷 서점 보드에서 깨지는 경우가 많아서 저는 그냥 한국식으로 적겠습니다). 이 문장의 뜻은 "고민하는 시간에 하나라도 더해 봐."인데,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도라에몽의 재촉에 지쳐 잠시 이슬이를 만나러 온 진구가 듣는 충고인 것 같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사회적 분위기, 개인 정서가 닮은 데가 많아 이런 대사가 (교훈뿐 아니라 말투까지) 공감이 잘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이키의 유명한 카피 Just do it!이라든가 바비 맥퍼린의 "Don't worry be happy"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고민하며 불안에 영혼을 잡아먹히기보다 뭐라도 행동으로 옮겨서 현황을 타개하라는 조언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p87에 나오는 062번 문장(중의 하나)은 あなたの名前は?인데 이게 대사이기도 하고 작품 제목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목에서는 물음표 아닌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이라 뉘앙스가 다릅니다. 왜 당신의 이름을 물어 보는 걸까요? 알면서도 묻는 질문이라면 더 뜻이 깊습니다. 한국 김춘수 시인의 <꽃>을 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름은 그만큼이나 존재의 본질을 다시 구성할 만큼 중요한 매개입니다. 저자는 이 작이 시각적으로도 아름답지만 그 담은 주제나 분위기 면에서도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을 명작이라고 평가합니다. 

p100에는 070번 문장, もう終わりだ。美しくなかつたら生きる意味がない。이 나옵니다. 제가 이 작품(<하울의 움직이는...>)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이기도 합니다. 무굴 제국의 창립자 바부르가 델리를 함락하고서도 아쉬운 듯 말하길 "이곳 사람들은 아름답지를 못하다."고 개탄했습니다. 고향 중앙아시아가 그리워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세상 천하를 다 얻어도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내가 더 이상 내 마음에 안 든다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울이 더 이상 악마와 교류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소피는 단호하게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애욕만 충족하는 관계가 아니라 이처럼 서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2022년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도 명대사들이 뽑혀 이 책 3-3, 9번째 챕터에 정리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거론되는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최근작입니다. p153의 102번 문장은 좀 긴데 제가 여기 잠시 옮겨 적어 봅니다. 命は儚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死はいつもそばにいあいあるうくことを知っています。여기서 儚은 덧없다는 뜻을 특히 일본어에서 갖습니다(한국 한자는 이런 의미로는 잘 안 씁니다). 저 글자의 인변을 마음심으로 바꿔도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같습니다. 목숨이라는 게 덧없고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뻔히 알아도 우리는 생을 좋아하며,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게 있을 정도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생이 우리에게 부여한 육신의 고마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p168에는 문장 111번이 있습니다. <겨울왕국>에서 그랜드 패비가 왕족들에게 안나의 상태를 설명하며 안심시키는 대사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The heart is not so easily changed. But the head can be pursuaded). 머리와 가슴 중 어느편이 진짜 우리에 가까운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에 확신을 갖는 순간이라면 둘의 의견이 일치하는 때입니다. 우리부터가 남들에게 머리로나 가슴으로나 끌리고 동의가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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