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탄잘리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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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 지방은 찌는 듯 더운 날씨와 풍성한 자원으로 유명합니다. 물산이 풍부하다 보니 외세로부터 침탈의 대상이 자주 되었고, 이 때문에 종교 갈등도 첨예하게 일어나 타고르의 시대에는 영국 식민자들로부터 "분할령"이 공포되기도 했고 현지인들은 이를 맹렬히 거부하며 저항 운동의 한 계기를 이뤘습니다. 정작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룬 후에는 힌두 교와 이슬람으로 나뉘어 대립 끝에 결국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말았고, 벵골은 다시 파키스탄으로부터 갈라서서 다른 독립국을 차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쓰디쓰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 타고르는 벵갈 출신이지만 인도의 문호로 대접 받고, 본디 출신 가문부터가 인도 문화, 전통에서 대 명문가에 속했기 때문에 협소하게 어느 한 지역에 묶어 평가할 수 없는, 보편적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된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후대에 들어서는 그를 두고 보편적 인류애와 반 제국주의를 설파한 사상가적 측면을 높이들 평가하지만, 바로 이 작품집에서 알 수 있듯 초기에는 유미주의적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하긴 괴테, 심지어 헤겔까지도 청년기에는 피끓는 청준의 격정과 달콤한 연정을 자주 글의 소재로 삼았으니 말입니다.

 "기트"는 노래, 시(詩)라는 뜻이며, "안잘리"는 봉헌을 의미합니다. 그 봉헌의 대상은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신일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일 수도 있고 겨레, 조국일 수도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를 넘어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 혹은 그 어느 문명권으로부터도 널리 사랑받는 문인이지만, 4대 비극만큼이나 애송되는 작품이 그가 젊은 시절 빚어낸 소네트들입니다. 일개 사랑 타령에 무슨 인생의 오의가 깃들었겠냐고 폄하하는 이는, 정말 사랑도 모르고 인생도 그 오의도 맛보지 못한 채 생명이 저무는 불쌍한 처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문인, 가수, 화가, 작곡가 들이 그만의 소명을 이룰 수 있게 돕는 유일한 영감의 원천이며, 사랑을 소재로 얼마나 절실한 곡조를 뽑아낼 수 있느냐를 보고 그 시인(혹은 어떤 예술가라도)의 자질 전체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랑 노래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이 시인을 인정해야 한다는 건 유사 이래, 문학의 창안 이래 전 인류가 공통으로 합의를 해 온 바입니다. 이 <기탄잘리> 역시 한 총명한 법학도가 인류 문학사 전체에 바치는 야심찬 고고의 성이자 청춘기 격정, 순정의 결산이었기에, 스웨덴 한림원과 유럽 문학계는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이" 최상의 영예를 수여하고 만 것입니다.

기탄잘리는 여태 여러 번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었지만, 이 책은 진즉부터 동양적인 명상의 실천과 피안의 탐구에 깊이 천착해 온 류시화 시인의 번역이라서 펴 읽기 전부터 흥미로웠습니다.류시화 시인만큼 사무치는 연정과 그윽한 동양적 명상의 세계에 고루 관심을 주고 헌신했던 문인이 국내에 드물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번 이 시인과 힌두 문학의 정수가 만나야 하지 않을까 독자로서 기대를 품어 왔습니다. 역시, 전공자의 건조하고 다분히 기술적인 문체로 풀어왔던 기본 번역본들과는 달리, 공감과 투영이 매 행마다 이뤄진 혼연일체의 옮김이라서 독자로서는 몰입도 자체가 달라지더군요.

책에서는 기탄잘리를 "님에게 바치는 노래"라고 표현합니다. "바치다, 봉헌하다"는 건 반드시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두고 "(원문에는 명시적으로 안 드러난) 님"이라 상정한 건 포괄적이어서 좋고, 우리에게도 시심 가득한 문인으로 널리 기려지는 만해 한용운의 "그 님" 생각 나서 더욱 좋습니다. 실제로 기교와 지능, 재능을 과시하려고 형식적으로 운을 맞춰 행마다 짤막하게 끊지 않고, 절실히 이어지는 감정은 줄글로 내처 표현한 기법은 자유시의 정수를 보여 주지만, 이런 스타일이 만해 한용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도 우리는 (특히 류시화 시인의 번역을 보고 나서야) 바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나는 부서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아니 모든 인간이, 비록 자연의 도전과 같은 인간과의 생존 투쟁 과정에서 거칠어진 성정을 한 구석에 지니긴 해도, 일개 미물인 야생의 사자나 맹금류와 대적해서 이길 수 없는 초라한 육체와 완력을 지녔을 뿐입니다. 육신도 약할 뿐 아니라 마음 또한 변덕스러운 감성에 출렁이는 치명적 약점을 안았으며, 내가 생령을 잃는다면 몸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 마음, 감정 때문에 아마도 쓰러지고 말 겁니다. 이런 약한 몸, 약한 마음을 무엇이 채워주고 무엇이 온전히 만들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난폭한 신은 굴종을 강조하며 섬김을 받는 자신과 섬기는 자까지 모두 악하고 약하게 만들지만, 사랑으로 나를 감싸는 당신은 나를 철벽으로 바꿔 줍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 때문에 불멸이 됩니다.

나는 당신에게 노래의 형식을 빌어 사랑을 봉헌하지만, 당신은 오히려 더 큰 선물을 나에게 두 손으로 건네 줍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내 보잘것없는 요량으론 짐작할 수 없지만, 눈먼 나로서는 그저 벅찬 사랑이라고 즐거운 착각에 빠져들고 싶습니다. 영문학에서는 본격 문학과 장르물 가리지 않고 "군중 속의 낯선 얼굴'에 대해 기나긴 허구와 상념을 풀어 대는 일이 잦은데, 그 원조가 바로 이 고전 아닐까 싶을 만큼 "낯익은 군중의 얼굴"이란 표현도 책 속에 바로 눈에 띄더군요. 이야말로 "결코 군중이 아닌 나만의 그대"가 가장 역설적인 모습을 하고선 내 맘에 찾아든 기막힌 결합이 아닐지요.

The day was when I did not keep myself in readiness for thee; and
entering my heart unbidden even as one of the common crowd,
unknown to me, my king, thou didst press the signet of eternity
upon many a fleeting moment of my life.


이 책은 이처럼 영어 원문(물론 벵갈어 원문도 창작 당시엔 따로 있었겠습니다만)을 같이 실어서 독자가 더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이를 놓고 류시화 시인이 옮긴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낯익은 군중의 한 사람처럼 내 마음 안에 들어온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덧없이 흘러가는 내 삶의 수많은 순간들에 영원이라는 각인을 새겨 놓은 이는?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는?" (기탄잘리 43)

작품 중에는 king of kings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서유럽에서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뜻으로 새겨지겠지만, 페르시아에서도 인도에서도 절대 군주를 저리 부르는 건 흔한 전통입니다. 기독교에서도 가장 힘없이 죽음을 당한 이를 두고 "왕중왕"으로 높였듯, 가장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근원을 놓고 이리 부르는 건 이후 타고르가 전세계를 돌며 설파한 사상, 평화주의와 사해동포주의를 이미 배태한 흔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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