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니체를 만나라
이동용 지음 / 초록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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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마치, 현대인이 앞으로 앓게 될 모든 정신적 고뇌를 혼자 도맡아 선제적으로 앓아 내기라도 한 듯, 진정한 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천재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그에 걸맞게 성숙한 세계관이 몸에 배어야 하는데, 니체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일생을 두고 한 번도 맞닥뜨리지 못할 추싱적인 난제를 다룬 딴세상의 신선이 아니라, 어른이라면 누구나 골머리를 앓고 갈등했을 만한 이슈에 대해 감각적이고도 직관적인 언어로 그 해명을 시도했기에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지난 시대의 독일인이기에 한국 독자에게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을 수 있는데, 저자 이동용 박사님이 더욱 쉽고 일상적인 설명으로, 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은 우리들에게 속시원하게 풀어 주십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사자도 자신의 먹잇감이 된 동물에 대해 사냥을 마치고 경멸감을 느낄까요? 이 책 p79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재인용한 구절이 잘 설명하듯, 사람은 무엇인가에 대해 경멸을 표출하는, 좀 독특한 감정 성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경멸감이란 약하고 무능하고 열등한(그렇게 판단되는) 무엇인가에 대해 느끼는 단순한 우월감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이 저런 무기력하고 위험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다는 어떤 위기감이 그리 발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대체로 인간은 (만약 그가 성숙한 어른이라면) 그런 경멸감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 그리 편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약한 타자에 대한 경멸감이라면, 아 내가 이래서는 곤란하겠다며 비겁한 자신에 대해 책망할 줄도 압니다. 만약 내 자신에 대한 경멸이라면, 그게 경멸감 같은 낮은 차원의 감정에 계속 머물게 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으로 오르게 스스로를 재촉할 줄도 압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런 경멸감에 대해, 스스로를 애써 부정하지 말고 좀 더 솔직해질 것을 권합니다. 일단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건 그 자체로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어떤 감정이 솟아오를 때 일일이 이를 성현, 석학의 가르침에 대응하여 더 고상한 무엇으로 치환하는 건 대단히 피곤할 뿐 아니라 아무나 수행할 수도 없는 과업이라고 하겠습니다. 니체는 구태여 감정을 속일 게 아니라, 있는 힘껏 한계에 부딪혀 과연 내 자신이 경멸받아 마땅한 저 다른 패배자들과 같아질지, 아니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이전의 나와는 다른 차원으로 도약할지, 현실의 좌표에서 어디 나 자신을 제대로 점검해 보라고 합니다. 어떤 안온한 울타리 안에서 나 자신을 과잉보호할 게 아니라, 승리자와 패배자 사이에서 과연 내가 어느 그룹에 속할지 칼 같은 잣대로 숨김없이 회피않고 마주쳐 보라고 외칩니다. 

독일어의 Wildnis, 영어의 wildness도 우리말로 옮길 때 오해를 사기 좋은 단어들입니다. p158에서 저자께서 잘 설명하시듯이, 이걸 구태여 황야 등으로 옮기기보다, 야생, 야만, 자유분방 등을 뜻하게 번역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니체의 심상에서 사자가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바는 바로 "자유"입니다. 사자는 야생에서 절대 강자이기에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으며, 어떤 강제력 앞에 쉽게 굴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사자 역시 자신보다 강하거나 덩치가 큰, 기린, 코끼리, 코뿔소 등 앞에서 때로 목숨을 건 사냥을 감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겁하게 타자의 폭력 행사 앞에서 물러날 필요까지는 없기에, 사자의 삶은 호쾌하고 사내다우며 행여 일격을 당하고 사바나의 그늘에 피흘려 눕더라도 그의 여생에 아무런 회한이 없습니다. p159에 잘 나오듯, 끝없이 이어지는 도전의 사슬을 지혜롭고 끈기 있게 풀어나갈망정 운명 앞에 체념하거나 비참하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자의 삶이요, 또 자유로운 인간의 지향이라야 합니다. 

p170에 잘 나오듯, 니체는 흔히 "신은 죽었다"는 말을 한 철학자로 알려졌습니다. 자 그럼 신이 죽었으니, 악마는 세상 살판났다는 듯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일까요? 악마가 그토록 득세하게 되었다면 우리 인간은 윤리 도덕은 땅바닥에 갖다버리고 악마의 길을 따르면 그만일까요? 니체는 그런 말을 하고자 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은연중에 사람들의 마음에 심은 패배주의, 수동적 삶, 세상의 악에 끌려나니며 마침내 굴복할 수밖에 없는 노예적 평화주의 따위를 비판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신이 죽었다는 건, 사문화한 규범에 더이상 기대지 말고, 십계명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나를 지켜 주겠거니 막연히 의지하지 말고, 내 인생은 내가 싸워서 쟁취하고 개척해 나간다는 의지를 다지라는 뜻으로 우리는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니체가 말한 자유인의 삶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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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그 화석이 된 흔적들
홍긍표 지음 / 반달뜨는꽃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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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추억을 먹고사는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족해도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이 내 영혼을 지탱해 주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런저런 현재의 바람 앞에 결국은 한쪽으로 쓰러지는 오외로운 나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저자께서는 평생 교편을 잡으시고 이제 정년을 맞아 중국의 고등 교육 기관으로 소속을 옮기시는 교육자이시며, 이 예쁜 책 안에 자신의 지난 인생 소중한 추억을 담으시어 우리들 후학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전수하십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47 이하에는 "꽃상여를 볼 수 있을까?"라는 제목 하에 참으로 심오한 교훈이 전개됩니다. 저자님 등 동료분들의 부모님들께서는 거의 구순 가까이되는 연세에 별세하신지라 다들 호상(好喪)이라며 지나친 비통보다는 가벼운 농담도 오가는 분위기였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나를 세상에 낳아 주시고 어렸을 시절 보설펴 주신 부모님을 이제 세상에서 영원히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찌 그 마음이 미어지지 않겠습니까. 저자께서는 인생의 신산을 두루 겪으신 분들만이 들려 줄 수 있는 따스한 말씀, 그리고 개인적인 회고를 곁들여 우리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십니다. 

선생께서는 예순을 넘기신 연세입니다. 이때라면 나라가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아이들도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놀거리가 극히 제한되었던 시절이라 하겠습니다. 저자께서는 책 p57 이하에 그림까지 곁들이며 아무것도 없던 시절 자연을 벗삼아 잘만 놀던 어린이들이 과연 무엇을 벗삼아 소일했는지 저게히 설명해 주십니다. 과연 우리는 이처럼 풍요로운 세상에서,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고 떠난 우리들의 앞선 선배들, 조상들에게 합당한 감사를 표하고 사는 중일까요, 아니면 은혜를 까맣게 잊고 말초적인 향락에 젖어 불건전하고 무의미하게 세월을 죽일 뿐인 걸까요. 

우리네 국토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명승지가 많습니다.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신양선착장이라는 곳이 있고, 연홍도(延洪島)라는 절경의 섬이 있는데 저자께서 친지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시고 이 책 p144 이하에 그 기행문을 적어 두셨습니다. 사진이 설령 없다 해도 우리 나라 다도해 기행문은 장소가 워낙 장소이다 보니 관광객들에게 자연스러운 흥취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글들은 같은 한국인이라면 마음 속에 공감의 파도를 절로 일게 하여,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풍경에 대한 파도치는 감회와 설렘을 마음 속에 매우 자연스럽게 생성하기 마련입니다. 홍긍표 저자님의 이 부분 기행문도 그렇습니다.  

18세기말에 조엄이 한반도에 처음 들여온 고구마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도 널리 사랑받는 작물입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전라남도 여러 곳에서 자라는데, 저자께서는 이 고구마에 대한 추억이 어려서부터 참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p97 이하에 상세히 이어지는 사연은 아마도 홍긍표 선생님과 비슷한 연배의 독자들께 무궁무진한 추억의 연상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듯합니다. 선생께서도 표현하듯 이 작물은 경신대기근 무렵부터 기후 변화로 기근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에게 구황 작물 노릇을 톡톡히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웰빙식(食) 메뉴로도 많은 기여를 하는 중이죠. 

p183에는 비익조, 연리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연리지라는 말은, 저자 말씀대로 요즘 예식장에 자주 쓰이는 단어이기도 한데 그 뜻을 알면 참 예쁜 말이 과연 그럴 만해서 자주도 쓰이는구나 생각이 듭니다. 왕소군(p157)은 전한(前漢) 대를 산 비운의 궁녀, 미인인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동방규의 유명한 시구에도 등장하여 후대의 독자들에게 더욱 크게 어필한 문학적 모티브입니다. 하동은 경남, 광양은 전남이 그 행정상의 소속인데, 이 두 고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바짝 붙어 있죠. 하동의 명물 녹차, 광양의 상징(제철소와 더불어)인 매화에 대해 구수하게 풀어 주시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중국의 대학생들도 저자로부터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을 들을 듯하여 부러운 마음이 절로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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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글자로 끝내는 중국어 표현 100
리리제제 지음 / 한다중국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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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국과 많은 교역을 하는 나라이며 싫든 좋든 우리 경제와 긴밀한 관계로 엮인 거대한 단위입니다. 이미 한국에 조선족이나 중국인들이 많이 건너와 있기에 비록 그 수요는 많이 줄었으나, 중국어를 잘하는 인력은 어느 회사에서나 필요합니다. 우리가 간단한 중국어 몇 마디를 익혀 두면 어디에서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며, 중국어 컨텐츠를 즐기거나 중국 커뮤니티에서 잠시라도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중국어 실력이 꼭 필요합니다. 불과 다섯 글자로 부담없이 몸에 익힐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면, 이것부터 먼저 몸에 배게 하고, 그 다음에 더 어려운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8을 보면 중국어의 가장 기초적인 인사라고 할 니 하오!라는 인삿말이 나옵니다. 중국어로는 你好라고 쓰며, 책에서처럼 느낌표를 붙이는 게 보통입니다. 페이지 안쪽의 QR코드를 찍으면 한다중국어 사이트로 연결되며 다시 책의 목차가 나옵니다. 지금 공부하는 챕터로 다시 들어가면 해당 대화의 원어민 목소리로 문장을 읽어 주며, 한국어 뜻은 한국어 목소리가 다시 설명해 주는 형식입니다. 음원을 다운받을 수도 있는데 페이지 중간 오른쪽의 점 세 개 부분을 클릭하면 다운로드 링크가 나옵니다(이 서평을 작성할 때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니하오에서 하오 부분은 우리가 배워 아는 대로 3성이며 얼핏 하~처럼도 들립니다. 책에는 이 표현과 유사한 다른 표현들(嗨 등)도 나옵니다. 

나이를 말할 때는 p64에 나오듯이 我三十岁라고 합니다. 岁는 중국어로 쑤이(4성) 비슷하게 읽으며 우리식 한자로는 歲(세)와 같습니다. "나는 30세"라고 하는 셈입니다. 상대의 나이를 물을 때에는 你几岁(니 지 쑤이)? 처럼 말하면 된다고 합니다. 모든 대화에는 간단한 컬러 일러스트가 딸려 있어서 중국어 쌩초보의 이해를 조금 더 돕는 편입니다. 또 처음 나오는 표현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을 달아 주는데, 예를 들어 p65를 보면 多大[뚜오어따] 같은 말은 한국어로 "얼마"라는 뜻이라고 바로 아래에 주를 달았습니다. 

이 교재의 또다른 독특한 점은, 성조를 표시할 때 보다 직관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성의 경우 쭉 뻗은 화살표가 대신 나타냅니다. 또 2성의 경우 위로 올라가는 화살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3성은 글자 자체가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p82에는 晕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이게 책에는 헐!이라며 놀라움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자세히 나옵니다. 이 글자는 중국어로는 [윈] 비슷하게 읽으며 1성이라서 쭉 뻗은 화살표가 함께 표시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한자를 잘 쓰지 않으며 구태여 뜻을 찾자면 현기증이 난다는 [훈]이라는 음으로 읽습니다. 

이 책은 확실히 긴 표현이 잘 나오지 않고, 간단간단한 회화 표현 위주입니다. 그래서 따라서 배우기에 별 부담이 없습니다. 길다고 해 봐야 p85에 나오는 대로, 其实我不是韩国人("사실, 나 한국인 아냐.") 정도가 고작이며, 대부분은 정말 제목 그대로 다섯 글자를 넘지 않는 표현이 대부분입니다. p90을 보면 完了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우리말로야 "완료"지만, 중국어로는 책에 나오듯이 "망했어!"입니다. 같은 한자어라고 해도 이처럼 뜻이 한국어와 중국어가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어이가 없다, 황당하다, 노답이다 같은 표현도 있는데 无语了[우위이이러]처럼 읽습니다. 无는 우리말의 無하고 같습니다. 교재 p116 이하에 이 표현에 대해 자세히 설명이 나옵니다. 太过分了!는 너무해! 정도의 표현인데, 뒤에 따라오는 "말도없이 계약해지라니!" 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표현은 다 생략되었습니다. 제목대로, 까다롭고 어려운 건 중국어에 충분히 익숙해진 후에 배우라는 배려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네요. 모든 내용에 컬러 일러스트가 따라와서 정말 부담없이 초보 중국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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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찬 - 문학과 사회학의 대화
지그문트 바우만.리카르도 마체오 지음, 안규남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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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만 봐서는 헷갈릴 수 있으나 지그먼트 바우만은 독일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나치 독일에 의해 모진 핍박을 받은 폴란드계 유대인의 일원이며, 이후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활동하였기에 지금 이 책 <In praise of literature>도 원서가 영어로 쓰였습니다. 만약 지그문트 바우만이 독일인이었다면 저 Zigmunt Bauman이란 철자도 매우 다르게 적혔을 것입니다. 심리학의 개조 프로이트처럼 Siegmund였겠으며, Bauman도 끝에 n이 하나 더 붙은 Baumann이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아무튼 지그문트 바우만은 전후 공산주의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사회학자로 열심히 활동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프랑스에서 이른바 68혁명이 일어났고 이 여파가 폴란드에까지 미쳐 공산당의 전횡에 저항하는 학생 시위가 일어났죠.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무우카(예전 책들에서 "고물카"로 표기되던 사람)는 이를 진압하고, 흉흉해진 민심의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뜬금없이 반유대주의를 부추기는 한심한 책략을 부렸습니다. 폴란드에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건 나치에 짓밟힌 조국의 자존을, 마르크스주의(나치의 가장 큰 적)를 통해 실천적으로 회복하려는 민중의 몸부림이었는데, 이 자는 기가 막히게도 나치의 악행을 계승하여 손쉬운 마녀사냥을 부채질했던 것입니다. 바우만 교수는 이때 정든 조국을 떠나 이스라엘로, 이후 다시 영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 책은 이탈리아 출신 편집자 리카르도 마체오와의 의견 교환 형식으로 쓰였습니다(대담[對談]은 아닙니다). 마체오 에디터가 대체로 "문학" 진영을 대변하고, 바우만 교수가 "사회학"을 옹호하는 스탠스로 볼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런 건 아닙니다. 어차피 리카르도 마체오도 인문학 다방면에 소양이 깊은 분이고, 바우만 역시 전인적 시야로 문학을 사회학적, 철학적 지평에서 능란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성이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거의 같은 지점을 나란히 응시하며, 때로 살짝 조(key)만 달리하여 화성을 이루는 이중창을 연주하는 듯도 보입니다. 

바우만 교수가 격동의 20세기 한복판을 지내온 분이기에 혹시 이 책도 어떤 고색창연한 주제만을 다루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p92를 보십시오. 18세기 계몽사상의 대표적인 두 사상가 볼테르와 루소의 시대에서, 마체오 에디터는 어떻게 해서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이렇게나 약해졌는지 그 단초를 찾아냅니다. 아버지의 권위 실종과 남성성의 시대적 퇴조는 철학, 사회학, 문학 등 어떤 관점에서 봐도 현대적인 현상이며, 다만 리카르도 마체오는 그 뛰어난 인문적 식견으로 이를 18세기까지 소급해 가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가 인용하는 책은 루이지 조야의 <Il gesto di Ettore. Preistoria, storia, attualità e scomparsa del padre>인데, 2009년에 <아버지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이미 번역도 되었습니다. 

제6장은 "블로그와 중개자의 소멸"인데, 물론 소멸하는 건 중개자이며 인터넷에 별반 진입장벽 없이 누구나 개설하여 자기 주장을 펼 수 있는 블로그는 그 세부 형태만 달리하며 발전 중입니다. 또 유튜브 등 뉴미디어, 트위터(현 X)나 메타 등 소셜미디어는 이미 전통적 중개자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중이며, 신문과 잡지 등 오랜 역사를 지닌 매체들이야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보다, 원로 편집자인 리카르도 마체오 같은 이가 이 이슈에 대해 각별한 소회를 피력하는 게 당연하죠. 이에 대해 바우만 교수는, 이른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법칙은 저 토마스 그레샴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코페르니쿠스, 심지어 아리스토파네스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현대의 의견 개진과 소통의 장이 확장되는 현상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큰) 하나를 받으면 (상대적으로는 작은) 하나를 내주어야 하는, 일종의 역사 진보에 따른 대가 지불로 보자는 제안으로, 마체오 편집자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랩니다. 

바우만 교수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비슷한 또래이며 마체오 편집자는 조국 교수 등과 세대가 같습니다. 이분들 사이에도 이미 세대 차가 크게 나며 바우만 교수가 워낙 장수한 분일 뿐 사실은 타계 1년 전까지 이런 지적 활동에 참여가 가능할 만큼 젊은 사고를 유지했다는 자체가 벌써 기적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책 제목은 "문학(literature) 예찬"이지만 널리 "인문 예찬"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며, 두 지성은 이미 전통적 한계를 저만큼 뛰어넘는 21세기 대중의 실험과 시행착오를 저만큼 먼 곳으로부터 관조하고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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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의 풍경 - 인물로 돌아보는 대한민국 현대사
신복룡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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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36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족의 철제 하에 신음하다가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맞이했습니다. 그 기쁨도 잠시, 남북이 분단되고 좌우가 대립하여 급기야는 동족 상잔의 비극까지 이어졌습니다. 1945년부터 1948년 단정 수립까지를 보통 해방공간, 해방 정국이라 부르는데요. 신복룡 박사님의 이 묵직한 책을 보면 우리 민족이 그 기간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장래를 모색하고 민족의 앞날을 설계하려 노력했는지 그 생생한 단면을 개관할 수 있습니다. 분량도 풍성하거니와 대석학의 원대한 통찰까지 지면 곳곳에 숨어 있기에 독자로서는 너무도 행복하면서도 유익한 독서가 가능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역사는 대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간 쟁패의 연속으로 채워졌습니다. p29를 보면 저자께서도 버나드로 몽고메리의 말을 인용하여 "결국 해양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패권자가 된다"고 소결론을 내십니다. 일본은 왜 그리도 잔인하거나 호전적이었나? 이에 대해서는 무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도 언급이 있다고 하시며, 이렇게 호전적이고 냉혈 기질이 다분한 그들, 집단의 명예와 가치를 위해 (자신을 포함하여) 개인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것을 당연시하는 그들의 심성이, 바다를 지배하는 실력과 결합되었을 때 이웃 반도에 위치한 우리 겨레에 어떤 피해가 닥쳤는지는 이미 역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한 바입니다. 

언변 좋고, 부티 나고, 사회적 지위도 번듯한,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 아마도 우리 모두가 이런 유형이 되고 싶어하며 혹은 그런 사람과 친분을 맺길 원할 것입니다. 저자는 몽양 여운형을 가리켜 그런 축복 받은 인물이었겠다고 추정하며, 다만 이런 분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처럼, 해방공간에서처럼 좌와 우가 극렬히 대립하는 국면에서 과연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지, 양자를 조화롭게 중재하는 게 가장 바람직했겠으나 그런 고상하고 숭고한 시도가 좌절했을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 실감나게 보여 준 위인이 바로 몽양 아니었겠냐는 취지로 말씀하십니다. 합리적인 중도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게 해방공간 비극의 한 국면이었음은 우리 모두가 통감하는 바입니다. 

p147을 보면 저자의 참으로 심오한 통찰이 담긴 말씀이 나옵니다. 해방공간은 과연 좌우의 대립이라는 하나의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방울뱀도 동종의 공격에 대해서나 생사를 걸고 싸우지, 이종과의 대치 상태에서는 상대가 강하다 싶을 때 적정선에서 꼬리를 미리 내리는 게 보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같은 우파 내에서, 또는 좌파 안에서의 권력 투쟁이 더 심각했으며, 이승만과 백범의 갈등도 두 사람 모두 (각각의 이유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대표하는 이들이었기에 더욱 심각성을 띠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두 사람이 대등한 위치에서 대립했는지에 대해 저자는 회의적입니다. 백범은 올곧은 지사형 인물이었지 권력투쟁 쪽에는 무관심했으며 실제로 한 살 연상이었던 이승만에 대해서도 대체로는 형님 대접을 하며 양보하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이승만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권력욕의 화신 같은 권위주의적 성격이었습니다. 

"용서해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의 원한을 간직하고 살아야 할까요? 대체로 사람은 아무리 지독한 악몽에 대해서도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면 잊기 마련인데, 이는 머리가 나쁘거나 사람이 물러터져서가 아니라, 나쁜 기억을 갖고 사는 게 자신의 생리적 건강 유지에 해롭기 때문입니다. 전후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색출 처단은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그저 생계 유지를 위해 적군에 몸을 허락했던 매춘부 등에 대한 린치, 마녀사냥, 사력구제 등 한심한 분풀이에 그쳤던 일부의 행태에 대해서는 이걸 자랑스러워할 게 아니라 반대로 자성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칼 야스페르스 역시, 뉘른베르크 재판은 진정한 전범자를 가리는 정의의 심판장이 아니라, 거꾸로 크고작은 공범자들이 자신만은 가담의 책임을 면하려고 더 큰 범죄자를 지목하기에 바빴던 위선의 퍼레이드였다는 취지로 말한 적 있었다고 p199에 나옵니다. 

김일성은 과연 진짜 독립 운동가였을까요 아님 가짜를 덧칠한 과장일까요? 일단 나이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나이였다고 해서 그 많은 공훈이 그것만으로 부정될 근거는 되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북측에서는 만주 일대의 가혹한 기후, 지형 조건을 고려할 때 오히려 젊은이라야 그런 행적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옹호하기도 합니다. 반면,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혁혁한 공적은 1920년대까지도 거슬러올라가는데, 그 많은 전승이 심지어 10대 시절의 김일성에게 낱낱이 귀속되는 게 과연 물리적으로 가능하냐는 상식 선의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국전은 과연 남침을 유도한 미국의 음모 같은 게 개재했었나? 이 역시도 근 70년 동안 불씨가 꺼지지 않고 이어지는 오래된 논쟁거리입니다. 미 국무성에서 유엔 담당 업무를 맡던 D W 웨인하우스가 이미 한국전이 발발하기도 전에, 침략자로서 북한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이미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수정주의도 두 갈래 입장이 있는데 하나는 브루스 쿠밍스(=커밍스)의 주장처럼 미국의 압도적인 구조적 유도 끝에 북한이 필연적으로 남침을 감행한, 사실상의 북침설이며, 다른 하나는 이 신복룡 박사님처럼 미국이 어설프게 뭔가 함정을 파 두기는 했었는데 우연도 다분히 개재하여 북한이 덜컥 미끼를 물었다는 입장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신복룡 박사님의 이 주제에 한정된 어떤 압권(壓卷)이 하나 나왔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었는데 마침 딱 맞게 이 멋진 신간이 출간되어 독자로서 너무 행복하고 책을 받아들어 읽게 된 자체가 영광입니다. 원래 주간조선에 연재되던 아티클을 모은 2017년 지식산업사판이 있었고, 이 신간은 그에 여운형, 김규식론, 남북협상 등의 화제가 더 보강되었습니다. 두고두고 읽으며 제 마음의 양식과 교양의 원천으로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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