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경제학 -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생활밀착형 경제학 레시피
유성운.김주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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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라고 하면 그 처음부터 끝까지 난해한 수식과 도표의 장구한 행진일 것만 같아도, 그 실상은 평범한 개인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없이 많은 선택과 결정들의 합리적인 진행을 돕는 매뉴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매뉴얼이나 계획안에의 충실한 의존만으로 언제나 최상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아도, 충동과 감정에만 쏠린 어리석은 행동을 피할 수는 있다는 점에서, 원리와 원칙은 언제나 유익한 플랫폼입니다. 또, 원리가 도출되는 과정을 면밀히 살피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상식의 범주 안에 드는 것들이 대부분, 아니 절대다수입니다.

이런 원리와 법칙들을, 우리들 대부분이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봐 왔던 연예인들의 부침사나 우여곡절, 성공담과 스캔들에 빗대어(적용하여) 설명한다면, 경제학 소양이 전혀 없는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 꽤나 재미있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사실, 독자들이 정말로 일상에서 겪는 예를 들어 설명하면, 머리는 수긍해도 가슴이 맹렬하게 거부하던 저마다의 아픈 기억이 해당 교훈과 결부되기 때문에, 오히려 반감만 키우고 그냥 넘어가는(=해당 원리를 결국 이해 못한 채 남겨두거나 종래의 오해를 교정 못하는) 일도 잦습니다. 서술을 너무 "생활밀착형"으로 진행해도 효과를 못 보는 책들이 이래서 나오는 거죠.

그러나 멀찌감치 떨어져 그저 환상과 선망의 대상으로만 남는(남아야 할) 연예인들의 사례에 견주는, 이 책과 같은 설명이라면 대개는 (특히 아재팬들 사이에서) 공감과 의견 일치가 잘 이뤄집니다. 오빠부대와 달리 삼촌팬들은 특정 그룹에 대한 충성도가 약할 뿐 아니라(읽어보니까 저자분들- 한 분은 중견기자, 다른 한 분은 데이터 엔지니어-도 마찬가지, 아니 더하더군요ㅋ) 서로 다른 팬덤 사이에서도 상호 이해와 교감이 비교적 잘 이뤄지는 편이니 말입니다. 저자 두 분은 책에서 대개 소녀시대 팬의 관점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이어가지만, 소녀시대 팬이 아닌 독자들도 얼마든지 책의 기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 아재들에게는 정치 이야기만 안 꺼내면 대개는 바보 같은 싸움이 잘 안 나는 편이죠.

제목이 "걸그룹 경제학"이니만치 정말로 95% 정도는 걸그룹 이야기만을 논의의 단초로 삼습니다. 보이밴드 이야기도 가끔 나오고, 정말 가끔이긴 해도 정치 이야기 역시 등장합니다. 지난 조기 대선에서 승자가 된 문 대통령이 이 책을 읽어 줬으면 한다는 소박하고 솔직한 바람도 표현되고, 우회적인 표현이나 행간의 뉘앙스로 정치 현실에 대한 풍자도 간간히 이뤄집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경제학이란 비합리적이고 후회가 따르는 선택을 사전에 가급적이면 피해 보자는 취지로 고안된 학문이니만치, 현실에서 자주 목도되는 우행의 여러 패턴에 대한 (언론인다운) 비판이 끼어드는 건 주제나 기획 의도에 비추어서도 당연하긴 합니다.

문 대통령에 대한 호감이 서술 대목 곳곳에서 드러나긴 해도, 예컨대 pp.67~77에서처럼 "자유 경쟁"에 대한 옹호가 선명하게 주창되는 등 마냥 진보적인 기조를 유지하는 건 아닙니다(하긴 걸그룹 삼촌팬들이 쓴 책에서 너무 진지하길 기대하기란...). 다만, 어느 챕터 중에서도, 그 예시 사항이 다양한 영역에 걸친 것들이라(저널리스트 특유의 장기가 드러나는 대목이죠) 지루하지도 않고 (이런 이슈에 그리 밝지 못했던 독자들에게라면) 상식도 읽어가며 덩달아 늘겠다 싶었습니다. "메기 효과"를 설명하면서 1) 1998 대일 문화 개방 조치, 2) 이케아 상륙 후 오히려 더 높아진 국내 가구제조업체의 경쟁력, 3) 카카오뱅크 돌풍 이후 국내은행들의 수수료 인하 경쟁 등 다방면의 예증을 시도하는 게 특히 그렇습니다.

링겔만 효과를 설명하면서 한 그룹에 무작정 (개개인으로서 다 뛰어나기는 한) 여러 맴버를 투입만 한다고 그에 비례하여 팬 수나 음반, 음원 판매량이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예거가 흥미로웠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1) 동기부여의 문제 2) 역할 조율 문제 두 가지로 비효율의 원인을 세분하는데, 본디 경제학의 묘미는 사실의 건조한 기술에 그치는 게 아니라 동인의 세분화한 분석을 절묘하게 이어가는 데에 있죠. 예컨대 왜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가 증가하는지를 놓고서도, 대체 효과와 소득효과를 준별하듯이 말입니다. 이 현상은 한계생산 체감의 법칙으로도 일단 커버가 가능했겠지만, 저자들처럼 링겔만 효과를 거론하는 편이 훨씬 논의가 풍성해지고 설명력도 강해지는 것 같네요(동시에, 걸그룹이나 축구 국대에서 왜 스타들 간에 화학적 결합이 잘 안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뒷담화"가 가능하고 말입니다).

마이클 포터의 포지셔닝 이론을 원용하며, 선명한 개성을 대중에게 부각한 걸그룹이 (멤버 개인의 기량과 매력과는 원칙적으로 무관하게) 시장에서 더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결론도 흥미롭습니다. (이 이론과 대립하는 "케이버빌리티 파"를 또렷이 거론해 주는 것도 센스네요) 단 과도한 컨셉, 잘못된 포지셔닝은 그저 대세 추종 전략보다도 훨씬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은, 해당 전략이 "어디가, 왜 과도하고 잘못되었는지, 시대를 어느 정도나 앞서갔다는 것인지"를 명확히 짚지 않아, 흔한 결과론에 머물렀다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하긴 이 파트에서 예거된 어느 걸그룹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가는 필경 정치 논쟁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니 저자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다는 짐작도 들긴 합니다.

파레토 법칙이 걸그룹 판도, 시장이라고 해서 적용 안 되는 예외가 아님을 저자들은 짚고 넘어가는데, 데뷔를 한 걸그룹들은 우리가 일일이 꼽거나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절대 다수가 미미한 인지도로 고생하다가 누구의 뇌리에도 못 남고 해체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실제로 TV 예능 프로를 보다 보면 진행 보조 역할 비슷하게 양념처럼 등장하는(아니면, 책 후반부에 언급되는 일선 군 부대 공연 전문인) 몇몇 젊은 여성들이 있던데 상당수가 걸그룹 단위로 활동하는 이들입니다. 이들 중 몇몇은 이후 큰 무대 데뷔에 성공하기도 하고, 그룹 컨셉화의 패착이나 이미지 노후화 등의 이유로 다시 개별 멤버 레벨에서 재도전 재발견 기획에서 스타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80%가 아니라 거의) 98% 이상이 꿈을 못 이루고 쓸쓸히 퇴장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책 후반부에서, 저자들은 "일반인의 일상으로 복귀했다고 해서, 아직 젊은 그녀들의 선택이 딱히 실패라거나 잘못되었다는 동정, 판단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라며 괜한 고정관념을 버릴 것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타당하죠.

경제학의 가장 주목 받는 분야 중 하나가 게임이론입니다. 존 내쉬 등이 1994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고, 2002년에는 그의 생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오스카에서 성과를 거둠으로써 일반에게도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죠. 저자들은 몇 년 전 이른바 "컴백"을 앞두고 라이벌이라 할 만한 상대 그룹의 동정을 살피다가 결국 전략적으로 연기할 것을 결정한 기획사들의 예를 들며 "죄수의 딜레마"를 설명합니다. 죄수의 딜레마는 개개인(플레이어)들이 자신의 고립된 이익 극대화를 꾀하다가(그 나름으로는 합리적 선택) 결국 최선의 균형점을 피해가고 만다는 결론인데, 이 경우는 두 기획사가 모두 "연기"를 택함으로써 현명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최상의 균형점은 "간격을 둔 순차 컴백"이지 기약 없는 연기 결정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조금 동의하기가 머뭇거려집니다.

p247에서는 빅맥지수를 설명하며 왜 걸그룹의 활동주기에만 7년차 징크스라는 게 끼어드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나옵니다. 이는 저자분들 스스로 솔직히 털어놓길, 주제(걸그룹)에 대한 애정과 "덕력"에 올라앉아 자연스럽게 빠져든 고민이라 더 집요하게 분석도 되고 그 과정이 즐겁기도 했다는 고백이, 매 문장마다 뚜렷이 그 진정성이 (특히)드러나는 파트이기도 해서, 읽으면서 여러 번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자들이 이르게 된 결론은 그룹의 1인 집중도가 얼마나 낮으며 고르게 비중이 분포되었느냐와 결정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최후통첩게임 이론으로도 아주 자연스럽게 논의가 넘어가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TV에서 모 맥주 광고에 A그룹 S양이 등장하는 터라 묘한 감흥을 주는군요.

S 기획사에서는 소속 연예인(특히 걸그룹과 보이그룹)들에게 절대 주류 광고에 등장하지 말것을 철칙으로 삼는다는 서술에서, 저자들은 장난스럽게 "그럴 만도 하겠다"며 뼈 있는 한 마디를 곁들이는데, 이는 아마도 몇 년 전 빈발했던 과실 특정 위법 사실(저도 이렇게만)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근데 그런 범주의 위법(과실)은 그 회사 연예인들만 저지른 건 아니라서.... 걸그룹이 피크를 지나 점차 쇠락하는 과정을 정치인의 레임덕에 비유한 건 좀 그렇기도 했지만 여튼 읽으면서 재미는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본문 텍스트에 마냥 따르기보다는 p230의 언급량 순위 도표를 직접 보고 독자들도 자신만의 결론을 내 보는 게 훨씬 흥미로울 수 있겠네요.

"프로듀스 101"은 이 책 여러 챕터에서 다양한 이슈 설명의 근거로 자주 등장합니다. 저자들은 실제로 투표에 참가도 하고 지인들과 열띤 대화의 소재로 삼기도 해서 이 프로그램에 대한 여러 감회가 (아직도) 남아 있나 봅니다. 좀 억지다 싶은 대목도 있었으나 여튼 프로그램 하나를 갖고 이처럼 다양한 논의의 단초를 끌어내는 게 대단했으며, 좋아서 하는 일에는 능력의 한계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걸그룹은 대중성, 보이그룹은 덕후성"이라는 결론에까지 흔쾌히 동의한다면 그 독자는 이 책을 최고의 효율과 몰입도로 읽어낸 것입니다. 책 말미에 실린 "걸그룹 세력도"는 물론 실제 지정학 판도(?)를 반영한 건 아니고 단순 면적 환산일 뿐입니다만 십 년 간 어떻게 시대의 선호와 트렌드가 변했는지 한눈에 살필 수 있어서 한동안 넋놓고 주시했습니다. 쉽고 친근한 서술, 상식에 벗어나지 않은 편안한 논의가 술술 이어지는 재미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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