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스트 (표지 : 2종 중 랜덤) - 작고도 빛나는 삶을 위한 111가지 일상탐구서
체로키 지음 / 웨일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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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미물이라 해도 먹을것을 찾아 생리 요구를 채우고, 대사 작용을 이루며, 새끼를 번식시킨 다음 수명을 마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일종의 "추구, 탐험, 모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존재가 그 필멸의 아픔, 숙명을 극복하는 몸짓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데서 가장 아름다운 결정(結晶)을 빚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나, 무정물이라고 해도, 실재 속에 지금 그 모습으로 어엿한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거나 특유의 향취를 뿜음은, 역시,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분주히 노력하며, 마침내 뜻한 바를 찾은, 그 나름의 소중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퀘스트는 일종의 열쇠입니다." 저자 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 실린 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버티고 선 문을 두드리고, 마침내 그 문이 열리기를 갈구하는 과정으로 삶 전체를 다 채우다시피합니다. ".... 어떤 문은 좀처럼 열리지가 않아서, 우리를 주저앉게 만듭니다...(p004)"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이들에게, 이 말은 "나 말고 다른 누구도 그 앞의 문이 야속하게 굳게 닫혔나 보구나." 같은 위안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고난 각자의 처지가 다르고 삶의 편의가 차이날지언정, 한 과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다른 고난도의 짐이 여전히 우리 어깨를 짓누르게 마련이죠. 퀘스트는 그래서, 열쇠를 찾아다니는 긴 여정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열쇠이기도 합니다. 결실과 소득의 농도, 볼륨에 못지 않게, 이를 좇고 찾아나서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보배인 법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생이라는 게임 속에 들어왔습니다.(p005)" 누구라도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이는 없습니다. 무지렁이는 무지렁이대로, 귀한 몸은 귀한 몸대로, 임의대로 던져진 주사위에 따라 말이 되어 움직여지고, 때로는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제 의지대로 꿈틀대기도 하는 법입니다. 이를 두고 실존주의자들은 "피투(披投)적 존재" 같은 어려운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냥 돌멩이처럼 굴러다니지만은 않고, 한번쯤은 내 뜻대로 날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또 얼마나 갸륵합니까. 혹 절대의 섭리 같은 게 위에서 지켜보기라도 한다면 그 역시 다 기특히 여길 만한 분투입니다.

이 책 <Quest>는 다섯 개의 "퀘스트"로 이뤄졌습니다. 각각의 퀘스트는 "일상", "나", "타인", "일", "세계"인데, 어떻습니까? 저는 책을 넘겨 읽다가 이런 분류가 너무도 공감되고 좋아 보여서 잠시 그 느낌을 스틸사진처럼 간직하려고 눈을 감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일단 생리가 완전히 작동하는 순간(어디가 아프다거나 신체 일부가 장애가 아닌 이상), 어리면 어린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일상을 영위합니다. 그러다 그 일상에 다소라도의 여유가 생기면, 비로소 "나"를 자각하죠. "나"에 대한 감정,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찾으면, 그때부터는 "타인"에 대해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관계의 형성을 모색하는데, 이 단계가 성공적이면 "일"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려 듭니다. 나이도 지긋하게 먹고 제 일에서 소정의 성과, 인정을 얻고 받아 낸 다음에는, 비로소 "세계"에 대한 의미를 찾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또, 이게 "퀘스트"입니다. 그러니, 전체가 곧 부분이며, 건강하게 살아온(동작한) 부분이 다시 오롯한 전체를 이루는 셈 아니겠습니까? 정말 고대 체로키 족의 대현자가 행여나 있기라도 해서(ㅎㅎ), 어리석은 우리 후대인들을 깨우치러 정성들여 세공한 보석과도 같은 가르침이 아닐지요.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p005)" 우리의 추억과 기억은 단 것과 쓴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이 모두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불쾌하고 화나고 더러운 기억이 유독 오래가는 것일까요? 이 역시 가슴이 절절히 느끼고 기억의 중추에 넣은 요소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주어진 현재에 감사할 줄을 모르고, 분수에 넘는 걸 마구 바라기는 또 즐기는 동물인지라, 긍정보다는 부정의 기억이 존재를 괴롭히기가 일쑤인 법입니다. 그래서 현인들은 하나같이 "가능하면 긍정의 시선으로 세상과 자신을 보라"며 우리들을 도닥입니다. 그 긍정이 이성과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진정 마음으로 느끼며 정직한 희열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이 꼭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최소한 "행복한 사람"임은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가슴으로 느끼는 인생은 그래서 무엇보다도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일상이란, 소소하기에 그 가치를 모르고, 공기처럼 흔하고 당연하기에 감사를 받지 못합니다. <행복의 기원>에는 이런 말이 실려 있다고 하는군요.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이 책 p014)" 사실 행복, 아니면 그보다는 낮은 차원의 피상적 쾌락이라고 해도, 한번 강한 세기의 체험이 주어지면 그와 비슷한 만족이 재현되기만을 또 원하는 게 우리네 간사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감각의 쾌감에 아부하며(쾌감이 주인인 내게 아부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 에스컬레이트시켜 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약물 중독자들이 파멸을 맞는 게 다 이런 경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를 참된 내용으로 채워나가는 건, "쎈 행복"이 아니라 "흔하고 잦으며 우리 곁에 소소하게 머무는 행복"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책 매 절의 끝마다, "가장 좁은 의미의 Quest"가 또 실려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p015에서는 우리 독자에게 미션을 주며, "추억 꺼내어 나누기", "함께 TV 보기" 등을 권한 후, 체크박스 안에 표시해 보라고 합니다. 이런 책에서 부여하는 미션은 대개 좀 부담스러운 것들이 많았다는 생각인데,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TV 예능을 보며 낄낄거리거나, 과거의 재미진 사연 나누기라면 누구나 어디서건 실천에 옮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퀘스트라면 자다 덜 깬 눈과아직 둔하게 굳은 근육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죠. 어찌보면 모든 "퀘스트"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깨 힘 빼고 놀듯이 하나하나 채워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우뚝 완성되어 있는 겁니다. 안 열리는 문 애써 붙들고 씨름할 땐 죽을 지경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하네요(이 책에서는 p036).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이지만, 우리 몸은 회복과 재생 과정에 몰두하며, 동시에 기억력과 창의력, 자신감을 키우는 작용을 한다." 이는 지혜의 금언이라기보다, 어떤 실천의 팁이라든가, 혹은 자계서식 실천 요령처럼 다가옵니다. 실제로 저는 예전에 러시아어 초급 강좌를 들을 때, 전날 힘들여 외운 단어, 숙어들이, 자고 일어나니 당연한 사항처럼 머리 속에 이미 정리된 걸 깨닫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회복과 재생도 그저 수면과 휴식에 덩달아 따라오는 기능은 아니며, 깨어 있는 동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셋으로 과제에 힘껏 달려들었던 후에나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278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낙관주의가 심장병의 예방과 치료에 핵심적 영향을 미친다." ㅎㅎ

"꽃들이 죽지 않도록 나는 그림을 그린다." 프리다 칼로의 말인데(이 책 p050), 파스칼은 이런 말을 한 게 기억납니다. "우주는 하찮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만큼 거대한 크기지만, 인간은 자신이 작다는 것도, 우주가 크다는 것도 알고 있으나, 우주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꽃이 아름다운 줄 평가하고, 아름다움을 알아 보는 인간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예술가는 그런 자연의 아름다움에 또다른 창조 행위로써 최상의 찬사를 바칩니다. 꽃도 그런 아름다움을 알아 봐 주는 인간이 없다면 한낱 무심한 진화의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고교 졸업 후, 물감과 파레트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정말 간단한 스케치라도 해 본 적 있습니까? 없다면 당신이나 저나 인생 참 삭막하게 산 겁니다. 전 고교 시절 다른 어떤 추억 못지 않게, 미술 선생님이 제게 다가와서, 벽에 간 균열을 애써 모사하는 걸 보고 "아! 재미있는 것!"하고 칭찬해 주신 말씀이 이상하게도 안 잊힙니다. 월요 전교조회에서 연단에 올라가 천여명이 올려다 보는 가운데 상 받은 체험보다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생각이 데려다놓은 거리에 존재한다.
우리는 내일, 우리의 생각이 데려다놓은 거리에 존재할 것이다.
 - 제임스 앨런 (이 책 p092)

그러니 생각이 부실한 인간은, 생각이 멈춘 만큼 인생을 퇴보해서 사는 겁니다.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정말 보드게임에서 주사위굴림 한 번마다 이리 기우뚱, 저리 휘청대는 일개 졸(卒)만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폴 부르제의 것이었군요. 여튼, 매번 생각하는 대로 살 수야 없겠으나, 적어도 내가 지금 "생각하는 대로 사는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중인지는" 분간이 가능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혹 후자의 굴레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과감히 질곡을 떨치고 사람으로서 정상 궤도에 복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장 심각한 건, 전자이면서도 후자인 양 무지렁이처럼 우습게 착각하는 꼴입니다. 하긴, 그걸 알면 이미 무지렁이가 아니죠.

네오, 너도 나처럼 곧 알게 될거야.
갈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를. (p118)

요거는 모르페우스가 한 말이죠.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Neo, sooner or later you're going to realize just as I did that there'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

길을 걷는 중이면 그 길이 뭔지 알게 될까요?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겉멋만 들어 아무 구절이나 이름표를 따서 쓰는 엉터리처럼, 길을 막상 걸으면서도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 채, 뇌가 할 일을 다리에 맡기고는 기계처럼 궤도를 도는 인간도 부지기수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길을 알기만 하고 정작 운동화를 신은 채 신나게 달려볼 생각은 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시 저 위 편저자의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인생이라는 퀘스트에서 진정 어떤 작은 의미라도 찾으려면, 우리는 머리와 가슴, 실존과 이상이 하나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 "어둠은 불멸의 영혼, 그 전진을 가로막지 못하게(p212. 헬렌 켈러)"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삶은 초콜릿보다 더 달콤하다는 겁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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