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 다오스타
정선엽 지음 / 노르웨이숲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지중해 세계는 이 소설에서 커버하는 대목에서 큰 격변기를 맞이했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잃었고, 이 오랜 로마의 텃밭 통치에 대해 확고한 자신이 아직은 없었던 셀주크 투르크는 킬리지 아르슬란의 통치권을 사실상 허여합니다. 이 소설 p148에도 잠시 언급되는 대로죠. 이 소설에서 클르츠(책에는 클로츠라고 표기되네요) 아르슬란은 꽤 매력적인 청년 군주로 묘사됩니다. 볼모로 끌려와 어려웠던 시절 자신과 친하게 지낸 무흐타디를, 술탄위(位)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격의 없이 대하고, 이런 오빠의 성품을 공유해서인지 여동생(공주) 예나도 꾸밈없이 소박한 매력을 드러내더군요. 늙은 피노카 장군의 충성을 이끌어 낸 것도 결국 젊은 군주 자신의 덕망이 주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일화는 다분히 동양 사서에 나올 법한 것들과 매우 닮았는데, 어차피 투르크인들도 동아시아에서 발원한 족속들이란 점을 감안하면 별 어색할 것도 없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비야 다오스타"이고, 이 이름을 단 청년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전체 내용을 놓고 볼 때 아주 비중이 크지는 않습니다. 이 장편의 마지막은 청년 비야가 자신의 출생 그 근원과 기어이 마주하게 되는 감개무량한 장면으로 장식되지만, 대강은 그 내력을 짐작하는(혹은, 사연 전개를 통해 명시적으로 알게 된) 독자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당연히) 않습니다. 비야는 용감하고 지혜롭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과 가르침 받은 교리의 타당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고민 많은 청년입니다. 이런 점은 이 스케일 큰 장편 소설의 프로타고니스트들이 대개 공유하는 편이라서, "대체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믿음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이웃들과 사생결단을 내어야만 하는가?" 같은 회의와 갈등에 시달립니다. 선량하고 현명한 이들은 공존과 화해를 모색하고,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이들은 피를 끝내 보려 들거나, 터무니없는 횡재를 꿈 꿉니다.

배경이 중세이긴 하나 우리가 대뜸 떠올리는 기사도, 수도원, 숨막힐 듯한 교회 도그마의 독선 따위가 주된 소재는 아니고요(이런 것들도 선명하게 소설 속에서 등장, 제 구실을 합니다만), 리뷰 서두에 적은 대로 동지중해를 둘러싼 인물, 세력, 국가들 사이의 다툼과 음모, 애정, 포용 등이 독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기나긴 사연입니다. 이 직전 시기에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청 질서를 잘 다져 놓아, 그 다음 다음 후임자인 우르바누스 2세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십자군 소집령을 내려 천하에 위세를 떨칩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여기서 편협하고 근시안적이며 광신적인 면모를 지닌, 명백한 안타고니스트로 세팅됩니다.


반면 이런 서유럽 라틴 - 게르만 - 가톨릭 연합 패권에 저항하려는 쪽은 "로마 제국"인데, 물론 우리가 아는 비잔티움 제국입니다. 소설에선 아무 위화감 없이 내내 "로마 제국"이란 명칭이 쓰이는데, 해당 국가 단위가 존속 기간 내내 그리 자신을 부른 게 사실입니다. 제국의 통치자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인데, 노련한 외교술로 외침을 현명히 콘트롤한, 성공한 통치자로 꼽힙니다. 여기서도 권신(원로)들을 어르고 달래는 수완이 돋보이지만, 단 소설 속에서는 율리아노스, 아이노스 등 교활한 원로(세나투스, 혹은 Γερουσία를 가리키는 듯합니다)들이 국익은 아랑곳않고 더러운 정치 게임을 벌이느라 황제의 뒤통수를 치죠. 황제가 지중해 해적 세력, 아르메니아의 허약하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여군주와 연합하려 들면, 기민하게 연락망을 가동하여 낌새를 미리 알아챈 후 선수를 놓는 술책이 일품입니다(그런 게 바람직하다는 게 아니라 소설적 재미가 잘 고안되었다는 뜻).

세상이 참 좁은지 아르메니아의 여성 군주와 지중해를 벌벌 떨게 하는 해적 두목 포네로스(아르메니아 인이 왜 헬라식 이름을 지녔는지는, 여전히 국제 공용어 중 하나로 통하던 게 그리스어라는 사정을 감안하여 이해해 주면 되겠죠)는 친동기간이라는 게 결국 드러납니다(스포일러는 아닌 게, 독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리드하는 여러 젊은 남녀 주인공 중 이 사내다운 해적 두목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요소입니다. 단, 문제의 야생(?) 소녀 소피아(혹은 첼로시아)가 이처럼이나 많은 인물들과 혈연, 입양 관계로 얽혔다는 건 좀 작위적이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이 무렵 서방의 야만인들이 겁도 없이 무연고의 고장을, 제멋대로의 종교 명분을 내세워 침범해 들어온 건, 셀주크의 패권이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기에 "힘의 공백"이 생긴 면도 분명 있습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 또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드러나듯, 한 국가의 위세가 쇠퇴하면 리더십이 흔들리는 지역을 놓고 반드시 "땅따먹기 경쟁"이 촉발되기 마련인데, 우르바누스 2세는 한편으로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강한 견제구를 던지고, 다른 한편으로 정력은 넘치고 먹을 건 부족하던 야수 같은 서유럽의 봉건 제후들에게 좋은 미끼를 던져 세력 재편을 시도한 겁니다. 이 소설에도 잘 묘사되듯 "로마 제국" 역시 만성적인 내홍에 시달리던 터라 이런 건방진 도전에 정면 대응은 자제하고, 대신 (앞서 말한 대로) 노련한 정치 술책을 써서 국력 소모 없이 정치적,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는 선택을 합니다. 단 이 소설 중에는 직접 언급이 없고, 아이노스의 반란군(제국군)이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를 침공한다는 대목이 상세히 묘사됩니다. 이 무렵 역사가 항상 그러했듯, 점령군의 현지 약탈, 부녀자 강간 등이 끔찍히 벌어지고, 이런 무도함을 징벌하는 건 무공이 뛰어난 프로타고니스트들의 활약입니다.

종교, 외교 등이 주된 화제를 이끌어나가긴 해도, 이 소설의 주역들은 한결같이 검술과 격투의 달인들로 설정되어, 마치 무협지를 읽어나 가듯 인물들 간의 일합 대결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독자들은 극중 세계에서 과연 누가 무공 랭킹 1위, 2위인지 가려 보는 맛을 거부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서 돋보이는 건 야생소녀 소피아가 탑 1, 2를 다툰다는 사실인데, 타고난 혈통도 혈통이거니와 워낙 막강한 실력자들에게 어려서부터 무예를 전수받은 터라, 날고기는 남성 전사들도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판입니다.

누가(루카)의 복음서 14:23에 보면 실제로 그런 말이 나옵니다. Coge intrare... 그런데 이 말은 원치도 않는 이들을 강제로 내 집에 납치, 감금하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수에 안 맞는다며 초대를 사양할, 낮고 가난한 이웃들을 강청이라도 해서 배를 채우게 하고 기쁨을 나누라는 뜻이지, 양심을 모독하고 신념을 강제하라는 뜻이 아니죠. 사랑과 구원의 명분을 허울 좋게 건 뒤 자행하는 온갖 간악한 범죄에 대해, 작가는 이런 등장인물들의 위선과 우행을 통해 신랄히 풍자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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