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센트 마화텅 - 앞서가는 사람의 한 걸음
렁후 지음, 송은진.유주안 옮김 / 큰나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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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IT 기업의 수장들은 대개, 빼어난 엔지니어와 능숙한 사업가로서의 자질 둘 다를 겸비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시절 중화학 공업이라든가 철도 산업,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타이쿤들의 경우 반드시 해당 분야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공학자, 과학자) 출신은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세상 물정에 밝고 저돌적 추진력을 지닌 전형적인 비즈니스맨 유형이 훨씬 많았죠. 2000년 인터넷 혁명이 본격 시작한 이후 이 분야 거물로 일어선 이들을 보면 물론 순수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탁월한 이들이지만, 이 영역에 대해 남다른 세부 통찰과 각론적 파악을 갖추지 못한 문외한들이 큰 성공을 거두긴 힘들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종래, 전자나 석유화학, 섬유 분야는 꼭 엔지니어 출신이라야 CEO로 올라설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 창업형 성공신화가 더 지배적인 양상인 이 분야에선 각론(기술적 디테일)과 총론(판 전체를 보는 안목)을 두루 갖춘 인재가 될 필요가 더 절실해집니다.

텐센트 마화텅 회장은 21세기 초 날고기는 인재들이 IT 창업에 나서며 향후 수십년을 먹고살게 해 줄 새로운 영토의 개척에 여념이 없던 시절, 선두 주자군에 속하는 위상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에도 상세히 나오지만 "텐센트는 다음에 또 뭘 따라할 것인가?" 같은 비아냥이나 받기 일쑤였고, 심지어 이 분야 굴지의 거인으로 자리매김한 지금도 이런 "남의 기술 베끼기, 복제"의 대가라는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한 텐센트는 이 책 후반부에도 나오듯, 다른 기업의 특허와 지적 자산을 소홀히만 점검한 채 활동을 펴다 치명적인 소송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마냥 깨끗하다거나 존경만 받는 평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치열한 업계의 대전(大戰)에서 살아남은 건 마화텅의 텐센트입니다.

이 책은 텐센트의 한계와 단점, 자잘한 실패의 요소를 정직히 조명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나 혁신 일변도가 아닌, 적의 장점을 영리하게 모방한다거나, 특정 장점만을 극단으로 추구하지 않고 두루두루 소비자에 어필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상품(과 서비스)을 언제나 지향해 온 그의 성공 비결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순수 자연과학이라든가 엔지니어로서의 역량을 선도적으로 과시, 경쟁하는 분야에선 자신만의 아이템을 못 내어 놓고 남의 생각이나 기법을 따라하는 행태가 경멸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IT 산업에서의 각축은, 학술 경진 대회가 아니라 소비자의 사랑을 놓고 겨루는, 여타의 자본주의적 시장 경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창의적 혁신을 세부 분야에서 이루지 못해도, 전체로서 소비자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산물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면 그가 승자로서의 찬사를 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보상일 뿐입니다.

마화텅(馬化騰. 마화등)은 광둥 성 사람이며,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됩니다만 덩샤오핑의 소위 남순 강화 후 개발이 본격화한 선전(심천) 경제 특구의 번영상을 보고, 그 혜택을 입으며 자라난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부친은 당시 한창 발돋움 중이던 이 지역 관청에서 주로 회계 업무를 맡던 공무원이었으며, 마화텅 같은 현대 중국형 창업주의 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로대로 이후 민간 기업 여럿에 몸담으며 커리어도 쌓고 안정적 부(富)도 모은 성실한 직업인이었습니다. 마화텅의 사진을 보면 (이 책에도 그 비슷한 평가가 나옵니다만) 무난한 환경에서 무난한 과정을 밟아 성공한, 이 시대 평균적인 중국 청장년층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그런 이미지를 두루 품고 있습니다.

마화텅은 일찌감치 전공을 컴퓨터공학으로 정하고, 학부 시절 성적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실제 상황(전산 장애 등)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영리한 학생이었습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제로 여러 계기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뛰어난 학생 그룹에는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증언을 통해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조용한 학생". 이런 평가는 마치 인생의 비교적 늦은 단계에 정계에 입문하여 지금은 일국의 대통령 물망에 오르기까지 하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퍼스낼리티와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성품과 외모는 많이 다르지만).

이 책을 읽으며 분명히 인식되는 교훈 중 하나는, 마화텅은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도 금전이든 작은 명성이든 인맥이든 뼈저린 교훈이든 반드시 무엇 하나를 챙기고 마무리를 짓는 타입이었다는 겁니다. 대학 시절 가장 뛰어난 학생도 아니고 장래도 그리 밝지 않았으나, 주식 투자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좋은 평가도 받고 바로 실용화하려는 의도를 가진 회사에 판매하기까지 하여, 향후 자립할 수 있는 종잣돈을 젊은 나이에 이미 거머쥐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여러 젊은 공대생들이 고학년 시절부터 반은 학생, 반은 창업자 역할을 겸하며 기업과 실무에 깊숙한 발을 들여 놓고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매우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건 형편에 지나지 않죠. 마화텅은 저런 컴페티션에서도 실속이랄까 뭔가 유형적인 과실을 거두고 한 코스를 마감하는 게 어떤 확실한 버릇이 든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습관이 모이고 모여 인생의 승자로 진입하는 길이 개척되는 거겠고 말입니다.

<삼국연의>의 유관장 세 의형제라든가 오호대장군 같은 영걸들, <수호전>의 백팔 호걸 같은 이가 거대한 사연을 만들고 역사를 바꿔 놓았듯, 세계 굴지의 기업 텐센트도 다섯 명의 선구자들이 의기투합하여 오늘의 거인을 우뚝 세워 놓았습니다. 주인공이자 오너인 마화텅, 장즈둥(장지동), 쩡리칭(증리청), 쉬천예(허진엽), 천이단(진일단) 등의 5인이 그들입니다. 연의류의 주인공들이 각각 대체할 수 없는 개성과 특장을 지녔듯 5인 역시 동시대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재능을 보유했기에 이런 거대한 창업신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장은 마 회장처럼 기술적 지식에 정통한 엘리트, 쩡은 (물론 그 역시 엔지니어지만) 과감한 추진력으로 애로를 개척하는 타입, 쉬는 전체의 의견을 조정하는 완충형 인격자, 천은 (특이하게도 화학 전공에 변호사 자격을 갖춘) 결정적 국면에서 의사 결정에 모멘텀을 제공하는 자문역, 뭐 이런 식입니다.

이 텐센트의 발전상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 굴지의 IT 기업의 사연과 성취를 닮은 점이 많아 눈이 저절로 갑니다. 가령 텐센트의 통신앱 "위챗"이 중국 사용자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 때, 수익의 파이프라인만 제공하고 실속은 이 기민한 기업에 다 뺏길 판이라고 위기의식을 느낀 통신사들은, 텐센트로부터 "정당한 요금"을 책정해 물릴 것을 엄포 놓기도 했고, 중국 정부는 이를 지지할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네티즌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백지화했다는 건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닙니까? 우리도 이 사태가 터지기 대략 1년 전(후가 아니라 전이에요. 우리가 더 빨리 겪었습니다)쯤, (주)카카오와 3대 통신사가 큰 알력을 빚고 정부도 당시 통신사 편을 드는 듯한(중국과 달리 확정적인 제스처는 아니었고) 모습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당시 카카오 측이 내세운 가장 강력한 논리가, "망 중립성의 원칙"이었습니다. 사용자가 계약에 따라 통신사에 가입하고 망을 이용하면, 계약 조건에 따라 뭘 전송, 수신하든 새로운 제약이나 별개 요금이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역시 이 문제는 "통신망의 혁신(LTE 채택, 개발)"로 돌파구를 찾아, 통신사는 데이터 중심 요금제로 사용자들로부터 수익을 챙김으로써(따라서 다양한 컨텐츠의 개발로 소비 패킷량이 늘어날수록 자기들도 이익) 소위 무임승차의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LTE 같은 건 카카오 등을 좋은 일 시키려고 연구 개발하는 게 아니라 통신사의 진화, 자체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맞부딪혀야 하는 과제였으며, 남아돌아가는 여유 대역을 통해 돈까지 버니 서로 win-win하는 결과가 아닐 수 없죠. 아무튼 텐센트가 각종 난관을 헤치고 오늘날의 입지를 굳히기까지 밟아 온 경로가, 주인공 이름만 바뀌었을 뿐 한국에서 친숙히 접하는 "성공 드라마"의 사연과 너무도 닮아 흥미로울 뿐입니다.

텐센트는 다양한 플랫폼과 서비스를 개발해서 적어도 4억 정도의 중국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만,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소개하는 건 메신저(인스턴트 메신저. IM으로 약칭하는 것)인 QQ와 스마트 기기 통신 앱인 위챗입니다.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전개되는 건 AOL(2000년대 전반기)이나 MSN(후반기)와의 피터지는 경쟁,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위챗의 승승장구하는 사연들입니다. 저자는 왜 AOL이 중국 시장에서 패퇴했는지를 두고 몇 가지 이유를 분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현지(중국) 언어 지원이 부족했다는 걸 듭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외산 매신저가 2000년대 전체를 들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버디버디 등 몇 가지 브랜드가 국지적으로 충성스런 소비자를 장악한 게 고작이죠. MSN은 제 기억으로 2006~2009년 사이에 직장인, 학생 층을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는데 이 책에 나오는 MS의 중국 공략 시기와 비슷합니다. 공격적 마케팅을 편 데다 무엇보다 윈도에 끼워팔리는 강력한 이점을 지녔기에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널리 쓰였습니다.

어떻게 QQ는 MSN을 누를 수 있었는가? 첫째 어린 층을 사로잡기 위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인터페이스를 삽입하여 "소통의 즐거움"을 추구한 전략입니다. 다음으로 QQ는 (제 생각에 이게 중요한데) 모르는 이들과의 관계 맺기에 보다 주력한 반면, MSN은 이메일 통합으로 계정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기존에 알던 이들 중심의 네트워크 강화"를 지향했습니다. 당시 중국 인터넷의 대세가 후자보다는 전자에 놓였던 만치 이 점이 필승 포인트였다는 건데, 사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 심지어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큰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또 첫째 논점과 관련, 결국 어린 층이 대학생이 되고 그들이 사회로 진출하며 직장에서도 이 메신저를 쓰게 될 테니, 현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본 전략이 주효했다는 설명인데 그렇다면 한국의 버디버디는 왜 망했는지 시원한 설명이 또 안 되죠. 책에는 이 외에도, QQ가 초창기 잘 나갈 때의 한국 싸이월드에서 아바타 키우는 플러그인을 보고 이거다 싶어 따라했다는 말도 나옵니다. 한때 그토록 전 한국인을 사로잡으며 인터넷상의 거대한 관계 구축 거점이자 아이덴티티 단장의 아성 노릇을 했던 싸이가 왜 지금 이꼴이 되었는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고, 어떤 특정 성과를 미래로까지 지속적으로 못 살려 내는 게 한국 산업계의 고질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QQ의 전략적 기로 중 또 하나 중요한 게, MSN이 야후와 손잡고 메신저 연동을 추구한 승부수에의 대응이었습니다. 이때 많은 이들, 심지어 텐센트 내부에서도 "개방이 아닌 폐쇄를 택한 우리들만의 고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마 회장은 과감히 "애써 파악한 우리 고객들의 특성, 취향을 타사의 자산으로 넘겨 줄 수 없다"며 기존의 태세를 고수했죠. 책에서는 "야후의 기존 점유율이 낮아 별 시너지 효과가 없었고, 얼마 후 웜 확산이라는 치명적 실수를 MSN이 저지른 후 QQ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사실 호환성, 개방성 여부는 지금까지도 뭐가 낫다 못하다 결판이 난 문제가 아닙니다. QQ가 한창 성장하던 시절 애플은 그 폐쇄적인 맥 운영체제 때문에 유저들에게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러니까 회사가 망해가는 거다." 혁신의 아이콘이자 컨슈머들에게 가장 확고한 로열의 대상이 되는 지금도, 애플의 OS(컴퓨터든 스마트 기기든)는 여전히 대외적으로 닫혀 있지만, 이를 비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치일 것입니다. 마 회장의 사업 태도에서 확실히 교훈으로 삼을 또 하나는, 상황에 따라 기존 정책을 고수하거나 표변하거나에 어떤 제한을 둬선 안 된다는 겁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동업자 관계였던 이병철 - 조홍제(효성 창업주) 두 분이 삼성 덩치가 커짐에 따라 끝내 결별하고 말았듯, 텐센트 창업의 다섯 기둥 중 세 사람은 대세를 따라 회사를 떠난 후 독자 행보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하고, 주-종(최대 지분권자와 2인자들)의 초기 차이가 이처럼이나 극복 안 되는 근원적 팩터인지 깊이 곱씹게도 만듭니다. 뭐 거물은 남의 둥지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 없으니, 능력껏 새 입지를 개척해서 자신만의 성을 세우는 것 역시 일류 사업가의 로망이겠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이처럼 뜻대로 한 번 휘젓고 이정표를 세우는 게 진짜 인생이지 싶더군요. 이 책은 IT 기업사의 한 단면을 참 상세히, 그리고 재미있게 조명하는데, 2006년 기업 순위를 인용할 때 "알렉사 닷컴(지금은 사람들이 이게 뭔지도 모를 겁니다)"의 자료를 근거로 삼는 등 지난 시절 그때 그런 게 있었지 하는 향수를 진하게 부르는 점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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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의 표정
정민 엮고 지음 / 열림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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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막집, 신석기 시대 움집을 짓고 살던 인류가 비천한 동물이나 다름없던 단계에서 벗어나 문명인으로서 품격을 누리고 살게 된 징표는 이론 없이 의, 식, 주의 양식 진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련된 정서의 다듬어진 표현이나 심오한 종교적, 도덕적 각성 등은 정신의 산물, 개성, 성취일 뿐이라서 그게 감각적으로 캐치되질 않습니다. 사람의 생이 사람다운 각성을 이뤘느냐는 누구의 눈에도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의, 식, 주 문화가 어느 정도 안정된 꼴을 갗췄느냐에 달려 있고, 정주 문명이 유목 문명에 비해 높은 평가(부분적으로 부당하거나 과장된 면이 있어도)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 혹은 나아가 동아시아의 선진 문명을 일구고 살던 옛사람들이 얼마나 이른 시기부터 문명인으로서 감성과 물질 양면에서 여유를 누리고 살았는지 대번에 찾을 수 있는 징표가 있습니다. 특수 계층만이 향유하던 고급 문화의 결정체는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거나 아예 현전(現傳)하지 않지만, 기와의 끝막음을 한 작고 귀여운 장식인 "와당"은 전통 기와 지붕을 올린 가옥이 있는 곳에 찾아가 흔히 접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한옥마을 혹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민속촌이 아니라도, 서울 강북 일대만 해도 재개발이 더디 이뤄진 골목길 어귀에서 어렵지 않게 본는 게 와당입니다.

사람 사는 집이란 게, 관리상의 중대 고비를 맞지 않는 이상 사람이 거기 올라가 볼 일은 드물었겠는데(도둑놈이 아니고서야), 다만 지상의 사람들과 지붕이 아슬아슬한 맞대면을 이룰 기회라면 비 오는 날 처마 밑에서 비를 그을 때, 혹은 머슴놈더러 "이리 오너라"를 외친 후 대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올려다 보는 지붕의 끝자락입니다. 아주 정교한 예술 작품까지는 아니라도, 보는 이들의 눈을 의식해 (혹은 거주자 본인의 만족을 위해서) 이런 곳까지 뭔가 문양을 그려(새겨) 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먼 후손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합니다. 하긴 사람이란 본디 구석기 시절 토굴에 살면서도 희미하나마 예술의 맹아를 남기려 애를 쓰던 별난 동물이며, 이런 마음의 여유(혹은 종교적 동기에서라도)를 갖는다는 점 자체가 오늘날 스스로를 향해 "인간다움"으로 지칭할 수 있는 그 모든 특성, 오로지 인간만이 갖는 존엄한 특징들 중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와당에 새겨진 다양한 문양들로부터 우리는 그 시절 사람들의 애틋한 정서 한 줄기, 자연과 동식물을 향해 문명 속에서도 품는 애정의 단초, 무병장수와 사후 세계, 혹은 종잡을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노스탤지어 따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수키와에다 막음처리를 하고 문양을 새기는(물론 일의 순서로야 문양의 양각, 음각이 먼저겠습니다만) 이 와당은 물론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예처럼 수키와에 부착하는 게 보통입니다만 암키와에도 못할 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의 도판들은 수키와의 와당을 주로 다루네요.

<좌전>에 보면 이른바 사흉이란 게 나옵니다. 혼돈, 궁기, 도올(김용옥이 이 이름을 따 아호로 씁니다), 그리고 도철인데, 이 도철은 인간의 비루함과 탐욕을 상징하는 신화상의 동물이죠. 한자로는 饕(탐할 도), 탐할 철(餮) 자를 쓰는데, 이 두 글자 모두 이 용례 외에는 다른 곳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희귀자들입니다. 저자 정민 교수님(물론 우리가 아는 그분입니다)은 이 문양을 두고 "고릴라"라든가, 주름살 많은 할아버지라든가, 놀라서 뜬 눈이라든가, "술취한 사내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 같다고 즉흥 감상의 일단을 피력합니다. 은나라때부터 즐겨 사용된(물론 수막새에) 문양인데, 이 책에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전국 시대에도 애용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들이 소개되었네요. 선악의 평가는 후대에 내려진 것이고, 고대인 특유의 물질적 풍요와 미래의 안녕을 기원하는 심리가 투영되었다고 보는 게 정설입니다.

남북조 시대에만 해도 수키와에 새겨진 여러 짐승들의 형상은 벽사(辟邪)의 뜻을 담았다고 이 책에도 나와 있습니다(p141 등). 猴(원숭이 후) 역시 한국에서는 잔나비가 재수없다고 여기는 게 보통이었던 터라 우리 눈에는 신기하게 비춰지는 게 사실입니다. 당나라 때 것으로 여겨지는 와당을 보면 벌써 민중의 삶 깊숙이 유입된 불교 문화를 반영해서인지 금강역사라든가 연주문이 보이는 등 시대상의 변화가 물씬 느껴지죠.

수레바퀴라든가 해바라기 문양은 출토된 후 연구자들이 그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만 마치 현대의 추상화처럼 보는 눈에 따라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감이 있습니다. 중국에서야 너른 영역에 해바라기가 자생했으므로 해당 와당에 이름이 붙은 대로 葵(해바라기 규) 자가 일찍부터 고안되었고, 역시 문양을 짓는 이들도 좌우사방대칭의 그래픽을 선호하는 게 인지상정이었기에 이 해바라기나 수레바퀴 말고도 사엽(四葉. 네 잎사귀)의 도형이 즐겨 쓰였음이 이 책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책의 후반부로 들어서면 한대(漢代)를 거쳐 표음문자의 표준화가 완결되어 가던 사정이 엿보이는데요. "만세"라느니 "만물함성"이라느니 하는 기원형 구호가 새겨지기도 하고, 저자께서 지적하시듯 뜬금없이 "무(無)" 한 글자만 덜렁 보이는 와당도 있습니다. 한자가 본디 그 대종이 그림의 본뜸에서 비롯했지만(이 외에 지사, 형성, 회의, 전주, 가차가 있지만), 이런 역사적 진척이랄까 변천 과정을 보면 인류가 어떻게 자신의 내심을 타인에게 전달해 가는지 그 정격화한 원리를 보여 주는 것도 같아, 심미적 호기심과 만족 못지 않게 언어학적 영감도 떠올리게 돕는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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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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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 "토니와 수잔"에서, "수잔"은 두 레이어에서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우선 우리 독자들이 마주대하는 3인칭 주인공이 수잔이고, 소설 속의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 잠시 현지인으로 얼굴을 비추는 클럽 가수 이름이 수잔입니다. 둘은 이름이 같지만 직업과 신분과 처한 처지가 당연히 다르며, 제 생각에는 성격과 내면도 꽤 다른 빛깔인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소설을 창작한, 한때는 가망 없는 작가 지망생으로 여겨졌던, 수잔의 전 남편 에드워드는 분명 어떤 의도를 갖고 단역에다 그 이름(자신의 전 부인)을 붙였을 테고, 에드워드가 수잔(실물. 동시에 우리 독자에게는 캐릭터)에게 풀어보라며 던진 퍼즐을 해결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열쇠이겠으니 말입니다.

문제의 인물은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인 "토니"입니다. 중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자신의 신분과 걸맞은 여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던 중년 남성인 그는, 어느날 외딴 지방 주간고속도로에서 아내, 딸과 함께 차를 몰다 불량배 셋을 마주친 후 인생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비열하게 시비를 건 불량배들에 의해(셋 중 한 놈이 특히 질이 나쁘며 모든 범죄를 주동하는 위치네요) 차를 뺏긴 토니 교수(수학과)는, 아내와 딸이 엄청난 위험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위력에 의해 굴복한 채 결과적으로 사태를 방치하고 맙니다. 소설 속 소설을 읽는 주인공 수잔이나, 그 액자 밖에 있는 우리 독자들은 이 두 불쌍한 여인들이 어떤 운명에 처할지 뻔히 짐작하면서도, 불의가 세상 한 구석을 잔인하게 점령하지 않기를, 죄 없는 이들이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질 않기를 (헛되이) 기원합니다. 헌데, 두 여성을 지켜야 할 보호자의 의무를 진 데다, 수잔이나 우리 독자와는 달리 그들과 같은 세계 같은 장소에 놓였던 토니 헤이스팅스 교수는, 우리나 수잔처럼 그저 무력한 희망만 되뇌어서는 안 되었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습니다.

수잔은 전 남편이 보내온 소설(토니와 그 가족 이야기) 끝자락을 읽어가며, 이 흡인력 있는(비록 내용은 절망적일망정) 소설을 쓸 만큼 "실력이 는" 남편의 과거에 대한 복잡한 심경의 회고에 빠지고, 아울러 현재의 남편인 아놀드(외과 의사)라면 이 소설(속 소설)의 토니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했을지 상상해 봅니다(결코 나와 내 딸을 불량배들의 손에 호락호락 넘겨 주지 않고, 놈들의 이빨과 눈알을 씹고 빼먹을 각오로 끝까지 저항했으리라 믿는데, 이 믿음은 사실 현재의 자신이 누리는 행복에 대한 어설픈 합리화에 지나지 않음을 그녀는 곧 깨닫습니다). 수잔은 소설을 읽으며 명백히, 토니와 전 남편 에드워드를 동일시하기 시작했고(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죠. 비록 수잔이 처음에 충분히 암시하지는 않았더라도), 에드워드 역시 이런 소설을 쓰면 수잔(헤어진 전 남편에 대한 의식적인 왜곡에 빠지기 쉬울 심리의)이 기꺼이 토니와 자신을 나란히 대어 보리라고 짐작하면서 이 "작품"을 도전 삼아 그녀에게 보내 온 것입니다("당신은 과연 공정한 사람이었어?").

작품이 잘 쓰여졌다고 느낀다면 그 독자는 곧 주인공 토니의 행동과 성격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아니라면 소설 자체가 실패라는 뜻입니다). 수잔은 분명 주인공들이 처한 운명에 개탄, 격분하면서도 이 작품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소설에 빠져든 독자(우리+수잔)의 반응이란,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토니에 대해 경멸감을 폭발시키며 단죄할 것인지, 아니면 한심하기는 해도 나 역시 저 상황에서 크게 다른 행동을 보여주긴 힘들었겠다며 체념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토니 헤이스팅스 교수는 (수학과 교수라면서) 눈 앞의 폭력과 맞대면하기 괴로운 나머지 놈들의 말도 안 되는 핑계와 수작을 말 그대로 믿는 철저한 비논리성과 어리석음을 노출하는데, 우리 독자들이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대목이 바로 여기일 것입니다. 놈들의 말에 속는 건 사실 비겁한 자신을 용서하려는 자기기만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수잔이 새로운 갈등에 빠지는 건, 그저 토니의 무력한 행보에 자기 반성을 투영한 소극적 공감을 결국 자인해서라기보다, 특히 토니가 보여 준 (소설 속의) 자기기만의 과정이 그 무엇과 소름끼치게 닮아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거은, 현재 자신이 유지하는 위태한 결혼생활에 내재한 온갖 거짓과 위험 요소를 애써 모른척해 온 비겁한 타협지향적 태도가 아니었을지요. 조금 스포일러입니다만 결국 토니는 소설 속에서 놈들의 두목격인 레이와 단둘이 대면한 후 그 나름의 응보를 가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고로 눈이 멀게 됩니다. 토니 헤이스팅스는 가장된 안온한 현실 속에서 숱한 모순과 비위를 보고도 "눈이 멀어 있었으며" 이제 극한의 진실과 마주친 후 영적 개안을 육적인 시각과 맞바꾸게 되는 의도라고 해석했습니다. 소설을 덮은 후 수잔이 보이는 몸부림의 방향은 단 하나입니다. "일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눈을 뜨고, 또 어디서부터 눈을 감을 것인가. 그것이 나 자신의 감정이든 타인의 거동에 대한 평가이든 무관하게."

끔찍한 성폭행 범죄가 주된 모티브인 것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이런 게 배경으로 깔리면 독자들부터가 [정상적 범주의] 성에 대해서까지 싸잡아 거부감을 갖죠. 일시적일망정), 이 작품에는 액자밖 인물들의 불륜, 애욕이 섬세하게(말초적이진 않고 그 미묘한 심리 부분이) 묘사되어 있고, 한심하게도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토니가 (제자 대학원생에 대해) 품는 떳떳지 못한 애욕도 끈적한 심리의 부분이 매우 정직하게 펼쳐집니다. 우리들의 의무감, 양심, 생존 욕구, 현실 도피 충동의 모든 기저에는 결국 "충족된, 혹은 좌절되거나 결코 만족될 수 없었던 섹스"가 깔려 있다는 점도 작가가 암시하려 든 포인트 중 하나이겠습니다.

우리가 놓쳐선 안 되는 핵심 인물 중 하나가, 정의감과 승부욕에 불타는 형사 안데스인데(이 이름을 "앤디스"라고 불러야, 후반에 악당 레이가 짐짓 잘못 부르는 "갠지스"와 라임이 맞을 것 같네요), 그는 진지하게 절차를 밟는 수고를 번거롭게 다 치르면서도(피살자 두 여인의 시신을 보고 남편보다 더 격분하는 게 그입니다), 한편으로 무작정 토니의 말을 믿지는 않는 신중함을 보입니다. 물론 공판 절차에서 사건이 배척당하지 않으려면 치밀하게 케이스를 완성해야 하고, 그 편이 자신의 경력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정도 있겠지만 여튼 그의 주된 동기는 순수한 정의감, 나쁜 놈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믿음 쪽입니다. 이 안데스 경사의 정열적인 행보가 이처럼 강조된 것 역시 토니의 미적지근한 삶의 태도와 대비시키기 위함이었겠으며(사실은 다른 동기가 하나 더 있지만 스포일러라 생략하겠습니다), 그의 동선은 또한 믿을 수 없을 만큼 불합리한 현실이 안겨 준 충격의 몽환으로부터 안개를 걷어내는 유일한 동력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사실 막판에 레이가 자백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독자들 역시 100퍼센트 그의 유죄를 확신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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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업계지도 - 한발 앞서 시장을 내다보는 눈
한국비즈니스정보 지음 / 어바웃어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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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천안에서 V리그(한국 프로 배구 리그) 올스타전이 열렸습니다. 올스타전은 프로리그를 갖춘 종목, 국가에서는 팬들에 대한 서비스, 혹은 스포츠인들의 친목 도모를 위해서도 반드시 치러지는 행사인데요. 소속 팀에 무관하게 감독, 선수, 심판 간에 우의를 다지고 평소 못 보던 모습을 구경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흐뭇한 광경 말고도 제가 개인적으로 눈여겨 본 건,  리그에 직접 참여하여 해당 기업의 홍보 효과를 보려는 당사자 외에, 다른 어떤 기업들이 협찬하여 그들의 로고를 대중에게 노출하려 애썼나 하는 거였습니다. 이런 스포츠 행사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거나 관심 갖는 기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향후 경기에 대한 전망을 좋게 본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죠. 제 생각에는 총체적 호황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밝지 못해도, 국지적으로는 여전히 맹렬한 현금 흐름이 이뤄지는 듯했습니다. 쉽게 말해 (잘 안 풀리는 곳이 압도적으로 많아도) 잘나가는 기업은 여전히 잘나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뜻입니다.

김성근 감독은 컴백 2년차가 되던 작년 어느 인터뷰에서 "(없던)제약이 많아져서 불편하다"라고도 털어놓았습니다. 자세한 언급은 없었으나 아마도 협찬사들의 로고를 어깨나 팔, 등에 붙이는 리그 협약을 두고 이른 것이겠습니다. 유니폼 등번호(콩글리시로 하면 백넘버) 하나에 민감해져 컨디션이 극과 극을 오가는 선수들의 예전 행태를 보면 보수적인 축에서는 이런 상업적 행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이해 관계가 직접 부딪히는 구단 운영 기업측도 마찬가지 -배구를 예로 들자면 흥국생명과 농협보험 등). 저는 반대로 적극 옹호 쪽인데, 자본주의가 머리를 짜내서 기존에 없던 마케팅 활로를 개척하는 건 아직 생명력이 왕성하다는 반증도 되며, 리그도 구단 직접 후원 외 미세하나마 다른 채널을 모색하는 게 먼 장래를 위해 결코 나쁠 게 없기 때문이죠.

기업의 로고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시각적으로 흐뭇한 느낌을 줍니다. 본래 시청자들, 소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만든 예쁜, 선명한, 유쾌한 디자인일 뿐 아니라, 이 작은 나라에 기업이 이렇게 많았구나, 눈높이가 높아진 일부의 기준을 만족시키지는 못해도 사람들이 이처럼 먹고살려고 건설적인 발버둥을 치는구나, 대강 이런 안도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경제 역동성을 보인 미국도 한번 침체의 불길한 기운이 엄습하자 일단 직장을 잃어버린 많은 이들이 재기의 꿈을 버리고 노숙의 길을 택했습니다. 시스템의 문제도 물론 큽니다만 일단은 경제에 참여하는 이들의 자활 의지가 경기 활성화를 위해선 가장 중요한 팩터입니다. 한국은 모르긴 해도 그 시절의 미국처럼 가지는 절대 않으리라는 게 저의 확신입니다. 근로자도 업주도 돈 좀 벌어보려고 이렇게나 일상에서 연구 영역에서 혹은 투자 섹터에서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죠. 독일어 속담에 Not macht erfinderisch 같은 게 있듯이 말입니다.

이 책은 어바웃어북 출판사에서 매년 발간되는 인포그래픽 형식의 업계 전망 분석서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포그래픽을 잘 다루고, 가장 권위 있는 정보를 정리하여 펴내는 곳에서 연례적으로 내놓는 자료이기에 매년 반드시 검토한 후 한해를 시작하곤 합니다. 중복되는 정보,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목도 물론 많지만 이 책을 열독해 온 층은 어차피 그런 점을 다 감안하고, 그 와중에서도 변화가 특히 보이는 파트에 정력을 기울여 책과 정보를 소화할 것입니다.

삼전은 작년 갤노트 7 불량사태 때문에 전례없던(업종 전체나 아예 세계 기업사를 놓고 봐도) 시련을 겪었습니다만 다들 알다시피 실적이 매우 양호했습니다(물론 불과 며칠 전엔 정치 추문에 총수가 연루되어 구속 직전까지 가기도 했으나 더 지켜 볼 일이죠). 그런데 이게 통신업계에는 어떤 파장을 끼치겠는가. 많은 전문가들이 내다본 대로 분위기를주도하던 아이템이 단종되었으니 당연히 싸한 바람이 불겠지만 이 악재 말고 업계에 활력을 줄 만한 다른 추동력이 연달아 발견되는 편입니다. 소비자들에게 욕을 먹는 단통법 역시 일단 마케팅비용(흠....)을 줄인다는 점애서 장기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통신사들의 어깨를 가볍게 하겠고 말입니다. SKT의 T맵은 뭐 스마트폰 출시 초기부터 해당 통신사의 소위 킬러 앱으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지만 (책의 서술대로)요즘도 같은 파급력을 누리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LG 유플의 "비디오 포털"은 저로선 처음 들어보는데 저자들은 호의적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통신사와 미디어업체 간의 시너지를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도 사실 이 책 출간 초기부터 꾸준히 나오던 말인데 아직도 주장 단계에 머물고 있는 편이며, 대신 통신사가 자체 미디어 채널 역량 강화를 시도하는 추세는 더 뚜렷합니다("옥수수"라든가).

예전에 이익치씨가 전국민이 환란의 고통에 신음하던 시절 전도사처럼 전국을 누비며 "코스피 지수는 이천을 넘어 삼천을 넘나들 것"을 장담하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결국 불미스런 일에 엮에 큰 곤경을 치르고 그 상전의 아들인 정몽준 씨한테 "참 불쌍한 사람" 같은 조롱을 듣기도 했지만 당시 돈 쓸 곳을 못 찾던 아주머니들, 기타 여러 물주들에게는 큰 인기를 누리고 확신을 주던 인물입니다. 이 이익치씨의 활약으로 유명한(물론 그 이전부터 한국 굴지의 증권사였던) 현대증권이 작년 KB로 흡수합병되었습니다. 장남(사실상) 몽구씨의 현대차그룹이 큰 덩치로 남아있긴 하나 현대중공업이 저처럼 고전하는 중이며, 특히 몽헌씨 계열의 "현대그룹"이 거의 풍비박산된 판이니 한때 한국을 주름잡던 정주영 신화는 근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반면 외환위기 즈음 미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내에 갓 진입했던 미래에셋은 증권업계 이제 1위로 올라섰습니다. 2위는 NH인데, 어떤 이들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뭐가 정신없이 변하긴 하지만 결국 제자리" 같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걸 보면 20년 전과는 구조와 구도의 근본 성격이 변했다고 해도 충분합니다. (서평 맨앞에 배구 이야기를 꺼낸 건 이런 소회 때문이었습니다. V리그 주 후원사가 농협이라서)

두산은 투자자들에게 오랜 기간 근심덩어리였습니다(어디 국외자뿐이겠습니까. 가장 걱정이 심한 건 그곳 직원들이었죠). 이러던 두산의 움직임 속에 작년 단연 눈에 띈 건 역시 두산밥캣의 상장이었죠. 자 과연 이 루키가 해당 기업군은 물론 향후 한국경제의 주요 성장 동원으로 효자노릇을 할 것인지 여부가 대단히 주목되는 편인데요. 이 책은 그 전망을 대단히 밝게 보는 편입니다. 이곳이 잘나가는 이유는 북미 (건축)시장이 근년 들어 활황을 보였다는 데에 있는데, 트럼프가 나프타 재협상을 선언한 지금 전망이 계속 장밋빛일지는 더 지켜 봐야 하겠습니다. 뭐 미-멕시코국경에 거대 콘크리트 장벽을 쌓는 것도 분명 일감은 일감이겠으니...(농담입니다)

의외로 사양산업 취급을 다 받았던 정유업계가 작년에 승승장구했습니다. 이는 작년 한해 유가가 다시 상승 기미를 보였기 때문인데, 다들 아는 것처럼 OPEC이 관리 모드에 들어간 게 큰 이유죠. 다만 이게 추세적 상승요인이 될 수 있을지가 의문인데, 뉴스에 막 나오는 것처럼 트럼프는 비축유도 계속 풀고(오바마 정책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예) 사우디 등 산유국에 대해 공세를 이어가려는 모습입니다. 이 책은 뭐 독자로서 언제나 만족입니다만 정치 언급이 최소화되어 있고(장점이기도 하죠), 그해 초 시점에서 최신 국제 정치 변수가 덜 고려된 게 좀 아쉽다면 아쉬우며 대체로 낙관적 전망에 기운 게(새해 초에는 기분 좋은 마인드로 시작해야 맞겠지만) 다소 여지를 남깁니다. 여튼 이만큼이나 자료가 잘 정리되고, 말 그대로 한눈에 업황과 개별 기업 건강성을 들여다 보게 해 주는 점은 너무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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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에비터블 미래의 정체 - 12가지 법칙으로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것들
케빈 켈리 지음, 이한음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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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들이 발 디디고 서 있는 현재가 언젠가는 과거의 궤도로 사라지고 만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온다는 점도 역시 "필연적"이긴 하지만, 그 미래가 어떤 성격인지, 이 미래가 우리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는 반드시 정해져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나 호킹 등의 과학자(물론 그 훨씬 이전의 다른 분들 포함)가 시간의 차원성을 논의하며 "미래를 볼 수 있다" 비슷한 주장을 펼 때에는 어떤 일련의 사건군이 이미 정해져있음을 가정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볼 수 있는" 사건도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이며, 현재에 이를 알 수 있었던 행위자와 상호 작용이 가능하다면 미래가 꼭 고정적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책에 제시된 탁월한 예견을 미리 알고 장래를 대비하는 독자라면, 급변하는 미래의 파고에 그저 수동적으로 대응할 뿐인 다른 미래의 자신과는 운명(?)을 달리 개척해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2가지 법칙화라고 하면 좀 도식적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12법칙은 내용의 전부가 아니라 읽는 이들을 위한 "마크"에 불과합니다. 챕터의 제목이 보기 좋게 붙여져 있고 자계서 같은 형식이라며 착각을 부르기 좋지만, 책의 진짜 가치는 그런 도식화가 아니라 방대하게 인용되는 사례들, 혹은 그 사례들로부터 도출되는 저자의 참신하고 과감한 주장에 있으니 정말 펼쳐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오히려 너무 친절한 편집이 책에 대한 오해를 부를 수도 겠네요.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은 물론 우리가 잘 알듯 테오도르 넬슨이 최초 고안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일반인들이 알게 된 건 인터넷 혁명이 본격화하고서죠. 텍스트가 존재의 의미를 본격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저 인터넷 혁명 몇 년 저술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네그로폰테의 책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도대체 인터넷이 없었을 땐 사람이 어떻게 살았나요?" 아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하긴 "당연한 걸 뭘 물어?"라며 모든 혜택이 그저 당연히 주어진 것인줄 로만 알고 게임만 하는 애들보다는 저런 "반대 사정을 가정해 보는 회의적"인 태도가 얼마나 바람직합니까. 어떤 수학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미지의 암흑에 둘러싸여 있었을 과거엔 천재들이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라며, 이미 이뤄질 게 다 이뤄지고 만(?) 현재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혁신가들이여 기뻐하라. 진짜 인터넷 혁명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거두는 대로 연구하는 대로 (아직은) 다 당신의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신나고 영감을 솟게 하는 구절이었습니다. 진짜 이 구절 하나를 (신나는 맥락 속에서) 읽은 것 하나만으로도 책 읽은 보람이 있습니다.

제일 궁금했던 게 과연 이 정도 레벨의 저자께서 그 흔한 주제인 인공지능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ㅎㅎ 저자께서는 너무 심오한 말씀을 하셔서, 아 정말 반도체 덩어리가 인간의 지성을 능가할까 같은 협소한 고민을 하지는 않으시더군요. 우주에는 마음, 인간에 깃든 그 마음뿐 아니라 상상도 못할 만큼 다양한 가능성으로 "마음"의 형성이 존재할 수 있으며(어디까지나 가능성) 이제 인간이 그 가능성 중 하나인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겁니다. "인공지능 따위가 어찌 사람의 복잡미묘한 능력 그 일부라도 흉내낼까?"가 아니라, 이 인공지능이 (애초에 잠재되었던)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 중 일부(인간이 상상도 못하던)를 구현하리라는 기대에 몸을 떠는 어조가 다 느껴집니다. 이인류가 해결 못한 온갖 과학상의 난제를 이 지능은 풀어 줄 수 있을 테고(이분은 일자리 이런 것보다 이 점이 더 관심사네요 ㅎㅎ), 그 지능 역시 또다른 차원의 문제들을 대면하고는 절망하리라는 겁니다(이 정도면 할 말을 잃게 하네요). 저자의 말 중 딱 한 가지는 누구나 동의할 만한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누구인지 알려줄 다른 지능이 필요하다." 독자로서 제가 갖는 생각은 바로 프로그래머이자 창조주인 우리가 이를 모르기에 그 복제품이자 모사품인 "인공지능"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이분은 이런 식으로 문제를 인식하는군요.

제조환경이란 본래 산업혁명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유형적이고, 제조원가가 노예의 족쇄처럼 해당 상품을 옥죄는 처지였고, 같은 물건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는 녀석이었습니다. 이러던 게 보십시오. 텍스트 온리의 저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복잡한 영상물마저 온갖 불법 복제품이 다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쉽사리 해적판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너무나 보수적인 출판업계의 태도) 때문에 e-book이 대단히 느리게, 상대적으로 드물게 나옵니다. 책의 퓨처가 전자책이라는 전망은 우리 생각처럼 그리 폭 넓은 동의를 얻는 견해가 아닙니다. 어떤 전망이든 보기 좋게 뒤집힌 후에야 그게 그렇게 취약했었나 사람들이 비로소 돌아보게 되고, 그런 반성이라도 하는 사람은 그나마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저자는 모든 "제조품"이 근본적으로 복제 가능하고, 완전히 동일한 포멧으로 여러 사람에 의해 공동 소유(점유)된다는 이 본성 자체가 세상을 본격적으로 바꿔 놓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을 이해한 이들도, "어떤 건 그렇고 어떤 건 결코 그렇게 안 될 것"이라며 분절적인 인식을 해 오던 데 지나지 않는데, 저자는 거기에 반기를 드는 겁니다.

제가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애들 앞에서 PT를 하려면 손으로 일일이 2절지에다 색깔을 그려 가며 자료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를 망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을 뿐 기존의 성과를 살릴 수가 없었죠. MS 워드(혹은 널리 워드프로세스 소프트웨어)를 쓰게 되며 가장 놀란 건, 이제 발표 자료를 만들 때 혹 실수를 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직전에 save한 단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부분만 달리해서 몇 가지 다른 개성을 부여한 "동일한 본판"을 무수히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제는 그저 당연할 뿐으로 여겨지는 이런 이점이, 미래에서는 일반화한 문명의 장점으로 모두가 누리게 될 수 있다는 저자의 과감한 도약은, 석학이란 이런 스케일과 깊이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다시 안겨 주었습니다. 칸트나 헤겔도 동시대인들에게 이런 경탄을 안기고, 그 독자들에게 내실 있는, 그리고 "불가피한" 미래의 대세를 수용하고 준비하게 돕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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