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상처 입은 용
윤이상.루이제 린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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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용". 역시 거장의 판단과 표현력으로만이 가능한, 웅대한 인물 규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타인)를 두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음이 그 자체로 발화자의 그릇 크기를 증명하는 건데, 그런 대단한 규정의 대상이 되는(되었던) 분이야 또 엄청난 분이 아니어서는 안 되겠죠. 상대를 "용"으로 부른 분은 80년대 학번, 혹은 그보다 이전세대들도 잘 아시는 독일(서독)의 큰 작가 루이제 린저 여사이며, 린저 여사에게 용으로 불린 분은 우리 겨레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 선생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두 거인, 두 마리 용의 대화, 대담"이라고 요약하고 싶습니다. 물론, 컨텐츠의 메인은 윤이상 선생님이지만, 우리는 과분하게도 덤처럼 루이제 린저 여사의 날카롭고 지성적이며 정의로운 면면도 함께 살필 수 있습니다. 평범한 독자에게는 책 한 권을 통한 대단한 대접이고 특권이며 행운입니다.

이 책은 루이제 린저, 윤이상 선생 모두 정정하게 활동하시던 1970년대 후반에 집필되었습니다만, 이 책에서도 집중 조명되는 "그 사건"의 길고 긴 파장 때문에 "당연히" 한국에서는 발표, 판매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정면으로 그 본질을 훼손당하는 참담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죠. 물론 이 책은 "그 사건"에 대한 개인적 기억의 술회에 중점이 놓인 건 또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재출간본의 서문에도 잘 나오듯, "철학, 문화인류학, 음악 등의 영역을 자유자재 종횡무진 넘나드는" 두 사유의 거장이 치밀한 소통을 이루고, 이 행복한 만남을 엿보는 독자들이 스스로의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소중한 배움터에 가깝습니다.

더군다나 뜻밖인 건, 윤이상 선생이 개인적으로 "그 사건"에 대한 피맺힌 소회를, 최대한으로 자제하며(엄청난 정치적 음모, 추문의 최대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한을 털어놓기보다는 이를 민족 전체의 아픔과 인류사적 문제로 승화시키려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평가는 독자 레벨에서 공감하기에 앞서, 대담자 루이제 린저 여사가 아웃라인을 선제적으로 잡아 주는 태도입니다.

"그는 경상도 양반 가문 출신이다. 이들의 체면 의식, 도덕관념은 남들 앞에 알몸을 드러내는 걸 극히 꺼린다. 그게 정당한 고백이고 권리를 갖춘 고발이라 해도, 행여 자신의 권리 주장 때문에 타인에게 작은 피해가 갈 수 있음을 염려해서이다." 린저 여사는 이처럼, 얼핏 보아 이해가 안 되는 "용의 상처 가리기"에 대해, 자신 나름의 이해와 공감을 투영하고 독자를 이끕니다. 물론 그런 양반 가문의 위신, 지조, 자제에 대해서는 우리 한국 독자들이야 누구보다 깊고 정확한 동감의 투영이 가능하기에, 그런 친절한 안내는 (우리들에게야) 과공처럼 비춰집니다만, 여사의 영민한 지성이 어쩜 저리도 (당사자가 일일이 말로 표현 안 했건만) 본질을 절묘히 꿰뚫었을까 하는 감탄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또, 벽안의 외국 지성인이 이처럼 우리의 집단 내력, 전통의 유대를 이제 자신의 거대한 정신 속에 한 요소로 접수, 편입했구나 하는 긍지도 느낄 수 있겠고요.

개인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부당한 겁박과 위협은, "그 사건"에 한해서 윤이상 선생이 겪은 고난은 아니었다는 게 또한 비극입니다.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 선생은 일제말 조선인 전체를 상대로 이뤄지다시피한 징용의 와중에도 이미 희생이 되었고, 본인의 술회에 따르자면 "대나무 조각을 손톱 밑으로 밀어넣는" 지극히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 독자가 참담한 느낌을 받는 건, 야만적이고 분수를 모른 채 준동했던 이민족 지배 체제의 행태와, 독립이 이뤄진 후 이 땅에 들어선 같은 민족의 정부의 그것이, 서로 유사한 특성을 보였다는 점 때문이죠. "어쩜, 그들이 하던 짓과 이들의 만행이 이처럼 닮을 수 있을까?" 손발톱 밑에 무엇을 집어 넣어 고통을 주는 방식은 일제 때 꽤 광범위하게 유행했나 봅니다. 저 역시 가까운 분으로부터 비슷한 얘길 자주 들었거든요. 공교롭게도 그분도 윤이상 선생과 같은 고장에서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성장기를 보냈고 말이죠 ㅎㅎ.

윤이상 선생이 이승만 정부에 대해 회상하는 바는 다소 특색이 보입니다. "...그는 독립투사로서 항일의지만큼은 투철했으나, 정치인이나 경세가로서 철저히 무능했던 탓에 단기간에 전 민족을 빈곤선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평가는 그 이면에, 이승만 집권기에 오히려 이전보다 경제상황이 더 악화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대조군이 일제 말기, 즉 공출을 통해 겨레 모두가 끼니를 굶다시피한 극한 상화이었는데도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양반이란 무엇입니까?"

이 심오한 질문에 대해, 윤이상 선생의 답변, 그리고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 적은 여사의 선명한 문장 덕분에,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라지만 제3자의 객관적인 필터를 통해 입체적인 이해가 다시 한번 가능해집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전통적인 훈육을 받고 자라났기에, 그는 본인의 자유혼, 예술혼이 극구 피하는 가부장의 한 자락 개성을 결국 못 떨쳤음을 진솔히 고백도 합니다. 그 와중에도 그가 성장 과정에서 넉넉히 입은 문화적 혜택의 영향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습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 샬라핀(Фёдор Иванович Шаляпин)의 중후한 음색이, 그의 어린 시절 정신과 영혼의 볼륨과 색채를 풍성히 꽃피운 한 자양이었음을 그는 행복하게 술회합니다.

윤이상 선생은 생전에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주로 독일 평론가들이 그를 겨냥해 한 말이지만, 너무 엘리트 티를 내느라 음을 어렵게 꾸미고 구성을 난해하게 잡는다는 식이었죠. 하지만 태생으로부터 입은 신의 축복이 아니라면, 다른 속물 근성 가득한 이들이 어떤 흉내를 내고 싶어도 못 낼 천재만의 날렵한 행보이기도 합니다. 루이제 린저는 이 대담 내내, 신이 빚은 용(그녀 자신은 물론 무신론자에 가까웠습니다만)을 대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유념하여 해석하고 교감합니다. 이 역시 린저 여사 자신이, 동양적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기에 가한 소통이었겠습니다. 기사의 손에 의해 찔리고 정복되고 포획되어야 할 괴수로서의 용이 아니라, 피안의 진리와 신비를 지녔기에 숭배와 일체의 대상으로서 말이죠.

이 책, 그리고 동시대 외국 언론에는 KCIA로 더 잘 알려진 소위 "남산의 중정"은, 지금 이 책이 구술된 시점 기준으로 외국(프랑스, 서독, 그리고 몇 년 뒤 일본에서까지)의 주권침해를 참 대담하게도 저질렀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북한이 전세계를 향해 도발하는 그 배짱을 연상케 하는데, 이건 당연한 소리지만 전혀 자랑이 못 됩니다. 무슨 불량청소년이 비뚤어진 방법으로 세상을 향해 개기는 꼴 아니겠습니까. 어른이 되었으면 어른만의 방식으로, 불만이 있든,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하든, 제 의사를 표현하고 호소해야 마땅하죠. 참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브링크맨십으로, 처음엔 남의 요구를 들어 주는 척하다가 결국 한 걸음 더 나간 도발로 상대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는 수법(서독, 프랑스 정부의 정치범 감형, 석방 요청에 대해 수긍하는 듯하다, 나중에 다른 정치범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걸로 응수)도, 이때 남한 정부와 하는 짓이 꼭 닮았습니다.

대담 형식으로 일관하지는 않고, 동백림 사건에 대한 린저 여사의 정리와 평가, 해석이 별개 챕터로 삽입되었으니 현대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꼭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린저 여사만의 명쾌하고 심오한 해석으로, 윤 선생의 대표작인 오페라 <심청>에 대한 짧은 해석도 실렸는데, 윤 선생에 대한 개인 팬이 아니라도 서양 고전 음악에 대해 취미가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 읽고 새길 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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