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건축 예술 쫌 하는 어린이 1
알렉산드라 미지엘린스카.다니엘 미지엘린스키 지음, 이지원 옮김 / 풀빛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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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집. 우리가 별 노력 없이 남들이 지은 집을 사서 그 안에 들어가 거주하기만 하면 될 것 같아도, 한 채의 집이 지어지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노력과 고민과 생각이 쏟아부어져야 합니다. 살림을 사는 집도 그러하거니와, 관공서, 박물관, 연주회장, 찻집 등 다양한 건축물이 있는데, 이들 역시 그저 직접, 당장 무슨 쓸모로 쓰일 것이냐만 생각해서 지어지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건축가가 남달리 많은 생각을 한 후에야 그 고민과 정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지어지는 집도 있는데, 그런 집들은 보기만 해도 기발한 상상과 감각이 잘 드러나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개성 없고 획일적인 아파트단지에서 자라나 일생을 답답한 환경에서 보내기 일쑤이지만, 그럴수록 사람의 희망과 노력이 곳곳에 반영된 창의적인 건물, 집들의 모양을 두루 접하면서 감수성의 폭을 키울 필요가 있죠. 커서 정말 건축가가 될 아이들도 있을 테고, 혹은 그 인접 분야에서 사람이 살고 일하는 공간의 효율적이고 심미적인 활용을 고민하면서 자아실현을 이어갈 이들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 책에 실린 서른 다섯 가지 특별한 집들은, 특히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마음껏 상상력을 불어넣으며 창의적인 어른이 되게 도와 줄 훌륭한 교재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특히 뛰어난 점은, 그저 특이한 건축물 35개를 나열한 게 아니라, pp.12~13에 이 건축물들이 어떤 재료로 지어졌는지, 예를 들면 콘크리트, 목재, 유리, 모래 등 소재에 대한 정보를, 35개 모두에 공통된 기호(그림)을 정해 놓고 어린 독자들에게 그 자재에 대해서도 상상과 통찰이 가능하게끔 배려했다는 점입니다. 뿐 아니라, 욕실, 부엌, 작업실 등 모든 집에 배치되기 마련인 공통 부분 구조도 같은 기호(역시 그림)를 써서 표시하고, 나아가 "이 집은 산에 있는지, 숲에 있는지, 바닷가에 있는지" 그림 기호만 봐도 알 수 있게 쉬운 약속을 정해 놓았습니다.

서른 다섯 개의 집들은 어느 한 지역, 나라에만 분포한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샘플을 찾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집이 어디쯤 있는지 지도(세계 전도) 위에 표시해 주면 어린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좋을 텐데, 이 책은 네 폭의 지도를 통해 35개의 건축물들이 세계 어디쯤 자리헸는지를 먼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단, 35채 중 21건이 유럽에 위치했기에, 유럽 지도가 큰 축척으로 표시되어 이 사정을 반영한 건 어쩔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창의적인 건조물"이 아직까지는 유럽에서 더 자주, 보편적으로 시도되는 편이라고 봐야하겠지요.

독일 프랑크푸르트(암 마인)에는 불어서 만든 집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숨을 호호 불어넣어서(ㅎㅎ) 집을 부풀린 건데, 이렇게 하면 집을 가방 안에 집어 넣었다가 바람만 넣어 다시 키운 후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힘들게 불 필요야 없지만, 요즘은 강아지집(고양이라도)을 이런 식으로 제작해서 반려동물을 위한 상품도 팔곤 하죠. 원하는 땅 어디에도 설치할 수 있겠으나, 실제 사람이 거주한다기보다 그 안에서 "차를 마시는 용도"로만 쓴다고 합니다. 뜨거운 차라면 호호 불어가면서 마실 테니 그 나름 다양한 정서 교차를 경험하는 셈이죠.

슐레지엔은 본디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빼앗겼고, 이를 독일 제국이 관장하다 2차 대전 나치의 패망과 함께 현재는 폴란드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그토록 많은 왕가, 제국들이 탐낸 건 탄광 때문인데, 현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양 산업이지만 책에서는 갖은 고충을 무릅쓰고 깊은 갱도에서 탄을 캐내던 그들을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노동의 소중함을 깨우친다는 점에서 참 바람직한 서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프세모 투카시크라는 이는, 이 폐광의 구조물을 구입해서 그들의 노고를 기리는 "빼빼다리 위에 지은 집"을 멋지게 건축했다고 합니다. 여러 모로 지난 역사의 땀방울을 상기시켜 주는 조형물입니다.

안달루시아 감시탑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지붕도 없고 딸랑 두 개의 새하얀 벽만 남긴 채, 나머지 시설은 계단을 통해 지하에 모두 배치했다는 게 특이합니다. 안달루시아 감시탑과 다른 점이라면, 멀리서 봤을 때 이 두 벽이 새하얀 돛처럼 보인다는 점이겠습니다. 하긴, 건축가 에밀리오 암바스는 처음부터 안달루시아 감시탑을 "하얀 두 돛을 단, 대양을 유영하는 한 척의 배"로 보았기에, 이런 착상으로 집을 지을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죠.

한국에는 해남에 땅끝마을이 있습니다만, 칠레에는 지도의 맨끝, 세상의 끝이라고 여겨진 콜리우모라는 반도 마을의 벼랑에다가, "세상의 끝에 있는 집"을 지은 마우리시오와 소피아 두 분 건축가가 있네요. "세상의 끝"은 사실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고, 또 아인슈타인이 "절대방위, 절대좌표"라는 게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한 후에는 낡은 관념입니다만, 우리들이 해남을 쉽게 "땅끝"으로 여기고 동의하듯, 사람이 그곳을 "더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새로운 시작"으로 간주하면 어디라도 "땅끝"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도 이와 같아서, 자신이 현재 특정 시점을 새출발로 잡고 전환, 재충전의 계기로 삼는다면, 언제든 그 순간에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집"은 그런, 인간의 사고와 희망과 인생관을 일일이 반영하는 집약된 몸짓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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